마르켈루스(Marcellus)는 그의 전군을 몰아 쉬라쿠사로 갔다. 그 근처에 병영을 차리고 도시로 사절을 보내어 레온티니(Leontini)에서 일어난 일을 알리라 했다. 그러나 이는 소용이 없어서 쉬라쿠사 사람들은 들으려도 하지 않았다. 권력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는 수륙 양면으로 도시를 공격하려 했다. 아피우스(Appius)가 육군을 이끌고 그 자신은 60척의 오단노전함으로 된 함대에 발사기 등 갖가지 무기들을 싣고 가서 8척의 갤리선으로 지지받는 판에 포를 세우고 성벽을 향해 가면서 이 무기와 자신의 명성을 신뢰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에 눈과 장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이 그가 진지한 노력을 들여서 할 일로 생각한 것은 절대 아니다. 대부분은 흥미를 위해 한 기하학 작업의 부수물일 뿐이었다. 지난 날 히에로(Hiero) 왕이 그의 기술을 추상적 관념에서 실질적인 일로 바꾸기를 열렬히 바래 설득해 낸 것이며, 그의 취미를 다소 보통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쪽으로 돌려낸 것이었다.

지금 무척 선망과 존경을 받는 기계제작술에 관해서는 처음에 에우독소스(Eudoxus)와 아르퀴타스(Archytas)라는 기하학을 정교하게 다듬어 말과 도해로는 증명이 불가능 한 문제에 기계에 의한 감각에 익숙한 예시로 뒷받침을 하게 한 이들에게 처음 유래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기하적 그림에 대해 필수 요건인 두 기하평균선을 찾는 문제에서 두 수학자는 기계 장치 배열에 의지한 직선과 곡선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플라톤(Plato)은 이에 화를 내며 기학학의 순수한 우수성을 타락시킨다며 그들에게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는 무형의 기하학이란 추상적 사상에서 등돌리고 감각계로 떨어지는 일이어서 훨씬 천하고 육체적 노동을 요하는 목적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기계제작술은 기하학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무시된 채 군사기술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히에로의 친척이면서 친한 관계인 아르키메데스 조차 마땅한 힘이라면 어떤 무게도 들어올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편지를 쓰고 있으며 그의 시현에서 같은 원리에 의해서 또다른 세계가 존재해 그곳에 갈 수 있다면 그는 이 세계도 움직일 수 있노라고 뽐냈다. 놀란 히에로는 그의 제안을 실행에 옮기라고 애걸하면서 작은 힘으로 거대한 무게가 옮겨지는 것을 보여달라고 졸랐다. 아르키메데스는 왕의 함대에서 세척의 배를 많은 인부들을 동원 해안으로 끌어다 놓고 승객과 짐을 싣고, 자신은 수고 없이 멀리 앉아 복합도르레를 작동해 자신에게 물위로 미끄러지듯 끌려오게 했다.

이에 놀라고 그의 기술의 힘을 이해한 왕은 설득을 통해 공성전에 쓰일 수 있는 각종의 공격 및 방어 무기를 준비하도록 했다. 이는 그에게 전혀 익숙치 않았는데, 지금 껏 그는 전쟁과 상관없이 평화로운 향연 속에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현재는 그의 기구가 쉬라쿠사에 세워져 그 제작자가 감독했다.

로마인들이 수륙으로 공격할 때 쉬라쿠사인들은 공포로 넋을 잃었었다. 그런 힘에 맞설 것은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가 자기 기계를 사용해서 공격자들의 지상군에 무거운 돌 등을 쏘아보내니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그들 진영에 떨어져 대형을 헤집어 놓았다. 같은 시각에 거대한 기둥이 성벽에서 배로 내려졌는데 그 때문에 그 중 몇몇은 거대한 하중을 못이기고 가라앉았다. 다른 배들은 이물이 쇠갈고리에 잡히거나, 기중기의 부리에 낚여 공중으로 올려진 후 깊이 내동댇이 치거나 도시 내로 이리 저리 끌려와 돌려지고 성벽 절벽에 떨어뜨려져 그 안에 사람이 탄체로 부숴지고 인명이 살상되었다.

빈번하게, 배가 물에서 허공중으로 들어올려져 매달린 채 이리저리 돌곤 하는 것이 위험스런 장관이 연출되었다. 벽에 떨어지거나 잡는 부분이 미끄러질 때면 선원들이 사방으로 떨어졌다. 마르켈루스가 배로 만든 다리에 가져간 공성기는 그런 이름을 가진 하프 비슷한 악기와 닮아서 '삼부카(sambuca)'라고 했는데, 성벽에 처음 접근시킬 때 어느 정도 거리에서 10 탈렌트의 무게를 가진 돌이 한번 두번 세번 떨어지는 동안 공성기의 기초를 부수고 틀을 흔들고 판을 떼어냈다. 마르켈루스는 이에 당황하여 자기 배를 될수 있는 대로 빼고 지상군을 후퇴시키라고 명했다.

그 후, 전략회의에서 가능하면 밤에 공격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아르키메데스가 기계에 쓰는 밧줄이 그들 생각으로 머리 위로 멀리 보내긴 해도 근접시는 닿지 않아 소용없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는 오래 전부터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 짧은 사거리로 쏠 수 있게 했는데 벽의 많은 작은 구멍에 스콜피온(scorpion)이라 불리는 짧은사거리 발사기를 적 모르게 비치하고 있었다.

로마인들이 몰래 성벽으로 다가갔을 때 즉시 거대한 화살세례를 받았다. 무거운 돌들이 거의 수직으로 떨어졌고 벽 곳곳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그들은 후퇴했다. 이제 거리가 생기자 또 화살세례가 있어서 엄청난 사상이 있었고 배들은 서로 좌충우돌하는데도 적의 방향을 몰라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아르키메데스가 벽 뒤 가까이 공성기를 세워서 로마인은 신을 상대로 싸우는 것 같았다. 무수한 재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왔다.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달아나 자기의 책사와 공병기술자와 농담을 나눴다.

'편안히 앉아서 우리 배를 컵처럼 사용하고 우리 삼부카를 쓸어버리는 기하학의 브리아레우스(Briareus)와 그가 우리에게 한번에 쏜 많은 화살들과 싸우는 것은 그만 합시다. 백개의 손을 가진 전설속 괴물을 능가하는 구려.’

실상 다른 쉬라쿠사인들은 단지 아르키메데스의 계획을 실현하는 몸으로 그의 영혼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 다른 무기들은 놀고 있었고 그가 만든 것만 쓰였떤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마르켈루스>, 14-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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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로 알려진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가 마르켈루스의 전기에 나온다. 그는 쉬라쿠사 출신으로 마르켈루스의 로마군이 이 곳을 함락할 때 어느 로마 병사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플루타르크의 전언으로는 그가 만든 공성기로 인해 마르켈루스가 함락까지 크게 고전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 내용을 들어보면 헐리우드 스펙터클로나 구현될 만한 이야기가 많아 과장이 심한 것 같다. 주로 정치인이나 장군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과학기술자가 상당한 분량으로 설명되는 것이 바로 이 아르키메데스에 대한 설명이다. 동양에서 이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에 방어전에 주력해 직접 아르키메데스 처럼 방어무기를 만드는데 종사했던 묵가의 쇠퇴를 생각하게 한다. 아르키메데스의 죽음 후에 "로마의 창" 마르켈루스 자신도 결국 한니발 전쟁 중에 한니발에 의해 전사했다. 쉬라쿠사는 멸망하고 시칠리아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아르키메데스의 방어전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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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스토스(Philistus) 같이 상아와 금과 자의(紫衣)에 화려함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아니지만, 화려함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필리스토스는 폭정의 위대한 비극적 피날레를 뽐내면서 마친 디오뉘시오스의 장례를 예찬했었다.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은 헤파이스티온(Hephaestion died)이 죽자 그의 말과 나귀의 갈귀까지 깍아주었을 뿐 아니라 성시가 이전의 아름다움 대신 단정한 모습으로 통곡하도록 보이기 위해 성벽에서 균열들을 없애버렸다. 그러나 이런 영예들은 전제자들의 명령으로 강제로 행해져 영예를 받은 자들에 대해 질투와 강제한 자에 대한 증오가 함께 따랐다. 그런 것들은 감사와 존경의 표현이 아니라 야만적인 거만과 사치 허영의 표시로 헛되고 안쓰러운 관습속에서 주체못할 부를 낭비하는 자들의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으로 이국에서 처자식과 친척없이 죽어서 그런 것을 강제하고 요구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 그에게 영예를 바치는 그 많은 사람들과 도시들에게 호위되고 관이 씌워진 채 이송되는 것은 그가 극도로 행운아라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한다.

개선식 중에 죽은 사람은 이솝의 말대로 한없이 슬픈 것이 아니라 한없이 축복받은 것이다. 그들의 축복을 계속 누림은 변함이 없고 운명은 더이상 변하지 않는 탓이다. 그런까닭에 스파르타인의 그 충고는 옳다. 그는 올림픽 우승자 디아고라스(Diagoras,)가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올림피아에서 승리관을 쓰는 것을 본 데 대해 그를 끌어안고 '지금 죽게. 디아고라스여. 자네가 (그렇다고 신이 되어) 올림푸스에 오를 수 없을 걸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누구도 모든 올림픽과 피티아스 대회의 우승과 펠로피다스의 투쟁 중 하나를 비기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그는 여러번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명성과 영광 속에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며 13차례나 보이오타르코스직을 영임하며 참주의 목숨을 노려 뛰어난 용맹을 보여주면서 테살리아의 자유를 수호하는 중에 죽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펠로피다스>, 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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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서 스파르타, 그리고 다시 스파르타에서 테베로의 그리스 패권의 이동을 이야기 할 때 테베를 스파르타 지배에서 해방해 그 발판을 마련하고 테베의 지도력을 확장한 주역이 펠로피다스다. 그가 앞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억압적 지배에서 각 폴리스의 자유를 회복시키는 방법으로 테베동맹을 그리스의 최고 최대 세력으로 올려놓았다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그런 유래없는 발전 중인 테베의 지도자였지만 그 역시 페라이의 폭군 알렉산드로스와 테살리아를 놓고 일전을 벌이는 도중 사망한다.  

 

 

 

<테베 패권 하의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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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것이 이들이 걸어 온 역사일 때 이들 사의에 대한 우리의 비교에서 보여 줄 차이나 이질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잇다. 두 사람이 유명한 적대자들에게 맞서 수행한 전쟁에서, 한 사람은 마케도니아를 다른 한 사람은 카르타고를 상대로 하였다. 승리 역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한 사람은 마케도니아를 차지해 안티고노스 왕조를 7대 만에 끝장 냈고 다른 쪽은 시칠리아의 모든 참주들을 박멸하고 섬에 자유를 확립했다. 누구는 아이밀리우스가 페르세우스와 겨룰 때는 페르세우스가 강하여 전에 로마에 승리하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또 반면에 티몰레온이 디오뉘시오스와 겨룰 때 디오뉘시오스는 구축되어 절망에 빠진 상태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티몰레온 측 입장에서 말하자면, 티몰레온은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겨우 모을 수 있는 병사들과 돈에 노예들 그리고 무질서 하게 원정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는 자들로 많은 참주들과 그 처럼 큰 규모의 카르타고군을 이긴 반면 아이밀리우스에게는 전쟁 경험이 풍부하며 명령에 복종을 교육받은 병사들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비슷하지 않은 준비로 같은 성공을 이끌었다면 지휘관에 더 큰 점수를 주어야 한다. 

더우기, 행정업무에 관해서는 두 사람 모두 공정하고 청렴했다. 그러나, 아이밀리우스는 조국의 법과 관습이 그의 경력에 요하는 것으로 부터 그리된 것인 반면, 티몰레온의 커다란 정직함은 그 자신으로 인한 것이었다. 아이밀리우스 시대 로마인이 한결같이 삶에 질서가 있고 준법적이며 법과 동료시민을 경외하였다는 것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반면, 시칠리아 문제에 개입한 그리스의 지도자들과 장군들은 디온(Dion) 외에는 단 한 사람도 부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디온도 많은 이들에게 군주제에 대한 야심을 품고 스파르타적 왕국을 꿈꾸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더우기, 티마이우스(Timaeus)의 전언으로, 귈리포스(Gylippus) 조차 수치와 불명예 속에 쉬라쿠사인들에게 쫓겨났는데 그들의 장군으로 있는 동안 변덕과 탐욕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스파르타인 팔라크스(Pharax)와 아테네인 칼리포스(Callippus)가 시칠리아를 통치하려는 희망에  법과 조약을 무시했는지는 많은 작가들이 이야기했다. 그들이 그런 희망을 꿈꿀 때 그들은 누구며 얼마나 많은 자원을 갖췄을까? 그 중 한 사람은 디오뉘시오스가 쉬라쿠사에서 쫓겨난 후 그의 비천한 추종자였고 칼리포스는 디온의 용병대장 중 하나였다.

그러나, 티몰레온은 쉬라쿠사인의 열렬한 요청을 받을 때 그들의 장군으로 가서 더 이상 그들에게서 권력을 바라지 않고 그들의 자유의지로 준 권력만으 유지하며 비합법적 지배자들을 타도했다. 아이밀리우스의 경우 그가 그렇게도 위대한 왕국을 평정하였음에도 그의 재산에 일 드라크마도 더하지 않고 비정복민의 재산을 눈독들이지 않고 도리어 후한 선물을 타인에 하였다는 것에는 존경을 보낼 가치가 있다.  지금, 나는 티몰레온이 교외 영지와 대저택을 많은 것이라 비난하려 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미스럽다고 할 수 없지만 받지 않는 쪽이 더 좋았을 것이긴 하다. 합법적으로 가진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대단한 덕이다.  

가장 강한 신체가 더위와 추위를 견딜 수 있다면 천성으로 조율된 절대적이고 강력한 마음은 순경이 주는 자만에 우쭐되어 몸을 망치지도 역경에 의해 비굴하지도 않을 때 생긴다. 아이밀리우스의 성격은 그래서 더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데, 참혹한 불운과 슬픔이 아들들의 죽음으로 찾아왔을 때도 그의 성공 시절 못지 않은 위대함과 위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티몰레온은 그의 형제에 대해 고귀한 방식을 보였지만 슬픔을 거둘 수 없어 비탄과 후회로 주저 않아 20년간을 연단이나 광장을 보지 않았다. 누구나 불미스런 행동은 피해야 하지만 사람들 속에서 나쁜 소문을 근심하고자 하는 것은 상냥하고 세심하기는 하지만 위대함과는 거리가 있다 하겠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티몰레온과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비교>,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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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업적은 비등한 것이었으나 전성기로 향하는 로마에 많은 도움과 위대한 시민정신을 아이밀리우스는 공유하고 힘입은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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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시카(Nasica)를 크게 신뢰하여 그를 불렀지만 거기 없으므로 자신의 불운을 한탄고 자기의 일들을 저울질 하고서 그나이우스(Gnaeus)에게 항복하였는데. 이것으로 운명이 쓰러진 자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할 유일한 것인 동정받을 수 있는 위안을 그에게서 앗아가버린 삶에 대한 애착보다는 그의 변덕이 덜 비겁한 악덕임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의 요구가 아이밀리우스(Aemilius)에게 전달되었을 때 아이밀리우스는 그에게서 신의 분노와 사악한 운명으로 인해 패망한 위대한 사람을 보고서는 일어나 눈물과 동료들과 함께 그를 맞으러 갔다. 그러나 페르세우스(Perseus)는 가장 수치스런 몰골을 하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비겁한 애원을 하였다.

이런 것을 아이밀리우스는 견딜 수가 없었다. 화나고 괴로운 얼굴로 그를 보면서 말했다.

"왜인가요? 가련한 사람이여. 그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대의 불운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며 당신에게는 과거의 번영보다는 지금의 신세가 더 적당한 것으로 생각하게 할 행동으로 운명의 여신에게서 그녀를 책망할 가장 강력한 추궁을 이겨 내려 하십니까. 그대는 왜 스스로를 로마의 적대자로서는 전혀 고귀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모습을 보이셔서 나의 승리의 가치 마저 훼손하고 나의 성공마저 형편없는 것으로 만들려 하십니까. 불운한 자의 용기는 적들 사이에서도 위대한 존경을 얻지만 로마인의 눈에 겁장이란 성공을 했더라도 여러 모로 불명예스런 이일 뿐입니다."

불쾌함에도, 그는 페르세우스를 일으켜 손을 잡고 투베로(Tubero)에게 넘겨주었고 자신은 자식과 손자들과 다른 장교들 특히 젊은이들을 막사로 모아 장시간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앉았다. 이를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운명과 인간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죽어야만 할 인간으로 성공이 그를 찾을 때 고무되는 것과 그가 한 나라나 도시 혹은 왕국을 정복했다는 이유로 의기양양하는 것이 합당할까? 아니면 그의 생각을 한 전사 앞에 모든 인간에 공통된 약함을 보이게 하는 운명의 반전에 돌려 놓고 어떤 것도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이 없음을 배워야 할까? 타자를 정복하였을 때에 그리고 끊임없이 회전하며 여기저기 있는 자들 사이를 떠도는 운명의 행로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서 운명의 공포에 대한 가장 타당한 이유를 생각하게 할 때에 그리고 성공에 어쩔쭐 모르는 자가 나같이 커다란 회의에 빠질 때에는 어떤 경우가 그 사람에게 자신감을 주겠는가? 아니면, 힘에서 최대의 정점에 올라 엄청난 힘에 도달했던 알렉산더의 후계자가 한시간 사이에 무너져 버려 그대들의 발밑에 꿇어 앉았거나 수많은 보병대와 수천 기병에 둘러싸였던 왕이 적의 손에서 음식과 생활품을 받아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우리자신이 시간이란 이름의 공격에 대해 맞설 운명으로 부터의 보증을 이끌어낼 뭔가가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제군들. 이젠 버려야 할 때다. 승리에 대한 허영과 자만을. 그대들의 미래를 보는 지금 겸손한 자세를 가지며 그대들의 지금 번영에 신들이 질투해서 일어날 때를 생각하라."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26-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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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많은 정복자들은 자신이 맞선 상대가 되도록 훌륭한 자이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정복된 상대의 개와 같은 비굴한 처신을 본다면 역시 자신의 승리에 대해 별다른 보람을 느끼지는 못하게 된다. 파울루스의 업적은 대단했지만, 당시 마케도니아인들에게 버림받고 사모트라케 섬으로 도망가 신전에 은신했던 페르세우스 왕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자 파울루스는 인간사의 운명의 회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는데 이것은 조금 뒤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의 멸망을 눈앞에 보면서 로마의 미래를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른 일이 아니다. 여러 나라들이 자신들의 발 밑에 꿇어앉을 때의 로마인들의 겸허한 생각과 지난 역사에 대한 통찰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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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이들을 위해 나의 '비교열전'을 쓰기 시작했지만 어느 새 작업을 이어가면서 나 자신을 위해 하고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역사에서 거울을 발견하고 자신의 행동방식을 찾아 노력하고 거기에 묘사된 덕의 표준들로 내 인생을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나의 역사의 각 주제가 되는 인물을 내 손님으로 받아들여 조심스레 '그가 얼마나 위대하였는지'를 관찰하고 그의 경력에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을 골라낼 때 일상생활에 친교를 맺는 하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오! 어찌 그대가 이 보다 더한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 (소포클레스의 인용임)

 

또한 도덕적 향상을 위해 더 가치있는 것은 어찌 얻을수 있을까!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는 우리가 유익한 영과 만나야 하며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있는 삐뚤어지고 악한 영들보다 되도록 좋은 영들과 접촉해야 한다고 했다. 삐뚤어진 영이란 철학을 옳지 않은 교의로 이끌며 끝없는 미신 속으로 방황하게 한다. 

그러나 나의 저술들이 생산해 낸 역사에 대한 연구와 그에 대한 친숙함이 내가 최고로 중요하고 고귀함 성격들만을 내 영혼에 간직하게 하기 때문에 천하고 사악하고 비열한 제안이면 무엇이든 멀리 물리치게 하고 차분하게 내가 든 예의 가장 훌륭한 것에로 생각을 강제로 돌리게 한다.   

이들 중 그의 전기를 독자 앞에 내놓은 것이 코린트인 티몰레온(Timoleon)과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us)이다. 이 사람들은 똑같이 그들이 적용한 좋은 원칙 뿐 아니라 그들 사업에서 누린 행운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업적이 행운 때문인지 현명함 때문인지 독자들이 판단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티몰레온이 시칠리아 원정을 행하기 전 쉬라쿠사의 국사는 다음과 같다. 디온(Dion)이 폭군 디오뉘시오스를 몰아낸 후 그 자신이 배반적으로 살해당했고 그를 도와 쉬라쿠사를 해방하려는 자들은 분열되었다. 그 도시는 끝임없이 폭군을 대신해 폭군을 세웠는데 잘못된 대중들로 인해 방치되었고 시칠리아의 다른 곳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 파괴되고 전쟁 때문에 거의 거주민이 없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도시들의 대부분이 잡탕의 야만족들과 용병들에게 점령되었고 이들이 전제권력의 연속적 교체에 동의해 주는 편이었다. 드디어 디오뉘시오스가 추방후 십년 만에 요병들을 모아 니사이우스(Nisaeus)를 몰라냈다. 그는 이 때 쉬라쿠사의 주인으로 다시 권력을 회복하고 폭정을 새로 확립했다. 그는 최고의 나라를 보잘 것없이 작은 군대에게 잃어버렸다가 비천한 추방 끝에 더 불가해하게 그를 몰아낸 자를 정복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티몰레온>,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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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의 티몰레온과 로마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비교열전의 서언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이 비교열전을 쓰는 보람과 그것이 주는 유익한 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장점이 많아 간직할 것이 많은 예이다. 티몰레온은 디온이 다시 잃어버린 쉬라쿠사의 자유를 확립한 코린트인이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빛나는 전공과 전리품들은 로마인들을 한동안 세계의 주인으로서 세금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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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고 수집할 가치가 있는 것에 한한 이들 두 사람의 행동들을 살펴본 지금, 군사적 경력에서는 어느 쪽도 지지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둘다 지휘관으로서의 기술과 예지력은 물론 군인으로서 용기와 대담성을 입증하였다. 단 누군가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우위를 줄 수 있는데 육상은 물론 바다에서도 승리를 쟁취하였으므로 더 완벽한 장군으로 보기도 할 것이다. 또한 각자가 조국을 위해서 지휘권을 잡았을 때 확실히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고 적으로 넘어가서는 더 확실한 상처를 입힌 것도 분명한 일이다.  

정치가로서는, 알키비아데스의 극도의 무절제함과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는 모든 노력은 냉정한 시민들의 혐오를 샀다면 마르키우스의 과한 무례함은 소수귀족적 자만과 태도와 함께 로마 민중의 미움을 샀다. 어느 쪽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민중에게 호의적으로 보여 지지를 얻으려는 사람은 그렇게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민중에게 쓰디 쓴 말과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권세를 위해 민중에게 아첨하는 것은 치욕이지만, 공포와 폭력과 억압으로 권력을 얻는 것은 치욕일 뿐 아니라 불의이기도 한 탓이다. 

마르키우스가 흔히 타고나기를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다고 생각되며 알키비아데스가 공적 행동에서 부도덕하고 잘못이 많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알키비아데스는 특히 투퀴디데스(Thucydides)의 전언대로 그가 스파르타 사절들을 속이고 평화를 끝장낸 사악한 수단으로 비난받는다. 그러나, 그의 이 정책은 도시를 전화로 몰아넣었으나 알키비아데스가 수호한 만티네아(Mantinea)와 아르고스(Argos)와의 동맹으로 도시를 강화하게도 했다. 그러나 마르키우스 자신도 로마인과 볼스키인 사이에 전쟁을 불붙이려 속임수를 썼다. 디오뉘시오스(Dionysius)가 전하는 대로 축제에 방문객에 대해 그릇된 고발을 했고 그 행위의 동기는 더 나쁜 것이었다. 그는 알키비아데스 처럼 야망이나 정치 투쟁의 경쟁에 영향받는 아니지만 단순히 분노에 몸을 맡기는 이였다. 디온(Dion)의 말대로 분노에서 온 격정이란 '누구도 좋은 댓가를 돌려받을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탈리아의 많은 지구들을 혼란으로 몰아넣고 두말할 것도 없이 무고한 도시들을 그의 조국에 분노하게 했다. 알키비아데스 역시 그의 분노로 조국에 곤경을 가져오게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마음을 돌리고 후회하는 것을 보이자 마자 곧 선의를 보였고, 두번째로 쫓겨난 후에도 조국 장군들의 실수에 기뻐하지도 위험하고 나쁜 계획을 무관심하게 보지 않았고 아리스티데스(Aristides)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에게 한 것으로 최고의 칭찬을 받는 그 일을 정확히 했다. 그는 당시 지휘하는 사람에게 가서 아군으로 여기지 않았음에도 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었다. 마르키우스는 우선 도시 전체 사람들이 그를 해치지 않았음에도 전체 도시에 해를 가했는데 도시의 강력한 자들은 그의 잘못과 아픔을 공유했었다. 둘째로, 그의 어리석음을 치유하려는 조국인이 보낸 대사들을 거부하면서 조국을 타도 전복하려는 전쟁을 수행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알키비아데스와 코리올라누스의 비교>,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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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조국을 위해 그리고 그에 맞서서 격력한 싸움을 벌였던 두 인물에 대한 플루타르코스의 비교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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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들이 군역을 철저히 거부한 이 때, 마르키우스(Marcius)는 자신의 종자(피호민)들을과 자신이 설득할 수 있ㄴ는 자들을 거느리고 안티움(Antium)에 독자적으로 쳐들어갔다. 거기서 많은 곡물을 찾아냈고 가축들과 포로들을 대량 노획하였는데 자신은 전혀 취하지 않은채 따라온 자들에게 주어 갖가지 전리품을 로마로 실어보낸 것이다. 남은 시민들은 후회하면서 이런 부유한 동료들을 질시하면서 마르키우스에 대한 원한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커가는 그의 명성과 힘에 대해 못견뎌했으며 민중에 대한 해악으로 보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마르키우스가 집정관이 되려 나섰을 때 대중의 마음은 누그러지고 이렇게 많은 위대한 일을 한 태생이나 용기에서 최상의 인물을 경시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민중들은 느꼈다. 이제는 관직을 지망하여 동료시민들에게 인사하고 표를 구하는 자로서 포룸에 튜닉을 아래 입지 않고 토가만을 걸치고 나오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그것은 민중들이 표를 구하는 호의를 위해 복장에서 겸손을 취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거나 전쟁에서 상처를 입었을 경우 용감함의 증거를 보일 수 있거나 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표를 구하는 후보자가 튜닉없이 띠도 풀고 대중앞에 나설 것을 요구받는 것은 뇌물쓰는 의혹 때문은 아니었다. 이 이후로는 곧 표의 매매는 선거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후에는 이런 부정과 뇌물이 병영이나 법정 구석구석으로 영향을 미치어 도시 로마를 군주제로 바꾸게 했다. 군대가 철저한 돈의 노예가 되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처음으로 뇌물을 쓴 사람이야 말로 민중 권력 체제를 전복시킨 자라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그런 잘못이 조금씩 꾸준히 자라나 즉시 눈치 챌 수 없었다. 우리는 민중과 법정에서 뇌물을 쓴 첫 인사가 누군지 모른다. 반면, 아테네에서는 안테미온(Anthemion)의 아들 아뉘투스(Anytus)가 배심원들에 돈을 준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끝무렵에 퓔로스(Pylos)를 구하는 데 실패한 배신적 행위에 대한 법정에 섰을 때 일인데 로마의 포룸에서는 황금시대의 순수한 종족이 아직 살던 때였다.  

용감한 군인으로 17년간을 있었던 마르키우스가 많은 전장에서 얻은 흉터들을 보였을 때 민중들은 그의 용기에 안색을 잃었고 그를 뽑는데 서로 동의해 주었다. 그러나 투표날이 되어 마르키우스가 뽐내며 원로원의 호위로 포룸에 들어오면서 주변에 모든 파트리키우스 귀족들이 전에 없이 굽신거리는 것을 보자, 민중들의 생각은 그에 대한 호의를 접는 것으로 전의 질투와 분노로 기울게 되었다. 이런 감정은 파트리키우스들을 중시하는 귀족이 정부 최고권력을 장악하면 민중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갈것이란 두려움에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그들은 마르키우스를 거부하고 다른 이들을 선출되게 했다. 원로원의원들은 이것이 마르키우스 보다 자신들에게 이 모든 것이 향해있다며 분개했다. 마르키우스 자신은 이 상황을 절제와 관용으로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본성적으로 격정적이고 호전적인 면에 탐닉되어 그런 것을 위대시하고 이성과 훈련으로 닦아야 할 정치인의 주요 덕목인 신중함과 온건성에는 익숙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Nor did he k공무를 수행하는 자라면 무엇보다 플라톤이 '고독의 동반자'라 말한 고집을 피해야 하고, 이 사람들 속에 융화되어야 하며, 어떤 사람들이 잘못들에는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햇다. 그러나, 직선적이고 고집스러웠으며 모든 것에 대한 정복이 동시에 여성적 유약함 보다는 용감함의 특권이라 반대자를 누르지 못하는 것은 약함이라고 믿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언제나 민중에 대한 불만과 증오를 품고 있었다.

고귀한 태생을 젊은 귀족들은 열심히 뽐내는 분자들인 젊은 파트리키우스들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그에게 헌신하며 지지했는데, 이런 것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심정적 위로와 공감을 표하며 그의 화를 부채질했다. 전쟁에서 지도자이며 교사였고 승리에 대한 고무자였기 때문인데 거기에서는 상호 질투란 없었다. 

마침 이 때 로마로 곡물선이 왔다. 대부분은 이탈리아에서 온 것이었는데 비슷한 량이 쉬라쿠사(Syracuse)에서 참주 겔로(Gelo)로 부터 선물로 보내졌다. 민중들은 대부분 큰 희망을 품고 도시가 품귀와 불화에서 구원될 것을 기대했다. 원로원이 이에 소집되었고, 의사당을 에워싼 민중들은 토론 결과를 기다렸다. 곡물가가 조절될 것을 기대했고 선물분은 무료 분배될 것을 기대했다. 원로원에도 이를 권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자리에 일어나 격렬하게 민중 편에 선 자들을 규탄하며 그들을 데마고그나 귀족들의 배신자라고 불렀다. 폭도들 사이에 뱃짱과 무례라는 악의 씨를, 발아단계에서 짓이겨 놓아야 하며 호민관직 같은 것의 권력도 크지 못하게 해 두어야 할 텐데도, 자해적으로 품고 있는 자들이라 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코리올라누스>, 13-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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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우스 마르키우스. 로마 초창기 인근 제족들과 영역다툼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고 그가 정복한 한 도시 중 하나인 코리올리의 이름을 딴 코리올라누스(Coriolanus)라는 칭호가 그에게 붙여졌다. 이렇게 많은 전공을 로마를 위해서 세우고도 그는 정계에서 실패했고 집정관의 영예로운 직을 맡지 못했다. 민중에 대해 이렇게 독설을 퍼붓던 그는 도리어 나라에서 쫓겨나 전의 주적이었던 볼스키군을 이끌고 로마를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망명 중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물론 로마 역시 그렇게 훌륭한 장군을 잃은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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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키비아데스(Alcibiades)에 대한 이런 엄청난 유죄판결과 단죄가 통과되자 아르고스(Argos)에 있던 그는 곧 투리이(Thurii)로 부터 달아나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로 넘어갔다. 그곳의 자기 적들을 두려워 해 조국을 비방하는 동시에 스파르타인들에게 면죄와 신임을 요구하면서 전에 적으로 손실을 끼친 이상의 보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스파르타가 이 요구를 인정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가자 마자 그는 한가지 일을 해냈다. 쉬라쿠사(Syracusa)인들의 원조 요청을 미루고 있는 펠로폰네소스인들이 귈리포스(Gylippus)를 지휘관으로 보내 그곳에 온 아테네 군을 물리치도록 한 것이다. 그가 한 두번째는 아테네 본국에 대한 전쟁을 하게 한 것이요, 세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데셀레이아(Deceleia)를 요새화한 것이다. 마지막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조국의 파멸에 기여했다. 

스파르타에서 그는 공적으로 큰 명성을 가지게 되었고 사적으로는 존경을 얻었다. 대중들이 그의 영향 아래로 몰려들었고 그의 스파르타식 태도가 그들을 매혹했다.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과 냉수욕을 하면서 스파르타식의 거친 빵에 익숙하고 검은 수프를 먹는 그를 보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눈을 의심하였고 그런 이가 자기 집에 요리사를 두면서 향수를 찾고 밀세시아산 양모를 견디는 이였다는 것을 못믿어했다.    

그는 사람들 말로 다른 모든 이들을 초월여 다른 사람을 끄는 힘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다른 사람의 바램과 생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적응시키는 것이었고 이에 있어 카멜레온 보다 더 격하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 짐승은 흔히 한가지 색만 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선과 악 모두와 친할해질 수 있었고 그가 흉내내거나 익히지 못할 것은 없었다. 스파르타에서 그는 신체훈련에 전심을 쏟았으며 단조로운 생과 엄격한 외모를 했다. 이오니아에서는 사치스러운 취향을 가졌고, 트라키아에서는 과음을 했으며, 테살리아에서는 거칠게 말을 몰았다. 페르시아 태수 티사페르네스(Tissaphernes)에게로 가서는 그의 외양과 낭비가 페르시아인들을 능가하였다. 생활방식을 쉽게 바꾸고 본래의 성격마저 매경우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자연적인 성격이나 방식이 동료들에게 불편한 인상을 준다고 생각할 때는 매경우 그들에게 알맞는 거짓 성격을 그렇게도 빠르게 꾸며내고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에서 모든 일에 대해 그 외양에 대해 그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리쿠르고스가 훈련시킨 그 사람

"아킬레스의 아이가 아니라 아킬레스 자신이다."  

그가 느끼고 행한 것으로 판다하면 누구나 시인(오레스테스의 에우리피데스) 처럼

"이 여자가 예전에 그녀야!"

라 울부짖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알키비아데스>,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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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아스와 함께 시칠리아의 정복을 위해 원정에 나섰던 알키비아데스는 궐석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망명자의 신세가 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니키아스의 불행을 자신이 모면했다는 것이다. 후에는 조국 아테네와 화해하고 다시 아테네를 승리와 영광으로 이끌었지만 또다시 신망을 잃고 망명 유랑해야 했다. 조국에서 용납되었을 때는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열정적으로 적에 맞서 싸웠지만 적이 되었을 때는 아테네 멸망의 화근이 될 정도로 조국의 약화에 기여하였다. 이 시기를 보면 그가 민중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것인지 아니면 무능하고 통찰력없는 민중이 중요한 순간마다 한 선지자를 박해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 이야기는 알키비데스의 뛰어난 환경에 대한 적응성에 대해 말해 준다. 그는 적어도 전쟁에 능하였던 만큼이나 세계 여러 나라의 각 풍습에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가 스파르타에 가면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스파르타인이 되었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클레오파트라나 그리스의 향락에 푹 빠져 다른 국사는 뒷전으로 미루는 안토니우스가 일단 로마에서 쫓겨나자 썩은 물을 마시고 나무껍질로 허기를 채우던 것과 비길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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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도, 자기 노래에 대한 자부심을 감출 수 없었던 그는 네로제(Neronia)라는 축제가 그들의 귀환 전에 기념되도록 명했다. '그의 천상의 목소리'를 듣기를 애원하게 되자, "원하는 사람은 정원에서 내가 답하겠노라"고 알렸다. 그러나, 근위대의 병사들이 민중의 목소리에 맞장구치자 즉시 요구를 들어줄 것을 진심으로 약속하였다. 그는 즉시 그의 이름이 경연에 참가하는 음악가들 명단에 들어가게 명하고, 단지에 그의 제비를 던저 자기 순서에 하프를 든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의 장관들과 천부장들 그리고 여러 친구들의 수행을 받으며 나아갔다. 그의 자리에서 통상의 사전연설을 한 후, 집정관급의 인사인 클루비우스 루푸스(Cluvius Rufus)를 통해 "니오베(Niobe)의 이야기"라는 곡을 부르겠다고 알렸다. 이것을 오후 넘겨 오랫동안 계속되게 하고 그가 더 잦은 공연을 하도록 남은 경연들은 다음해로 미루게 했다. 그러나, 너무 길어지자 그 사이에 공공 경연자로 나서고 싶은 것도 억누르지 못했다. 민중을 위해 연 황제주최가 아닌 사설 대무대들에서는데 꺼리낌이 없었고 법무관 한 사람은 이런 봉사로 백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가면을 쓰고 비가를 불렀다. 영웅들과 신들의 가면은 여신들과 여자영웅들의 것과 더불어 그와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닮게만들어졌다. 나머지로, "시련 중의 카나케(Canace in Labour)", "존속살해자 오레스테스(Orestes the Murderer of his Mother)," "눈먼 오이디푸스(Oedipus Blinded)",  "미친 헤라클레스(Hercules Mad)"를 불렀다. 마지막 비극에서 무대 입구의 젊은 보초병이 대본대로 죄수복에 족쇄를 찬 그를 보고 구하러 달려가기도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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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Cornelius Scipio)가 스페인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많은 전투를 통해 카르타고군을 무찔러 몰아냈을 뿐 아니라 그곳의 여러 민족들에게도 승리해 화려한 전리품을 위대한 도시들에서 취했다. 따라서, 로마로의 귀환에서 그는 유래없는 인기와 명성을 누리며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 민중이 자기에게 위대한 성취를 요구하고 바란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한니발과 이탈리아에서 손수 싸운다는 것을 시대착오적 잘못된 정책으로 생각하고는 아프리카와 카르타고 영토로 로마군을 싣고가서 약탈하고 그를 유인할 제안했다. 그는 온 정성으로 민중에게 이 생각을 설명했다. 그러나, 여기서 파비우스(Fabius)는 이 계획에 대해 시민들사이에 두려움을 심어주려 했다. 그의 말로는 시민들이 바보청년의 인도에 최고의 위험으로 돌진하고 있었으며 그런데도 자신은 이 계획을 단념시킬 말이나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다. 원로원에 자기 생각을 제출하였지만 민중들은 그의 성공을 질투하는 것이라 일축했다. 그들은 스키피오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전쟁을 끝내고 그들을 이탈리아에서 일소하면 자신이 전쟁을 끝내지 못했던 점으로 인해 겁장이면서 꾸물거려 전쟁을 망친 평가를 받을까 두려워 한다는 것이었다.

위험에 대한 우려에서 최대한 주의함에서 반대를 시작했을 법하지만 그는 점점 무분별했고 경쟁심과 야망에 눈이 멀어졌다. 스키피오의 떠오르는 영향력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스키피오의 동료집정관 크라수스(Crassus)를 설득해 제안이 받아들여지더라도 군대지휘권을 양보치 말고 직접 카르타고로 가라고 까지 했다. 전비승인까지도 그는 방해했다. 따라서 돈문제에 관해 에트루리아의 도시에서 스키피오는 사비로 지지자들에게서 모았다. 크라수스는 스키피오와 경쟁하고 싶은 천성은 아니었고 최고대사제(pontifex maximus) 역을 위해 이탈리아에 남았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파비우스>,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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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을 상대로 방어를 최선의 전술로 지구전을 벌여 로마와 동맹을 지켰던 일로 훗날 '페이비언주의'라는 말까지 만들어내게 했던 파비우스 막시무스, 그는 전쟁에서 그를 겁장이라고 비난하는 경솔한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목숨을 여러차례 구했고 마침내 그의 정책은 서서히 효과를 나타냈고 로마인들로부터 감사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런 그도 정작 스키피오란 새로운 영웅의 등장 앞에서는 현명한 예지력을 보이지도 어려울 때 화합단결하는 로마인의 미덕도 보여주지 못한 채 한니발의 패배를 지켜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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