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위기의 시대 개막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명상록>의 첫 페이지들

 

기억하라 얼마나 오래 그대가 미루어 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그대가 신들로 부터의 기회를 부여받고도 사용하지 않았는지를. 그대는 드디어 이제서야 그대의 일부인 우주 그대 존재의 발현에 대한 우주의 감독자를 인식하였다. 그대들에 대해 시간의 한계는 주어져 그대가 그대 마음의 먹구름을 걷어내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고 그대도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각주:1]



필리푸스(Philip) 황제의 로마의 천년제(千年祭)가 있은 후 갈리에누스(Gallienus) 황제의 죽음까지의 20년간(서기 248-268년)을 기번은 "치욕과 불운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재앙스런 시기 동안 매 순간이 너무도 분명히 각인되고 로마 세계의 모든 속주가 야만적 침략자와 군사독재자에게 고통받었으며 폐허가 된 제국은 그 와해의 마지막 치명적인 순간에 접근해 보였다고 했다. 

 

군인황제들: 필리푸스-데키우스-갈루스-아에밀리아누스-발레리아누스


필리푸스(Philip)[재위 244-249년]는 천년제를 치른 이듬해 그의 장군인 데키우스(Decius)[재위 249-251년]에게 패하여 황제 자리를 내준다. 2년 뒤, 데키우스는 야만인의 침입으로 부터 로마를 구하러 나섰다가 전사하고 군단내에서 갈루스(Gallus)[재위 251-253년]가 선출된다. 형식상 데키우스의 아들 호스틸리아누스(Hostilianus)가 공동황제로 있지만 곧 사망한다. 그리고 또 두해 뒤, 갈루스는 역시 군단에 의해 세워진 아에밀리아누스(Aemiliaus)[재위 253년]에게 패하고 새 황제 아에밀리아누스 역시 전 황제의 부름을 받고 뒤늦게 달려온 발레리아누스(Valerianus)[재위 253-260년]에게 복수를 당하게 된다. 모두 253년의 일이다. 이들에 비해 발레리아누스는 비교적 오래 황제직을 유지했고 아들에 까지 황제 자리를 물려주나 페르시아군과 맞서 출전했다가 로마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이 죽음으로 제위는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가 계속 유지하하여 소왕조를 이어가지만, 제국은 이제는 외부의 침입만이 아닌 다른 도전을 받는 국면으로 진입한다. 이것은 발레리아누스의 불운과 치욕을 당하면서 온 로마 국토가 야만인들의 유린을 당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후한 보상을 줄 황제만을 원하는 군대와 개인적 야심을 위해서라면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명예로운 의무는 져버릴 수 있는 정치적 군인들이 다투어 황제를 선언하는 바람에 소위 "서른명의 폭군들"이 생겨나 로마는 통일마져 유지할 수 없는 위태한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 20년간의 역사에 대한 간단하 설명이다. 막시미누스(Maximin)가 몰락하면서 같은 해 여러명의 황제가 잇달아 즉위와 시해를 겪으면서 고르디아누스(Gordian) 3세가 즉위할 때까지 원로원이 아무런 역할을 못한 것에서 보듯 그 이후의 과정에서은 그를 대신해 각지에 나가 있는 군단들이 철저히 주도하였고 이들이 분열하였던 것이 이런 사태의 원인으로 생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역시 가장 기억되는 인물은 그러한 비운과 치욕의 주인공인 데키우스 황제와 발레리아누스 황제일 것이다. 그 둘은 군사적으로 실패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으나 역시 그러한 최후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훌륭한 황제들이었다는 점이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다. 

 

 

발레리아누스와 필리푸스 아라부스 두 황제에 대한 승리가 그려진 "샤푸르의 개선식"이 새겨진 나크세루스탐(Naqsh-e Rustam) 유적지

 

데키우스 황제의 고트전 출격

 

데키우스의 죽음의 발단은 고트족(Goths)의 남하와 관련이 있다. 전설상에 스칸디나비아에서 흑해(Euxine Sea) 주변으로 이동하여 이미 우크라이나 등지를 장악하고 동쪽으로는 스키타이(Scyth)와 서쪽으로는 로마의 다키아(Dacia) 속주와 이웃하게 되었다. 그리고 필리푸스-데키우스-갈루스-아에밀리아누스의 교체와 이들의 활동이 관련이 되었고, 이 모두가 이 곳의 군대 지휘를 맡게 된 것이 이들이 신임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근거를 마련했던 것이다. 데키우스 자신은 필리푸스가 그 지역의 마리누스(Marinus)의 반란을 막도록 매시아(Maesia) 군단을 책임지도록 보내졌다가 그 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언되었다. 사실은 이 때에도 고트족이 다뉴브를 건넜고 그리고 그 새로운 황제가 로마로 돌아온 이듬해 고트족이 다뉴브를 두번째로 넘어왔던 것이다. 우선 그들은 트라야누스(Trajan)가 동방 원정을 하면서 그의 누이를 위해 세운 두번째 매시아(Moesia Secunda)의 수도였던 마르키아노폴리스(Marcianopolis)에 나타나 거의 무방비 상태의 매시아를 가볍게 짓밟았다. 니코폴리스(Nicopolis)를 포위하다가 황제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하에무스(Haemus) 산맥으로 물러난다. 황제가 급히 이를 추격하자 이를 기습해 패주시킨 후에 그 틈을 타 필리포폴리스(Philippopolis)를 포위 함락하였는데 이 때 그 도시의 사령관인 프리스쿠스(Priscus)와 동맹을 맺고 데키우스에 대항하게 된다. 

 

고트 전쟁(250-251)의 전투 지도


데키우스의 개혁에 대한 생각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번은 데키우스가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헌신하기 직전 로마를 구하기 위해서 원로원에 제안한 한 가지 개혁 조치를 중요한 비중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황제 역사>에 의하면 아마 그해 250년 11월 6일에 데키우스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은 발레리아누스(Valerian)가 한동안 중단되었던 감찰관직(censorship)을 맡도록 선출하었다. 감찰관은 공화정 시기에는 집정관을 지낸 원로 2인이 맡아서 로마의 풍속을 단속하고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심사한다는 중요한 역할을 맡다가 제정 성립 이후 황제가 겸직하게 되었던 것으로 당시에는 폐지 되어있었다. 이 부활시킨 취지에 대해서 기번은 이렇게 설명한다.


동시에 데키우스가 세찬 폭력과 투쟁하고 있을 때에 그의 마음은 전쟁의 소동을 찬찬히 숙고하며 두 안토니누스들(Antonines) 이래의 그렇게도 격렬하게 로마의 위대성에서의 쇠퇴를 재촉하는 더 일반적인 원인들을 조사했다. 그는 곧 그것이 항구적 기초의 그 위대성을 공적인 덕성, 고대의 훈련과 예절, 법의 강제적 위엄으로가 아닌 것으로 대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고귀하고도 열정적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그는 처음으로 쓸모없는 옛것이 된 감찰관의 직무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렇다. 안토니누스 이래의 쇠퇴들. 그 징후는 뚜렸했지만 이제까지 누구도 이를 고치려 하지 않고 제정이래로 로마인들은 오히려 자신들끼리의 소모적 싸움에 몰두해왔다. 그리고 선출된 발레리아누스에게 막강한 옛 권한을 주었는데 발레리아누스는 조심스레 사양하는 답변을 했다. 어찌 되었든 이는 그다지 실효성이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기번이 말하기를 그것은 고트족을 물리치는 것이 당대 로마인에게 퍼진 대중적인 악성을 뿌리 뽑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의 대혼란은 일단 수습되지만 로마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 말이 옳음이 증명된다. 결국 데키우스의 말은 올바른 지적이었지만 올바른 해결책은 아니었던 것이다.

데키우스 황제의 전사

 

어쨌든 게르만 족의 선전을 지휘하는 인물은 크니바(Cniva)로 고트족의 왕이었고, 데키우스가 그렇다고 패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짓밟힌 모이시아 땅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침략자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국경 요새들을 강화하는 한편 그 퇴로를 완벽히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기번의 말에 따르면 적은 이제 포위되어 꼼짝 달싹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성급히 체념할 적들도 아니었다. 기번은 이런 극도의 궁지에 몰린 고귀한 정신의 야만인들은 노예보다는 죽음을 선호했다고 했다. 매시아의 소도시 포룸 트레브로니(Forum Terebronii)의 전투에서 데키우스는 처음 두 분대를 물리친 다음 세번째 적 분대에게 적의 전략에 말려들어 눈 앞에서 적의 화살 공격 속에 공동 집정관인 아들을 잃고 그 자신도 죽음을 맞이 하였다고 전한다.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이로써 이 로마 황제는 로마의 침략자들을 물리치다 장렬히 산화한 셈이었다.

 

단명 황제들


데키우스에게는 호스틸리아누스(Hostilianus)란 로마에 둔 아들이 있었지만 당시의 관례에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전선의 지휘관인 갈루스(Gallus)가 선출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명목상의 공동황제였다. 251년의 12월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호스틸리아누스가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고 갈루스의 전후 처리가 유화적이었던 탓인지 역사가 조시무스(Zosimus)는 전황제의 죽음이 그와 적과의 공모때문이라고 하였다. 유화책으로 서둘러 강화를 맺고 로마로 돌아온 면에서 갈루스는 군인황제였지만 코모두스와 비슷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곧 판노니아(Pannonia)와 매시아(Maesia) 군단의 사령관이자 지배자인 아에밀리아누스(Aemilianus)가 그의 성공적인 군사활동으로 게르만족을 다뉴브 전선 위로 몰아낸 뒤 황제에게 도전해 왔고 253년 살해된 황제를 대신하게 되는데 죽은 황제의 구원요청을 받고 뒤늦게 달려온 발레리아누스에게 다시 패한다.

 

페르시아 전쟁: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유수


로마 역사상 가장 불운한 황제였던 발레리아누스는 이렇게 즉위하게 된다. 그는 260년 까지 황제 자리에 있기는 했었지만 이민족을 막는데 내내 고생한데다가 페르시아의 야심가 샤푸르(Sapor)가 도전해 오는 바람에 서방을 공동황제였던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에게 맡기고 동방원정을 떠나야 했다. 그는 유프라테스(Euphrates)를 건너 에데사(Edessa)의 성벽근처에서 샤푸르를 만났고 260년에는 패하여 황제 자신이 포로가 되는 로마사상 전무후무한 사태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상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훗날 샤푸르는 자신의 기념비에 필리푸스의 일과 함께 이 자랑스런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로마 황제가 전에 우리에게 조공하기로 했다는 앞의 내용) 그리고서 카이사르는 다시 거짓말을 하고 아르메니아(Armenia)에게 잘못을 범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바르바리소스(Barbalissos)에서 로마의 60,000 병력을 전멸시키고 시리아와 그 이웃들을 우리는 전부 불태우고 파괴하고 약탈하였다. 이 한 원정에서 우리는 로마의 다음 요새들과 소도시들을 정복했다.  


the town of Anatha with surroundings, (Birtha of Arūpān ?) with surroundings, Birtha of Asporakan, the town of Sura, Barbalissos, Manbuk [Hierapolis], 6. Aleppo [ Berroia?],  Qennisrin [ Apamea, Rhephania, Zeugma, Urima, Gindaros, Armenaza, Seleucia, Antioch, 7. Cyrrhe, another town of Seleucia, Alexandretta, Nicopolis, Sinzara, Hama, Rastan, Dikhor, Dolikhe, Dura, 8. Circusium, Germanicia, Batna, Khanar, and in Cappadocia the towns of Satala, Domana, Artangil, Suisa, Sinda, Phreata, 9. a total of 37 towns with surroundings.


세번째 원정에서는 우리가 카르하이(Carrhae)와 우르하이(Urhai[Edessa])를 공격하고 카르하이와 에데사(Edessa)를 포위하고 있을 때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Valerian Caesar)가 우리에 맞서 진군하였다. 그는  Germany, Raetia, Noricum, Dacia, Pannonia, Moesia, Istria, Spain, Africa (?), Thrace, 10. Bithynia, Asia, Pamphylia, Isauria, Lycaonia, Galatia, Lycia, Cilicia, Cappadocia, Phrygia, Syria, Phoenicia, Judaea, Arabia, Mauritania, Germania, Rhodes [Lydia], Osrhoene (?), Mesopotasmia로 부터의 70,000 병력을 동반하였다. 그리고 카래와 에데사 너머 우리는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와 대전투를 펼쳤다. 우리는 우리 손에 발레리아누스 카이사르와 다른 사람들 그 군대의 수석들, 프라에토리안 장관, 원로원 의원들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모두 포로로 하여 페르시스(Persis)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Syria, Cilicia and Cappadocia는 우리가 불태우고 파괴하고 약탈하였다. 그 원정에서 우리는 로마 제국의 사모사타(Samosata)의 소도시, 이수스(the Issus) 상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Katabolos, Aegaea, Mopsuestia, Mallos, Adana, Tarsus, Augustinia, Zephyrion, Sebaste, Korykos, Anazarba ([Agrippas]),  Kastabala, Neronias, Flavias, Nicopolis, Epiphaneia, Kelenderis, Anemurion, Selinus, Mzdu-[Myonpolis], Antioch, Seleucia, Dometiopolis, Tyana, Caesarea [Meiakariri], Komana, Kybistra, Sebasteia, Birtha, Rakundia, Laranda, Iconium, 모두와 그 이웃들을 정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로마 제국과 비 이란인들을 추방했다. 우리는 그들을 이란 제국내의 Persis, Parthia, Khuzistan, 와 바빌로니아(Babylonia)와 다른 땅안에 즉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우리 조상들의 영역에 정착시켰다.[각주:2] 


비문을 보면 유독 3번째 원정인 발레리우스의 패전의 경우 병력면이나 포로 구성과 그 처리에 대해 자세한 것으로 보아 크나큰 패배였음을 보여준다. 기번은 그 후의 이 불운한 황제의 최후에 대해 이런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우리는 발레레아누스가 사슬에 묶여 어의를 차린 채 끊임없이 쓰러진 위대성의 장관으로 대중들에게 노출되고 페르시아 군주가 마상에 오를 때 로마 황제의 목에 발을 딛었다고 들었다. 그의 동맹들 그에게 변화무쌍해 알 수 없는 운명을 명심하고 돌아올 로마 세력을 두렵게 생각하며 그의 고귀한 포로에게 평화를 맹세케 하고 상처줄 대상으로 대하지 말라고 반복해 그에게 충언하는 그들에도 불구 샤푸르는 변함없었다. 발레리아누스가 치욕과 슬픔의 무게 아래로 가라앉았을 때 지푸라기가 채워기고 인형으로 만들어진 그의 가죽이 세세히 페르시아의 가장 경사스런 신전에 보관되었다. 로마인의 허영에 의해 그렇게도 자주 세워지던  대리석과 동판의 환상적 트로피보다 더 실제적인 승리의 기념비다. 그 전설은 도덕적이고 애처로우나 그 진실은 아주 훌륭히 의문속에 불려나온다. 동쪽의 군주들로부터 샤푸르에게 간 편지들은 여전히 위조가 드러난다. 질투 많은 군주라면 경쟁자조차로도 이렇게 왕들의 위엄을 공공연히 훼손한다고 생각하는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리다. 어떤 대우를 그 불운한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에서 경험했든 적어도 확실한 것은 적의 속에 떨어진 유일한 로마 황제는 희망없는 포로 생활속에 신음했을 것이다.

 

 

 

  1. 명상록, 2-10. [본문으로]
  2. http://www.colorado.edu/classics/clas4091/Text/Shapur.htm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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