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정치적 차이들이 완전히 축출되고 아테네시는 평온해져 통일된 것을 보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와 아테네인에게 관한한 모든 문제들-각국의 공헌금, 육군, 군함, 도서문제, 해양, 헬라스에서 모은 강력한 힘, 종속국들에 대한 패권, 왕가들과의 친교 및 동맹-를 자신의 손에 넣었다. 

이제는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민중의 말에 굴종적이거나 키잡이가 바람에 대해 그러는 것처럼 그들의 욕망을 받아주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전까지의 민주주의와 민중을 부드럽게 설득하듯 다루는 것을 버리고, 귀족정이나 군주정을 채용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모두에게 최고의 이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민중을 대부분 설득과 지시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을 때 그는 고삐를 조이며 강제로 그들을 이끌었다. 현명한 의사가 오래고 복잡한 질병을 다루면서 자기의 환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맘대로 하게 하지만 때로는 쓰디쓴 처방을 병행하는 것과 같다.  

온갖 병리들이 이렇게 광대한 제국을 이룬 난봉꾼들 사이에 만연하는 동안에도, 그 혼자만이 선천적 재능을 부여받아 각 업무를 적당하게 처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민중의 희망과 두려움을 이용해 그들이 자만할 때는 이를 제어하고 절망할 때는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수사학 연설술이 플라톤식으로 '영혼의 마법'임과 그의 주요 업무가 사랑과 열정에 대한 주의깊은 연구임을 증명하였다. 이는 마치 영혼이란 현의 울림과 같아 현명하고 기교있는 연주술을 요하는 것이다. 그가 성공한 이유는 단순히 연설가로서의 능력만이 아니라 투퀴디데스(Thucydides)의 말대로 삶과 신뢰에서의 명망이 뇌물과 부정에 무심한 사람임을 확고히 증명하였다는데 있어서다. 그는 아테네시를 위대하게 만들어 모든 도시들 중 최고로 만들었다. 그는 왕들이나 참주들보다 힘에서 우월한 정도로 성장해서, 그들 중 몇몇은 자기 아들의 후견인으로 삼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드라크마도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 이상으로 늘리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페리클레스>,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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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2년 페리클레스는 반대당과 지도자 투퀴디데스를 추방하고 구축했다. 이 이후 그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사실상의 일인통치를 굳혔고 민중에 대한 태도도 이제는 바뀌기 시켰다. 그가 이끄는 아테네제국의 번영과 성공적인 전쟁 수행이 민주주의의 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페리클레스의 역량은 민중을 추종하는데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분열되고 맹목적인 민중을 그의 현명한 심모원력의 정책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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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갈리아인들은 크루시움(Clusium)이라는 투스카니(에트루리아) 도시를 향해 진군해 와서 포위를 하고 있었다. 그 시민들은 로마에 원조를 구했으며 야만인들에게 서신과 사절단을 보낼 것을 간청하였다. 그리아여 파비우스(Fabius) 가문에서 도시적 명망 있는 세 사람을 보내게 되었다. 

로마라는 이름 때문에 갈리아인들은 이를 정중하게 맞아들였고 도시 공격을 중단하고 회견하였다. 크루시움 사람들에게 그들을 공격할 만큼의 해라도 입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갈리아인의 왕 브렌누스(Brennus)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클루시움인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이라면 경작이나 보유 능력은 자그마한 사람들이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서 떠돌아다니는 가난하고 수는 많은 우리와 함께 나누지 않는 것이오. 그런 잘못이라면 당신들 로마일들도 알바인(Alban), 피데나이인(Fidenates), 아드레아인(Ardeates)들에게 당했던 것이며 최근에도 베이이인(Veientines), 카페나인(Capenates), 팔리스키인(Faliscan), 볼스키인(Volscian)에게 당하는 일이잖소. 당신들은 그들을 향해 진군해가 당신들과 공유하지 않으면 그들을 노예화하고 약탈하고 성벽을 허물지 않았소. 그렇게 하는 것이 잔혹하거나 부정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잖소. 그대들은 모든 법 중 가장 유서깊은 조항 약자의 재산이 이웃의 강자에게 속하여야 한다는 신에서 부터 동물계에까지 적용되는 이 법을 따르고 있을 뿐이오. 자연의 법 역시 강자가 약자보다 더 가져야 한다고 하오. 우리에게 포위당한 클루시움인들을 가여이 여기는 일이라면 중단하시오. 우리 갈리아인들이 당신네 로마인들에게 해를 당하는 자들에게 공감하라고 가르치지는 말란 말이오."

이 연설을 들은 로마사절들은 브렌누스와 조약을 맺지 클루시움에 잠입해 그 시민들에게 야만인들과 맞서싸울 것을 고무하였다. 그곳 전사들의 기량과 자신들의 기량을 보여주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클루시움인들이 기습할 때 성벽 밑 싸움에서 파비우스의 일원인 퀸투스 암부스투스(Quintus Ambustus)가 선두에 말달리던 키크고 잘생긴 갈리아인에게 곧장 말을 몰았다. 우선 그 결투가 빠르게 지나고 그의 번쩍이는 갑옷이 얼굴을 가리는 동안에는 그는 인식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이기고 상대를 말에서 내리게 해 군장을 벗겨내니, 블렌누스가 그를 알아보며 신에게 호소하기를 천하에 외교중재자로 온 이가 적군이 되어 나타나는 공정하고 신성한 만국공법 어디에 있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나서 전투를 멈추고 클루시움을 놓아두고 로마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백성이 이에 격분하는 것을 즐기며 선전의 명분만 찾던 그는 공격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카밀루스>,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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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의 말기 알라릭의 약탈은 갈리아족의 왕 브렌누스의 이후에 맞은 로마가 당한 두번째 약탈이었다. 약 800년의 시간 간격이 두 사건 사이에 있다. 브렌누스의 로마약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이래 계속된 사회적 갈등이 지속되었고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종종 일부러 외국과의 전쟁을 함으로써 내부갈등을 무마하려고 하기도 했다. 당시 브렌누스에 맞서 로마를 구한 카밀루스 역시 이런 갈등의 최고조 중에 인근 도시로 망명한 상태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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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배운 교양과정 중 음악과목이 있었고 제위에 오른 후 즉시 당대 최고 명성을 향유하는 하프주자[각주:1] 페르프누스(Terpnus)를 찾았다. 몇일이나 그를 앉혀놓고 식후 밤늦게 까지 노래와 연주를 해 점차 악기에 익숙해졌다. 그의 목소리를 보호 개선을 위해 예술가의 제안한 것은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가슴에 납덩이를 두기도 하고 복부와 창자를 구토와 관장으로 게웠으며 목소리에 나쁜 음식과 과일먹기를 금했다. 시끄럽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지만 약간의 진전에 고무되어 무대에 설 것을 열망하여 이에 대해 친구들 사이에서  "듣지 못한 음악이라면 누구도 감동 못시킨다"는그리스 속담을 반복해 들려주었다. 따라서, 그는 나폴리에서 그의 첫 공개연주회를 갖았다. 극장이 갑작스런 지진 충격을 받아 울렸지만 그는 그가 시작한 악장을 마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여러 번 여러 날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악기를 타고 노래를 불렀다. 목이 거의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물러나기는 싫어서 욕실에서 곧바로 극장으로 가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오케스트라 석에서 식하를 하면 떠들석한 민중의 회의 앞에서 그리스어로[각주:2] 조금만 마시고 그들의 귀가 울릴 정도로 크게 노래 불러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의 찬양하에 부른 노래를 나폴리에 도착한 함대에 소속된 알렉산드리아인들이 매우 좋아하자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더 많은 가수들을 불러들였다. 동시에 기사계급의 청년들과 평민 중 오천명의 젊은이들을 뽑아 자기 공연있을 때마다 따라다니는 봄부스대(bombi), 임브리케스대(imbrices), 테스타이대(testae)[각주:3]의 다양한 박수부대를 만들었다. 여러 파로 나뉘어 가발과 화려한 옷으로 차려입으면서 왼손에 반지를 끼게 했다. 각 부대의 지도자는 4만 세스테리티우스의 봉급을 받았다.

 

 

  1. Citharoedus. 하프연주를 하면서 노래하는 사람이다. [본문으로]
  2. 네아폴리스 오늘날 나폴리는 그리스 식민지였었다. [본문으로]
  3. 각기 "벌(the bees)", "기와(the roof-tiles)," "벽돌(the bricks)"로 각각의 소리에서 따온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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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집트(Egypt)가 아테네의 원조로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고 헬라스의 삼단노함들이 키프로스(Cyprus)와 실리시아(Cilicia)까지 이르며 키몬(Cimon)이 노련한 해전술을 가지고 등장하자 페르시아 왕은  이에 맞서 헬라스인의 적대심의 성장을 막게 했다. 드디어 병력이 움직이고 장군들이 배치되며 테미스토클레스에게도 왕이 헬라스 문제에 그를 필요로 한다는 서신이 도착했다. 그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미 옛 동료시민들에 대한 분노를 거의 잊고 전쟁으로 얻는 대단한 영광과 권력에도 무디어진 채였는데 아마도 그가 나서도 소용이 없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테네에는 그 때 다른 훌륭한 장군들이 많고 키몬도 엄청난 기세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른 시기에 그가 얻었던 성취와 기념비들의 명성을 생각하여 그는 최상의 길이 자기 생을 마감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신께 제의를 바치고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그들과 악수하고 현재의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황소의 피를 마셨다고 하고 또 다른 말로 재빨리 독약을 들이켜 마그네시아(Magnesia)에서 죽었다고 한다. 나이 65세로 일생을 마감했고 그 대부분은 정치이 바쳤었다. 그의 죽음의 이유와 상황을 설명들은 왕은 전보다 더 그를 존경하여 그의 친구들을 더 우대하였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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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던 테미스토클레스는 동포들의 등쌀에 쫓겨 드디어 페르시아 왕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그의 신하가 된다. 이오니아의 마그네시아에서 관리로 늙어가던 그에게 그리스에 맞서 싸우는데 그를 이용하려는 왕의 명령이 전해지자 풍운아 테미스토클레스는 친구들과 마지막 향연을 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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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테네 시에서 추방되어 아르고스(Argos)에 머무는 동안 파우사니아스(Pausanias)의 죽음의 틈이 아테네의 적대자들에게 구실을 주었다. 그에 대한 반역죄 고발을 한 이는 아그라울레(Agraule) 구 출신의 알크메온(Alcmeon)의 아들 레오보테스(Leobotes)였고 스파르타가 이를 지원했다. 파우사니아스는 반역적 계획에 연루되는 동안 테미스토클레스와 은밀히 연락했었다. 그러나 그가 나라에서 추방되고 극도의 고통을 겪는 것을 보자, (페르시아의) 왕에게서 받은 서신을 보이면서 비천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일 뿐인 헬라스인들에 마서 싸우는 일에 동지가 되어 주기를 대담히 요청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파우사니아스의 요청을 거절하였고 제휴는 철저히 고부했다. 그러나 이는 비밀로 하면서 그런 반역 기도를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파우사니우스가 스스로 이를 포기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그 비이성적 맹목적으로 추구되던 그 계획이 탄로나길 바랬던 것이다. 이제 파우사니아스가 죽음을 당하자, 그의 서신과 서류 중 그 문제에 관한 것이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스파르타인들은 그를 규탄했고 질투심많은 동료시민들도 그를 비난했다. 그는 출석해서 변명하지는 않았지만 서신을 통해 자신을 변호하면서 과거의 그릇되게 고발된 예를 들었다. 한 때 그가 동료시민들 앞에서 고발되어 중상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은 다스릴 생각만 있고 다스림 받을 생각은 없는 이이기에 자기자신을 헬라스와 함께 야만인들에게 팔아넘기는 짓은 않는다고 했었다. 민중은 고발자의 말에 설득되어 사람을 보내 헬라스 회의의 법정에 그를 세우도록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미리 전해 들은 테미스토클레스는 바다 건너 코르키라(Corcyra)로 갔는데 그곳은 그가 이전에 이득을 준 기여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코린트인들과 그들의 분쟁을 중재해 코린트인들에게 20 탤런트의 배상을 하게 하고 레우카스(Leucas)를 공동 식민지로 인정했었다. 그는 다시 에피로스(Epirus)로 달아났지만 여전히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에게 쫓견 채 절망적인 망명과 도망 생활을 하며 몰로시아인들의 왕 아드메투스(Admetus)에게로 갔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23-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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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군을 이끌던 그의 친구 파우사니아스의 몰락과 추방이 있은 후 화는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찾아왔다. 반역죄 수배 중 사망한 이후 그의 모의에 테미스토클레스와 관련된 서신들이 발견되자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합십해서 그들 법정에 세우려고 했다. 두 강대국 모두의 적이 되어버린 그가 이제 그리스에서 발붙일 곳이 없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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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천성적으로 명예를 사랑했는데 기억에 남는 그의 언행으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아테네 시가 그를 제독으로 뽑았을 때 그는 적시에 공사의 업무를 수행하지 않고 한 번에 여러 업무와 만남을 처리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이 위대하고 강력하다고 생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항해시까지 미루어 두었다. 

바다로 떨어진 야만인들의 사체들을 둘러보면서 그는 금팔찌와 금장신구를 차고 있는 것을 보고 지나치면서 따르는 친구에게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번 해보게. 자네는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니니까!"

다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안티파테스(Antiphates)와 그를 업신여기는 자이지만 그가 명성을 얻게되자 대우가 달라졌던 이에게

"젊은이, 사실 늦긴 했지만, 이제 우리. 그러나, 이제 우리가 함께 제대로 정신차리게 되었군."

라고 말했다.

또 아테네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기리지 않고 폭풍칠 때 가지 밑으로 은신처를 삼다가 날이 개면 그 잎을 뽑는 플라타너스 같이 그를 대우한다고 말하곤 했다. 세리피아 사람에게 명성을 얻은 것이 그에게가 아니라 아테네 시에게 더 걸맞을 거라는 말을 듣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사실이오. 하지만 내가 세리피아인이었다면 그런 명성을 얻지 못했겠지만 그대가 아테네인이라도 나와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오." 

또, 아테네를 위해 엄청난 봉사를 했다고 자신을 생각해 주는 동료장군들 중의 한 사람이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도전적이 되어 자신을 그에 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축제일과 더불어 다음날이란 자가 싸우기 시작하면서 '그대는 갖가지 일로 시달리지만, 내가 나타나면 모두가 전에 제공된 여가를 즐기게 된답니다'고 하더랍니다. 축제일은 이에 대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나타나지 않으면 그대는 나타나지도 못하는 주제입니다. 내가 살라미스에서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했다면, 그대와 그대의 동료들이 지금 어디 있을 수 있겠소?"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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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미스토클레스는 자만심과 허영심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이러한 탓으로, 권력과 명예의 정점에서 그는 시민들의 질투와 의심을 사 독재와 권력집중을 막기 위해 제정된 도편추방제의 희생양이 되어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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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인들은 라우레이움(Laureium)의 은광(銀鑛)에서 온 소득을 분배하곤 했는데, 테미스토클레스만이 감히 민중 앞에 이런 분배를 포기하도록 하고 그 돈으로 삼단노전함을 아이기나(Aegina)와의 전쟁을 대비해 건조하도록 하는 제안을 제출하였다. 이것은 헬라스를 고통스럽게 한 가장 격렬한 전쟁으로 그 때까지 (아이기나의) 섬주민들은 선박의 수적 우위를 통해 바다를 지배했다. 

이렇게 그는 다리우스(Darius)나 페르시아인의 가공할 만한 이야기로 시민들을 전율시키는 대신 더 쉽게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위협은 너무나 멀어서 별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아이기나에 대해 가졌던 쓰디쓴 질투심을 이용할 수 있었고 이로 부터 그가 원하는 무장을 쟁취했다. 그 결과 그 돈들로 삼백척의 삼단노전함을 만들어 나중에 크세르크세스(Xerxes)를 상대로 살라미스(Salamis)에서 쓰이게 된다. 이후로는 도시가 점차 바다를 향해 눈을 돌리게 하였다. 그들의 최인근 이웃에게는 맞수가 없는 보병에 더해 선박으로 부터 얻는 힘으로 야만인들을 격퇴함은 물론 헬라스의 지도권을 장악하자고 했다. 그는 꾸준한 '호플리테스(중장보병)' 대신 플라톤이 말한 바다를 누비는 '뱃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며 그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시민들에게 창과 방패를 빼앗아 노나 젖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비난을 잠재웠다. 그는 이렇게 밀티아데스(Miltiades)의 공개적 반대를 물리쳤던 것은 스테심브로토스(Stesimbrotus)가 말한 바와 같다.   

이렇게 그의 이런 행동이 국가의 통합과 순수성에 상처를 입혔는지는 학자들에 조사에 맡기기로 하자. 그러나, 그 때 헬라스를 구원한 것은 바다로 부터 왔다는 것과 아테네의 쓰러진 도시를 재건한 것이 바로 삼단노함대라는 것은 크세르크세스 자신도 본 것이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보병은 그대로인 채로 해전의 패배 후 도주했는데, 해군력의 열세를 생각했기 때문에 마르도니오스(Mardonius)에게 뒤를 맡긴 것이다. 그것은 정복을 위한 것이기 보다 수비차단을 위한 것이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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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미스토클레스는 반대당을 물리치고 그의 해군위주의 정책을 아테네이 새로운 국책으로 세운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와 그리스 세계의 분열은 더 깊어지고, 그 자신도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해 부패와 매수와 정적에 대한 모함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끝내 아테네가 잿더미로 변하는 참화를 겪은 후에 테미스토클레스는 전 그리스 세계의 존경과 칭찬을 한 몸에 받게 되지만 그 역시 그가 정적을 밀어냈던 같은 방법으로 도시로 부터 추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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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생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얘야. 너는 하찮은 인간은 되지 않고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다. 선인건 악인이건 말이다.' 인격 형성을 목표로하는 분야의 공부를 하거나 교양과정을 익히게 될 때 그는 배우기 꺼려하거나 게으름을 피웠다. 비록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믿는 듯 했으나, 지혜의 연마나 실용지식 획득에서 그는 나이에 맞지 않은 열성을 보였다. 이리하여 이런 교양과 매너의 측면에서, 교양있는 사람에게 경시당할 때 그는 다서 거칠게 자신을 방어하여 흔히 뤼라나 하프 따위를 타는 것은 자신의 할일이 아니며 작고 보잘 것 없는 도시를 크고 빛나게 가꾸는 것이 자기 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스템심브로투스(Stesimbrotus)는 그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의 문하에 있었으며 자연철학자 멜리소스(Melissus) 밑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연대기는 불확실하다. 멜리수스가 사모스 포위[각주:1]에서 맞선 자는 페리클레스인데 후자는 테미스토클레스 보다 많이 어린 사람이며 아낙사고라스와 친했다.

한편으로 테미스토클레스가 수사학자도 자연 철할류의 학자도 아닌 프레아리아인(Phrearrhia) 프므네시필루스(Mnesiphilus)의 제자라고도 한다. 그는 다만 ‘소피아(sophia)’ 즉 지혜라는 것을 연마하는 이로 그것은 단지 정치나 실용기술을 공부하는 것으로 솔론(Solon)에서 부터 단절없이 하나의 종파로서 전수되어왔다. 그 후계자들 중에 이에 변론술을 섞었고 공무에서 언어로 그 영역을 넓혀 '소피스트'라 조롱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공직 경력을 시작할 때 의존했던 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에 그는 평범치 않고 불안정했는데, 이성과 훈련에 소홀하면서 충동에 자신을 맞겨 거친 극단을 향해 돌진하곤 했다. 그의 후년 고백에서 그는 다루기 어려운 말도 적절하게만 훈련되면 좋은 말로 된다는 말을 했었다.

호사가들이 덧붙인 것에 아버지가 의절했고 어머니가 아들의 수치에 비탄해 자살했다는 말들은 내 생각엔 거짓이다. 아버지가 공직 즉 정치에 나서는 그를 단념시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서지고 방치된 해변의 낡은 배를 가리키면서 그것이 퇴물이 된 지도자를 민중이 다루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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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를 페르시아의 위협으로 부터 구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나라팔아먹은 매국노 소리를 듣기도 한 테미스토크레스의 어린 시절 그는 다듬어 지지 않은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술과 교양은 뒷전이었지만 실용적 기술을 익히는데는 모든 열정을 바쳤고, 정치적 성공와 민중들 사이의 명성을 열망하였다. 

 

 

  

 

  1. 440 B.C.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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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번 그는 해외 여행을 하려했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였고 한번은 아카이아(Achaia)[각주:1]였다. 전자의 경우 떠나기로 한 당일날 포기해 버렸는데 불길한 징조와 항해의 위험 때문이었다. 베스타 신전에 앉아 사원 둘레를 만들 때, 그가 일어나려는데 옷이 걸려서 눈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볼수가 없었다. 아카이아에 가서는, 이스트무스(Isthmus)를 가르려는 시도를 했고[각주:2] 그래서 자신의 근위병들에게 작업을 맡기는 연설을 했다. 나팔 소리를 신호로 그가 첫 삽을 떠 그의 병사들에게 흙동이를 날라주었다. 카스피해의 산악지대의 통로로의 행군을 준비하며 뒤늦은 이탈리아에서의 신병조집에서 얻은 병력으로 한 신설 군단을 만들었다. 전원 6피트의 키를 가진 이 군단을 그는 알렉산더대왕의 팔랑크스부대(phalanx of Alexander the Great)라고 불렀다. 부분적으로 의외이며 또 매우 칭찬할 만하기도 한 이런 행동들을 나는 그의 그릇된 행동들과 별개로 수집하여 여기에 설명을 해 둔다.

 

 

 

 

  1. 그리스. [본문으로]
  2. 역대 황제들의 야심적 사업이었던 코린트 지협(이스트무스)에 운하를 파는 일이다. (JULIUS Caesar, C. xliv. ; CALIGULA, C. xxi.)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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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국의 국경을 넓히려는 희망은 꿈에라도 품지 않았다. 반대로, 브리타니아에서 군단을 철수시키려는 생각은 있었으나[각주:1] 그의 아버지의 명성을 훼손하려는 것처럼 보일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은 겨우 폰투스(Pontus) 왕국과 알프스 지역을 속주화한 것이었다. 전자는 폴레몬(Polemon)에 의해 그에게 양도된 것이오, 후자는 코티우스(Cottius)의 죽음에 의해[각주:2] 그렇게 된 것이다.

 

 

 

 

  1. 그의 양아버지이자 전임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가 브리타니아 일부를 정복했고, 네로 재위 중에도 그의 장군 파울리누스(Paulinus)는 계속 전쟁을 수행했다. ,철수를 고려했던 것은 브리타니아의 여왕 부디카(Boadicea)가 반란을 일으켜 런던 등을 함락하고 로마병사 7천명을 살해했을 때였을 것이다. (Tacit. Agric. xv. I, xvi. ; and Annal. xiv. 29.) [본문으로]
  2. 이 속주는 로마의 코티우스 알프스 속주(Cottian Alps)로 편입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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