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레그눔[275년]

 

비록 영주(英主) 클라우디우스 고디쿠스(Claudius Gothicus)와 효웅(梟雄)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의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뒤를 이어서 프로부스(Probus),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내외의 적들에 대한 승리는 계속되었다. 특히 되돌아보면 아우렐리아누스의 죽음은 아쉬운 만큼이나 그 재위 중에 로마시민들에게 많은 선물을 안겨 준 듯하다. 확장되고 더 굳센 성벽을 선물했으며 비록 나중에는 그 규모와 비용면에서는 카리누스(Carinus)에게 밀리기는 했으나 갈리아와 팔미라를 정복하고 성대한 개선식을 열었다. 이는 내우외란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자존심과 위엄을 손상당한 로마인에게는 로마를 새로 건설한 로물루스나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에 비길만한 일이었다.

이것 외에도 아우렐리아누스가 선사한 것은 하나 더 있었는데 물론 본의는 아니겠지만 후계자가 없는 채 당한 뜻밖의 자신의 죽음에 의해서 평화와 더불어 고대적 기풍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더이상 자신들의 생각대로 황제를 세울 그 동안의 관례화된 권리를 포기하고 원로원에게 돌려주었다. 기번은 이렇게 이 때의 상황을 설명한다.

기만적 음모자들은 해를 입은 주권자의 장례식에 진지하거나 잘 꾸며낸 회개심을 갖고 출석하였고 군인계급의 일치된 결정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다음 서간에 나타냈다. "용감한 행운의 군대가 로마의 원로원과 민중에게- 한 사람의 범죄와 많은 이의 실수가 우리에게 고(故)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를 앗아갔다. 당신들 고귀한자 어버이들이 그를 신의 대열에 두고 당신들의 판단으로 황실의 어의(御依)의 가치가 있을 후계자를 지명하시라! 죄와 불운이 우리의 손해를 일으킬 누구도 우리 위에 다스리지 못하리라."  로마 원로원은 놀라지 않고 또다른 황제가 그의 병영에서 암살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비밀스레 아우렐리아누스의 몰락에 기뻐했던 것이다. 그러나 레기온(legion)의 온화하고 순종적인 연설은 집정관에 의해 전체 소집속에 의사가 전달되었을 때 가장 놀라운 즐거움을 확산시켰다. 이런 두려움이나 아마 존경이 강취할 명예를 그들은 그들의 죽은 주권자의 기억위에 관대히 쏟아놓았다. 감사함이 불어넣어 줄 승인들을 그들은 공화국의 충실한 군대에 돌려주었고 그들은 한 황제의 선택에 있어서 법적 권위에 대한 아주 적절한 감정을 품었다. 그러나 이런 아첨섞인 호소에도, 그 회의의 가장 신중한 자들은 그들의 안전과 존엄을 무장한 다수들에게 노출하기를 거부했다. 레기온의 힘은 진정 그들의 성실성의 선서였는데 명령할 수 있는 자가 가장할 수 있는 신세가 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인데 그러나 서두러한 회개가 80년간의  고질적 버릇을 교정할 수 있을까? 군사들이 익숙한 반란으로 빠진다면 그들의 무례함은 원로원의 위엄을 손상하고 그 선택의 대상에게도 치명적임이 증명될 것이다. 이들과 같은 동기들이 새 황제의 선거에서 군인계급의 참여에 대해 언급할 칙령을 지시하였다.


타키투스 황제[재위 275-276년]

 

이렇게 해서 원로원과 군대는 서로 사양을 반복한 채 약 8개월 간의 시간이 흐른다. 그 동안에는 주권자도 찬탈자도 반란도 없었고 전 황제가 임명한 장군과 관리는 아시아 총독만을 제외하면 그 자리를 유지하였고 모든 것이 전에 없이 너무나 평화로왔다. 기번은 이러한 상황이 그보다는 진실성이 덜하지만 마치 고대 인테레그눔(Interregnum)과 비슷해 보인다고 하였다. 이것은 로물루스의 사후 후계자가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리비우스(Livy)의 설명에 의하면 그 죽음 동안에 왕의 권력이 원로원의 몇명에게 나누어져 교대로 그 것을 맡게되는데 이 기간이 인테레그눔으로 그 때 일년이지나 사비니족(Sabine) 출신의 누마(Numa)가 왕이 되었다. 미묘한 긴장속에 275년의 9월 25일 드디어 집정관 벨리우스 코르니리시우스 고르디아누스(Velius Cornificius Gordianus)가 회의를 소집하여 황제를 선출한다. 타키투스(Tacitus)라는 저명한 역사가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그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75세의 원로원이 먼저 발언하려는 찰라 여기저기서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나이를 들어 사양을 하려해도 막무가내로 그를 위험한 지존의 자리로 추대하려 목소리를 높였다.[각주:1] 그 중에는 수락도 하기 전에 부디 죽은 후에도 자손들에게 공화국을 넘기지 말고 오현제의 예를 따르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에 감격해 유능한 자에게 물려주겠다는 맹세까지하고 황제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오현제 시대의 통치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고 원로원은 이에 의해 몇가지 중요한 특권들을 얻게 된다고 한다.

 

프로부스 황제[재위 276-282년]

군대도 이런 결정을 받아들였을 때 진정으로 타키투스가 말하던 "더 할 수 없이 행복한 시대"인 오현제 시대로 로마가 돌아갈 것 같았다. 또 게르만 족이 국경을 넘었고 노구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간 황제는 카파도키아에서 사망한다. 아마도 그의 연령이 가진 신체적 한계인지는 모르지만 군단의 불만이 그의 자연사를 기다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진정한 평화"는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오현제의 행복은 백일몽에 불과했다. 그는 육개월 동안 황제로 있었고 그의 형제인 플로리아누스(Florian)가 황제를 서둘러 선언했지만 시리아와 이집트의 군단을 지휘하는 프로부스(Probus)가 도전해 오자 카르수스(Tarsus)에서 자신의 병사들에게 배신되어 살해된다. 프로부스는 그 역시 전의 군인황제들과 같은 일리리아 출신의 경험많은 군인이었다. 기번이 제12장의 첫머리에 말한대로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런 것이 로마 황제들의 불행한 상태여서 그들의 무슨 행동이건 그들의 운명은 공통적으로 똑같았다. 즐거움이든 덕이든, 엄격함이든 온화함이든, 나태함이든 영광스러움이든 인생은 한결같이 때이른 무덤으로 이끌리고 거의 모든 통치는 반역과 살인의 역겨운 똑같은 반복에 의해 끝났다."

새로운 황제의 운명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프로부스는 유능한 군인으로 많은 국경너머의 야만인을 치러 전장을 이곳저곳 누비고 다녔으며 라인을 건너 엘바강까지 이르러 이들의 복종을 받아 로마의 위엄을 떨쳤다. 또한 근본적으로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석벽의 장성을 쌓기도 했으며 아우렐리우스가 시작한 새 로마의 성벽도 완공시켰다. 그리고 내부의 반역 음모도 훌륭히 분쇄했다. 군대에 대해서 노련한 경험을 가진 그의 병사들에 대한 태도는 아우렐리우스 만큼은 아니더라도 엄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도 여기에 말미암았고 유달리 비참하였는데 반란 통에 탑으로 도망가 있다가 병사들의 잔인한 복수심의 제물이 되었다.
 

카루스조[282-285년]


군단은 잠시 회개하는 시간을 갖고 그의 프라에토리안 장관을 황제로 추대했다. 282년의 일로 그의 이름은 카루스(Carus)[재위 282-283년]이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학식이 있었고 원로원의원으로서는 군사적인 재능이 있어서 기번이 말하기를 군사 정부와 민간 정부의 절충이 그에게서 다시 시작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오현제의 덕과는 그다지 가깝지 않은 듯 자신의 아들 둘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 자신도 단명인데다가 그의 왕조는 285년에 끝이 난다. 그는 서방의 일을 장자 카리누스(Carinus)[재위 283-285년]에게 맡기고 다른 아들 누메리아누스(Numerian)[재위 283-284년]과 함께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던 중에 283년 자연사인지 모를 죽음을 당한다. 원로원은 이에 카리우스와 누메리아누스 두 아들을 황제로 인정한다. 누메리아누스가 원정을 멈추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에 그 역시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성급히 황제가 된 프라에토리안 장관 아페르(Aper)는 그의 암살의 혐의를 받아 연행된다. 군단은 이렇게 역시 일리리아 출신의 장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를 새 황제로 선출하고 서쪽의 방탕한 황제에 대해 내전을 일으킨다. 카리우스는 물론 우월한 무력을 이미 갖고 있었지만 매시아(Maesia)의 작은 도시 마르구스(Margus)의 회전에서 그의 천부장 하나의 배신에 의해 살해된다. 이런 일들은 로마가 특히 쇠락하던 3세기에 흔히 보이던 풍경들이다. 그리고 이 노예 출신의 부모를 둔 새로운 황제에 의해 로마는 비로소 본격적인 수술대에 오르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동전

 

 

  1. 마이클 그랜트는 <로마항제들>에서 그가 노년에 로마에서 머물다 군인들에 의해 추대된 군인황제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원래 악명높게 틀린 사료라고는 하지만 <황제역사>의 타키투스 황제 즉위에 대한 기술은 많이 왜곡 희화된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

 

음모 그리고 갈리에누스의 최후

 

전통적인 로마사가의 말대로 갈리에누스(Gallienus)가 정말로 그렇게 형편없는 인간이며 동시에 황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재위중의 제국이 내적 분열과 외적 침략 등의 온갖 재난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268년 음모에 의해 죽음을 당했을 때를 기점으로 제국은 급격히 회복되었는데, 이는 마치 마법에서 풀려나 악몽에서 갑자기 깬 것 같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이 사람의 최후에 관하여 기번은 아마도 조시무스(Zosimus)의 설을 취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즉, 황제가 로마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을 때 상(上) 다뉴브(Danube)에서 아우레올루스(Aureolus)가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Milan)를 점령하면서 이탈리아의 패권에 도전하고 갈리에누스는 다른 다뉴브 군단의 반란때와 같이 신속히 이를 진압하러 나선다. 폰티 롤로(Pontirolo)라는 요충지를 놓고 격전을 치른 후 아우레올루스는 치명적 상처를 입고 밀라노로 물러나 포위되어 농성을 시작한다. 그의 최후의 수단은 포위진영을 이간하는 음모를 꾸미는 것이었는데 근위대 장관인 헤라클리아누스(Heraclianus)와 장군 마르키아누스(Marcian) 그리고 달마티아(Dalmatia) 호위대의 세크롭스(Cecrops)에 의해 황제가 살해된다. 황제는 야밤에 그들에게 포위된 채 치명상을 입고 죽기전 기적이 일어나서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애국적 감정이 그에게 자격있는 후계자를 지명하도록 유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이에 따라 장군 클라우디우스(Claudius)가 정통의 황제가 된다. 이것을 그대로 믿는다면 참으로 적을 포위한 중에 도리어 적의 음모에 의해 살해된 갈리에누스는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한 황제임에 틀림없을 일이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정말로 기적적으로 그의 죽음과 동시에 로마의 구제불능으로 보였던 국가적 재난들은 서서히 사라진다.

 

클라우디아누스 시기의 회복[268-270년]


황제는 죽었지만 우선 적의 분열을 틈타 포위에서 풀려나 강화를 맺을 수 있다는 참칭자의 희망은 사라지고 신황제는 그의 즉위에 본의아니게 나마 일정부분 기여했을 아우레올루스의 강화 요청을 거절하고 그를 죽인다. 그리고 그 동안 미루어졌던 군 및 사회 개혁에 착수한 후 야만인과 내란 세력을 일소할 계획을 세운다. 그가 즉위하던 해는 아마도 고트족(Goths)족의 마지막 해상원정과 병행한 일리리아 약탈이 계속되던 시기로 보이며, 동시에 제국의 여러 참칭자에게서 기원한 세력이 동서로 팔리마 제국과 갈리아 제국으로 각기 통합되어 제국이 삼분된 상태였다. 드디어 다뉴브 전선으로 나아간 신황제는 거의 20년간 로마를 괴롭히던 이들을 축출하여 이 지방을 재확립하여 클라우디우스 고디쿠스(Claudius Gothicus)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이 때 그는 다소나마 야만인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신의 도움을 받는데 역병이 적진에 만연했던 것이었으나 불과 재위 2년만에 동일한 재난이 그에게 덮쳐 시르미움(Sirmium)에서 숨을 거둔다. 그 역시 태생이 다소 불분명한 다뉴브 국경지방의 사람으로 군사적 경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으로 생각이 되며 훗날의 콘스탄티누스 집안이 이 사람에서 기원했다 하여 당시의 사가들은 이 사람의 덕을 많이 칭찬한다고 한다-즉 어느 정도 근거있는 말인지는 모르나 이 황제의 형인 크리스푸스(Crispus)의 증손이 콘스탄니누스(Constantine)라는 것이다. 그의 사후 그의 형제인 퀸틸리우스(Quintilius)가 아퀼레이아(Aquileia)에서 황제를 선언하나 오래지 못하고 같은 해 270년에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에게 정권을 내어준다.   

 

아우렐리아누스의 계승과 통일[270-275년]


혹은 애당초부터 황제가 후계자로 아우렐리아누스를 지명했다고도 한다. 그의 경우 역시 전황제들과 마찬가지로 변경지대 시르미움 지역의 농가 출신이다. 입대하여 차차 초급 지휘관에서 장군에 까지 올라갔고 고트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워 다른 장군들 처럼 발레리아누스의 신망을 얻었다. 갈리에누스의 치세에도 황제에게 클라우디우스와 더불어 중요한 장군이었을 것이다. 그의 군율은 너무나 혹독했고 심지어 잔인해 보일 정도였으며 원로원이나 귀족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분열을 해소하고 침략자들을 로마에서 몰아내어 20년간 계속된 로마의 수치를 씻어냈지만 아쉽게도 그이 재위 기간도 4년 9개월밖에는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분명 영웅이었고 그의 가장 인상적인 업적은 갈라진 로마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고 멸망직전의 나라를 다시 소생시킨 것이리라. 그 때까지 동방에서는 오다이나투스(Odaenathus) 이래 갈리에누스와의 협조하에 세력을 키운 팔미라 제국(Palmyrene Empire)이 그의 아내인 제노비아(Zenobia)에 의해 더욱 성장한다. 이미 269년 당시의 동방정세를 이용해 티마게네스(Timagenes)의 도움을 얻어 이집트를 자신의 영역에 추가했고 로마측의 프로부스(Probus)가 편성한 로마의 이집트-아프리카 혼성 군단이 바빌로니아(Babylon) 근처에서 티마게네스에게 패하면서 그녀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 진다. 갈리아 제국 역시 빅토리아(Victoria)라는 여제(女帝)의 통치를 받기도 하는데 그녀는 아들과 손자의 섭정으로서 그리한 것이며 포스트무스 이후의  갈리아제국의 대부분의 황제들은 즉위시 그녀의 금전적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군대의 반란으로 역시 잃었을 때 그녀는 테트리쿠스(Tetricus)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유해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테트리쿠스는 도리어 배은망덕으로 그녀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먼저 팔미라 정복에 나선다. 그가 바다를 건너자 비티니아(Bithynia), 앙키라(Ancyra) 티아나(Tyana)가 귀순하거나 쉽게 굴복한다. 시리아의 안티오크(Antioch)의 황제의 관대한 조치를 기대하며 항복하게 되어 이제 팔미라 제국은 풍전등화의 운명을 맞는다. 드디어 안티오크(Antioch)와 엠사(Emesa)로 여왕이 군대를 파견에 결전을 벌이고 패하자 사실상 제국은 와해된다. 팔미라는 포위되고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동방으로의 탈출을 하는 도중에 체포된다. 테트리쿠스의 운명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항복문서에는 <아이네이아스>를 인용했다고 하는 이런 구절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Eripe me his, invicte, malis.  (나를 구해주시오. 극복할 수 없는 악덕에서) " 


이로써 로마는 분열과 쇠망의 위기에서 다시 회복되고 예전대로 광대한 영역의 패자로 다시 올라서게 된다. 카이사르와 같은 정복자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사상 가장 성대한 개선식을 올린다. 내전뿐 아니라 그의 클라우디우스 사후 다시 도전해 오는 게르만 족들 고트(Goths)와 알레마니(Alemanni) 들을 굴복시킨다. 또한 그의 당대에 로마의 성벽을 새로이 쌓는 일을 했는데 프로부스 황제 때 완성이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성벽

그리고 그에 대한 음모도 많고 그에 대한 처벌도 그의 군기만큼 엄했다. 펠리치시무스(Felicissimus)의 반란도 그런 것이다. 그는 카이사르 처럼 갈리아를 정복한 후 동방원정을 계획했지만 채 페르시아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음모에 의해 희생된다. 아마도 군단을 엄하게 다룬 댓가라고 보여진다. 그의 재위시 로마의 영광은 다시 찬연한 빛을 발하는 듯 하지만 내용을 잘 들여다 보면 의혹스런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야만인을 굴복시켰다지만 그 후로 국경침입이 완전히 멈춘 적도 없고 그 굴복의 조건을 보면 다키아(Dacia)의 철수가 있는데 이는 아마 하드리아누스의 첫 예이후 로마인이 자청해서 영토를 내준 아주 드문 경우의 하나였으며 야만인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그들을 로마군대에 받아들인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Posted by DreamersFleet
,

 

30인의 폭군들

 

그리고 불운한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 사후 갈리에누스(Gallienus) 재위 중에 있었던 또 하나의 문제는 로마가 여러 참칭(僭稱)의 황제들로 뿔뿔히 분열된 상황에 있었다는 점이다, 흔히 이들을 아테네의 30의 폭군들과 비교해 로마의 30인의 폭군들(the thirty tyrants of Rome)들이라 불렀다. <황제역사>에는 30명 정도의 인물을 거론하고 있지만 실제로 참칭자의 아들들까지 다 합친 것이므로 실제로는 19명 정도라고 한다. 기번은 이 많은 사람을 다 일일히 다루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는지 이들 중 몇몇 중요한 사람들만을 설명하고 있다. 비록 적법한 절차로 황제가 된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사가들은 오히려 정통황제인 갈리에누스의 무능을 비난하고 오히려 이들 30명의 폭군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기번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그의 말을 보자.


 

폭군(Tyrant)이라는 끔찍스런 호칭이 종종 고대인들에 의해 최고 권력의 불법적 장악을 표현하는데 그의 남용에 대한 어떤 언급없이 이용되고 있었다. 참칭자들 중 여러명이 덕의 빛나는 덕의 모델이였고 거의 모두가 용력과 능력의 상당부분을 소유했다. 그들의 재능은 그들을 추천하여 발레리아누스의 호의를 갖게 했고 점차 그들을 제국의 가장 중요한 명령권으로까지 승진시켰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칭호를 보유했던 그 장군들은 능력있는 지휘와 엄한 군율로 그들의 군단들에 존경을 받거나 전쟁에서 용기와 승리로 경배되거나 솔직함과 관후함으로 사랑받았다. 승리의 전장은 종종 그들의 선출의 광경을 보였고 어의(御衣)에 대한 모든 후보들 중 가장 경멸스런운 무기장인 마리우스(Marius) 조차 두려움 없는 용기와 당할 자 없는 힘과 우직할 정도의 정직성을 보여 주었다.

 

기번은 비록 생략이 많았던 이 부분에 대해서 여기서 자세히 다루어 보려고 한다. 우선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던 당시로 돌아가 그의 소관이었던 동방의 문제부터 시작하자. 여기에는 뜻밖에 키리아데스(Cyriades)라는 일종의 로마입장에서 향도가 되어서 사푸르(Sapor)의 침략을 충동질했고 안티오크(Antioch)와 카이사리아(Caesarea)를 함락하던 그 날 스스로 카이사르(Caesar)를 칭하였으니 일종의 괴뢰황제가 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미 발레리아누스가 첫 출전하던 당시 제거된 셈이었다.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때에는 이미 언급했던 마크리아누스(Macrianus)와 프라에토리안 근위대 장관 발리스타(Ballista)가 남은 군단을 모아서 갈리에누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실은 이 두명이 마크리아누스(Macrianus)의 두 아들인  소(小) 마크리아누스(Macrianus)와 퀴에투스(Quietus)를 황제에 세웠다고 한다. 패잔병들을 추스려 드디어 발리스타가 발레리아누스 패배 후 페르시아 사푸르에게 첫번째 일격을 가하고 그의 퇴로를 팔미라의 군주 오다이나투스(Odaenathus)가 공격한다. 오다이나투스는 갈리에누스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면에서 마크리아누스와는 대립하게 되었다. 대소(大小)의 마크리아누스가 일리리아에서 황제로 추대된 아우레올루스(Aureolus)를 치기 위해 출전하였을 때 그에게 패하게 된 틈을 타서 오다이나투스는 아시아에 남아있던 발리스타와 퀴에투스를 제거하여 장차 제국을 삼분할 팔미라 제국의 기초를 쌓는다. 사실 마크리아누스는 몸소 출전하기 전에 갈리에누스(Gallienus)에 의해 아카이아(Achaea)의 총독으로 임명된 발렌스(Valens)를 제거하기 위해 피소(Piso)를 파견하였는데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고 테살리아(Thessaly)로 물러나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발렌스 부자와 피소 모두 얼마 못가 살해된다. 이 밖에 소아시아의 이사우리아(Isauria)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트레벨리아누스(Trebellianus)를 황제로 추대하고 점차 실리시아(Cilicia)로 영토를 넓혔다. 이집트(Egypt)의 경우 특히 알렉산드리아(Alexandria)가 극도의 혼란을 겪었으면서 갈리에누스에 대항해 아에밀리아누스(Aemilianus)를 세웠다. 아에밀리아누스는 이집트가문 출신의 정통황제의 장군인 테오도투스(Theodotus)에게 패하여 호송되었으며, 전자의 경우는 역시 테오도투스의 형제인 캄시소레우스(Camsisoleus)와 맞서 요새를 나와 싸우다가 제거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요새를 근거로 저항을 계속한다. 또한 폰투스(Pontus)에는 갈리에누스의 가장 뛰어난 장군이라는 사투르니누스(Saturninus)가 할거하였으나 병사들에게 너무 엄격히 대한 나머지 인기를 잃어 살해된다.

일리리아와 다뉴브 국경지대에서도 끊임없는 반란과 진압 그리고 배신이 이어진다. 인게누우스(Ingenuus)와 레길리아누스(Regillianus)와 아우렐우스(Aureolus)가 번갈아 일어났다. 우선 갈리에누스가 게르만을 상대로 고전하던 258년에 판노니아 총독인 인게누우스가 메시아 군단에 의해 추대되었으며 갈리에누스는 이를 진압하고서 이 지역과 관련자들에 대해 잔인하고 철저한 복수를 명한다. 또한 이 곳에서 사르마티아계 부족과의 싸움에서 공이 많은 레갈리우스(Regalianus) 역시 황제가 되지만 곧 살해되고 마지막으로 아우레올루스(Aureolus)를 추대하는데 여러 역학관계에 의해서 이 인물은 갈리에누스와 동맹관계를 유지한다. 그는 동방에서 진격해온 마크리아누스의 야욕을 분쇄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갈리아에서 일어난 포스투무스(Postumus)를 상대로 갈리에누스와 이해를 같이 하게 된다.

포스트무스의 배신은 서방을 맡도록 책임지운 갈리에누스의 아들 살로니우스(Saloninus)를 죽인데서 시작되어서 갈리아 전토를 회복하고 향락에 다소 빠진 갈리에누스를 대신해서 프랑크를 몰아내고 이 땅을 지킨다. 그리고 갈리에누스의 성난 공격도 잘 막아내 그를 화살에 맞게 하고 이후 갈리에누스는 아우레올루스와 동맹하여 그에 대항하려 한다. 이후 역시 배신이 끊이지 않아 그 역시 살해되나 이 갈리아 제국은 롤리아누스(Lollianus), 빅토리누스(Victorinus)와 그의 어머니 빅토리아(Victoria), 삼일천하의 마리우스(Marius)와 그 다음의 테트리쿠스(Tetricus)로 이어져 제노비아 여왕의 팔미라와 함께 나중에 로마를 삼분하게 된다. 

아프리카(Africa)에서는 한 때 셀수스(Celsus)가 추대되지만 칠일만에 갈리에누스의 누이에게 살해되었다. 베리(J. B. Bury)에 의하면 시기적으로는 늦지만 펠리시시무스(Felicissimus)라는 인물도 이에 추가되어야만 한다고 한다. 또 그에 의하면 고귀한 혈토을 가졌다는 피소는 참칭자가 아니며 마크리아누스, 발리스타, 오다이나투스, 제노비아 역시 엄밀히는 황제가 아닐 것인데 이는 그들의 아들들이 대신했거나 오데나투스 처럼 정통황제의 인정을 받은 경우이다. 오데나투스-제노비아 부부에게는 헤렌니우누스(Herennianus)와 티몰라우스(Timolaus)의 두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기번은 비록 이들 유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의 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더 비천한 계급의 농부나 노예의 지배를 받게 된 중에 농업이 황폐화된 시칠리아의 예를 추가로 언급하였다.


 


30인의 폭군 표[각주:1]



 

  1. 영어판 위키백과 관련항목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

 

 

갈리에누스의 흉상


포스트무스[재위 260-269년]와 갈리아제국[260-274년]

 

사실 253년 비운의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가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는 260년까지 그의 나라는 사실상 세명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이미 즉위 초 발레리아누스는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를 공동황제로 만들어서 자신은 동방으로 나아가면서 서방의 일은 그에게 맡긴다. 후에 258년 쯤 갈리에누스는 라인 전선을 그의 어린 아들인 살로니우스(Saloninus)를 명목상으로 남겨두어 다른 장군들이 책임지게 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될 무렵부터 야만인의 계속된 침략과 갈리에누스에 대한 불만때문에 각지의 군단들이 제 각기 황제를 선언하게 된다. 갈리아의 경우 살로니우스는 살해되고 그를 보살피도록 의무가 있는 포스트무스(Postumus)가 도리어 황제가 되어 로마에서 독립된 갈리아 제국을 출범시키어 나중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합쳐질 때까지 계속 그 상태로 남게 된다. 발레리아누스는 제국을 삼분했지만 실제로는 포스트무스 외에도 30명의 폭군들의 배신과 음모로 더욱 조각조갖 나뉘어지게 되고 그 마지막 단계에서 다시 로마와 갈리아와 팔미라의 셋으로 수렴된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발레리아누스가 관련된 동방의 일들을 이야기 했다면 이제는 갈리에누스의 서방의 일을 다뤄볼까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그렇게 연대기를 자신있게 구성하기란 석학들에게도 어려운 바이거니와 나에게는 더욱 더 그러하여 대체로 몇가지 그 시기에 있었던 로마를 혼란시켰던 야만인들의 침략과 여러가지 재난들에 대해 언급해 두도록 하겠다.

 

이민족들의 침입

사실 전에 언급했던 크림 반도로 이동해왔던 고트족(the Goths)의 경우 혜성처럼 떠오른 새로운 신진 세력이라면 갈리에누스를 괴롭혔을 라인과 다뉴브 동쪽의 로마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게르만족은 로마인들과 너무도 오래 접촉하고 항쟁해 와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로마의 이러한 혼란을 이들이 노칠리가 없었으며 이들의 침입이 결국 갈리에누스로 부터 이곳의 민심을 돌려놓아 결국 갈리아제국의 분리를 허용하게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며 기타의 다뉴브 등지의 군대의 반란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이 시기 로마와 이들의 관계의 새로운 특징 중 하나는 보면 로마가 야만인들에게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것에 너무나 일상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원정 중 필리푸스 아라부스(Philip the Arab)가 그러하기로 약속한 것은 잘 알려졌고 조지무스(Zosimus)의 경우 갈루스 역시 년공(年貢)을 바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시기 정통 황제라 할 수 있는 갈리에누스 역시 내외의 적을 상대로 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야만인과 평화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즉 야만인들은 로마가 그들에게 약속한 년공을 바치지 않으면 언제라도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흉노 선우: 중행(中行)은 한(漢)의 사신에게 공물이 좋으면 그만일 뿐이고 말은 필요없다고 답한다


프랑크족의 침입

 

프랑크족(the Frank)의 침입에 대해서 일단 기번의 말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로마인들은 오래동안 저지게르마니아(Lower Germany) 사람들의 대담한 용기를 경험해왔다. 그들의 힘의 통일은 더 가공할 침입으로 갈리아를 위협하고 황제 세력의 상속자이자 동료인 갈리에누스의 존재를 요하였다. 그 군주와 그의 어린 아들 살라니우스가 트레베스(Treves-트리에, 갈리아 벨기카의 수도)의 궁정에서 제국의 위엄을 보인 동안 그의 군대는 그들의 장군 포스투무스(Posthumus)에게 지휘되었는데 그는 후에 발레리아누스 가문을 배신하였지만 그 군주국의 큰 이해에 대해서는 충실했다. 기만적인 칭찬의 말과 메달들이 긴 일련의 승리들에 대해 어둡게 이야기 해준다. 트로피와 칭호들은 (이런 증거가 증명력이 있다면) 포스투무스의 명성을 증명하는데 그는 반복적으로 게르만족의 정복자(The Conqueror of the Germans)와 갈리아의 구원자(the saviour of Gaul)로 그려진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 즉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진 특징적 지식 어느 것 중의 단지 하나가 넓은 기준에서 허영과 자찬의 이런 기념물들을 지워버린다. 라인은 속주들의 보호자(Safeguard of the provinces)라는 칭호로 신성화되었지만 프랑크가 활성화된 대담한 정신의 사업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방벽이었다. 그들의 신속한 파괴가 그 강에서 피레네(the Pyrenees)까지 뻗었다. 이 산들에서 멈춘 것도 아니다. 스페인은 게르만인들을 두려워 한 적 조차 없었는데 그들의 침임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십년간 갈리에누스의 재위 중의 대부분 그 풍족한 나라는 감당할 수 없는 파괴적 적대감의 무대였다. 그 평화로운 속주의 번영하는 수도 타라고나(Tarragona)가 약탈되고 거의 파괴되었고, 오로시우스(Orosius)라는 5세기에 그 대 도시들의 폐허 중에 흩어진 형편없는 집들을 쓴 사람의 늦은 시대에도 야만인들의 격분을 아직 기록했고, 아프리카로 지나쳤다. 그 쇠잔한 나라에가 더 이상 다양한 약탈품을 공급할 수 없을 때 프랑크족은 스페인 항구에서 함선들을 장악하여 마우리타니아(Mauritania)로 스스로를 수송하였다. 그 먼 속주가 이들 야맘인의 성화에 놀랐는데 그들은 새로운 세계에서 떨어진 것 처럼 그들의 이름과 행동과 안색이 아프리카 해안에는 마찬가지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사실 이들 라인 이동의 게르만인들은 로마에 대한 분노라면 신흥의 고트족 못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역시 그 제국 방어가 이완되었던 틈으로 갈리아는 물론 배를 타고 아프리카 까지 약탈대를 보냈던 것이다. 로마가 포스트무스 같은 경험있고 노련한 장군이 이들을 잘 달래지 않았다면 이들이 입히던 피해도 고트족 못지 않았을 것이다.

 

알레마니와 마르코마니


이는 대체로 라인방면의 침입이라면 사실 갈리에누스가 후대에 책임을 져야 했던 것은 중부 다뉴브나 알프스를 너머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침략에 대한 것이다. 알레마니(the Alemanni) 역시 알프스를 넘어와 이탈리아를 위협했다. 그 중에 254년에 마르코마니가 라벤나까지 알레마니가 258년에 밀라노까지 쳐들어 왔다고 전하며(로마사, 하이켈하임), 이런 경우는 전선에 나가 있던 황제를 이탈리아로 소환하게 했을 것이며 전선에서의 지휘공백으로 다뉴브에서 잦은 군단의 지지를 받는 가짜 황제들이 난립하는 악순환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들의 이탈리아 침략에 대해서 기번은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또다른 더 가공할 만한 관점측면에서의 더 영광스런 사건인 알레마니의 침입은 더 아래 제국의 작가 하나에 언급된다. 삼십만의 호전적 사람들이 밀라노(Milan) 근처의 전투에서 겨우 만명의 로마인의 우두머리인 갈레리아누스에 의해 몸소 격파되었다고 이야기 된다. 우리는 그러나 커다란 가능성으로 이 믿기지 않은 승리를 역사가의 신뢰성이나 황제의 부하의 과장 어느 쪽이든지 돌릴 수 잇다. 갈리에누스가 이탈리아를 게르만족의 성화로 부터 보호하려 한 것은 아주 다른 성질의 무기에 의해서다. 그는 전쟁과 정복에서 수에비(Suevi) 부족 알레마니와 종종 헷갈렸던 마르코만니(the Marcomanni) 왕의 딸 피파(Pipa)와 약혼하였다. 그 아버지에게는 그의 동매의 군주로서 판노니아(Pannonia)의 정착을 넉넉히 인정했다. 꾸미지 않은 미인의 토착적 매력은 충실하지 못한 황제의 사랑 속에서 그 딸을 붙잡아 두었고 정책이 이런 사랑에 더욱 확고히 연결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오만한 편견은 결혼이란 이름을 거부하고 아직 한 시민과 한 야만인의 불경한 야합으로 폄하하였고 게르만 공주를 갈리에누스의 상스러운 첩이라고 낙인찍었다.



 

 

<어느 결혼식>

어쨌든 이에 크게 힘입어 일단은 알레마니족을 몰아낼 수 있었으므로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나 적을 다시 국경안으로 끌어들였고 결국 다뉴브 군단이 그에게 계속해서 반기를 들게 하고 계속 일리리아와 로마 사이를 왔다갔다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황제역사>의 경우도 갈레리아누스가 잘 한 일은 그의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해 준 오다이나이에게 그곳의 통치권을 인정해 준 일 밖에는 없다고 할 뿐 이 부분에 대한 그 업적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대체로 갈리에누스에 대한 평가는 당대 사가의 경우 좋지가 않다. <황제역사>에서는 그에 대해 여러번 조롱하고 있다. 그는 통치력은 별도로 하더라도 부친의 상중임에도 여러가지 사치와 오락을 즐기는 등의 품행에서도 좋지 못했고 또한 잔인한 면모까지 보여주었다. 내우외환속에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지극히 불운한 인간중 하나였던 그가 그런 충격적인 소식들을 듣고 대구한 이야기는 겨우 그들이 "모탈(mortal)"일 뿐이라고 한 것이었다. 

이러한 야만인의 전방위 침략과 잦은 내란외에도 이 시기의 로마를 괴롭히는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자연재해와 기근 등이었다. 갈레리아누스 재위 중에 지진 등이 많아서 시빌 경서에 다시 사람들이 신탁을 묻는 일이 많았다고 <황제역사>는 전한다.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하루에 5000명의 사람이 질병으로 죽어갔으며, 이집트는 내전 중에 그 지배자가 수시로 바뀌었으며 이 시기 알렉산드리아의 인구는 2/3가 사라졌다 한다.[각주:1]

 

 

  1. 하이켈하임, 로마사.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

 

시리아인 오다이나투스

 

로마사상 248년 부터 268년까지는 불운했던 시대 중 하나였으며, 특히 발레리아누스(Valerian)가 산채로 페르시아의 포로가 된 것은 전 로마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치욕이었다. 하지만 이민족의 종횡무진한 침략으로 경황이 없는 로마측에서도 그에 대해 통쾌한 복수를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단독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이 아닌 갈리에누스(Gallienus)가 아닌 로마인들에게 그렇게도 용기없는 온화한 기질을 가졌다고 조롱받던 시리아인 팔미라(Palmyra) 사람 오다이나투스(Odaenathus)였다. 이 시기의 역사는 안팎의 혼란으로 인한 극도의 참상을 겪었기 때문이었는지 연대기가 불확실하다고 하지만 다음에서 이 인물과 그에 얽힌 동방정세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발레리아누스와 참제들


당시의 로마를 둘러싼 동방정세를 보면 데키우스 황제의 전사 이후 로마의 쇠약함이 노출됨에 따라 페르시아 측이 이미 발레리아누스가 잡힌 사태 이전에도 몇번 로마의 국경을 흔들어 보였다는 기록들이 있다. 사푸르의 비문을 보면 안티오크(Antioch)가 이 와중에 한 번 함락되 일이 있었고 발레리우스가 포위된 바로 그 때에도 그의 소유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서방의 일은 아들이나 공동황제인 갈리에누스에게 맡긴 상태에서 이 와중에 황제가 출정을 하였으므로 포로가 되기 전에는 일진일퇴의 싸움을 두 제국의 대표들이 벌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황제 역사>에 보면 이 때 황제를 따라나왔던 사람들 중에 프라에토리안 근위대 장관인 발리스타(Ballista)와 황제의 장군인 마크리아누스(Macrianus)가 새 황제가 동방을 다스릴 자질이 결여됨을 생각하여 군단과 함께 마크라아누스와 그의 두 아들인 소(小) 마크리아누스와 퀴에투스(Quietus)를 추대하게 된다. 당시 발레리아누스의 사태(260) 후에 이른바 30폭군이라는 찬탈자들이 각지에서 할거하며 서로 황제를 칭했기 때문에 별로 놀라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사실 "여자라도 그 보다는 잘 다스렸을 것"이라고 이 정통 황제를 조롱하는 <황제역사>의 사가는 그에 관한 이러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집트의 반란을 듣고서는 "어쩌라고! 우리가 이집트의 리넨(linen아마 섬유)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라 하고, 아시아가 유린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쩌라고! 우리가 초석(saltpetre)없인 어떻게 되나!" 라고 영토 하나 잃어버릴 때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그의 아버지가 포로가 되었을 때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로마인으로 동방을 책임지던 마크리아누스 일파역시 전황제를 찾아올 생각이나 보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갈리에누스를 치기 위해 바다를 건너게 된다. 

 

오다이나투스의 설욕전

이런 상황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로마의 쓰러진 위대성을 다소 나마 회복한 것이 시리아인 오다이나투스였다. 그는 264년에 인근 지역을 장악하고 끌려간 황제의 송환을 목표로 사푸르에 대해 전쟁을 선언했다. 사실 <황제역사>에도 나오는 것 처럼 사푸르는 누차 로마 황제를 잡은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의 위험함에 대해 충고하는 동맹들이 여럿이 있었음에도 이를 들은채도 하지 않다가 오다이나투스의 맹공을 받게 된다. 오다이나투스는 그 때까지 사푸르가 이 지역에서 성취한 업적을 한꺼번에 허물어 버리고 니시비스(Nisibis)를 재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두 번씩이나 사산조의 수도 크테시폰(Ctesiphon)까지 나아갔다. 비록 전황제를 찾지는 못했지만 사푸르의 첩들과 왕자들을 데려와 로마의 수치를 다소나마 씻어냈다고 전한다. 이 때 페르시아 영토를 황폐화 하였으며 그 전 제후들이 모여 가까스로 수도를 사수할 정도로 공세를 퍼부었다고 하지만 끝내 사푸르는 로마황제를 넘겨주지 않았다. 어쨌든 이로 인해 정통황제라 할 수 있는 갈리에누스도 이 공적을 인정해서 그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란 칭호[각주:1]를 인정하고 그를 믿음직한 동맹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역시 동방에 할거하며 갈리에누스에 반기를 들었던 마크리아누스가 퀴에투스와 발리스타를 남겨두고 일리리아 정복을 위하여 역시 그곳에 황제로 추대되고 있던 아우레올루스(Aureolus)를 치기 위해 출격해서 패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 군단들이 배반하여 퀴에투스를 죽이고 항복해와서 더욱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발리스타에 관해서는 그 후 행적이 분명치 않아 달아나 황제가 되었다고도 한다.

 

오다이나투스의 죽음과 그 후의 팔미라 왕국


그리고 이 위대한 영웅도 비열한 배반자의 칼에 갑작스럽게 쓰러지게 된다. 기번에 의하면, 위의 혁혁한 업적에 더해 고트족의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원정에서 돌아와 엘레가발루스의 고향이기도 한 시리아의 에메사(Emesa)에 돌아왔을 때 그의 조카인 매오니우스(Maeonis)가 눈앞에서 창을 내질렀는데 이 일로 자신의 아들 헤로드(Herod)와 함께 살해된다. 갈리에누스에 대해서는 그렇게 시종 비웃음을 던지는 <황제역사>도 이 순간에 이르자 로마의 불운을 진지하게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찬탈한지 얼마되지 못해 그 역시 헤로드의 계모이자 오데나투스의 후처인 제노비아(Zenobia)의 복수를 받게 되어 팔리마 제국은 이 동양의 여왕의 차지가 된다. 그녀의 후에 보여준 재능으로 미루어보면 실은 오데나투스가 이룬 업적도 그녀와 함께 이룬 것이 아닐까 한다. 그녀는 스스로 조상인 클레오파라에 비길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실제로도 군주로서의 자질들 뿐아니라 학문적인 재능도 가진 보통의 로마 황제 이상의 능력이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오데나투스는 전쟁 이외에도 사냥을 취미로 하여 매번 그 용맹함을 드러냈는데 거기에서 조차 그녀는 전혀 밀리지 않았으며 남편사후의 새로운 국제정세에도 영리하게 대응하여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페르시아가 다투어 그녀와의 불화를 두려워 하여 동맹을 맺기를 간청하였고 실제로 사푸르와는 동맹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로마가 세력을 회복하여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도전했을 때는 때마침 사푸르가 죽어서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여 이집트를 병합하여 남편에게서 받은 영토도 더 넓혀서 갈리에누스의 후계자의 로마 제국과 그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함께 로마세계를 삼분하였다고 한다. 

 

제국의 삼분 지도



그러나 그 영토에 비해 막상 아우렐리아누스가 제국을 안정시키고 쳐들어왔을때는 그다지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점차 속한 도시들이 회유되어 넘어가는 바람에 손쉽게 항복하였고 그 신하였던 유명하 롱기누스(Longinus)도 이 때 여왕을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며 팔미라 제국은 더 이상은 역사상에 그와 같은 빛을 발하지는 못하나 그 옛날의 화려한 시대를 유적을 통해서는 볼 수 있다고 한다.

 

팔미라 유적 전경

 

 

 

 

 

  1. 공동황제의 지위를 인정한 것은 아닐 것이라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

 

고트족의 분노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대체로 로마와 이웃하는 야만부족들은 대개 로마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는 부(富)에 대한 단순한 질투 때문만이 아니라 로마인 특유의 이민족에 대한 "분리해서 통치한다"는 분열정책 때문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라인 동쪽의 게르만족은 자신들의 부족 이름에 "자유"를 뜻하는 프랑크(Frank)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유럽의 역사를 바꿔놓는 프랑크족의 유래이다. 우선 그들의 자유란 로마의 속박에 대한 자유일 것이다. 고트족의 전승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들은 이 국경지대보다 훨씬 먼 스칸디나비아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들이 언제부터 이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들은 그곳으로 부터 흑해연안까지 남하해 왔고 이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들의 하는 행동을 보면 마치 신으로부터 로마를 멸망시키라는 계시를 받고 태어난 듯한 생각마져 들때가 있다. 그들의 섞연찮은 남하동기도 그러하고 남하하자 마자 그곳의 원주민과 어울려 살거나 정착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않고 다짜고짜 로마를 향해 진군해 들어가 갖은 약탈과 만행을 일삼은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속에 로마에 대한 깊은 증오가 있지 않았나 한다. 그들의 로마에 대한 투쟁은 이 248년에서 268년의 시기에서도 놀라운 바가 있다. 아마도 그들의 분노와 복수심은 로마가 망할 때까지는 누구도 억누를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는 고트족의 3차례의 해양원정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보스포로스 진출

필리푸스와 데키우스의 두 단명 황제 때에도 국경을 침입하여 로마를 혼란시키고 그 때마다 로마의 정변을 일으키는데 톡톡히 기여했지만 로마의 견제로 육상으로의 길이 막혔는지 고트족은 이제 다른 방식과 다른 루트로 로마를 약탈할 계획을 세운다. 사실 몽고족 같은 북아시아의 야만인들은 바다에 익숙치 않다고 하는데 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좋은 배를 가졌다고 하니 물을 딱히 두려워할 민족은 아닌 것 같은데다가 흑해로 남하하여 반문명화된 보스포로스(Bosporus) 왕국에 정착하여 해상수단 함대를 소유하게 된 것이 그 동기를 제공했다. 감시와 견제가 심한 일리리아 국경의 트라키아나 매시아를 육로로 공격하기 보다 오랜 평화의 단 꿈에 빠진 소아시아의 비교적 후방지대를 공격하는 것이 더 쉬웠다.

 

고트족 1차해상원정


드디어 이 야만인들은 로마세계를 파괴하기위한 첫 항해를 시작했다. 요르다네스(Jordanes)가 쓴 <고트사>에 의하면 이 때 그들을 지휘한 고트족 지도자의 이름은 레스파(Respa), 베두크(Veduc), 투루아르(Thuruar)라 한다. 이 첫번째 로마세계에 대한 탐험은 흑해를 시계방행으로 도는 것으로 시작하여 코카서스(Caucasus)의 서남측의 소도시 피투스(Pityus)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로마측에서도 수세시아누스(Successianus)라는 장군이 그 곳의 성벽을 상대로 엄격한 방어를 할 때는 그들을 가볍게 패주시켜 로마의 매서운 맛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가 난세에 이 믿음직한 장군을 자신의 궁정아래 두고 싶었는지 그를 소환하였는데 이것이 실의에 빠진 야만인들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었다. 고트족은 다시 함대를 일으켜 이번에는 가차없이 그 도시를 장악하고 모험을 통해 적지 않은 수익을 가져다 줄 다른 먹이감을 찾아 항해를 계속한다. 디아나 신전(the temple of Diana) 등이 있는 유서 깊은 도시 파시스(Phasis)가 겨쳐 드디어 멀리 부유한 트레비존드(Trebizond)로 나아간다. 부유하고 인구많은 도시에는 당시의 훈련에 태만한 게으른 군인들만 있을 뿐 수세시아누스 같은 장군은 없었기 때문에 고트족은 이 도시를 장악하고 수많은 전리품들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대량학살, 사원 등 도시의 훌륭한 건축물을 포함한 도시 파괴 등이 이루어졌다. 

 

고트족 2차해상원정


첫 원정에서 엄청난 재물들을 가져오자 다음에는 더 많은 인근 부족들을 규합해서 충실한 2차 항해를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이전에 데려온 로마의 포로들이 향도로도 쓰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미 약탈된 방향의 경로는 따르지 않고 흑해의 서쪽으로 향해해 흑해에서 지중해로 빠지는 관문이자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잇는 보스포로스(Bosphorus) 해협을 목표로 하였다. 이 곳을 경계로 서쪽 유럽엔 비잔티움(Byzantium) 즉 훗날의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이 있고 동쪽으로 소아시아에는 칼케돈(Chalcedon)이 있다. 고트족은 바로 해협 건너편의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속주를 목표로 삼았다. 이 곳의 수비대는 그들을 수적으로 압도했지만 나태에 빠진 그들은 이번에도 성난 야만인들에게 감히 맞서지 못했다. 고트족은 칼케돈을 거쳐서 니코메디아(Nicomedia), 니케아(Nicaea), 프루사(Prusa)를 약탈하고 키지코스(Cyzicus) 로 향하던 중 강물이 불어 두번째 원정을 마치고 귀향하였다.

이 때의 상황을 발레리아누스가 듣고 이를 염려해 군단을 별도로 파견하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별 소득도 없는데다가 이 기회를 틈타 드디어 페르시아의 샤푸르(Sapor)가 로마에 도전해 오게 되고 여기서 발레리아누스가 친정에 나섰다가 황제로서 포로가 되는 로마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전 유럽이 프랑크나 색슨 혹은 알레마니 등의 야만인들의 침입으로 딱히 고트족에게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고트족 3차해상원정


세번째 항해에서는 드디어 해협을 통과해 에게해로 쏟아져 나와 그리스 등지를 휩쓸고 다녔는데 이 때는 이탈리아 자체도 위협을 받는 때이며 제국이 분열을 시작할 때라서 별다른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피레이우스(Piræus) 항에 닻을 내리고 아테네를 노렸다. 클레오다무스(Cleodamus)라는 공학자가 황제의 명에 의해 평화기에 크게 이완된 방어체계를 정비하도록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다만 이들이 방심하여 무절제한 약탈에 빠져있을 때 닥시포스(Daxippus)가 자원병들을 모집하여 정박한 고트족의 배들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배를 잃은 고트족은 더욱 용감해 졌을 뿐이며 그리스 각지를 약탈하고서 에피러스(Epirus)의 해변까지 올라가서 일리리아(Illyria) 전체를 휩쓸고 이탈리아를 바라볼 때까지 되었다. 드디어 황제 갈리에누스(Gallienus)가 놀라 여기에서 나울로바투스(Naulobatus)라는 헤룰리족(the Heruli)의 수령을 회유하여 매시아(Maeia)로 밀어닥치는 이들을 가까스로 막아낸다. 그리고 이 싸움이 계기가 되어 갈레리아누스는 곧 음모에 의해 살해되고 로마는 또다른 군인황제를 맞게 된다. 이러한 일을 기번은 다음 황제의 클라우디우스 고디쿠스의 업적을 이야기하면서도 다루고 있다. 대체로 고트족은 이 황제에 의해 타격을 받고 굴복은 하지만 그 복수심의 불꽃을 완전히 잘라버린 것이 아니라 로마의 힘이 약화되었을 때는 위와 같은 끈기로 로마를 황폐화시킬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은 다시 돌아왔다. 

 

누구도 그의 분노를 막을 순 없다 (사진: 영화 케이프 피어 중에서)



아무튼 마지막 세번째 원정은 남은 기록상으로 침입 과정이나 종족 문제 등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기번은 종족 문제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래 일만오천의 전사단이 어떻게 그와 같은 대담한 모험의 손실과 분파를 지탱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어려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검에 의해 난파에 의해 더운 날씨의 영향으로 점진적으로 버려졌더라도 항구적으로 산적이나 투항자들의 군단으로 갱신되었고 그들은 약탈의 법아래 몰려들었으며 난민노예들의 무리가 게르만이건 사마르티아 계이건 자유와 복수이 영광스런 기회를 열정적으로 장악했다. 이 원정에서 고트 민족은 명예와 위험의 우월한 몫을 주장했으나 고트의 기치아래 싸웠던 부족들은 그 시대의 불완전한 역사속에서 때로는 구별되고 때로는 혼동되었다. 그리고 야만인의 함대가 타나이스 하구를 나오는 것으로 보임에 따라 스키티아인이라는 친순한 명칭이 자주 그 혼합된 다수들에게 붙여졌다.


때로 어떤 사가는 코트족을 스키타이족이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불확실한 문제에 대한 이유는 기번이 10장의 서두 등에서 여러번 밝혔듯 기록의 불완전성에 있으며 이는 아직까지 논쟁적인 문제로 보인다.

 

고트족의 제 삼차 원정 전투 지도

 

 

Posted by DreamersFleet
,

 

3세기 위기의 시대 개막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명상록>의 첫 페이지들

 

기억하라 얼마나 오래 그대가 미루어 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그대가 신들로 부터의 기회를 부여받고도 사용하지 않았는지를. 그대는 드디어 이제서야 그대의 일부인 우주 그대 존재의 발현에 대한 우주의 감독자를 인식하였다. 그대들에 대해 시간의 한계는 주어져 그대가 그대 마음의 먹구름을 걷어내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고 그대도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각주:1]



필리푸스(Philip) 황제의 로마의 천년제(千年祭)가 있은 후 갈리에누스(Gallienus) 황제의 죽음까지의 20년간(서기 248-268년)을 기번은 "치욕과 불운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재앙스런 시기 동안 매 순간이 너무도 분명히 각인되고 로마 세계의 모든 속주가 야만적 침략자와 군사독재자에게 고통받었으며 폐허가 된 제국은 그 와해의 마지막 치명적인 순간에 접근해 보였다고 했다. 

 

군인황제들: 필리푸스-데키우스-갈루스-아에밀리아누스-발레리아누스


필리푸스(Philip)[재위 244-249년]는 천년제를 치른 이듬해 그의 장군인 데키우스(Decius)[재위 249-251년]에게 패하여 황제 자리를 내준다. 2년 뒤, 데키우스는 야만인의 침입으로 부터 로마를 구하러 나섰다가 전사하고 군단내에서 갈루스(Gallus)[재위 251-253년]가 선출된다. 형식상 데키우스의 아들 호스틸리아누스(Hostilianus)가 공동황제로 있지만 곧 사망한다. 그리고 또 두해 뒤, 갈루스는 역시 군단에 의해 세워진 아에밀리아누스(Aemiliaus)[재위 253년]에게 패하고 새 황제 아에밀리아누스 역시 전 황제의 부름을 받고 뒤늦게 달려온 발레리아누스(Valerianus)[재위 253-260년]에게 복수를 당하게 된다. 모두 253년의 일이다. 이들에 비해 발레리아누스는 비교적 오래 황제직을 유지했고 아들에 까지 황제 자리를 물려주나 페르시아군과 맞서 출전했다가 로마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이 죽음으로 제위는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가 계속 유지하하여 소왕조를 이어가지만, 제국은 이제는 외부의 침입만이 아닌 다른 도전을 받는 국면으로 진입한다. 이것은 발레리아누스의 불운과 치욕을 당하면서 온 로마 국토가 야만인들의 유린을 당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후한 보상을 줄 황제만을 원하는 군대와 개인적 야심을 위해서라면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명예로운 의무는 져버릴 수 있는 정치적 군인들이 다투어 황제를 선언하는 바람에 소위 "서른명의 폭군들"이 생겨나 로마는 통일마져 유지할 수 없는 위태한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 20년간의 역사에 대한 간단하 설명이다. 막시미누스(Maximin)가 몰락하면서 같은 해 여러명의 황제가 잇달아 즉위와 시해를 겪으면서 고르디아누스(Gordian) 3세가 즉위할 때까지 원로원이 아무런 역할을 못한 것에서 보듯 그 이후의 과정에서은 그를 대신해 각지에 나가 있는 군단들이 철저히 주도하였고 이들이 분열하였던 것이 이런 사태의 원인으로 생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역시 가장 기억되는 인물은 그러한 비운과 치욕의 주인공인 데키우스 황제와 발레리아누스 황제일 것이다. 그 둘은 군사적으로 실패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으나 역시 그러한 최후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훌륭한 황제들이었다는 점이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다. 

 

 

발레리아누스와 필리푸스 아라부스 두 황제에 대한 승리가 그려진 "샤푸르의 개선식"이 새겨진 나크세루스탐(Naqsh-e Rustam) 유적지

 

데키우스 황제의 고트전 출격

 

데키우스의 죽음의 발단은 고트족(Goths)의 남하와 관련이 있다. 전설상에 스칸디나비아에서 흑해(Euxine Sea) 주변으로 이동하여 이미 우크라이나 등지를 장악하고 동쪽으로는 스키타이(Scyth)와 서쪽으로는 로마의 다키아(Dacia) 속주와 이웃하게 되었다. 그리고 필리푸스-데키우스-갈루스-아에밀리아누스의 교체와 이들의 활동이 관련이 되었고, 이 모두가 이 곳의 군대 지휘를 맡게 된 것이 이들이 신임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근거를 마련했던 것이다. 데키우스 자신은 필리푸스가 그 지역의 마리누스(Marinus)의 반란을 막도록 매시아(Maesia) 군단을 책임지도록 보내졌다가 그 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언되었다. 사실은 이 때에도 고트족이 다뉴브를 건넜고 그리고 그 새로운 황제가 로마로 돌아온 이듬해 고트족이 다뉴브를 두번째로 넘어왔던 것이다. 우선 그들은 트라야누스(Trajan)가 동방 원정을 하면서 그의 누이를 위해 세운 두번째 매시아(Moesia Secunda)의 수도였던 마르키아노폴리스(Marcianopolis)에 나타나 거의 무방비 상태의 매시아를 가볍게 짓밟았다. 니코폴리스(Nicopolis)를 포위하다가 황제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하에무스(Haemus) 산맥으로 물러난다. 황제가 급히 이를 추격하자 이를 기습해 패주시킨 후에 그 틈을 타 필리포폴리스(Philippopolis)를 포위 함락하였는데 이 때 그 도시의 사령관인 프리스쿠스(Priscus)와 동맹을 맺고 데키우스에 대항하게 된다. 

 

고트 전쟁(250-251)의 전투 지도


데키우스의 개혁에 대한 생각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번은 데키우스가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헌신하기 직전 로마를 구하기 위해서 원로원에 제안한 한 가지 개혁 조치를 중요한 비중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황제 역사>에 의하면 아마 그해 250년 11월 6일에 데키우스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은 발레리아누스(Valerian)가 한동안 중단되었던 감찰관직(censorship)을 맡도록 선출하었다. 감찰관은 공화정 시기에는 집정관을 지낸 원로 2인이 맡아서 로마의 풍속을 단속하고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심사한다는 중요한 역할을 맡다가 제정 성립 이후 황제가 겸직하게 되었던 것으로 당시에는 폐지 되어있었다. 이 부활시킨 취지에 대해서 기번은 이렇게 설명한다.


동시에 데키우스가 세찬 폭력과 투쟁하고 있을 때에 그의 마음은 전쟁의 소동을 찬찬히 숙고하며 두 안토니누스들(Antonines) 이래의 그렇게도 격렬하게 로마의 위대성에서의 쇠퇴를 재촉하는 더 일반적인 원인들을 조사했다. 그는 곧 그것이 항구적 기초의 그 위대성을 공적인 덕성, 고대의 훈련과 예절, 법의 강제적 위엄으로가 아닌 것으로 대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고귀하고도 열정적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그는 처음으로 쓸모없는 옛것이 된 감찰관의 직무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렇다. 안토니누스 이래의 쇠퇴들. 그 징후는 뚜렸했지만 이제까지 누구도 이를 고치려 하지 않고 제정이래로 로마인들은 오히려 자신들끼리의 소모적 싸움에 몰두해왔다. 그리고 선출된 발레리아누스에게 막강한 옛 권한을 주었는데 발레리아누스는 조심스레 사양하는 답변을 했다. 어찌 되었든 이는 그다지 실효성이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기번이 말하기를 그것은 고트족을 물리치는 것이 당대 로마인에게 퍼진 대중적인 악성을 뿌리 뽑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의 대혼란은 일단 수습되지만 로마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 말이 옳음이 증명된다. 결국 데키우스의 말은 올바른 지적이었지만 올바른 해결책은 아니었던 것이다.

데키우스 황제의 전사

 

어쨌든 게르만 족의 선전을 지휘하는 인물은 크니바(Cniva)로 고트족의 왕이었고, 데키우스가 그렇다고 패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짓밟힌 모이시아 땅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침략자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국경 요새들을 강화하는 한편 그 퇴로를 완벽히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기번의 말에 따르면 적은 이제 포위되어 꼼짝 달싹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성급히 체념할 적들도 아니었다. 기번은 이런 극도의 궁지에 몰린 고귀한 정신의 야만인들은 노예보다는 죽음을 선호했다고 했다. 매시아의 소도시 포룸 트레브로니(Forum Terebronii)의 전투에서 데키우스는 처음 두 분대를 물리친 다음 세번째 적 분대에게 적의 전략에 말려들어 눈 앞에서 적의 화살 공격 속에 공동 집정관인 아들을 잃고 그 자신도 죽음을 맞이 하였다고 전한다.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이로써 이 로마 황제는 로마의 침략자들을 물리치다 장렬히 산화한 셈이었다.

 

단명 황제들


데키우스에게는 호스틸리아누스(Hostilianus)란 로마에 둔 아들이 있었지만 당시의 관례에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전선의 지휘관인 갈루스(Gallus)가 선출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명목상의 공동황제였다. 251년의 12월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호스틸리아누스가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고 갈루스의 전후 처리가 유화적이었던 탓인지 역사가 조시무스(Zosimus)는 전황제의 죽음이 그와 적과의 공모때문이라고 하였다. 유화책으로 서둘러 강화를 맺고 로마로 돌아온 면에서 갈루스는 군인황제였지만 코모두스와 비슷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곧 판노니아(Pannonia)와 매시아(Maesia) 군단의 사령관이자 지배자인 아에밀리아누스(Aemilianus)가 그의 성공적인 군사활동으로 게르만족을 다뉴브 전선 위로 몰아낸 뒤 황제에게 도전해 왔고 253년 살해된 황제를 대신하게 되는데 죽은 황제의 구원요청을 받고 뒤늦게 달려온 발레리아누스에게 다시 패한다.

 

페르시아 전쟁: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유수


로마 역사상 가장 불운한 황제였던 발레리아누스는 이렇게 즉위하게 된다. 그는 260년 까지 황제 자리에 있기는 했었지만 이민족을 막는데 내내 고생한데다가 페르시아의 야심가 샤푸르(Sapor)가 도전해 오는 바람에 서방을 공동황제였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에게 맡기고 동방원정을 떠나야 했다. 그는 유프라테스(Euphrates)를 건너 에데사(Edessa)의 성벽근처에서 샤푸르를 만났고 260년에는 패하여 황제 자신이 포로가 되는 로마사상 전무후무한 사태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상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훗날 샤푸르는 자신의 기념비에 필리푸스의 일과 함께 이 자랑스런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로마 황제가 전에 우리에게 조공하기로 했다는 앞의 내용) 그리고서 카이사르는 다시 거짓말을 하고 아르메니아(Armenia)에게 잘못을 범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바르바리소스(Barbalissos)에서 로마의 60,000 병력을 전멸시키고 시리아와 그 이웃들을 우리는 전부 불태우고 파괴하고 약탈하였다. 이 한 원정에서 우리는 로마의 다음 요새들과 소도시들을 정복했다.  


the town of Anatha with surroundings, (Birtha of Arūpān ?) with surroundings, Birtha of Asporakan, the town of Sura, Barbalissos, Manbuk [Hierapolis], 6. Aleppo [ Berroia?],  Qennisrin [ Apamea, Rhephania, Zeugma, Urima, Gindaros, Armenaza, Seleucia, Antioch, 7. Cyrrhe, another town of Seleucia, Alexandretta, Nicopolis, Sinzara, Hama, Rastan, Dikhor, Dolikhe, Dura, 8. Circusium, Germanicia, Batna, Khanar, and in Cappadocia the towns of Satala, Domana, Artangil, Suisa, Sinda, Phreata, 9. a total of 37 towns with surroundings.


세번째 원정에서는 우리가 카르하이(Carrhae)와 우르하이(Urhai[Edessa])를 공격하고 카르하이와 에데사(Edessa)를 포위하고 있을 때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Valerian Caesar)가 우리에 맞서 진군하였다. 그는  Germany, Raetia, Noricum, Dacia, Pannonia, Moesia, Istria, Spain, Africa (?), Thrace, 10. Bithynia, Asia, Pamphylia, Isauria, Lycaonia, Galatia, Lycia, Cilicia, Cappadocia, Phrygia, Syria, Phoenicia, Judaea, Arabia, Mauritania, Germania, Rhodes [Lydia], Osrhoene (?), Mesopotasmia로 부터의 70,000 병력을 동반하였다. 그리고 카래와 에데사 너머 우리는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와 대전투를 펼쳤다. 우리는 우리 손에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와 다른 사람들 그 군대의 수석들, 프라에토리안 장관, 원로원 의원들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모두 포로로 하여 페르시스(Persis)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Syria, Cilicia and Cappadocia는 우리가 불태우고 파괴하고 약탈하였다. 그 원정에서 우리는 로마 제국의 사모사타(Samosata)의 소도시, 이수스(the Issus) 상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Katabolos, Aegaea, Mopsuestia, Mallos, Adana, Tarsus, Augustinia, Zephyrion, Sebaste, Korykos, Anazarba ([Agrippas]),  Kastabala, Neronias, Flavias, Nicopolis, Epiphaneia, Kelenderis, Anemurion, Selinus, Mzdu-[Myonpolis], Antioch, Seleucia, Dometiopolis, Tyana, Caesarea [Meiakariri], Komana, Kybistra, Sebasteia, Birtha, Rakundia, Laranda, Iconium, 모두와 그 이웃들을 정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로마 제국과 비 이란인들을 추방했다. 우리는 그들을 이란 제국내의 Persis, Parthia, Khuzistan, 와 바빌로니아(Babylonia)와 다른 땅안에 즉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우리 조상들의 영역에 정착시켰다.[각주:2] 


비문을 보면 유독 3번째 원정인 발레리우스의 패전의 경우 병력면이나 포로 구성과 그 처리에 대해 자세한 것으로 보아 크나큰 패배였음을 보여준다. 기번은 그 후의 이 불운한 황제의 최후에 대해 이런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는 발레레아누스가 사슬에 묶여 어의를 차린 채 끊임없이 쓰러진 위대성의 장관으로 대중들에게 노출되고 페르시아 군주가 마상에 오를 때 로마 황제의 목에 발을 딛었다고 들었다. 그의 동맹들 그에게 변화무쌍해 알 수 없는 운명을 명심하고 돌아올 로마 세력을 두렵게 생각하며 그의 고귀한 포로에게 평화를 맹세케 하고 상처줄 대상으로 대하지 말라고 반복해 그에게 충언하는 그들에도 불구 샤푸르는 변함없었다. 발레리아누스가 치욕과 슬픔의 무게 아래로 가라앉았을 때 지푸라기가 채워기고 인형으로 만들어진 그의 가죽이 세세히 페르시아의 가장 경사스런 신전에 보관되었다. 로마인의 허영에 의해 그렇게도 자주 세워지던  대리석과 동판의 환상적 트로피보다 더 실제적인 승리의 기념비다. 그 전설은 도덕적이고 애처로우나 그 진실은 아주 훌륭히 의문속에 불려나온다. 동쪽의 군주들로부터 샤푸르에게 간 편지들은 여전히 위조가 드러난다. 질투 많은 군주라면 경쟁자조차로도 이렇게 왕들의 위엄을 공공연히 훼손한다고 생각하는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리다. 어떤 대우를 그 불운한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에서 경험했든 적어도 확실한 것은 적의 속에 떨어진 유일한 로마 황제는 희망없는 포로 생활속에 신음했을 것이다.

 

 

 

  1. 명상록, 2-10. [본문으로]
  2. http://www.colorado.edu/classics/clas4091/Text/Shapur.htm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

 

로마 1000년제

 

페르시아 원정 도중 새 황제가 된 필립푸스(Philip) 그는 아랍인으로 알려졌으며 별볼일 없는 곳에 태어나 천성적으로 비천하면서도 거만했으며 그와 같은 자리를 명예롭지 않은 방법을 써서 올라갔던 것으로 그려지며 로마 사가들은 그가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기록했다. 다시 야만인 출신의 군인 황제가 탄생한 셈이고, 그는 244년에서 249년까지 황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중에 248년이 바로(Varro)가 제시한 후 널리 받아들여진 로마 건국기년으로 부터 1000년이 되는 해였고 이를 기념한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그러면 이 축제가 열린 것은 사태가 발생한 지 4년 후의 일이지만 기번을 비롯하여 많은 사가들이 이에 대해서 그의 범죄에 대한 기억을 없애고 민중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라고 보고 있다. 또 <황제 역사>에서는 전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가 자신이 사망한 페르시아 원정의 개선식을 위해 준비한 여러 보기 어려운 동물들을 필립푸스 자신이 이 축제의 현란한 검투시합과 써커스에 사용했다고 전한다.

 

콜로세움


사실 이 축제의 이름은 백년제(百年祭, secular games)로 라틴어로는 루디 사이쿨라레스(Ludi Saeculares)라 하며 그 기원은 공화정 시적의 루디 타렌티니(Ludi Tarentini)에 있었다고 한다. 루디라는 것은 로마에서 열리는 여러 축제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대개는 신을 위해 거행되었다고 하며, 사이쿨라레스는 곧 수명과 관계가 있어 대개 그 최대치는 어림잡아 100년이나 110년 정도가 된다. 조시무스(Zosimus)가 이 축제의 유래에 대해 자세히 기록[각주:1]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 수명을 가장 길게 잡아 보는 것이 이 축제의 주기가 된다고 한다. 그 기원은 발레리안(Valerian) 가문의 선조인 발레수스 발세이우스(Valesius Valseius)가 신의 분노 때문에 자식들이 병든 후 아이들을 타렌툼(Tarentum)으로 데려가라는 등의 계시를 받아 아이를 치료하였다는 이야기 이다. 물론 타렌툼은 티베르 근처의 타렌툼이다. 또한 이렇게 깨어난 아이들의 꿈에서 영감을 받아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에서 제단을 발견하여 희생제식을 치른 것으로 그래서 처음에 루디 타렌티니(Ludi Tarentini)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의식은 그 후 로마시가 재난이나 전쟁의 압박을 받을 때 이를 구하기 위해 열렸다고 한다. 그 후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다시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에 의해 열렸는데 그 시기가 정해진 시점은 아니었다고 하며, 도미티아누스(Domitian)가 아우구스투스로 부터 날짜를 계산해서 치렀으며, 그리고 세베루스(Severus)가 그 후를 204년에 치렀다고 한다. 이 중 클라우디우스의 경우가 로마 건국 100주년 단위의 백년제로 아마도 서기 47년으로 로마 건국 800주년 기념제였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필리푸스의 백년제는 로마 건국 천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아울러 있었다. 아무튼 조시무스는 이 제식 방법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는데 이것은 그가 인용하는 시빌 경서(the oracle of the Sibyl)에도 자세히 나와 있으며 그 인용은 "이런 (제식의) 법칙을 라티움(Latium)만 아니라 너희 지배가 미칠 이탈리아까지 준수하여라"라는 구절로 끝이 난다.

 

조시무스의 생각


바로 다음에 조시무스는 이 제전의 의미를 로마의 흥망과 관련시키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계사상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고 기번과 같은 대가가 다룬 이래 많은 사람들이 도전했고 여전히 많은 논쟁과 토론이 이루어지는 "로마 제국 쇠망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이런 의식이 때맞춰 그 경서의 지시대로 거행되는 동안에 제국은 안전하고 거의 알려진 모든 세계에 대해 그 주권을 보유한 것과 같았다는 것을 확신시킨다. 그리고 반면 그것들이 무시되었을 때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sian)가 제국의 고귀함을 져버린 때 쯤 쇠퇴에 빠졌고 알게모르게 야만적으로 쇠락해갔다. 내가 말하는 것이 오직 진실 뿐이라는 것을 나는 연대기를 통해 증명할 것이다. 칠로(Chilo)와 리보(Libo)의 집정관 임기(서기 204년임)에 세베루스가 백년제(secular games) 또는 그 제식을 거행했고 그로 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의 아홉번째 막시미아누스(Maximian)의  여덟번째 집정관 임기(서기 304년임)까지 백년 하고 일년이 되었다. 그 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로 부터 사적인 개인이 되었고 막시미아누스(Maximian)는 그의 예를 다랐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와 리키니우스(Licinius)가 그들의 세번째 집정관 임기(서기 313년임)에 있을 때 110년이 채워졌고 축제가 관습대로 지켜져야 했건만 무시되었고 공무는 그들의 현재의 불운한 상태로 쇠퇴하였다.


바로 이러한 엄격히 정해진 고대 제식을 거행하지 않았던 것이 로마 제국 쇠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설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우리나라 고대의 안팍의 적들 안으로 신라와 밖으로 당나라의 협공으로 멸망당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에 관해서도 비슷한 이유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구려 멸망에 대해서는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의 정사(正史)에 그 비슷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신당서(新唐書)220: 고려전>의 고구려 멸망 당시의 기사에 "고려비기(髙麗秘記)에 이르기를 900년을 미치지 못하여 팔십대장(八十大將)이 이를 멸망시킬 것인데 지금 고(高) 씨가 한(漢)나라 이래 지금 구백년이고 당나라 사령관 이적(李勣)의 나이가 80이였다."란 말이 전하며 역시 <삼국사기>에도 이 말이 실려 있고 <일본서기(日本書記)>는 좀더 자세히 고구려 시조인 중모왕(仲牟王) 즉 주몽이 건구할 때 1000년을 통치하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잘 다스리려면 어려운 일이다. 오직 700년이라여 마땅하다"라고 하여 과연 700년 만에 망했다고 전한다. 백제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귀신 하나가 궁궐에 들어와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지하로 들어가서 그 땅을 파니 등에 글이 새겨진 거북이 가 있어 읽어보니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새달과 같다"고 했다고 한다. 무당을 불렀는데 이를 "둥근 달은 찼으니 기울 것이고 새달은 아직 차지 않았으니 점차 찰 것이다"라고 답하자 이 말을 듣고 왕이 그를 살해하였고 하고 혹은 "둥근 달은 성한 것을 말하고 달이 새로우면 작으니 쇠하는 것이라"고 답해 왕이 기뻐했다고 한다.

미신에 가까운 이야기이지만 합리적 이유를 떠나 어떤 나라가 1000년이나 되었을 때 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기에 이런 이야기들도 나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조시무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를 변명하자면 이렇게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기독교가 로마쇠망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어 왔고 콘스탄티누스가 처음 기독교 왕조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래서 이교도의 다신교 신앙이나 제식이 억압되기 시작했다는 면에서 그렇게 틀릴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매우 편한 발상이면서도 스스로 "나는 연대기를 통해 증명할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의 선구적인 책이 아닐까 한다.

 

로마 창건


사실 과연 로마 건국 기원 흔히 바로가 제시했다는 것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고 그 중간의 로마 기록이 빈약하였기 때문에 기원전 754년에 대해서는 의심이 많았었다. 기번 자신도 이 기년의 뒷받침이 될 연대기가 결핍되었다고 하고 한 술 더 떠 과학자 아이작 뉴턴의 기원전 627년이 기원이라는 의견마저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우연치 않게 이 때가 고고학적으로도 로마의 언덕에서 정착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때와 일치한다고 한다. 실제로는 754년이라는 것은 로마에게는 이와 같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즈음 건국 1000년 기념제를 맞이 하는 로마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를 한 번 생각해 복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든다. 우선 축제가 열렸으니 즐거웠을 것이다. 비록 기번이 말하기를 이 축제에 노예와 외국인 등 천한 사람들은 배제되었지만 엄격한 제식 절차에 따른 송가를 부르고 희생제를 치르며 음악과 무도회가 뒤따르며 성화가 로마 시내를 환히 밝혔다고 한다. 그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피를 말리는 검투시합과 손에 땀을 쥐는 전차 경기도 열렸을 것이다. 그 열광과 함성 속에서 이 날들 만큼은 코모두스 이래의 잘못된 정치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로마인들은 잠시 한숨을 돌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아는 이들에게는 몰락하는 단계 점차 사멸해 가는 나라 사람들이 로물루스 이래의 찬란한 과거를 생각해 보는 것도 다소 나마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쯤에서 한번 기번을 따라 로마건국 후의 역사를 짧게 요약해 볼까 한다.

늑대의 젖을 먹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대개 초기 정착민을 목동들과 범법도피자들의 작은 무리들로 보는데 이것은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사실 본격적 정착이전에는 떠도는 인간들이 이 일곱언덕의 도시를 이따금 지나가곤 했을 것이다. 초기 정체는 선출적 왕, 귀족 의회, 민회의 세가지 로 구성되며, 전쟁과 종교가 최고 정무관인 왕에 의해 수행되고, 왕만이 원로원이 토론한 법률할 제안하고 30 쿠리에(curie)에서 이를 투표로 비준했다고 평한다. 그리고 로물루스(Romulus), 누마(Numa),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의 세 명을 가장 고대의 입법가로 각기 자신의 세가지 법 분야를 대표한다고 보았고, 타르퀴니우스(Tarquin)의 무법적인 전제를 만나 왕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고 한다. 공화정 이전의 왕정의 존재는 고대 로마 문자로 렉스(REX) 즉 왕을 의미하는 금석문이 나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존재를 시사한다고 한다. 특히 초기의 역사에서 에트루리아계 왕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영향들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된다고 한다. 이들 발굴 중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1857년의 불치(Vulci)에 있는프랑소아 묘(Francois Tomb)의 벽화 하나인데 Cneve Tarchunies Rumach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이 Marce Camitlnas에게 공격을 받고 있고 Macstrna라는 전사는 사슬에서 Caile Vispins 라는 사람을 풀어주고 있다고 하는데 각기 그나이우스 타르퀴니우스 로마누스(Gnaeus Targuinius Romanus), 마르쿠스 카밀루스(Marcus Camillus), 마스타르나(Mastarna), 카엘리우스 비벤나(Caelius Vibenna)로 읽힐 수 있다고 한다(Holloway, The archaeology of early Rome and Latium, 1994). 여기서 마스타르나(Mastarna)를 에트루리아사 학자였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와 동일인물이라고 했다고 한다. 정확히 그림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건국 초기사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그림 상에 표시되는 결핍된 기록의 시대를 메꿔줄 힌트를 막연히나마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대체로 이들 즉 에트루리아인 세력의 몰락은 년대기 보다 더 늦은 시기까지 계속되었다고 말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이 처음의 400년간을 기번은 가난이라는 힘겨운 학교에서 행운의 여신의 도움과 함께 그들의 덕성을 활기차게 발현했던 시대였다고 기번은 평한다. 비록 그들의 끊임없이 기록된 전투들이 로마의 성벽이나 그 주위에서 일어난 일이었을 지라도 말이다. 그 후 300년간은 드디어 팽창의 시기로 이 시기를 거쳐 이탈리아는 물론  지중해를 지해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세계제국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제정이 성립하고나서의 마지막 300년간은 표면적인 번영과 내부적인 쇠퇴로 평가하는 것이다. 기번은 이 시대의 팽창의 포기에 대한 로마의 전설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카피톨(Capitol)이 세워질 때 트르미누스(Terminus)라는 경계를 주관하는 신이 홀로 유피테르(Jupiter)에게 그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 고집이 로마인은 결코 영토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후대에 이해되었다고 한다. 이런 관례를 처음 깬 것이 하드리아누스(Hadrian)로 그는 전임 트라야누스(Trajan)가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었다. 이것은 오현제 시대의 일로 그 시대를 지나면서 병사와 정무관과 입법가들의 민족 로마의 35개의 부족(tribus)은 이게 로마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속주민의 무리와 섞여 와해되어 각지에서 야만인 용병이 모집되고 그런 오합지졸 군대의 선출로 시리아인(Syrian), 코트인(Goth), 아랍인(Arab)이 차례로 이 위대한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기번은 한탄했다. 아울러 7번째 장을 바로 1000주년이 있었던 248년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내고 있다.


로마의 경계는 아직 서쪽 바다에서 티그리스까지 아틀라스 산에서 라인과 다뉴브까지 뻗었다. 속인들의 분별없는 눈에는 필리푸스가 하드리아누스나 아우구스투스가 그랬던 것 보다 못할 것 없는 군주로 보였다. 형식상은 여전히 같았지만 숨쉬는 건강과 활력이 달아나 버렸다. 민중의 근면성은 일련의 억압으로 낙심되고 소진되었다. 레기온의 훈련은 그 만은 다른 모든 덕들의 소멸후에도 국가의 위대성을 떠받쳤으나 야만주위로 썩어들어가거나 황제의 허약성에 의해 이완되었다. 국경의 힘은 언제나 무기와 요새화에 달린 것인데 알게 모르게 약화되었고 가장 훌륭한 속주들이 야만인의 탐욕이나 야망에 노출된 채 남겨졌던 것이며 그들은 곧 로마 제국의 쇠퇴를 발견했던 것이다.

 

 

 


 

  1. Zosimus, Historia Nova, 2.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

 

막시미누스 황제[재위 235-238년]

 

기번은 알렉산더 세베루스 사후의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태생적으로 우월한 특권은 시간과 여론의 허가를 받을 때 인류들간의 모든 특징들 중 가장 간단하고 부당함이 적은 것이다. 이 승인된 권리는 파벌의 희망을 꺽고 의식된 안전이 군주의 잔인성을 해체한다. 이 이상의 굳은 확립에 우리는 유럽 군주제들의 평화적 계승과 온화한 행정의 공을 돌린다. 그 결핍에 대해 우리는 잦은 내전의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인데 이것은 아시아적 폭군이 그의 아버지의 왕좌를 찬탈할 때 써야 할 방법이었다. 그러나 동방에서 조차 논란의 반경은 흔히 왕가의 군주들에 한정되며 더 운좋은 경쟁자가 그의 형제들을 칼과 활시위로 제거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의 더 천한 신민들에게 어떤 질투도 품지 않는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원로원의 권위가 경멸의 대상으로 떨어진 후에 혼란의 일대 장관이었다. 속주의 왕가의 적어도 귀족의 가문들은 오래동안 오만한 공화파들의 차앞에서 개선식으로 이끌려 왔다. 로마의 고대 가문들은 계속해서 카아사르들의 폭정 밑에 깔렸고 이런 군주들이 공화국 형태의 굴레를 쓰고 그들 후손의 반복되는 실패로 실망할 때는 세습의 어떤 생각도 그들 신민들의 마음속에 뿌리 박는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왕위에 대한 권리는 누구도 태생으로 부터 주장할 수 없었으며 모두가 재능으로 부터 맡을 것이었다. 야심적이고 대담한 기대가 법과 편견의 유익한 규제에서 해방되었고 인류의 가장 천한 자들이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용기와 행운에 의해 군대에서 고관으로 올라갈 희망을 품었는데 그곳에서 한개의 범죄로 그를 그의 쉽고 인기없는 주인에게서 세계의 왕의 홀(笏)을 탈취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와 막시미누스(Maximin)의 즉위후 어떤 황제도 왕좌 위에서 스스로 안심할 수 없었고 변경의 모든 야만인 농부도 그 위엄있지만 위험한 위치를 열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제위를 찬탈한 것으로 보이는 막시미누스의 경우 더할 수 없이 비천한 태생이었다. 기번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고트족(Goth)이고 어머니는 알라니족(Alani)이었으며 따라서 태생은 트라키아의 변경 지대였을 것이며 그 이후 트라코-로만(Thraco-Roman emperor)들의 첫번째였다. 헤로디안에 의하면 그는 그 지방의 양치기출신으로 로마보조병이 되어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런 비천한 출신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은 형식적이지만 카라칼라 황제의 칙령의 혜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아버지 세베루스(Severus)에게 일찍부터 눈에 띄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은혜 만큼이나 세베루스 왕조에 충성하는 면을 보였다. 마크리누스(Macrinus)의 찬탈에 그 왕조가 단절되었을 때 잠시 고향으로 은거하다가 엘라가발루스(Elagabalus)가 돌아오자 다지 군대를 맡았다.[각주:1] 하지만 이런 충성심은 오래가지 않았고 앞서 언급했던 이유로 황제의 약점을 보면서 자신의 야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기번은 반란이 없었다면 알렉산더가 그의 누이와 막시미누스의 아들을 결혼시켰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성격에 대해 기번은 이렇게 말한다.

 

전의 폭군들 칼리굴라(Caligula), 네로(Nero), 코모두스(Commodus), 카라칼라(Caracalla)는 전적으로 방탕하고 경험없는 젊은이로 황제의 교육을 받고 제국의 긍지와 로마의 사치와 믿을 수 없는 아첨소리에 부패되었다. 막시미누스의 잔인성은 다른 근원 즉 경멸에 대한 공포에서 유래하였다. 그들 자신처럼 그의 덕을 사랑했던 병사들의 지지에 의존했지만 그는 그의 천하고 야만인적 기원, 그의 흉직한 모습, 예술과 민간 생활 제도에 대한 전적인 무지를 의식했다. 그는 비천한 운명속에서 종종 로마의 오만한 귀족앞에 기다리고 그들 노예의 무례에 의해 입장이 거절되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역시 그의 가난을 구제하고 그의 떠오르는 희망을 조력해 주었던 소수의 친교를 기억했었다.  하지만 트라키아인(Thracian)을 퇴짜놓고 보호한 이들도 동일한 범죄 그의 기원상의 불분명에 대한 앎에 대해 죄가 있었다. 이 범죄에 대해 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했고  그의 후원인 여럿의 사형으로 막시미누스는 그의 천함과 배은망덕의 지울 수 없는 역사를 혈통상의 특징으로 공표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위는 항상 도전 받았다. 첫 도전은 그가 게르만족을 공격하려고 도강했을 때 다리를 끊어 적에게 그를 내주려는 음모였는데 좌절되었고 관련자들은 재판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두번째는 오스로에네(Osroene)의 궁수(弓手) 부대에 의해 일어났다. 그들은 알렉산더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여 새로운 황제를 세우려 했으나 배신적인 음모로 제위는 유지되었다. 이후 정신을 추스리고 게르만 전선으로 나간 뒤에도 이 폭군에 대한 음모는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숙청이 일어났고 드디어 로마의 귀족들이 이 비천한 황제에 대해 맞서 설욕에 나선다.

 

아프리카의 고르디아누스 가문

 

문제는 속주에 나가 파견되어 황제를 위해 재산을 긁어모으는 재정관(procurator)에 의해 발단이 된다. 아프리카(Africa)에서 부당한 갈취를 일삼는 황제 대리인이 살해되고 이것이 반란으로 번진다. 그리고 여든 나이의 아프리카 총독 전집정관(前執政官, proconsul) 고르디아누스(Gordianus)에게 황제 즉위를 강권했고 이 위험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모면하려 했지만 결국 그의 부관이었던 아들 2세와 함께 이를 받아들이고 원로원의 승인을 얻는다. 고르디아누스 가문에 대해서는 황제와 대조되게 로마의 명문 귀족의 일원이었다고 말해진다. 막시미누스는 이제 국적(國敵)으로 처지가 완전히 바뀌었다. 신황제측은 물론 수도에 남아 있던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에 더 많은 돈을 약속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친 막시미누스파 근위대장을 제거함으로써 이가 달성되었다. 이렇게 로마는 해방되다. 하지만 막시미누스 밑에서 호의호식하던 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바로 아프리카의 코앞 마우리타니아(Mauritania)에서 카페리아누스(Capelanus)가 그와는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면서 폐제(廢帝)에게 충성을 보이며 군사를 일으켜 두 황제를 죽였다.

 

 

 

복위를 꿈꾸던 막시미누스가 포위 공격을 수행하다 살해된 아퀼레이아의 위치

 

 

 

로마의 황제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 그리고 어린 고르디아누스

 

이에 로마도 당황하지만 곧 귀족들이 단결하여 콩코르디아 사원(Temple of Concord)에서 원로원이 회의를 열고 새로운 황제 두사람을 선출한다. 한사람은 국적에 대항해 전쟁을 지휘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은 로마에서 민간 행정을 맡게 하는데 이들이 막시무스(Maximus)와 발비누스(Balbinus)이다. 군사면을 맡은 막시무스 즉 푸피에누스(Pupienus)는 <황제역사>에서 비천한 혈통으로 발비누스와 대조적으로 그려지나 두 사람 다 집정관을 역임한 명문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민중은 고르디아누스 일세의 손자이자 이세의 조카인 13세 소년을 동시에 후대에 부황제가 되는 카이사르(Caesar)로 추대한다. 바로 이 사람이 살아남아서 고르디아누스 왕조를 이어가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이러한 사태에 화가난 전선의 막시미누스가 로마를 향해 알프스를 넘어 진군해 온다. 아퀼레이아(Aquileia)의 포위 도중 로마에 가족을 둔 근위대의 반란으로 폐제는 그의 아들과 함께 살해되고 전쟁은 싱겁게 끝난다. 하지만 로마 역시 그 동안 근위대 측과의 내전에 휩싸이고 결과는 휴전으로 끝난다. 두 황제가 로마에서 다시 불화를 겪는 틈을 타 238년의 7월 15일 드디어 근위대 측이 황제를 살해하고 카이사르인 어린 고르디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한다. 몇 달 안에 6명의 황제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장인인 미시데우스(Misitheus)가 근위대의 장관이 되어 나름대로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선정을 베푼다. 하지만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을 때 이 장관이 급사하자 기번은 독살을 의심하였고 이번에는 막시미누스에 이어 두번째 야만인 황제가 될 필립(Philip)이 장관직을 이어받게 되고 곧이어 역시 어린 황제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야만인 장군이 또다시 황제가 된 것이다. 서기 244년 3월의 일이다. 이러한 귀족들과 군인 황제간의 권력다툼에 대해 기번은 민권 권력과 군사 정부간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은 원로원이 근위대를 배제한체 선출한 두 명의 황제가 다른 임무를 맡게 했던 것도 비록 실패했지만 이 문제를 염려한 그들에 의해 세심히 준비된 것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1. 막시미아누스의 황제즉위전의 황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11>에 원사료에 대한 번역문이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

 

세금과 제국의 재정

 

세베루스 왕조 중에 있었던 또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바로 세제(稅制)에 관한 개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개혁이 아닌 당시에는 개악으로도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사회적인 질서면에서 더 로마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기번은 이에 대해 다시 공화국 시기로 돌아가서 이 왕조의 카라칼라(Caracalla) 황제의 칙령이 있기까지의 로마의 세금에 대해 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상당 분량을 할애하였다.

 

우선 로마 전역사에서 에서 세금은 그들 전쟁과 관련이 있었으며, 그것은 아마도 건국 이래로 계속 그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왕정시기의 재산에 의한 군단 및 선거단 편성이 모두 그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번에 따르면 공화국시기 베이(Veii)의 전쟁에서 원로원이 병사들에게 줄 정규적인 급료를 처음에 제도화하기로 하였을때 이것은 물론 시민 재산 즉 토지에 비례하는 세금 즉 트리부툼(tributum)에서 충당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군사적 정복은 정복지로부터의 풍부한 부를 가져왔다. 개선식과 함께 수 많은 전리품들과 그들이 바치는 속주 수입으로 국고가 넘쳐났고 로마는 피정복민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우지 않는대신 스스로를 이러한 세금의 짓눌림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켰다. 예컨대, 플루타르크의 <아에밀리아누스 전기>를 읽으면 이 때의 로마의 상황을 잘 알 수가 있다. 이런 해방은 로마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라 할만 했지만 로마의 팽창이 종료되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재확립을 거친다.

 

일단 아우구스투스 제국의 세입과 세출을 정확히 균형잡았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부족한 예산을 처음엔 자신의 돈으로 나중에는 로마인이 그 때까지 누렸던 고귀한 면세권을 일부 침해하면서 이룬 것이다. 그가 죽을 때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 중 하나인 장부가 사라져서 혹은 그 밖에 이유로 정확히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제국 곳곳에서 속주민들에게 다양한 세금을 거두었음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대체로 로마에는 토지세 등에 해당하는 직접세인 트리부툼(tributum)과 간접세라는 벡티갈리아(vectigalia)[각주:1]가 있는데 전자는 공화국팽창기의 국고의 증가로 로마인들에게는 완전히 면제되게 되어 속주민에게만 부과되게 된다. 혹는 직접세 토지세에 대해 그것이 급료로서 지급된다는 의미에서 스티펜디움(stipendium)이라고 불렸다고 말한다.[각주:2]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러한 병사들을 위한 공물세(tribute)가 부족할 때 처음에는 자신의 돈으로 채우다가 결국 그 부족을 로마와 이탈리아에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군인들의 퇴직금을 위한 5% 세율의 상속세이다.

 

이를 바탕으로 기번은 이 시기의 로마의 세금을 세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오늘날의 관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로 항구나 역등에서 징수되었던 포르토리움(Portorium)을 말한다. 로마가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고 그 교역을 통해 국부를 증진시켜 감에 따라 제국 10개 대지구로 나누어 각기 1/8세에서 1/40세까지 다른 세율울 적용이 했다. 인도나 아라비아의 사치품같은 경우엔 높은 세율이 적용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이후에는 이렇게 교역되는 모든 상품들에 포르토리움이 부과되었다.

두번째는 소비세(excise)로 역시 국고의 부족을 위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소개되었다고 한다. 역시 모든 거래들에 적용되었지만 많지 않은 1%의 세율을 적용했고 민중의 원성은 높았다고 한다.

세번째가 바로 이탈리아인에 대한 직접세 부활과 관련된다. 이 5%의 상속세를 부과했을 때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는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 같다. 받아들이지 않을 때느 토지세와 인두세를 징수하겠다는 암시를 주어 그들을 침묵시킬 수 있었다.

 

네로 황제의 경우는 인기를 위해 관세와 소비세를 없애려고 했다고 하는데 원로원이 그의 관대함은 칭찬하면서도 그 실행은 막았었다고 한다. 로마의 세금은 여러 단편적인 사료들에 나타나지만 특히 토지세의 경우는 정복민과 피정복민 완전한 자유민인 시민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짓는 의미도 있었다. 그래서 몇몇 도시나 혹은 그리스 등이 이로 부터 해방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안토니누스 칙령

 

그러나, 카라칼라는 재정의 부족을 다른 방법으로 채우려고 했는데 속주민들에 부과하는 토지세를 폐지하고 그들에게 로마 시민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주었다. 제국내의 모든 자유민은 로마 시민이 된다는 칙령을 내렸다. 하지만, 일률적으로 다른 세율을 올렸다. 개혁이 아닌 개악이었다. 더구나 일부 속주에선 여전히 폐지된 옛날 세금을 새로운 세금과 같이 거두어들였다. 이것은 훗날 성군이 되는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에 의해 경감되지만 쇠락하는 제국은 힘겨워진 국방과 함께 더욱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게 된다. 머지않아 토지세는 물론 인두세와 각종 중세가 로마제국을 도탄에 빠뜨릴 것이었다.


 

 

 

카라칼라 황제의 흉상


 

따라서 기번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는 이 세베루스 왕조를 마무리하는 제6장을 이렇게 마친다.

 

로마와 이탈리아가 정부의 중심으로 존중되는 한은 민족 정신이 고대의 시민들에 의해 보존되고 새로운 시민들도 자연히 흡수가 되었다. 군대의 주요 지휘는 자유로운 교육을 받고 법과 문자의 이저을 잘 배웠고 같은 수순으로 민간적 군사적 영예의 정규적인 과정을 통해 올라간 사람들에 의해 채워졌다. 그 영향과 예가 우리가 부분적으로 제정사 첫 두세기간의 로마군단의 온화한 복종의 공을 돌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 국제(國制)의 마지막 울타리가 카라칼라에의해  짓밟혔을 때 직업적 구분이 점차 계급의 차별로 이어졌다. 내부 속주의 세련된 시민은 더욱더 그들만이 법률가와 정무관에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군대의 보다 거친 사업은 국경의 농부나 야만인에게 버려졌는데 그들은 병영외에는 장소를 전쟁 외에는 과학과 모든 법률을 몰랐고 군사적 훈련에 조차 희박했다. 피묻은 손과 사나운 태도와 절망찬 결단으로 그들은 때로는 제위를 보호하였지만 더 자주 전복시켰다.

 

 

 

 

 

 

  1. -로마의 모든 세금을 포괄한다고 한다, Leonhard Schmitz, A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Antiquities (John Murray, London): p. 1184 [본문으로]
  2. 시오노 나나미(로마인이야기 6)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