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들이 군역을 철저히 거부한 이 때, 마르키우스(Marcius)는 자신의 종자(피호민)들을과 자신이 설득할 수 있ㄴ는 자들을 거느리고 안티움(Antium)에 독자적으로 쳐들어갔다. 거기서 많은 곡물을 찾아냈고 가축들과 포로들을 대량 노획하였는데 자신은 전혀 취하지 않은채 따라온 자들에게 주어 갖가지 전리품을 로마로 실어보낸 것이다. 남은 시민들은 후회하면서 이런 부유한 동료들을 질시하면서 마르키우스에 대한 원한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커가는 그의 명성과 힘에 대해 못견뎌했으며 민중에 대한 해악으로 보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마르키우스가 집정관이 되려 나섰을 때 대중의 마음은 누그러지고 이렇게 많은 위대한 일을 한 태생이나 용기에서 최상의 인물을 경시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민중들은 느꼈다. 이제는 관직을 지망하여 동료시민들에게 인사하고 표를 구하는 자로서 포룸에 튜닉을 아래 입지 않고 토가만을 걸치고 나오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그것은 민중들이 표를 구하는 호의를 위해 복장에서 겸손을 취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거나 전쟁에서 상처를 입었을 경우 용감함의 증거를 보일 수 있거나 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표를 구하는 후보자가 튜닉없이 띠도 풀고 대중앞에 나설 것을 요구받는 것은 뇌물쓰는 의혹 때문은 아니었다. 이 이후로는 곧 표의 매매는 선거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후에는 이런 부정과 뇌물이 병영이나 법정 구석구석으로 영향을 미치어 도시 로마를 군주제로 바꾸게 했다. 군대가 철저한 돈의 노예가 되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처음으로 뇌물을 쓴 사람이야 말로 민중 권력 체제를 전복시킨 자라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그런 잘못이 조금씩 꾸준히 자라나 즉시 눈치 챌 수 없었다. 우리는 민중과 법정에서 뇌물을 쓴 첫 인사가 누군지 모른다. 반면, 아테네에서는 안테미온(Anthemion)의 아들 아뉘투스(Anytus)가 배심원들에 돈을 준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끝무렵에 퓔로스(Pylos)를 구하는 데 실패한 배신적 행위에 대한 법정에 섰을 때 일인데 로마의 포룸에서는 황금시대의 순수한 종족이 아직 살던 때였다.  

용감한 군인으로 17년간을 있었던 마르키우스가 많은 전장에서 얻은 흉터들을 보였을 때 민중들은 그의 용기에 안색을 잃었고 그를 뽑는데 서로 동의해 주었다. 그러나 투표날이 되어 마르키우스가 뽐내며 원로원의 호위로 포룸에 들어오면서 주변에 모든 파트리키우스 귀족들이 전에 없이 굽신거리는 것을 보자, 민중들의 생각은 그에 대한 호의를 접는 것으로 전의 질투와 분노로 기울게 되었다. 이런 감정은 파트리키우스들을 중시하는 귀족이 정부 최고권력을 장악하면 민중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갈것이란 두려움에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그들은 마르키우스를 거부하고 다른 이들을 선출되게 했다. 원로원의원들은 이것이 마르키우스 보다 자신들에게 이 모든 것이 향해있다며 분개했다. 마르키우스 자신은 이 상황을 절제와 관용으로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본성적으로 격정적이고 호전적인 면에 탐닉되어 그런 것을 위대시하고 이성과 훈련으로 닦아야 할 정치인의 주요 덕목인 신중함과 온건성에는 익숙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Nor did he k공무를 수행하는 자라면 무엇보다 플라톤이 '고독의 동반자'라 말한 고집을 피해야 하고, 이 사람들 속에 융화되어야 하며, 어떤 사람들이 잘못들에는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햇다. 그러나, 직선적이고 고집스러웠으며 모든 것에 대한 정복이 동시에 여성적 유약함 보다는 용감함의 특권이라 반대자를 누르지 못하는 것은 약함이라고 믿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언제나 민중에 대한 불만과 증오를 품고 있었다.

고귀한 태생을 젊은 귀족들은 열심히 뽐내는 분자들인 젊은 파트리키우스들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그에게 헌신하며 지지했는데, 이런 것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심정적 위로와 공감을 표하며 그의 화를 부채질했다. 전쟁에서 지도자이며 교사였고 승리에 대한 고무자였기 때문인데 거기에서는 상호 질투란 없었다. 

마침 이 때 로마로 곡물선이 왔다. 대부분은 이탈리아에서 온 것이었는데 비슷한 량이 쉬라쿠사(Syracuse)에서 참주 겔로(Gelo)로 부터 선물로 보내졌다. 민중들은 대부분 큰 희망을 품고 도시가 품귀와 불화에서 구원될 것을 기대했다. 원로원이 이에 소집되었고, 의사당을 에워싼 민중들은 토론 결과를 기다렸다. 곡물가가 조절될 것을 기대했고 선물분은 무료 분배될 것을 기대했다. 원로원에도 이를 권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자리에 일어나 격렬하게 민중 편에 선 자들을 규탄하며 그들을 데마고그나 귀족들의 배신자라고 불렀다. 폭도들 사이에 뱃짱과 무례라는 악의 씨를, 발아단계에서 짓이겨 놓아야 하며 호민관직 같은 것의 권력도 크지 못하게 해 두어야 할 텐데도, 자해적으로 품고 있는 자들이라 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코리올라누스>, 13-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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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우스 마르키우스. 로마 초창기 인근 제족들과 영역다툼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고 그가 정복한 한 도시 중 하나인 코리올리의 이름을 딴 코리올라누스(Coriolanus)라는 칭호가 그에게 붙여졌다. 이렇게 많은 전공을 로마를 위해서 세우고도 그는 정계에서 실패했고 집정관의 영예로운 직을 맡지 못했다. 민중에 대해 이렇게 독설을 퍼붓던 그는 도리어 나라에서 쫓겨나 전의 주적이었던 볼스키군을 이끌고 로마를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망명 중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물론 로마 역시 그렇게 훌륭한 장군을 잃은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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