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과 제국의 재정

 

세베루스 왕조 중에 있었던 또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바로 세제(稅制)에 관한 개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개혁이 아닌 당시에는 개악으로도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사회적인 질서면에서 더 로마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기번은 이에 대해 다시 공화국 시기로 돌아가서 이 왕조의 카라칼라(Caracalla) 황제의 칙령이 있기까지의 로마의 세금에 대해 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상당 분량을 할애하였다.

 

우선 로마 전역사에서 에서 세금은 그들 전쟁과 관련이 있었으며, 그것은 아마도 건국 이래로 계속 그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왕정시기의 재산에 의한 군단 및 선거단 편성이 모두 그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번에 따르면 공화국시기 베이(Veii)의 전쟁에서 원로원이 병사들에게 줄 정규적인 급료를 처음에 제도화하기로 하였을때 이것은 물론 시민 재산 즉 토지에 비례하는 세금 즉 트리부툼(tributum)에서 충당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군사적 정복은 정복지로부터의 풍부한 부를 가져왔다. 개선식과 함께 수 많은 전리품들과 그들이 바치는 속주 수입으로 국고가 넘쳐났고 로마는 피정복민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우지 않는대신 스스로를 이러한 세금의 짓눌림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켰다. 예컨대, 플루타르크의 <아에밀리아누스 전기>를 읽으면 이 때의 로마의 상황을 잘 알 수가 있다. 이런 해방은 로마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라 할만 했지만 로마의 팽창이 종료되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재확립을 거친다.

 

일단 아우구스투스 제국의 세입과 세출을 정확히 균형잡았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부족한 예산을 처음엔 자신의 돈으로 나중에는 로마인이 그 때까지 누렸던 고귀한 면세권을 일부 침해하면서 이룬 것이다. 그가 죽을 때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 중 하나인 장부가 사라져서 혹은 그 밖에 이유로 정확히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제국 곳곳에서 속주민들에게 다양한 세금을 거두었음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대체로 로마에는 토지세 등에 해당하는 직접세인 트리부툼(tributum)과 간접세라는 벡티갈리아(vectigalia)[각주:1]가 있는데 전자는 공화국팽창기의 국고의 증가로 로마인들에게는 완전히 면제되게 되어 속주민에게만 부과되게 된다. 혹는 직접세 토지세에 대해 그것이 급료로서 지급된다는 의미에서 스티펜디움(stipendium)이라고 불렸다고 말한다.[각주:2]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러한 병사들을 위한 공물세(tribute)가 부족할 때 처음에는 자신의 돈으로 채우다가 결국 그 부족을 로마와 이탈리아에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군인들의 퇴직금을 위한 5% 세율의 상속세이다.

 

이를 바탕으로 기번은 이 시기의 로마의 세금을 세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오늘날의 관세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로 항구나 역등에서 징수되었던 포르토리움(Portorium)을 말한다. 로마가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고 그 교역을 통해 국부를 증진시켜 감에 따라 제국 10개 대지구로 나누어 각기 1/8세에서 1/40세까지 다른 세율울 적용이 했다. 인도나 아라비아의 사치품같은 경우엔 높은 세율이 적용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이후에는 이렇게 교역되는 모든 상품들에 포르토리움이 부과되었다.

두번째는 소비세(excise)로 역시 국고의 부족을 위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소개되었다고 한다. 역시 모든 거래들에 적용되었지만 많지 않은 1%의 세율을 적용했고 민중의 원성은 높았다고 한다.

세번째가 바로 이탈리아인에 대한 직접세 부활과 관련된다. 이 5%의 상속세를 부과했을 때 원로원을 장악하고 있는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 같다. 받아들이지 않을 때느 토지세와 인두세를 징수하겠다는 암시를 주어 그들을 침묵시킬 수 있었다.

 

네로 황제의 경우는 인기를 위해 관세와 소비세를 없애려고 했다고 하는데 원로원이 그의 관대함은 칭찬하면서도 그 실행은 막았었다고 한다. 로마의 세금은 여러 단편적인 사료들에 나타나지만 특히 토지세의 경우는 정복민과 피정복민 완전한 자유민인 시민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짓는 의미도 있었다. 그래서 몇몇 도시나 혹은 그리스 등이 이로 부터 해방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안토니누스 칙령

 

그러나, 카라칼라는 재정의 부족을 다른 방법으로 채우려고 했는데 속주민들에 부과하는 토지세를 폐지하고 그들에게 로마 시민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을 주었다. 제국내의 모든 자유민은 로마 시민이 된다는 칙령을 내렸다. 하지만, 일률적으로 다른 세율을 올렸다. 개혁이 아닌 개악이었다. 더구나 일부 속주에선 여전히 폐지된 옛날 세금을 새로운 세금과 같이 거두어들였다. 이것은 훗날 성군이 되는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에 의해 경감되지만 쇠락하는 제국은 힘겨워진 국방과 함께 더욱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게 된다. 머지않아 토지세는 물론 인두세와 각종 중세가 로마제국을 도탄에 빠뜨릴 것이었다.


 

 

 

카라칼라 황제의 흉상


 

따라서 기번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는 이 세베루스 왕조를 마무리하는 제6장을 이렇게 마친다.

 

로마와 이탈리아가 정부의 중심으로 존중되는 한은 민족 정신이 고대의 시민들에 의해 보존되고 새로운 시민들도 자연히 흡수가 되었다. 군대의 주요 지휘는 자유로운 교육을 받고 법과 문자의 이저을 잘 배웠고 같은 수순으로 민간적 군사적 영예의 정규적인 과정을 통해 올라간 사람들에 의해 채워졌다. 그 영향과 예가 우리가 부분적으로 제정사 첫 두세기간의 로마군단의 온화한 복종의 공을 돌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 국제(國制)의 마지막 울타리가 카라칼라에의해  짓밟혔을 때 직업적 구분이 점차 계급의 차별로 이어졌다. 내부 속주의 세련된 시민은 더욱더 그들만이 법률가와 정무관에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군대의 보다 거친 사업은 국경의 농부나 야만인에게 버려졌는데 그들은 병영외에는 장소를 전쟁 외에는 과학과 모든 법률을 몰랐고 군사적 훈련에 조차 희박했다. 피묻은 손과 사나운 태도와 절망찬 결단으로 그들은 때로는 제위를 보호하였지만 더 자주 전복시켰다.

 

 

 

 

 

 

  1. -로마의 모든 세금을 포괄한다고 한다, Leonhard Schmitz, A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Antiquities (John Murray, London): p. 1184 [본문으로]
  2. 시오노 나나미(로마인이야기 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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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 조[193-235년]

 

앞서 와 같이 조금 교활한 방법으로 세베루스 조(Severan Dynasty)는 성립되었다. 아마도 초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조, 베스파니시누스 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조에 이은 4번째 왕조이고 비교적 단명의 왕조였다. 그 중간에 마크리누스(Macrinus)[재위 217-218년]같은 경우 1년간 황제 자리를 빼앗겼던 때도 있었다. 세베루스는 죽기 전에 두 명의 아들 카라칼라(Caracalla)[재위 211-217년]와 게타(Geta)[211년]를 공동황제로 올려 놓았는데 카라칼라가 게타를 죽이고 곧 단독 황제가 된다. 이 카라칼라의 경우 물론 동생도 잔혹하게 죽였다.

 

세베루스 조의 가계도
 

 

카라칼라 사후엔 그 제위가 카라칼라의 이종사촌 누이들의 아들들에게로 넘어간다. 그 중 첫 번째로 황제가 된 엘라가발루스(Elagabalus)의 경우는 기번이 비웃어마지 않는 아시아적 우승꽝스런 면모를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단지 이 왕조에서는 마지막 황제인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만이 로마를 구할 인품을 갖추었다. 사실 기번은 이 왕조에 대해서 제정초기의 원수정이란 형태에서 타락한 군사적 전제주의로의 이행이 있었다고 규정했었다. 군 부대에서 그 가족들이 신의 가족으로 숭배되고, 어떤 주화에서는 그의 아들 게타(Geta)가 태양신으로 묘사되는가 하면 그의 묘비명은 현존하는 영이라고 언급되기 까지 했다.[각주:1] 그런 관점에 대한 반증예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예이다. 베리(J. B. Bury)는 만일 그러나 변화가 있었더라도 알렉산더 세베루스에 의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비록 전제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왕조시기에 로마의 체제상 많은 변화가 있었던 전환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기번은 그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다.

 

세베루스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재위시의 행복과 영광을 만끽하면서 그것들을 들여왔던 잔인성은 용서했다. 후손들은 그의 유지와 예들의 치명적인 효과를 겪고서는 그를 단지 로마제국 쇠락의 주요 저자로 간주했다.

 

세베루스는 죽기전에 두 명의 아들 모두를 공동후계자로 생각해서 그들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주어 사상 최초로 로마에 세명의 공동황제가 있게 되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었는데 첫 부인은 갈리아의 총독의 딸이었고 상처후의 두 번째 결혼을 율리아 돔나(Julia Domna)란 시리아(Syria) 여자와 했다. 이 두 후계자들은 여기서 낳은 아들이고 그녀에게는 언니인 율리아 매사(Julia Maesa)가 있었는데 나중에 이 쪽으로 황제가 계승된다. 이들은 태양신을 섬기는 그 지역 사제의 딸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두 후계자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지만 아버지는 똑같이 사랑했다. 그래서, 죽기전에 원로원따위는 무시하고 군대를 잘 다루어야 한다는 충고를 하고 죽었다. 그들의 나쁜 사이에 대해서는 이미 체념을 하고 둘 중에 강자가 약한 쪽을 쓰러뜨리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공평한 사랑을 장자인 카라칼라(Caracalla)는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제위를 동생과 나눌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듯 아버지의 수명을 단축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암살을 기도했고 그의 아버지가 브리튼 원정 중에 자연사했을 때 따랐던 그는 제일 먼저 자신의 독살 요구를 거절한 아버지의 주치의를 죽였다. 세베루스는 그래도 자신이 죽어도 그들의 생모 율리아가 있는 한은 다투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티베리우스역시 어머니 리비아가 살아있는 동안은 동생의 혈족인 아그리피나 모자들에 잔인한 보복까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율리아가 역시 그 역할을 하려고 두 형제를 화해시키려는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 때를 틈타 카라칼라는 동생을 찔러 죽이고는 도리어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원래 잔인한 카라칼라 보다는 게타 쪽을 편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할 수 없이 후계자가 혼자 밖에 안남았으므로 군대는 일단 카라칼라를 따랐고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유언만은 잘 받들어 군대에는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반대자에 대한 잔인함은 부전자전인지라 이제 생전의 게타의 편을 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에 나섰다. 게타의 편이 많았는데 자그마한 혐의도 무자비하게 다루었으므로 규모도 컸다. 게타가 관할했던 속주의 총독들은 모두 죽였으며 전 황족들 코모두스의 마지막 누이, 페르티낙스의 아들, 세베루스의 사촌, 루킬라의 아들들도 죽였다.

 

카라칼라는 많은 면 사치와 오락을 좋아하는 면에서 코모두스와 닮았지만, 한가지 차이는 코모두스가 할렘과 검투장을 오가는 지극히 단조로운 도시생활에 만족한데 비해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러 도시나 전장을 떠돌면서 그러했다는 것이 다르다. 그 역시 어디를 가나 사치나 오락의 축제에 물쓰듯 돈을 썼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가서는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다.

 

그는 전쟁도 좋아했다. 파르티아 정복을 위해서 아버지가 알비누스에게 썼던 속임수를 쓰려 했다. 페르시아 왕에게 결혼동맹을 청해 그 딸과 결혼해 가장 큰 두 제국을 합치자고 속이고나서 그들을 유인해 학살했다. 그러나 그가 원정에 데리고 갔던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에는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카라칼라는 암살당한다. 승진탈락자를 시켜 이 암살을 계획한 장관 마크리누스가 드디어 황제로 선출된다, 카라칼라가 군대에 베푼 호의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이로써 일시 세베루스조가 단절되는 것 같았다.

 

마크리누스가 동방원정을 수행하는 동안 박해받은 카라칼라와 게타의 어머나 율리아 돔나는 자살하고 전황실의 율리아 매사가 그녀의 고향인 에메사(Emesa)로 쫓겨나고 그녀의 두 딸 소애미아스(Soaemias)와 마매아(Mamaea)의 환영을 받는다. 이 때 마크리누스가 군대개혁 등을 요구했던 개혁군주였으나 그로 인해 군대의 불만을 사는데 에메사에 마침 주둔한 로마 군단의 도움을 얻어 이 가문이 마크리누스를 물리치고 황제직을 계승하게 된다. 처음에는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라고도 잘못 알려져 있는 소애미아스의 아들 엘라가발루스(Elagablaus)[재위 218-222년]가 제위에 오른다. 그의 고향의 온갖 동양적인 보물들을 가지고 그가 로마로 개선하는 날 시민들을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에라가발루스는 그 지역에서 숭상하는 태양신의 사제를 말하는 칭호로 그의 로마식 이름은 카라칼라와 같이 안토니누스였다. 이 사치빼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동양적 군주는 로마인들의 비웃음을 받고 자신의 이모인 마매아에게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마매아는 어린 아들 알렉산더 세베루스[222-235년]를 황제로 세우고  사실상 최초의 여군주가 되다. 기번이 그나마 찬양하고 있는 이 알렉산더 세베루스에 의해 세베루스 조간의 다소 타락했던 로마가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그는 군대의 방종된 모습을 꾸짖고 로마의 군율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 위엄을 보였지만, 역시 원정중 병사들에게 야만족에게 평화를 산 겁많은 동양 군주란 비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사후 점차 로마의 혼란은 내부에서 외부로 확산되고 수많은 단명황제들이 등장하며 그들 중 적잖은 수가 군인황제들이 된다.



  1. 로마사, 하이켈하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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