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레그눔[275년]

 

비록 영주(英主) 클라우디우스 고디쿠스(Claudius Gothicus)와 효웅(梟雄)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의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뒤를 이어서 프로부스(Probus),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내외의 적들에 대한 승리는 계속되었다. 특히 되돌아보면 아우렐리아누스의 죽음은 아쉬운 만큼이나 그 재위 중에 로마시민들에게 많은 선물을 안겨 준 듯하다. 확장되고 더 굳센 성벽을 선물했으며 비록 나중에는 그 규모와 비용면에서는 카리누스(Carinus)에게 밀리기는 했으나 갈리아와 팔미라를 정복하고 성대한 개선식을 열었다. 이는 내우외란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자존심과 위엄을 손상당한 로마인에게는 로마를 새로 건설한 로물루스나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에 비길만한 일이었다.

이것 외에도 아우렐리아누스가 선사한 것은 하나 더 있었는데 물론 본의는 아니겠지만 후계자가 없는 채 당한 뜻밖의 자신의 죽음에 의해서 평화와 더불어 고대적 기풍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더이상 자신들의 생각대로 황제를 세울 그 동안의 관례화된 권리를 포기하고 원로원에게 돌려주었다. 기번은 이렇게 이 때의 상황을 설명한다.

기만적 음모자들은 해를 입은 주권자의 장례식에 진지하거나 잘 꾸며낸 회개심을 갖고 출석하였고 군인계급의 일치된 결정을 제출했는데 그것은 다음 서간에 나타냈다. "용감한 행운의 군대가 로마의 원로원과 민중에게- 한 사람의 범죄와 많은 이의 실수가 우리에게 고(故)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를 앗아갔다. 당신들 고귀한자 어버이들이 그를 신의 대열에 두고 당신들의 판단으로 황실의 어의(御依)의 가치가 있을 후계자를 지명하시라! 죄와 불운이 우리의 손해를 일으킬 누구도 우리 위에 다스리지 못하리라."  로마 원로원은 놀라지 않고 또다른 황제가 그의 병영에서 암살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비밀스레 아우렐리아누스의 몰락에 기뻐했던 것이다. 그러나 레기온(legion)의 온화하고 순종적인 연설은 집정관에 의해 전체 소집속에 의사가 전달되었을 때 가장 놀라운 즐거움을 확산시켰다. 이런 두려움이나 아마 존경이 강취할 명예를 그들은 그들의 죽은 주권자의 기억위에 관대히 쏟아놓았다. 감사함이 불어넣어 줄 승인들을 그들은 공화국의 충실한 군대에 돌려주었고 그들은 한 황제의 선택에 있어서 법적 권위에 대한 아주 적절한 감정을 품었다. 그러나 이런 아첨섞인 호소에도, 그 회의의 가장 신중한 자들은 그들의 안전과 존엄을 무장한 다수들에게 노출하기를 거부했다. 레기온의 힘은 진정 그들의 성실성의 선서였는데 명령할 수 있는 자가 가장할 수 있는 신세가 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인데 그러나 서두러한 회개가 80년간의  고질적 버릇을 교정할 수 있을까? 군사들이 익숙한 반란으로 빠진다면 그들의 무례함은 원로원의 위엄을 손상하고 그 선택의 대상에게도 치명적임이 증명될 것이다. 이들과 같은 동기들이 새 황제의 선거에서 군인계급의 참여에 대해 언급할 칙령을 지시하였다.


타키투스 황제[재위 275-276년]

 

이렇게 해서 원로원과 군대는 서로 사양을 반복한 채 약 8개월 간의 시간이 흐른다. 그 동안에는 주권자도 찬탈자도 반란도 없었고 전 황제가 임명한 장군과 관리는 아시아 총독만을 제외하면 그 자리를 유지하였고 모든 것이 전에 없이 너무나 평화로왔다. 기번은 이러한 상황이 그보다는 진실성이 덜하지만 마치 고대 인테레그눔(Interregnum)과 비슷해 보인다고 하였다. 이것은 로물루스의 사후 후계자가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리비우스(Livy)의 설명에 의하면 그 죽음 동안에 왕의 권력이 원로원의 몇명에게 나누어져 교대로 그 것을 맡게되는데 이 기간이 인테레그눔으로 그 때 일년이지나 사비니족(Sabine) 출신의 누마(Numa)가 왕이 되었다. 미묘한 긴장속에 275년의 9월 25일 드디어 집정관 벨리우스 코르니리시우스 고르디아누스(Velius Cornificius Gordianus)가 회의를 소집하여 황제를 선출한다. 타키투스(Tacitus)라는 저명한 역사가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그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75세의 원로원이 먼저 발언하려는 찰라 여기저기서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나이를 들어 사양을 하려해도 막무가내로 그를 위험한 지존의 자리로 추대하려 목소리를 높였다.[각주:1] 그 중에는 수락도 하기 전에 부디 죽은 후에도 자손들에게 공화국을 넘기지 말고 오현제의 예를 따르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에 감격해 유능한 자에게 물려주겠다는 맹세까지하고 황제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오현제 시대의 통치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고 원로원은 이에 의해 몇가지 중요한 특권들을 얻게 된다고 한다.

 

프로부스 황제[재위 276-282년]

군대도 이런 결정을 받아들였을 때 진정으로 타키투스가 말하던 "더 할 수 없이 행복한 시대"인 오현제 시대로 로마가 돌아갈 것 같았다. 또 게르만 족이 국경을 넘었고 노구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간 황제는 카파도키아에서 사망한다. 아마도 그의 연령이 가진 신체적 한계인지는 모르지만 군단의 불만이 그의 자연사를 기다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진정한 평화"는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오현제의 행복은 백일몽에 불과했다. 그는 육개월 동안 황제로 있었고 그의 형제인 플로리아누스(Florian)가 황제를 서둘러 선언했지만 시리아와 이집트의 군단을 지휘하는 프로부스(Probus)가 도전해 오자 카르수스(Tarsus)에서 자신의 병사들에게 배신되어 살해된다. 프로부스는 그 역시 전의 군인황제들과 같은 일리리아 출신의 경험많은 군인이었다. 기번이 제12장의 첫머리에 말한대로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런 것이 로마 황제들의 불행한 상태여서 그들의 무슨 행동이건 그들의 운명은 공통적으로 똑같았다. 즐거움이든 덕이든, 엄격함이든 온화함이든, 나태함이든 영광스러움이든 인생은 한결같이 때이른 무덤으로 이끌리고 거의 모든 통치는 반역과 살인의 역겨운 똑같은 반복에 의해 끝났다."

새로운 황제의 운명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프로부스는 유능한 군인으로 많은 국경너머의 야만인을 치러 전장을 이곳저곳 누비고 다녔으며 라인을 건너 엘바강까지 이르러 이들의 복종을 받아 로마의 위엄을 떨쳤다. 또한 근본적으로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석벽의 장성을 쌓기도 했으며 아우렐리우스가 시작한 새 로마의 성벽도 완공시켰다. 그리고 내부의 반역 음모도 훌륭히 분쇄했다. 군대에 대해서 노련한 경험을 가진 그의 병사들에 대한 태도는 아우렐리우스 만큼은 아니더라도 엄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도 여기에 말미암았고 유달리 비참하였는데 반란 통에 탑으로 도망가 있다가 병사들의 잔인한 복수심의 제물이 되었다.
 

카루스조[282-285년]


군단은 잠시 회개하는 시간을 갖고 그의 프라에토리안 장관을 황제로 추대했다. 282년의 일로 그의 이름은 카루스(Carus)[재위 282-283년]이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학식이 있었고 원로원의원으로서는 군사적인 재능이 있어서 기번이 말하기를 군사 정부와 민간 정부의 절충이 그에게서 다시 시작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오현제의 덕과는 그다지 가깝지 않은 듯 자신의 아들 둘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 자신도 단명인데다가 그의 왕조는 285년에 끝이 난다. 그는 서방의 일을 장자 카리누스(Carinus)[재위 283-285년]에게 맡기고 다른 아들 누메리아누스(Numerian)[재위 283-284년]과 함께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던 중에 283년 자연사인지 모를 죽음을 당한다. 원로원은 이에 카리우스와 누메리아누스 두 아들을 황제로 인정한다. 누메리아누스가 원정을 멈추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에 그 역시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성급히 황제가 된 프라에토리안 장관 아페르(Aper)는 그의 암살의 혐의를 받아 연행된다. 군단은 이렇게 역시 일리리아 출신의 장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를 새 황제로 선출하고 서쪽의 방탕한 황제에 대해 내전을 일으킨다. 카리우스는 물론 우월한 무력을 이미 갖고 있었지만 매시아(Maesia)의 작은 도시 마르구스(Margus)의 회전에서 그의 천부장 하나의 배신에 의해 살해된다. 이런 일들은 로마가 특히 쇠락하던 3세기에 흔히 보이던 풍경들이다. 그리고 이 노예 출신의 부모를 둔 새로운 황제에 의해 로마는 비로소 본격적인 수술대에 오르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동전

 

 

  1. 마이클 그랜트는 <로마항제들>에서 그가 노년에 로마에서 머물다 군인들에 의해 추대된 군인황제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원래 악명높게 틀린 사료라고는 하지만 <황제역사>의 타키투스 황제 즉위에 대한 기술은 많이 왜곡 희화된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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