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언제나 자기 노예들이 부화와 갈등 속에 있게 하였다. 그들 사이의 화합은 그에게 의혹과 두려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사형죄의 혐의자를 심리할 때 전 동료노예들 앞에서 행했으며 유죄가 확정되면 죽였다. 그러나, 그가 돈벌이에 재미를 붙이자 농업은 수지맞는 일보다는 여흥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재산을 안전하고 확실한 사업에 투자하였다. 연못 주변 습지, 온천, 의류업지구, 목축지나 숲 등 큰 이익이 있는 곳이면 무엇이든 투자했고, 그의 말마따나 '유피테르(Jupite)에게 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명예스럽지 못한 곳에도 많이 돈을 대부해 주었는데 선박업 같은 것들이다. 대개 이러했다. 대출자들을 모아 큰 단체를 꾸린 후 50명 정도가 되어야 안심하고 끼어들어서 퀸티오(Quintio)라는 그의 해방노예가 다른 자신의 피후견자를 모아 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위험은 크게 줄인 채 수익을 크게 했다. 돈을 원하는 노예에겐 돈을 빌려주었는데 노예들은 그래서 아들을 팔았다. 자비로 일 년간 그들을 가르친 후에는 다시 팔았다. 그 중 다수를 자신이 보유하려 했고 그 경우 아이에게 입찰된 최고가를 빚으로 매겼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도 이런 경제에 신경쓰게 했다. 그래서 가산을 축내는 것은 과부나 할 일이지 남자가 할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카토의 연설 중 격렬했던 중 심했던 것에 자기 마지막 재산이 상속분 보다 증가했을 때 만큼 신에 견줄 만큼 존경받을 수 있고 영예로운 것이 없다는 내용이 있다.

그가 이렇게 잘 살고 있을 때 아테네에서 로마로 사절단이 왔는데 아카데미파의 카르네아데스(Carneades)와 스토아파의 디오게네스(Diogenes)라는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아테네인들을 위해 500 탤런트를 벌금으로 부과한 어떤 결정을 바꾸려하고 청원하려 했다. 오로포스(Oropus) 사람들이 그 고소를 제기했고 아테네인들은 궐석한 상태로 시퀴온인들이 그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이들 철학자들이 도착하자, 시내 젊은이들 중 가장 학구적인 이들이 다투어 맞으러 나가 열성 청중이 되었다. 무한한 힘을 지닌 카르네데스의 매력은과 그에 못지 않은 힘은 동정적인 거대 인파를 모아 도시를 가득 채웠으며 찬양하는 소리가 강한 바람처럼 휘날렸다. 놀랄 재능을 가진 한 그리스인이 마술적 달변으로 모든 반대를 무장해제하며 시내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열정을 불어넣어 그 결과 다른 여흥을 단념하고 철학에만 '열중'한다는 보고가 멀리 퍼졌다. 다른 로마인들은 이에 기뻐하여 젊은이들이 그리스 문화를 익히고 이런 살마과 함께 하는 것을 반겼다.

그러나, 카토는 토론열이 도시를 덮치는 바로 이 때 젊은이들이 그들의 야망의 방향을 용맹스런 행동이 아니라 말로 하는 명성에 쏟을까 두려워했다. 방문철학자들의 명성이 시내에서 높아지고 원로원 앞에서 그들의 연설이 가이우스 아킬리우스(Gaius Acilius) 같은 저명한 사람에 의해 통역되는 것을 보고 카토는 핑계를 대어 이들 모두를 도시에서 쫓아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원로원으로 가서 원하는 것을 용이케 확보 못하는 이들로 된 사절단을 오래 머무르게 하는 것을 두고 정무관들을 책망하였다. 카토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튼 저튼 빨리 결정을 해서 그들의 제안을 표결에 부쳐서 그들의 학원과 강의를 그리스의 자식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로마의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법과 정무관에 귀기울여야 하니까요."

이런 일은 순전히 카르네아데스 개인에 대한 혐오 때문이지 철학 자체나 그리스풍의 문화나 학습에 대한 것 일반을 미워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소크라테스(Socrates)를 관습을 파괴하고 시민들을 꾀어 법에 반하도록 하여 자기 나라의 참주가 되려고 획책한 수다쟁이라고 했다. 그는 하데스 지옥의 미노스 앞에서 예술을 연마하는 것 처럼 늙어줄을 때까지 배울 자들이라며 이소크라테스(Isocrates) 학파를 조롱했다. 아들에겐 그리스문화에 대해 편견을 심어주면서 그리스 학식에 감염될 때 로마의 패권이 깨질 것이라며 예언자라도 된 듯 말하였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마르쿠스 카토>, 21-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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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를 탄압하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3차 포에니전쟁을 일어나게 했던, 바야흐로 로마가 제국으로 발달하던 시절을 문필가, 정치인, 군인으로 살았던 보수주의의 화신 마르쿠스 카토는 문화적으로는 그리스풍의 침투를 안간힘을 써서 막으려는 국수주의자였다. 전쟁에서 한니발을 물리친 친그리스파 스키피오를 탄핵해 울분 속에 죽게했던 카토는 한편으로 이렇게 돈버는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출세 후에도 가난한 농민으로서의 생활습성은 버리지 못했다. 일견 그의 탐욕은 한국의 보수와도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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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진 모든 덕들 중에 대중에게 가장 큰 인상을 준 것은 정의로움이었는데, 그것은 가장 지속적이면서 널리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가난했고 민중의 한 사람일 뿐이지만, '의인(義人)'이란 군주적이며 신적인 별명을 획득했다. 이 덕은 결코 왕이나 참주들이 열망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의 함락자'나 '벼락' 혹은 '정복자' 또는 '독수리' 혹은 '매'로 부리길 원하며 덕보다는 폭력과 권력에 의지한 명성을 닦으려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얻으려고 하는 신성(神性)이란 세가지 인간에 대한 우월한 것이다. 바로 불멸성, 힘, 덕 세가지인데 가장 존중되는 것인 동시에 가장 신성한 것이 바로 덕이다. 단순한 진공이나 궁극적 요소들도 불멸성을 가지며, 커다란 힘은 지진과 천둥 그리고 소용돌이나 홍수로 시현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정의로움은 이성적인 힘의 수련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품는 세가지 감정인 질투, 경외, 존경을 생각한다면 인간은 불멸성과 영원성에 관해 신들을 부러워하고 주권과 권력으로 인해 두려움을 품고 정의로움에 대해 존경을 갖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이 바라는 것은 인간 본성으로 닿을 수 없는 불멸성과 운명의 손에 있는 힘인 반면, 정작 우리의 능력내에 있는 유일한 신성함인 덕에 관해서는 그 중 가장 아래의 것으로 취급한다. 권력과 재산을 쥔 인간이 신성해지기 위해서는 정의로와야 하며 그런 인간이 불의하면 짐승과 같아 진다.

이제, 이런 별명으로 인해 처음에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인기를 얻게 되었지만, 후에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가 대중들에게 사적으로 모든 일을 가려 법정의 일을 처리하며 아무도 몰래 자신을 위해 사실상 군주제를 획책하며 무장 경호대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퍼뜨리자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민중은 이 때 그들의 승리에 크게 우쭐해 있어서 자신들을 넘어서는 명성에 대해서 싫어하였다. 그래서 방방곡곡에서 그들이 시내에 모여 아리스티데스의 명성을 싫어하여 참주제에 대한 우려라는 이유로 그를 도편추방했다.

도편추방 판결은 부정에 대한 징법이 아니라 억압적 권력에 대한 제한이었다. 그러나, 이는 질투많은 영혼의 자비로운 쫓아내기 굿으로 심각한 상처를 주기 보다는 10년간의 추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시될 만한 이가 이 형벌을 받받을 때 이가 중단되었는데 휘페르볼로스(Hyperbolus)가 그 마지막이 되었던 것이다. 알키비아데스(Alcibiades)와 니키아스(Nicias)가 권력을 잡고 싸웠을 때 민중이 이 투표를 행하자 이 두 사람은 도리어 자신들의 반대당에 대해 연합해 휘페르볼로스가 걸리도록 했다. 민중은 이 형벌이 잘못 오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화를 내어 이를 폐지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아리스티데스>, 6-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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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함이라는 당시 정치인이 좀처럼 가지기 어려운 미덕을 가졌던 아테네의 의인 아리스티데스는 페르시아군의 침입 때에는 테미스토클레스와 힘을 합쳐 그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 불과 수년 전만 해도 그와 반대되는 성향의 또 다른 정치인인 테미스토클레스의 교활한 정치공작에 걸려 도편추방되는 신세였다. 당시 아테네는 인기있고 권력이 있는 정치인들은 선동가들과 질투와 분노를 품은 민중에게 번갈아가면서 추방되기를 계속했었다. 그러나 최후 만큼은 그는 적어도 테미스토클레스 만큼 불행하지는 않았다.

 

 

아리스티데스에게 투표된 도편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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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그들 중 어느 쪽에도 죽음에 관해서는 박수를 쳐줄 수가 없다. 아니, 나는 그 최후의 재난적 상황에서 보인 그들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화가 난다. 나는 한니발(Hannibal)을 존경한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전투 중에 그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을 높이 세워 적을 물리치다가도 퇴각 나팔이 울리자 부하들에게 가자고 하고 자기도 점잖게 물러난 "퀴로파이디아(Cyropaedeia:크세노폰이 지음 책)"에 나오는 크뤼산테스(Chrysantes)도 좋다. 펠로피다스(Pelopidas)는 그래도 다소 변명할 만한 것이 있다. 

언제나 전투에 들뜬 그인 만큼 복수하고 싶은 정당한 분노에 의해 그리 된 것이기 때문이다. 장군에게 최고로 중요한 것은 승리하는 것과 목숨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죽어야 한다면'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말처럼 '용기있게 삶을 끝내'야 한다. 그 때는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한 것이다. 분노로 일어난 점만을 빼면 펠로피다스는 그의 승리 쟁취는 폭군들의 죽음을 의미했고 이는 그의 행동이 비이성적인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렇게 더 훌륭하고 영광스런 행동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켈루스의 경우는 대단한 압박이 있는 것도 아니며 위험에 순간에 판단을 흐릴 열정도 없이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 장수가 아닌 척후병에나 어울리는 죽음을 맞았다. 더구나 그는 다섯 번 집정관을 역임하고 세번 개선식을 치루어 카르타고를 위해 돈몇푼에  생명을 팔아치운 이베리아인과 누미디아인 병사들에 맞서 그 왕들에게 얻은 수많은 전리품을 가져온 사람이었다. 용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가장 큰 영향력과 빛나는 명성을 가진 로마인이 프레겔라이(Fregellae)족의 척후대 속에서 숨졌다면 그들은 그 성공을 받아들이기 꺼림찍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들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그들 자신과 용기에 반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분노와 항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덕을 헛되이 희생시켰다. 마치 죽음이란 자신에게만 관계되고 조국과 친구나 동맹과는 무관한 것처럼 말이다.

사후, 펠로피다스는 동맹국에 의해 마르켈루스는 적에 의해 그들이 쓰러진 자리에 묻혔다. 전자가 부럽고 행복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호의에 대한 감사를 바치는 선의보다 더 위대한 것이 해입은 적의 용기를 존경할 수 있는 미움이다. 이 경우 그것만이 영예를 받을 만 한 반면 개인적 관심과 필요성이 탁월함 이상으로 존중되었다. 한쪽은 영예만이 가치있지만 다른 쪽은 개인적 이해과 필요가 탁월함보다 더 생각된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펠로피다스와 마르켈루스의 비교>,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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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는 지도자도 마찬가지지만 장수로서 쉽게(자신의 경솔로 인해) 목숨을 잃게 하는 것에 대해 펠로피다스와 마르켈루스를 비난했고 한편으로 그런 면에서 한니발의 신중함을 칭찬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전기는 없지만 로마의 창과 방패였던 마르켈루스와 파비우스의 전기를 통해 한니발의 활약과 지략도 알 수가 있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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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켈루스(Marcellus)는 그의 전군을 몰아 쉬라쿠사로 갔다. 그 근처에 병영을 차리고 도시로 사절을 보내어 레온티니(Leontini)에서 일어난 일을 알리라 했다. 그러나 이는 소용이 없어서 쉬라쿠사 사람들은 들으려도 하지 않았다. 권력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는 수륙 양면으로 도시를 공격하려 했다. 아피우스(Appius)가 육군을 이끌고 그 자신은 60척의 오단노전함으로 된 함대에 발사기 등 갖가지 무기들을 싣고 가서 8척의 갤리선으로 지지받는 판에 포를 세우고 성벽을 향해 가면서 이 무기와 자신의 명성을 신뢰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에 눈과 장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것이 그가 진지한 노력을 들여서 할 일로 생각한 것은 절대 아니다. 대부분은 흥미를 위해 한 기하학 작업의 부수물일 뿐이었다. 지난 날 히에로(Hiero) 왕이 그의 기술을 추상적 관념에서 실질적인 일로 바꾸기를 열렬히 바래 설득해 낸 것이며, 그의 취미를 다소 보통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쪽으로 돌려낸 것이었다.

지금 무척 선망과 존경을 받는 기계제작술에 관해서는 처음에 에우독소스(Eudoxus)와 아르퀴타스(Archytas)라는 기하학을 정교하게 다듬어 말과 도해로는 증명이 불가능 한 문제에 기계에 의한 감각에 익숙한 예시로 뒷받침을 하게 한 이들에게 처음 유래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기하적 그림에 대해 필수 요건인 두 기하평균선을 찾는 문제에서 두 수학자는 기계 장치 배열에 의지한 직선과 곡선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플라톤(Plato)은 이에 화를 내며 기학학의 순수한 우수성을 타락시킨다며 그들에게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는 무형의 기하학이란 추상적 사상에서 등돌리고 감각계로 떨어지는 일이어서 훨씬 천하고 육체적 노동을 요하는 목적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기계제작술은 기하학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무시된 채 군사기술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히에로의 친척이면서 친한 관계인 아르키메데스 조차 마땅한 힘이라면 어떤 무게도 들어올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편지를 쓰고 있으며 그의 시현에서 같은 원리에 의해서 또다른 세계가 존재해 그곳에 갈 수 있다면 그는 이 세계도 움직일 수 있노라고 뽐냈다. 놀란 히에로는 그의 제안을 실행에 옮기라고 애걸하면서 작은 힘으로 거대한 무게가 옮겨지는 것을 보여달라고 졸랐다. 아르키메데스는 왕의 함대에서 세척의 배를 많은 인부들을 동원 해안으로 끌어다 놓고 승객과 짐을 싣고, 자신은 수고 없이 멀리 앉아 복합도르레를 작동해 자신에게 물위로 미끄러지듯 끌려오게 했다.

이에 놀라고 그의 기술의 힘을 이해한 왕은 설득을 통해 공성전에 쓰일 수 있는 각종의 공격 및 방어 무기를 준비하도록 했다. 이는 그에게 전혀 익숙치 않았는데, 지금 껏 그는 전쟁과 상관없이 평화로운 향연 속에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현재는 그의 기구가 쉬라쿠사에 세워져 그 제작자가 감독했다.

로마인들이 수륙으로 공격할 때 쉬라쿠사인들은 공포로 넋을 잃었었다. 그런 힘에 맞설 것은 없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가 자기 기계를 사용해서 공격자들의 지상군에 무거운 돌 등을 쏘아보내니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그들 진영에 떨어져 대형을 헤집어 놓았다. 같은 시각에 거대한 기둥이 성벽에서 배로 내려졌는데 그 때문에 그 중 몇몇은 거대한 하중을 못이기고 가라앉았다. 다른 배들은 이물이 쇠갈고리에 잡히거나, 기중기의 부리에 낚여 공중으로 올려진 후 깊이 내동댇이 치거나 도시 내로 이리 저리 끌려와 돌려지고 성벽 절벽에 떨어뜨려져 그 안에 사람이 탄체로 부숴지고 인명이 살상되었다.

빈번하게, 배가 물에서 허공중으로 들어올려져 매달린 채 이리저리 돌곤 하는 것이 위험스런 장관이 연출되었다. 벽에 떨어지거나 잡는 부분이 미끄러질 때면 선원들이 사방으로 떨어졌다. 마르켈루스가 배로 만든 다리에 가져간 공성기는 그런 이름을 가진 하프 비슷한 악기와 닮아서 '삼부카(sambuca)'라고 했는데, 성벽에 처음 접근시킬 때 어느 정도 거리에서 10 탈렌트의 무게를 가진 돌이 한번 두번 세번 떨어지는 동안 공성기의 기초를 부수고 틀을 흔들고 판을 떼어냈다. 마르켈루스는 이에 당황하여 자기 배를 될수 있는 대로 빼고 지상군을 후퇴시키라고 명했다.

그 후, 전략회의에서 가능하면 밤에 공격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아르키메데스가 기계에 쓰는 밧줄이 그들 생각으로 머리 위로 멀리 보내긴 해도 근접시는 닿지 않아 소용없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는 오래 전부터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 짧은 사거리로 쏠 수 있게 했는데 벽의 많은 작은 구멍에 스콜피온(scorpion)이라 불리는 짧은사거리 발사기를 적 모르게 비치하고 있었다.

로마인들이 몰래 성벽으로 다가갔을 때 즉시 거대한 화살세례를 받았다. 무거운 돌들이 거의 수직으로 떨어졌고 벽 곳곳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그들은 후퇴했다. 이제 거리가 생기자 또 화살세례가 있어서 엄청난 사상이 있었고 배들은 서로 좌충우돌하는데도 적의 방향을 몰라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아르키메데스가 벽 뒤 가까이 공성기를 세워서 로마인은 신을 상대로 싸우는 것 같았다. 무수한 재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왔다.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달아나 자기의 책사와 공병기술자와 농담을 나눴다.

'편안히 앉아서 우리 배를 컵처럼 사용하고 우리 삼부카를 쓸어버리는 기하학의 브리아레우스(Briareus)와 그가 우리에게 한번에 쏜 많은 화살들과 싸우는 것은 그만 합시다. 백개의 손을 가진 전설속 괴물을 능가하는 구려.’

실상 다른 쉬라쿠사인들은 단지 아르키메데스의 계획을 실현하는 몸으로 그의 영혼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 다른 무기들은 놀고 있었고 그가 만든 것만 쓰였떤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마르켈루스>, 14-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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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로 알려진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가 마르켈루스의 전기에 나온다. 그는 쉬라쿠사 출신으로 마르켈루스의 로마군이 이 곳을 함락할 때 어느 로마 병사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플루타르크의 전언으로는 그가 만든 공성기로 인해 마르켈루스가 함락까지 크게 고전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 내용을 들어보면 헐리우드 스펙터클로나 구현될 만한 이야기가 많아 과장이 심한 것 같다. 주로 정치인이나 장군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과학기술자가 상당한 분량으로 설명되는 것이 바로 이 아르키메데스에 대한 설명이다. 동양에서 이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에 방어전에 주력해 직접 아르키메데스 처럼 방어무기를 만드는데 종사했던 묵가의 쇠퇴를 생각하게 한다. 아르키메데스의 죽음 후에 "로마의 창" 마르켈루스 자신도 결국 한니발 전쟁 중에 한니발에 의해 전사했다. 쉬라쿠사는 멸망하고 시칠리아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아르키메데스의 방어전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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