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티낙스의 짧은 치세[193년]

 

페르티낙스(Pertinax)와 근위대와의 갈등이 어디서 부터 싹튼 것일까? 기번은 그가 황제가 된지 불과 삼일째 되는 날에 근위대가 다른 원로원 의원을 잡아 병영으로 데리고 가서 황제로 즉위시키려 했다고 했다 실패했다. 날짜상으로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장인 라에투스가 즉위시킨지 얼마 안되어 이런 일이 있었으니 라에투스가 충분히 근위대의 의사를 대변하고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황제 부재 중 소시우스 팔코(Sosius Falco)라는 의원은 역시 근위대의 반란 음모를 꾸몄으나 로마로 귀환한 황제에 의해 분쇄되었다. 페르티낙스 자신이 실질적으로 근위대에서 즉위하고 로마시민들의 환영을 받고도, 아무 실권도 없는 비굴한 의원들이 모인 원로원에서는 그들의 승인을 받기 전에는 황제가 아닌 듯한 겸손을 보인것도 근위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가 네로 이래의 신황제 즉위시의 관습이 되어버린 근위병들에 대한 사례금 지급조차 하지 않았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각주:1] 그리고 그가 갑작스럽게 황제위에 올랐고 코모두스에게서 인계받은 상황이 워낙 안 좋았던 것도 그럴 가능성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다더라도 이미 관습화된 것을 하지 않았다면 근위대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내었을 수 있다. 전황제와의 사이는 막역한 사이였지만 신황제와는 사실 그들이 요주의시 하던 일개 귀족이었을 뿐 아무런 친분도 없다. 어쨌든 기번이 말하는 당시의 재정 상황은 이 정도였다.

 

국가 재정은 황제의 가장 엄한 주의를 요했다. 비록 부정과 강탈의 모든 기준이 적용되어 신민들의 재산을 군주의 금궤로 바꿀 수 있었지만, 코모두스의 탐욕은 그의 사치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 기껏 8000 파운드 정도가 금고에서 발견되었으나 정부의 현 지출을 충당하고 후한 사례금의 압박적 수요를 채울 것이었다. 그것은 신 황제가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에게 약속해야 했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괴로운 환경 하에, 페르티낙스는 후한 단호함으로 코모두스에 의해 생긴 억압적인 세금을 면제하고 국고에 대한 모든 부당한 요구들을 취소하면서 원로원에서 " 그는 폭정(tyranny)이나 불명예를 통해 부를 획득하기 보다는 선량함이 있는 가난한 공화국을 다스리는데 더 만족한다"  라고 선언했다. 경제와 산업은 그가 순수하고 진정한 부의 원천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곧 모든 공공필수재에 대한 엄청난 공급을 유도했다. 가구 지출은 곧 반으로 줄었다. 페르티낙스는 모든 사치품을 공공경매에 부쳤는데 금은의 그릇, 전차, 비단 예복, 남녀의 아름다운 노예 여럿-물론 인간성에 대한 배려로 자유상태로 태어나서 부모들의 강압으로 그리된 경우는 예외-를 내놨다. 폭군의 무가치한 애호품을 잘못된 것으로 버림과 동시에, 그는 국가의 채권자로 만족했고 정직한 서비스의 긴 체납은 의외로 풀어주었다. 그는 상업에 대한 억압적인 제한을 없앴고 모든 이탈리아와 속주의 모든 비경작지를 그것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불하하면서 10년간의 기간으로 공납(세금)을 면제했다.

 

마르쿠스 황제의 덕에 비기는 이러한 개혁에 민중의 지지는 당연했지만 이를 통해서 자신의 것을 도리어 잃게 되는 사람들의 불만도 커졌다. 하지만 특히 이 모든 것이 바로 그의 침실앞까지 경호하는 근위대와는 끝내 화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페르티낙스의 개혁이 가져올 "고대 훈련의 엄격성"을 참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에 대한 금전전 보상이 실망스러운 것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거기에다 그들에게 폭군시절에 그들이 시민들에게 했던 폭력적인 행동들까지 금지 시켰다. 근위대만이 페르티낙스의 선정(善政)에서 소외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엄격함은 마르쿠스의 것이기도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갈바(Galba)의 인색함과 비슷한 꼴이 내었다. 엄격함에 관해서 특히 팔코의 음모 때 원로원 의원이던 팔코는 몸을 보전한 반면 병사들은 사형으로 다스려진데서 근위대의 불만은 폭발했다. 자신도 해방노예 출신 아버지를 둔 평민 출신이었만 원로원에 대한 태도와 군대의 아래부터 차차 최고지휘관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그의 사병들에 대한 태도는 극과 극이었다.[각주:2] 갈바는 네로 시절에 부당하게 지급되었던 돈을 도로 빼앗으려고 까지 했었다. 근위대는 차라리 코모두스의 시대가 그리웠고, 드디어 황제의 궁전으로 들어가서 그를 살해했다. 이미 보고를 들은 황제는 그가 황제로 옹립되었을 때 이미 죽음을 예상하고 의연했던 것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 이것이 193년 3월 28일의 일이었다. 시민들의 분노에 대해서 근위대는 나름의 준비를 했다. 그들이 분노가 곧 식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며칠간 그들의 병영의 요새안에 웅크리다가 여론이 가라앉을 때 쯤 그곳을 나와서 로마사상 아니 세계사상 가장 흥미로운 촌극을 연출했다.

 

황제직 팝니다


 

 

불황 중의 세태

 

페르티낙스의 엄격함과 검소로 인해 마땅히 보상받아야 할 돈을 못 쥐어 본 그들은  이번에야 말로 말뿐인 감사말고 확실하게 금액을 결정지어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황제직"을 팔겠다했다. 기번은 경매에 붙였다고 했지만 최고금액을 제시하면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완전히 개방된 경매는 아니었다. 죽은 페르티낙스의 장인도 여기에 참가했지만 그와의 관계때문에 복수를 두려워한 근위대측으로 부터 거절되었다. 그런 경우만을 제외하면 누구든 최고액을 베팅하는 쪽이 좋다. 이렇게 해서 디두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라는 귀족[각주:3]이 황제직을 사게 되었다. 황제직을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그것을 사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거수기가 되어있던 원로원이 이를 승인하는 때에는 이런 거래가 성공할 것처럼도 보였다. 물론 형식상 원로원의 결의야 말로 황제로서의 가장 큰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었지만 저와 같은 권위도 양심도 없는 결의를 더구나 이러한 난세에 모두 승복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것을 산쪽도 판쪽도 모두 크나큰 실수를 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소신없이 눈치만 보는 원로원과 달리 각지에 나가있던 유력 장군들 그 중에서도 세 사람이 원로원의 권위와 근위대의 무력에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각주:4] 그리고 페르티낙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제일먼저 로마로 진격해 왔던 사람은 유난히도 적에게 철저하게도 무자비했던 세베루스(Severus)였다. 그는 돈으로 등극한 황제는 물론 가족과 연루자까지 철처하게 찾아내 학살하고 그에게 대항한 근위대 역시 철처하게 해체해 버렸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근위대를 다시 창설했다. 숫자상 4배로 증가 시켰고 로마인 뿐 아니라 각지에서 그 대원을 모아서 충당했기에 더욱 강력해진 힘을 갖게 되었다. 당연히 프라에토리안 장관의 권위도 높아졌다. 실권에 있어서는 이미 황제를 제외한 1인자였지만 이제는 공식적으로도 더 높은 지위가 인정되었다. 그들은 이제 "단순한 군대의 우두머리가 아닌 재정과 사법 문제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예로 티베리우스가 그의 충복인 세자누스에게 그토록 집요하게 거부했던 혼인을 세베루스는 자신의 프라에토리안 장관인 프라우티아누스(Plautianus)에게 허용했다. 이 이후로 프라에토리안 장관 중에서 황제가 나왔으며 황제가 원정 중에 사망했을 때는 높은 우선순위의 계승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1. 통상 클라디우스 이래의 관례대로 즉위에 대해 사례금을 약속했고 이를 지키려고 코모두스의 재산을 경매에 붙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2. 로마 백부장 한 사람은 "한대 더"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본문으로]
  3. 전형적인 귀족으로 군단장 경험도 있었다. [본문으로]
  4. 마이클 그랜트의 <로마황제들>에서는 그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지지자였다. 하지만, 세베루스가 로마로 들어가 율리아누스를 살해하자 그는 니게르에 대항해 세베루스와 손을 잡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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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대와 장관

 

로마 제국에서 황제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요한 관직 중의 하나가 뜻 밖에도 현재 우리말로 "근위대장" 혹은 "호위대장"이라 흔히 쓴다. 라틴어로는 프라에펙투스 프라에토리오(Praefectus Praetorio)이며 프라에토르가 법무관으로 번역되는 점을 생각하면 법무 담당관이라고 보기 쉽겠지만 그 보다는 유래상 공화정 시기부터 군대안에서 장군이나 법무관(praetor)을 호위하는 부대에 대해서 프라에토리안(Praetorian) 코르호즈(cohors:대대)라고 했고 이것이 내전기까지 유지되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된 이후에 기원전 2년에 이것에 담당관(prefect)을 임명했는데 바로 이것이 소위 근위대장(Praetorina prefect)의 기원으로 생각이 된다. 초기에는 단순하 근위대장으로 보여지지만 그 역할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이를 프라에토리안 장관(Praetorina prefect)으로 불러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단순히 근위대장 혹은 호위대장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더 적절할 것 같아서 이하 프라에토리안 장관이라고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후대의 경우는 물론 신설당시 부터 내 생각으로는 사실상 총리와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기번은 그 유래에서는 단순히 근위대(guards)의 우두머리로 시작했고 세베루스(Severus, 재위193-212) 황제에 의해서 재정과 사법 등의 수장을 겸했다고 하는데 아마 단순한 근위대의 우두머리였던 것은 공화정시기였을 것이다. 이미 아우구스투스가 신설할 당시 부터 그가 2 명의 장관을 두어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이들이 휘두를 권력이 어느 정도가 되며 황제에게 어떤 위협이 될지 예상되었다는 것이 아닐까한다.

기번은 역시 별도로 이 부대와 관직에 대해 로마 제국 쇠퇴의 중요한 첫번째 징후와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만 역시 현대사가와 같은 정확성을 가지고 이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기원에 있어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부대와 장관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같다. 아우구스투스는 다만 이미 있었던 부대에 두 명의 장관을 두기 시작했던 것에 불과하다. 그의 설명은 이러하다.


그 교활한 폭군(tyrant)은 현명히도 법으로 그의 찬탈을 덧칠했지만 무력만이 이를 유지케함을 잘 인식하고 점차로 강력한 호위부대 조직을 형성해서 상시 그의 신변을 보호하고 원로원에게 경외감을 주며 반란의 첫 행위들을 막거나 분쇄하는데 대비케 했다. 그는 이 훌륭한 군단을 두 배의 봉급과 우월한 특권으로 차별화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공할 측면이 즉시 로마 민중을 놀라게 자극하하자, 3개 코르호트(cohort:대대급)만을 수도 내의 그들의 병영에 배치시켰다. 반면, 나머지는 이탈리아의 인근 마을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50년의 평화와 노역 후에 티베리우스(Tiberius)가 결정적인 모험을 시도했고, 이것이 영원히 그의 나라에 대갈못을 박았다. 군영의 무거운 짐을 이탈리아로 부터 덜어준다는 그리고 호위대 속에 더 엄격한 훈련을 도입한다는 미명하에, 그는 로마의 항구적 병영안에 이를 조직했다. 이것이 세심한 주의를 통해 강화되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가공할 종들은 전제주의의 왕좌에 언제나 필수적이지만 종종 치명적이기도 했다. 프라에토리안 근위대( Praetorian guards)를 궁정과 원로원에 들여놓음에 의해, 황제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힘과 시민 정부의 약점을 인식하고, 그들 주인의 악덕을 친숙한 경멸감으로 보며, 숭배심에 찬 경외감을 져버리도록 가르쳤다. 그것은 충분한 거리와 신비함만으로 가상적 권력에 대해 유지 될 것들이었다. 호화로은 도시의 사치스런 태만 속에 그들의 긍지는 그들의 대항할 수 없는 무게감으로 성장되었다. 주권자나 원로원의 권위, 공적 재산, 황제의 자리까지도 모두 그들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감출수도 없었다. 위험한 징후로부터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의 관심을 돌려놓으려고 가장 굳건하고 잘 확립된 군주들조차 감안이설과 명령을 처벌과 포상을 섞어놓고 그들의 긍지에 알랑거리고 그들의 탐닉을 눈감고 헤이함을 묵인하여 그들의 불안한 충성을 후한 선물로 사야만 했다. 그것이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등극이래 합법적인 청구가 되어 모든 신황제에게 그렇게 되었다.


세번째 황제인 칼리굴라가 근위대에 의해 살해되었고 네번째와 다섯번째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네로가 이런식으로 근위대의 병영에서 즉위했던 것만 봐도 그들의 권력이 이미 어떤 수준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라에토리안 장관의 경우 반드시 2명만도 아니었다. 그들의 두드러진 역할은 이미 티베리우스 시절부터 악명을 떨쳤다. 아버지에 이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세자누스(Sejanus)의 경우 이미 단독의 장관이 되어 호위대를 독점했고 티베리우스의 아들마저 그의 아내와 공모하여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 후에도 오히려 티베리우스의 충복이 되어 그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아그리피나와 그 아들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서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아래 로마에서 비길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대개 장관들이 그렇듯 기사계급출신에 불과하면서도 리빌라의 아들이자 유일한 티베리우스의 손자에 대한 보호자로서 리빌라와의 결혼 요구 등을 통해 스스로 황제 즉 티베리우스의 후계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단 숙청이 완료되자 그 역시 폭군의 희생양이 되는 것으로 끝났다. 원로원에서 자신이 후계자로 인정받을 황제의 메세지를 기다리던 그는 도리어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된다.

코모두스가 자신의 암살기도이후 극도의 두려움을 보였을 때 그를 대신해서 첫번째로 로마를 통치했던 페레니스 역시 그의 근위대 장관이었다. 몇번의 고비를 넘겨 마지막으로 암살되었던 것도 근위대 장관의 손에 의해서이다. 그후로도 황제가 유약하건 강한 규율로 그들를 통제하려하건 간에 숱한 황제들이 그들의 칼날에 쓰러지고 그 위에 다시 세워졌다. 거의 제정말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대를 통해 황제를 제외한 로마 제1의 권력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이 근위대 장관을 로마 정치사에서는 좀 모호한 존재지만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제정시대 근위대 병영 카스트라 프라에토리아(Castra Praetoria)의 로마시내에서의 위치 안의 선은 제정초 성벽이고 밖의 선은 후대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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