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서방의 복속

 

[서방의 로마화]

역사적 경로가 정치적 이기심의 시시한 단조—이는 원로원의사당에서 수도거리에서 있던 전투들이다—에서 로마의 첫 군주가 그나이우스냐 가이우스냐 마르쿠스냐로 불릴지에 관한 문제 보다 더 중대한 문제로 전환하려 할 찰나—그 영향이 세계의 운명에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는 사건의 문턱—에, 우리는 이제 잠시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로마인이 지금의 프랑스에 대한 정복한 것과 독일과 영국의 거주민과 접촉한 것을 관점이 세계사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도록 하는 것을 역시 허용할 수 있다. 한 국가로 성장해 온 민족이 정치적 미성년자로 있던 이웃을 흡수한다는 것과 문명화된 민족이 지적미성숙에 있던 이웃을 흡수한다는 법에 따라 보편적으로 유효하고 중력법칙만큼이나 자연법칙인 이 법 덕에,이탈리아 국민(문명화가 외적이고 불완전한 방식이긴 하나 우월한 정치발전과 우월한 문명화를 동시에 결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국민)은 멸망을 눈앞에 둔 운명의 동방의 그리스인들을 복속시키고 그보다 낮은 등급의 서방의 민족들—리비아인들(Libyans), 이베리아인들(Iberians), 켈트족(Celts), 게르만족(Germans)—이 이주민들을 통해 밀려나게 했다. 잉글랜드가 같은 권리로 아시아에서 뛰어나나 정치적으로 무능한 경쟁문명을 복속하고 아메리카와 호주에서 광범위한 야만국들을 상대로 그 국민성에서 고귀한 인상을 남겼고 그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로마귀족정은 이 업무수행할 예비조건인 이탈리아 통일을 성취하였다. 그 과제를 자체로 해결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외의 정복은 언제나 단순 필요악이나 국가의 범위외의 재정적 소유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최고의 목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고 정력적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로마의 민주정 혹은 군주정—왜냐면 둘은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의 불멸의 영예인 것이다. 환경이란 불가항력이 그 길을 놓은 것으로 원로원이 그 의지에 반해 동방은 물론 서방에서의 로마 미래 지배역의 기초를 확립한 것, 속주들로의 로마인의 이민—공적인 근심거리로 온 것을 의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방 지역에서는 어쨌든 상위문화의 개척자로서 온 것—이 본능의 문제로서 추구한 것, 이것들은 로마 민주정의 주조자인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가 정치인다운 명확함과 확신으로 이해하여 실행하기 시작했던 것들이었다. 새로운 정책의 두가지 기본적 관념—희랍적일 때 로마권력 아래 그 영토를 통합하고 희랍적이지 않을 때는 식민화한다—은 이미 그라쿠스 시대에 실제적으로 아탈루스(Attalus)의 왕국을 몰수할 때와 플라쿠스(Flaccus)가 알프스이북을 정복할 때 인식되었던 바다. 하지만 유력한 반작용이 다시 한번 방해했다. 로마국가는 철저한 점령이나 적당한 경계없이 나라들의 황폐한 집합체로 남았다. 스페인과 그리스화된 아시아 지역의 소유는 해안을 따라 로마에 속하지 않은 경계지대를 겨우 가진 넓은 영토로 모국에서 분리되었다. 아프리카 북해안에 카르타고(Carthag)와 키레네(Cyrene)의 영지만 당랑 오아시스 같이 점령되었다. 종속된 영토조차도 많은 부분 특히 스페인에서 이름만 로마에 종속된 상태였다. 그들 영역에 집중하고 주변영지 정리하는 것에서 정부측에서 한 일은 절대적으로 없었고, 함대의 쇠퇴가 드디어 먼 소유지들 간의 마지막 묶음을 끊었다. 민주주의파는 분명히 그 고개를 들자마자 그라쿠스적 정신—특히 마리우스가 이 생각을 아꼈다—으로 대외정책을 주조하기 시작했다만 키를 제대로 쥘 수 없는 상태라 계획은 충족되지 못하다가, 민주주의파가 684년[BC70] 술라체제의 전복 후 복귀해서야 이 관점에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지중해에 대한 그들의 주권이 우선 회복되었는데 이런 것은 로마처럼 한 국가에는 생존의 중대문제였다. 동쪽으로는 더우기 유프라테스(Euphrates)의 경계가 폰투스(Pontus)와 시리아(Syria) 속주들의 병합으로 보호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알프스 건너로는 북쪽으로나 서쪽로 로마 영토의 주변정리를 하고 동시에 그곳에 희랍문명을 위한 그리고 이탈리아 종족의 혈기와 열정을 위한 처녀지를 얻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카이사르 정복의 역사적 중요성]

이 과업을 수행한 것이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였다. 갈리아를 단순히 카이사르가 임박한 내전을 위해 자신과 자기 군단이 훈련하는 연병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한 개 실수 이상이며 역사를 지배하는 성령(신성한 정신)에 대한 테러다. 서방의 복속은 카이사르에게 알프스너머의 전쟁에서 후대 그가 세운 세력의 기초를 놓는다는 목적에 한 수단이었을지라도, 그것은 수단이 그 자체로 목적도 되는 천재적 정치인의 특권이다. 카아사르는 물론 그의 당파를 위해 군사적 힘을 목적으로 두었지만 그 당원으로서 갈리아를 정복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계속되는 게르만족의 침입의 위협에 맞서 로마 세계의 평화를 수호할 댐을 쌓아야 하는 직접적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 중한 목표도 카이사르에게 갈리아가 정복된 최고의 궁극적 이유는 아니다. 로마시민들에게 옛 고향은 너무나 좁아 쇠퇴의 위기 중에서, 원로원의 이탈리아 정복 계획은 이들을 파멸에서 구한 것이다. 이제 이탈리아란는 집이 너무 협소하여졌다. 다시 한번 국가가 방식은 비슷하나 더 대규모로 반복되는 동일한 사회악들 아래 신음하였다. 카아사르를 알프스 너머로 이끈 것은 천재적 발상이자 거대한 희망으로, 곧 그의 동료시민들에게 새로운 무한경계의 집을 마련하여 국가를 두번째로 더 넓은 기초 위에서 재생시키려는 이상과 확신적 기대였던 것이다.

 

[스페인의 카이사르]

어떤 의미에서 카이사르가 693년[BC61] 먼스페인에서 수행한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서방정복의 목적을 예견할 수 있기도 하다. 스페인이 로마인을 따라온 이래 그 서해안은 칼라이키족(Callaec)에 대한 데키무스 브루투스(Decimus Brutus)의 원정 이후까지 실질적으로 독립상태였고[각주:1], 북해안은 숫제 발를 딛이지도 못했다. 복속된 속주들이 그런 곳으로 부터 노출되어 일어난 노략질은 스페인의 문명화와 로마화에 적지 않은 장애였던 것이다. 이에 맞서 서해안을 따라 카이사르는 원정의 방향을 잡았다. 북으로 타구스(Tagus) 강과 경계한 헤르미니우스 산맥(Herminian mountains: 세라 다 에스트렐라Sierra de Estrella)을 가로질렀다. 주민들을 정복해 부분적으로 평지로 옮긴 후 그 나라를 도루(Douro) 강 양안으로 축소시키고 반도의 북동지점에 도달했다. 거기서 가데스(Gades)에서 온 소함대의 지원으로  브리간티움(Brigantium: 코로나Corunna)을 점령했다. 이에 의해 대서양 인접 종족들, 루시타니아인(Lusitanian)과 칼라이키인(Callaecian)들이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였으며, 정복자측에선 즉시 로마에 지불할 세공을 줄이고 공동체의 재정문제를 맡음으로써 더 관용적으로 속민들의 위치를 정하는데 주의하였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장군이자 정치인의 군사적이고 행정적인 데뷔에서 후에 더 큰 무대에서 입증한 같은 재능과 지도자적 이상을 분별해 낼 수 있긴 하지만, 이베리아(Iberia) 반도 내의 그의 대리는 깊은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나 잠정적이 것이었다.  특히 강한 신체적 민족적 특성 때문에 상당기간 꾸준하게 계속 유지된 행동 외에는 거기에다 지속적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Tätigkeit hier eine dauernde Wirkung äußern konnte.]

[갈리아]

서방에서의 로마의 발전상에 더 중요한 부분은 피레네(Pyrenee) 산맥과 라인(Rhine) 강,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로 펼쳐진 나라 아우구스투스 시대이래로 켈트인의 땅—갈리아(Gallia)—으로 특히 호칭된 나라에 그 운명이 유보되어 있었다. 켈트인의 땅이란 엄밀히 어떤 때는 더 좁고 다른 때는 좀 더 넓게 볼 수 있는 말로, 그 나라는 아우구스투스 이전에는 민족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이유로 카이사르가 696년[BC58] 그의 도착시에 만났던 아주 이질적인 이 국가의 분명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

 

[로마속주 갈리아]
지중해 위에 있는 이 지역은 론강 서편에 랑그독(Languedoc)을 그 동편에 도피네( Dauphine )와 프로방스(Provence)를 아우르면서 60년간 로마의 한 속주였는데, 로마의 칼은 이 곳을 휩쓴 킴브리아족의 침공 이래 거의 쉴 날이 없었다. [전쟁과 반란] 664년[BC90], 가이우스 카일리우사(Gaius Caelius)가 살리에스(Salyes)족과 아쿠아이 섹스티아이(Aquae Sextiae) 쯤에서 싸우고, 674년[BC80] 가이우스 플라쿠스(Gaius Flaccus)[각주:2]가 스페인으로 진군할 때 다른 켈트 주의 민족들과 싸웠다.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총독 루키우스 만리우스(Lucius Manlius)가 피레네산맥 너머 그의 동료들을 원조하려고 서두를 때 일레르다(Ilerda: 지금 레리다Lérida)에서 패해하여 돌아오는 귀국 도중에 로마속주의 서방 이웃들이라 할 아퀴나티아(Aquitani)족에게 두번째로 패배당하였을 때(676년 쯤[각주:3]), 이는 피레네산맥과 론강 사이의 속주민들의 일반적 봉기에 불을 집힐 것처럼 보였다. 폼페이우스는 칼로 반란의 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칼로 길을 뚫고[각주:4], 반란의 벌로 볼카아 아레코미키(Volcae-Arecomici)족과 헬베족(Helvii)의 영토(가르와 아르데슈주 주: Dep. Gard und Ardêche)를 마실리족(Massiliot)에게 넘겨주었다. 총독 마니우스 폰테이우스(Manius Fonteius:678-680[BC76-74])는 이런 계획을 실행하였고 보콘티족(Vocontii: 프랑스 드롬주)을 정복하여 반도들에게 마실리아(Massilia)를 보호하고 그들이 공성중던 그곳의 로마수도 나르본(Narbo)을 해방함으로써 속주의 평화를 회복하였다. 스페인전쟁의 고통의 분담[각주:5]과 로마인의 공식 비공식 수탈이 갈리아 속주들에게 가져다 준 재정난은 절망과 함께 평온하게 놔두지를 않는 것이었다. 특히 나르보에서 가장 먼 알로브로게스족의 마을은 항구적 소요에 있어던 점은 가이우스 피소(Gaius Piso)가 688년[BC66]에 이룬 "평화구축"은 물론 로마에서 알로브게스의 사절단이 691년[BC63] 무정부주의자음모에서 한 행동으로[각주:6] 뒷받침되거니와 또 후에는 (694년[BC61]) 이 절망적 전쟁 속에서 알로브로게스의 지도자 카투그나투스(Catugnatus)의 공개적 반란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처음 선전하였으나 솔로니움(Solonium)에서 영광스러운 저항 후에 총독 가이우스 폼프티누스(Gaius Pomptinus)에게 정복되었던 것이다.   

[경계]

이 모든 충돌들에도 불구, 로마 영토의 경계는 실질적으로 별 진전이 없었다. 폼페이우스(Pompeius)가 세르토리우스군의 잔당을 정착시킨 루그두눔 코페나룸(Lugudunum Convenarum)[각주:7], 그리고 톨로사(Tolosa)와 비엔나(Vienna)와 제네바(Genava) 들이 여전히 서쪽과 북쪽을 향하는 가장 먼 거리의 로마 마을이었다. [로마와의 관계] 그러나 동시에 모국을 위한 이와 같은 갈리아 소유의 중요성이 끊임없는 증대되는 중이었다. 이탈리아에 친숙한 빛나는 기후, 비옥한 토양, 브리타니아까지 상업항로가 열린 유리한 위치의 크고 부유한 지역, 모국과의 수륙으로 쉬운 교통이 남부 갈리아에게 이탈리아를 향해 그 중요성을 급속히 더해갔는데, 이는 다른 소유지들 예컨대 스페인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시기 정치적 난파를 당한 로마인들이 도피처를 특히 마실리아(Massilia)에 차리면서 한번 더 이탈리아의 문화와 사치를 거기에 세우자, 이탈리아로 부터 자발적인 이민이 점차로 더 론강과 가론강에 매혹되었다. "갈리아 속주"란 카이사르 도착 10년 전에 그려진 풍경으로도 "상인들로 가득찼고 로마시민들로 북적댁 있으며 갈리아의 토민은 로마인의 간섭없이 어떤 사업도 하지 못하고 갈리아에서 도는 모든 동전들도 로마시민의 회계장부를 거친다"는 것이다. 같은 묘사에 나르보(Narbo)의 식민가들 외에도 경작을 하고 가축을 기르는 로마인들이 다수 갈리아에 거주하였다 하며,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로마인에 의해 소유된 속주 토지 대부분이 마치 아메리카의 초기 시대 영국 소유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 처럼 이탈리아에 사는 고위 귀족의 손에 있어 농민과 목축업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사환—노예나 해방노예—으로나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로마화 발단]

이런 환경에서 문명화와 로마화가 얼마나 급속히 토민들 중에 퍼졌는지 이해하는 것은 쉽다. 켈트족들은 농경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주인들은 검과 쟁기를 바꾸도록 강제하였으며 알로브로게스족 주민들이 부분적으로 이에 거세게 저항한 것은 아주 신뢰할 만하다. 이전 시기 희랍주의 문화도 일정 정도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고급문화 요소, 포도와 올리브 경작[각주:8]에 대한 그리고 문자사용에 대한[각주:9] 돈의 주조에 대한 자극이 마실리아에서 들어왔던 것이다. 희랍문화는 이 경우 로마인들이 보류했다고 볼 수 없다. 마실리아는 그들에게 통해 잃은 것보다 영향 받은 바가 많았으며 심지어 로마시기에 조차 그리스 의사와 수사학자들이 공공연히 갈리아 주들에 고용되었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로 남부 갈리아의 희랍주의는 로마인에 의해 이탈리아에서와 같은 것을 획득했다. 뚜렷하게 희랍문명은 라틴-그리스 혼성문화를 주었고, 이는 거기서 곧 대거 개종자들을 만들어 냈다. 남부 갈리아의 거주민으로서의 "토가걸친 갈리아인"은 이미 로마화가 종료된 후자와 같지 않았지만, 북부 지구에 아직 복속되지 않은 "장발의 갈리아인"과는 뚜렷이 구분되었다. 그들 중에 자연스럽게 된  세미컬춰(semiculture)가 야만스러운 라틴어에 대한 조롱 소재를 충분히 주었으며, 민중들은 틀림없이 "토가와의 관계"로 켈트 후손이라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형편없는 라틴어는 먼 알로브로게스인들 조차도 로마당국과 거래하고 통역없이 로마법정에서 할 수 있게 했다. 

이들 지역의 켈트계 그리고 리구리아계 인구가 그 민족성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희망없는 반란으로 충분히 증명되는 불관용성으로 대표되는 정치경제적 억압 속에 고통받으면서, 토착인구는 우리가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발견하는 똑같은 고급문화의 자연수용과 나란히 나아갔다. 아쿠아이 섹스티아이(Aquae Sextiae) 나아가 나르본은 상당한 도회였는데 아마도 베네벤툼(Beneventum)과 카푸아(Capua)와 나란히 거명되었으며, 최고로 조직되고 더 자유스럽고 자위능력이 최고였으며 로마의 종속된 그리스 도시 중 가장 강력한 마실리아는 로마보수파가 아마 좋은 도시 체제의 모범으로 지목하였던 철저한 귀족정 아래서 로마인에 의해 상당히 넓혀진 중요 영토와 무역권을 소유하면서 레기움(Rhegium)과 네아폴리스(Neapolis)가  베네벤툼과 카푸아에 그러한 것과 같이 라틴계 소도시들과 병립했다.

 

 

 

 

 

 

 

  1. V. IV. Aggregate Results [본문으로]
  2. IV. IX. Spain [본문으로]
  3. V. I. Renewed Outbreak of the Spanish Insurrection [본문으로]
  4. V. I. Pompeius in Gaul [본문으로]
  5. V. I. Indefinite and Perilous Character of the Sertorian War [본문으로]
  6. V. I. Indefinite and Perilous Character of the Sertorian War [본문으로]
  7. V. I. Pompeius Puts and End to the Insurrection [본문으로]
  8. IV. II. Scipio Aemilianus [본문으로]
  9. 예를 들어, 보콘티족 주(Vocontian canton)인 베종(Vaison)에서 발견된 그리스 알파벳으로 기록된 켈트어 비문이 발견된 것을 들수 있다. —σεγομαρος ουιλλονεος τοουτιους ναμαυσατις ειωρου βηλησαμισοσιν νεμητον—. 마지막 단어는 "신성(神性)함"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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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폼페이우스와 동방

<해적을 소탕하는 폼페이우스> 이미 우리는, 687년[67BC] 초에 폼페이우스(Pompeius)가 무제한급의 권력으로 해적들에 대해 전쟁업무에 착수했을 때 동방에서 수륙상으로 로마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속한 광대한 지역을 13개 지구로 나누고 각 지구에 한 명의 부관(lieutenants)을 배치해 인력과 배를 준비하게 하고 해안을 수색해 해적선을 나포하거나 동료의 그물로 몰아넣는 일을 시작했다. 가용한 전선(戰船) 중 양호한 것들 로도스 선박이 그러했는데 이것들을 몸소 타고 년초부터 바다로 가서 주로 이탈리아로 오는 공급선을 재정비할 생각에 시칠리아, 아프리카, 샤르데냐의 바다를 휩쓸고 다녔다. 동시 그의 부관들은 스페인과 갈리아의 해안을 일소하였다. 집정관 가이우스 피소(Gaius Piso)가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의 레가투스(legate)인 마르쿠스 폼포니우스(Marcus Pomponius)가 가비니우스 법(Gabinian law) 덕으로 나브로(Narbo)의 속주에서 모병하는 것을 막고(이것은 경솔한 시작이었다) 동시에 대중의 집정관을 향한 정당한 분노를 합법적 테두리에 제어 감시하려고 시도했던 그 순간에 폼페이우스가 잠정적으로 로마에 다시 나타났다.[각주:1] 사십여일 만에 지중해의 서쪽 주변에서는 곳곳에 항해가 가능해졌고, 폼페이우스는 자기 함선들의 주력 중 60척으로 동쪽 바다로 나아가게 했는데 우선은 해적의 본토이자 고향이라 할 만한 리키아(Lycia)와 실리시아(Cilicia)의 바다로 갔다. 로마함대의 접근소식에 해적들의 선박들은 공해상으로 부터 사라졌고, 그 뿐 아니라 안티크라고스(Anticragus)와 크라고스(Cragus)의 리키아인 요새는 별 다른 저항없이 굴복했다. 폼페이우스의 잘 계산된 포용이 두려움보다는 좀처럼 접근부가능한 해양 요새문을 열어젖히는데 더 도움이 되었다.그의 선험자들은 그 모든 약탈자들을 잡히는 대로 십자가에 매달았다. 지체없이 그는 모두에게 거처를 주고 특히 나포된 해적선에 발견된 보통 사공들을 이례적 관용으로 대접해 주었다. 대담한 실리시아의 바다왕만 홀로 로마에 맞서 무력으로 자기 바다를 적어도 지키기라도 할 시도할 모험을 할 수 있었다. 타우루스(Taurus)의 산악요새에 처자와 보물들을 둔 이후로 그들은 로마함대를 코라케시움(Coracesium) 앞바다의 실리시아의 서쪽 전방계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여기서 폼페이우스의 배들은 모든 전쟁도구들이 잘 준비되어 올려진 채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더 이상의 장애없이 그는 상륙후 해적의 산악성채를 들이쳤고 그 동안 계속해서 항복의 댓가로 그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었다. W곧, 대다수가 그들의 요새와 산맥에서 희망없는 전쟁의 계속을 단념하고 항복에 동의했다. 폼페이우스가 이 동쪽 바다에 나타난지 49일만에 실리시아는 평정되고 전쟁은 끝이 났다.

해적질에 대한 빠른 억제는 위대한 구원이긴 하나 진정한 위대함은 아니었다. 애당초 엄청난 정도로 끌어모은 로마의 국가자원에 해적들은 대도시 도둑강도무리들이 잘 조직된 경찰에 맞서는 것 만큼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기습을 기념한다는 것은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악의 고착화된 상태에서 날로 확대해 가는 것을 생각할 때엔 이 끔찍한 해적들을 놀랍게도 빨리 진압한 것은 대중에게 최고의 인상을 준 이상이었다. 한 손에 집중된 지배의 첫번째 시험이 되어 여러 당파들은 그 손이 협력단의 통치보다 다스리는 법을 잘 알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기다렸다.  그래도 90척의 전함이라 불릴 수 있는 배를 비롯 거의 400척의 선박이나 배들이 폼페이우스에게 장악되거나 그에게 굴복했다. 부부적인 그의 자비로 다해서 약 1300척의 해적선이 가라앉고, 그 외에도 넉넉하게 채워진 옛 해적들의 병기창이 불탔다. 해적 중 거의 10,000명이 죽어갔다. 20,000 웃돌게 산채로 승자의 손에 잡혔다. 실리시아(Cilicia) 주둔 로마군의 제독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Publius Clodius)와 몇몆은 고향에서 죽게 되었다고도 하는 해적들에게 사로잡힌 개인들은 다시 한번 폼페이우스로 인해 자유를 얻었다. 687년[67BC] 여름 이 원정 3개월 후에 상업과 무역이 옛 궤도로 복귀했고 이탈리아에는 이전의 기근 대신 풍요가 찾아왔다.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간 알력> 크레타 도(嶋)에서의 불유쾌한 간주(interlude)가 어느 정도 로마군의 이 기쁜 성공을 훼방놓았다. 거기엔 퀸투스 메텔루스가 그의 지휘권의 2차년도에 주둔해 섬의 진압-이미 효과가 현저히 드러난 상태—을[각주:2] 마치도록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 때에 폼페이우스가 동쪽 바다에 나타난 것이다. 한 충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가비니우스 법에 따라 폼페이우스의 지휘권이 메텔루스와 병행하여 동시에 길이는 굉장하지만 폭은 90마일이 되는 것이 없는 이 섬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그의 부관 중에 누구에게 이를 배당치 않을 정도의 사려가 있었다. 아직 저항하는 크레타인의 공동체는 메텔루스가 극악한 잔인성으로 정복된 모국인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서 폼페이우스가 소아시아 남부에서 그에게 굴복한 마을에 부과한 조약들의 온건함을 알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폼페이우스에에게 항복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는 잠시 있던 팜필리아(Pamphylia)에서 그들의 사절단에게 이를 수락하고 그의 부관 루키우스 옥타비우스(Lucius Octavius)를 보내 메텔루스에게 그 협정의 결론을 고지하게 해서 그 마을들을 취하게 했다. 이런 절차는 의심할 바 없이 동료로서의 것이 아니었으나, 공식적인 정당성은 전적으로 폼페이우스 측에 있었다. 메텔루스가 철저히 폼페이우스와 도시들간 협정을 무시하면서 그들을 계속 적대하였다. 헛되이 옥타비우스가 저항했다. 군대 없이 직접찾아간 그는 헛되이 아카이아(Achaia)에서 그곳 주둔 폼페이우스의 부관 루키우스 시센나(Lucius Sisenna)를 소환해 엘레우테르나(Eleutherna)를 포위하고 랍파(Lappa)를 습취하였다. 거기서 옥타비우스의 신병은 수감되어 치욕스럽게 잊혀졌고 그 동안 그와 함께 갔던 크레타인들은 사형집행인에게 보내졌다. 따라서 공식적 충돌이 시센나의 군단들과 메텔루스의 군단들 사이에 발발하였는데, 전자의 경우 그 우두머리에는 그 지도자의 사후 옥타비우스가 자신을 올려두었었다. 그리고 전자가 아카이아로 귀환하라고 명령받았을 때 옥타비우스는 크레타의 아리스티온(Aristion)과 히에라피트나(Hierapytna)와 협력해 전쟁을 계속하였다. 양자 모두 가장 완고한 저항 후 메텔루스에게 겨우 정복되었다.  

실상 옵티마테스의 열심당원 메텔루스는 이렇게 자기 손으로 민주파의 사령관을 향해 공식적 내전을 시작하였다. 이는 로마국가에 형언할 수 없는 해체를 보이는 것이어서, 이 사태가 두 장군간 통렬한 설전 이상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두 해 뒤에 다시 한 번 평화롭게 앉아 원로원에서 "친구처럼" 나란히 앉았다. 

<폼페이우스가 미트라다테스 전쟁 최고명령권을 장악> 이 작전 중에 폼페이우스는 실리시아에 남았다. 다음해의 크레타인에 대한 원정 차라리 메텔루스에 대한 것이라고 볼 전쟁을 준비하려 했는데, 실상은 그가 소아시아 본토의 철저한 혼란상에 개입하도록 그를 지명해 주기만 기다렸다. 그가 입은 손실을 안고 핌브리아군단(Fimbrian legion)의 출발 후 남겨진  루쿨루스군(Lucullan army) 일부가 포투스 영토 경계상의 트록미(Trocmi) 족의 나라의 할리스(Halys) 상류에 빈둥거리며 남아 있었다. 루쿨루스는 이름뿐인 그의 후임 클라브리오(Glabrio)가 소아시아 서부에서 계속 마물고 있음에 따라 여전히 최고명령권을 보유했다.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Quintus Marcius Rex)의 3개 레기온도 실리시아에 비슷한 비활동적 상태였다.  폰투스 영토는 다시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 왕의 자비를 바란 처지에 있었는데, 그는 에우파토리아(Eupatoria) 읍과 같은 로마에 가담한 개인과 공동체들에 그들의 반역에 대해 잔인하게 파멸시켰다. 동방의 왕들은 로마에 대해 별다른 공격적 행동을 계속하지 못했는데, 그들의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고나 실리시아에 폼페이우스가 상륙하는 것이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와 티그라네스(Tigranes)의 더이상의 활동을 막기 때문이었다. 마닐리우스 법(Manilian law)는 폼페이우스가 은밀히 키워온 희망을 그가 예상한 이상으로 빨리 현실화 시켰다. 글라브리오와 렉스가 재소환되고 폰투스-비티니아(Pontus-Bithynia) 정부와 그 주둔 군단이 폰투스-아르메니아 전쟁(Pontic-Armenian war)의 전쟁, 화의, 동맹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폼페이우스에게 이전되었다. 영예와 전리의 전망 중에 폼페이우스는 그의 빈약한 계관(桂冠)을 질투심으로 수호하려는 불편해 하는 옵티마테스당의 꾸짖음을 기꺼이 망각했다. 크레타를 향한 원정과 더 먼 해적들의 추적을 중단했고 그의 함대를 폰투스와 아르메니아의 왕들에 대해 수립한 공격 계획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지상전 중에 그는 절대로 해적에 대한 시야를 완전히 잃지 않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고개들었다. 그가 아시아(Asia)를 떠나기 전(691년[63BC]), 그는 필요한 배들이 해적에 대항하기 좋게 만들었다. 다음 해 그의 제안에서 미슷한 조치가 이탈리아에서 결정되었고 그 목적을 위한 비용이 원로원에 의해 승인되었다. 기병대와 소규모 분선대로 해안을 계속 방어하였는데, 696년[58BC] 키프로스(Cyprus) 699년[55BC] 이집트(Egypt)에 대한 후의 원정이 언급되는 것에서 보듯 해적들은 철저히 정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로마의 우여곡절과 정치적 위기 속의 폼페이우스의 원정 이후에도 다시 고개 들어 과거 썩어빠진 상태의 과두정부 때 처럼 로마인을 바다에서 철저히 구축하는 일은 없었다.

 

 

  1. V. III. Senate, Equites, and Populares [본문으로]
  2. V. II. Metellus Subdues Cret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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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킨나와 술라

<이탈리아의 혼란> 술라가 667년[BC87] 초 그리스를 향해 출발할 때 이탈리아에 남겨놓은 긴박함과 불확실성은 이미 묘사한 바와 같다. 반쯤 억압된 반란과 정치적으로 아주 의심스런 장군들이 반이상 찬탈하다시피한 지휘권 아래 놓인 군대, 수도 내의 혼란과 다층의 얽히고 섥힌 음모들이 그것이다. 무력에 의한 과두제이 승리는 그 완화로 인해 다층의 불만을 잉태했다. 로마 창건이래 최악의 재정위기의 타격을 힘겹게 감수하고 있는 자본가들은 이자에 관해 포고한 정부의 법률에 그리고 정부가 막지 못하는 이탈리아와 아시아의 전쟁에 화가 난 상태였다. 자기 무기를 내려놓게 된 반도들은 지배계급의 시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얻으려는 희망의 좌절 뿐 아니라 오랜 공정한 계약관계의 무효화와 피해방권리가 박탈된 새로운 지위를 한탄하였다. 알프스와 포강 사이의 지역공동체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행해진 부분양보에 불만을 가졌고, 신참 시민과 해방노예들은 술피키우스 법들의 취소에 몸시 화가 났다. 도시의 민중은 일상적 고초에 힘겨워하면서, 이 총칼식 정부가 더 이상 몽둥이로 된 헌정질서 침묵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술피키우스 혁명 이후 추방된 자들의 수도 내 거주하는 지지자들—술라의 눈에 띄는 완화조치의 결고로 아주 수가 많이 있었다—은 열정적으로 그 추방자들의 귀국허가를 받아내려 애썼는데, 특히 부유하고 저명한 여성들 중에서 그 목적을 위해 돈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불편함의 이런 배경들 중에서 당파들간 참로운 무력 충돌을 즉각 예견케 하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목적없는 잠정적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통상 불만을 가지면서 루푸스(Rufus)의 살해, 술라의 암살 시도, 667년[BC87] 집정관 및 호민관 선거의 야당 위한 참여 등에 다소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킨나(Cinna>불평불만자들이 국가의 수장으로 불러들이려는 사람의 바로 그 이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Lucius Cornelius Cinna)는 이제껏 동맹전쟁 때 한 관리로 좋은 모습으 보였다는 외엔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킨나의 원래 인간성과 계획에 관해서는 이 로마혁명 중의 다른 어떤 당파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보다 잘 알지 못한다. 그 이유란 다름 아니라 저속하면서 천박한 이기심에 의해 인도되는 이 사람이 처음부터 숨은 정치적 계획이라곤 전혀 가지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다. 바로 그의 첫 등장에서 신참 시민들과 마리우스의 도당들에게 거액으로 자신을 팔아치웠다고 단언되었지만, 이 조차 거짓이더라도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와 술피키우스(Sulpicius)에게는 없었던 이런 의혹이 킨나에게는 붙었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남는다. 사실, 그 자신이 우두머리인 이 운동은 그 동기나 목적 양면에서 무가치함의 외양을 띄었다. 그들은 한 당에서 부터라기 보다는 적절한 정치적 목적이나 주목할 지원 없는 불평자 다수였다. 그들은 합법적 혹은 비합법적 수단으로 유배에서 풀려나도록 주로 노력하였다. 킨나는 나중에야 모의에 말려들어간 것 같은데, 단순히 호민관 권력을 제한한 결과로 그런 제안들을 할 집정관을 필요로 하는 그 계획이 667년[BC87] 집정관 후보로 최적임자로 그를 요구하였으며 그래서 그가 집정관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제2류의 지도자로 나오는 지도자들 중 몇몇 더 유능한 우두머리들이 있었다. <카르보(Carbo)>이런 사람이 민중호민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Gnaeus Papirius Carbo)로 충동적 대중연설을 잘해 이름을 날린 경우며, <세르토리우스(Sertorius)>무엇보다도 퀸투스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는 로마 관리 중 최고의 재능을 가지면서 많은 면에서 탁월한 자들로서 민중호민관 입후보이래 술라와는 개인적인 적이었고 이 싸움으로 자신의 본성에 전혀 맞지 않는 불만이 많은 자들에게 소속하였다.전집정관 스트라보(Strabo)는 정부와 대립하기는 했으나 이 당파와 뜻을 같이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킨나의 혁명발발>술라가 이탈리아 내에 있을 때는 정당한 동기로 뭉친 이 동맹은 조용히 있었다. 그러나 킨나의 경고에는 끄떡 않은 채 동방의 절박한 문제에 전념하는 이 무시무시한 전집정관이 닻을 내릴 때, 킨나는 호민관단 다수의 지지로 666년[BC88] 술라의 복고에 대한 부분적 반작용인 법들을 즉시 제출했다. 이는 신입의 시민들과 해방노예들의 정치적 평등에 대해 술피키우스가 제안했었던 대로의 포용을 담았으며 술피키우스 혁명의 결과로 추방되었던 자들의 본래 지위로의 회복에도 그러했다. 신입 시민들은 대거로 수도에 모여들어 해방노예들과 나란히 반대자들을 전율케 하고 필요한 경우 강제하였다. 그러나, 집권당은 굴복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집정관 끼리 맞서서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Gnaeus Octavius)가 루키우스 킨나(Lucius Cinna)와 싸웠고 호민관들끼리도 그러했다. 양쪽이 투표당일 투표장소에 대거 무장한 채 나타났던 것이다. 원로원파의 호민관들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로스타 위에서 조차 칼날이 그들에게 겨누어지고 있을 때 옥타비우스(Octavius)는 폭력에 맞서 폭력을 사용했다. <정부의 승리>무장된 사람들로 된 일단의 그의 무리들이 비아 사크라(Via Sacra)와 장터(forum)를 쓸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들의 더 온화한 지도자의 명령도 무시한 채 군집한 대중들에게 끔찍한 잔학행위를 가하였다. 이 '옥타비우스의 날'의 포룸이 피에 씻기는 것은 전후로 절대 없는 일로, 시체의 수는 일만으로 추산되었다. 킨나는 노예들을 불러 이 투쟁에서 한 몫을 해 스스로 자유를 찾을 것을 주문했지만, 그의 호소는 이전의 마리우스의 비슷한 호소만큼이나 소용이 없었고 이 운동의 지도자들에게는 달아나는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 헌정체제는 음모의 두목들이 그 해 임기가 계속되는 한은 그들에 맞설 수단이란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도 경건하기 보다 충직한 예언자 한 사람이 집정관 킨나와 그를 지지하는 민중호민관 여섯에 대한 추방이 나라에 평화와 안정을 회복시켜주리라고 말한 후, 헌정이 아닌 신적 자문에 의해서 집정관 킨나가 원로원의 제청으로 그 직위를 박탈당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Lucius Cornelius Merula)가 그 대신 뽑혔으며, 달아단 두목들에게 추방과 제적이 포고되었다. 누미디아(Numidia)에 있는 추방자들의 수에 약간만을 더한 채로 이 위기의 전과정이 끝날 것 같았다.

 

<이탈리아의 킨나파>만약에 한편에선 원로원이 그들의 태만한 버릇으로 이 난민들을 이탈리아에서 급하게 소개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잊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선 후자들이 해방된 신참 시민의 옹호자로서 이탈리아인들의 반란에 다소 호의적 위치에 서지 않았더라면, 확실히 아무것도 더는 이 운동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움 없이 그들이 티부르(Tibur)에 프라이네스테(Praeneste)에 라티움(Latium)과 캄파니아(Campania)에 있는 신참시민들의 중요한 마을이라면 모든 곳에 모습을 나타내 여기저기서 공동목적을 위해 돈과 인력을 모았다. 이렇게 지원받고 그들은 포위하는 군대와 함께 모습을 놀라(Nola) 에 나타냈다. 이 시기의 군대는 견해에 있어 그 장군이 그의 개인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에서는 어디든 민주적이며 혁명적이었다. 도망한 정무관들의 연설은 병사들에게 마지막 원정과 관련되어 호의적인 기억을 남기고 있었는데 킨나와 세르토리우스가 대표적이어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민중파의 집정관에 대한 초법적 해임과 주권자인 민중의 권리에 대한 원로원의 간섭이 일반병사들에게 전해젔고 콘술 아니 차라리 신참시민의 금은 이 관리들에게 헌정의 파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캄파니아 군대는 킨나를 집정관으로 인정하고 한 사람씩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가 신참시민들 뿐만 아니라 동맹 마을사람들이 모여 이룬 부대들의 핵심이된 것이다. 대부분 모병된 것이나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곧 캄파니아에서 수도로 이동했다. 다른 부대들은 북쪽에서 접근했다. 킨나의 부름에 전년도에 추방당한 이들이 에투리아 해안의 텔라몬(Telamon)에 상륙했다. 이는 겨우 500명의 무장 병력 그것조차 대부분 망명자들의 노예거나 차출된 누미디아 기병일 뿐이었으나, <마리우스 상륙>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전년도 수도의 어중이떠중이들과 기꺼이 어울렸던 만큼 이제는 이 지역의 지주들이 야간에 그들의 고용농민을 가둔 에르가스툴라(ergastula)를 열도록 명하였다. 그가 자유를 달성케 할 목적으로 이들에게 제공한 무기는 경멸되지 않았다. 이들과 신참시민들의 분견대는 물론 빨치산들과 함께 사방에서 몰려든 망명자들로 충원되어 이제 킨나는 독수리군기 아래 6,000명을 거드리고 40척의 배를 댈 수 있었다. 티베르 어귀에 정박해 로마로 향하는 곡물선박을 추적했다. 이에 그는 스스로를 "집정관" 킨나의 처분에 맡겨 내놓았다. 캄파니아군의 지도자들은 흔들렸다. 더 현명한자 특히 세르토리우스가 이름으로 그 자신을 이 운동의 머리로 반드시 올려야 할 사람인 동시에 비정상적 복수심의 망령에 휘둘리며 정치인다운 행동에 무능하기로 악명높은 사람에게 자신들을 너무 긴밀히 밀착하는 위협을 지적했다. 그러나 킨나는 이를 무시하며 마리우스에게 에트루리아와 바다에서 전집정관적(proconsular) 권위를 가진 최고명령권을 인정해 주었다.

 

<의심스런 태도의 스트라보>폭풍은 도시 주변으로  몰려가 정부가 더 이상 그들의 군대로 이를 방어하기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각주:1] 그러나, 메텔루스(Metellus)의 병력은 삼니움(Samnium)에서와 놀라(Nola) 앞에서 묶여있었다. 스트라보(Strabo)만 급히 수도를 도우러 올 위치였다. 그는 콜리나문(Colline)에 나타나 자리잡았다. 그의 대병력의 경험많은 군대로 그는 반도들의 허약한 군대를 틀림없이 신속하고 완전하게 절멸시켰을 수 있었을 것이나, 이는 결코 그의 계획 중에 있지 않았다. <로마 주위의 킨나파>오히려 그는 로마가 실제적으로 반도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허용하려 했다. 킨나가 그의 군단과 카르보의 군단을 함쳐 야니쿨룸(Janiculum) 언덕 맞은편의 티베르 우안에 진영을 갖추었고, 세르토리우스가 좌안에서 세르비우스 성벽을 마주하고 폼페이우스(Pompeius)와 맞섰다. 자기 부대가 세 개 레기온 정도 까지 조금씩 불어나게 된 동시에 수많은 전선(戰船)들을 보유하게 된 마리우스가 차례로 해안지역을 점령해 마침내 오스티아(Ostia) 까지 간계로 그의 손에 넣게 된다. 다가오는 공포통치의 전조로 장군에게 버려진 그곳이 야만적 부대의 학살과 약탈에 노출되었다. 이 수도가 단순한 통행의 금지로도 커다란 위기 속에 동요하였다. 원로원의 명령으로 성벽과 성문이 방어상태에 들어가고 시민징집병들이 야니쿨룸으로 배치되었다. 스트라보의 무위(無爲)는 모든 경우에서 놀람과 분노를 샀다.그가 킨나와 은밀한 협상을 한다는 의혹은 자연스러운 것이나, 아마도 근거는  없다. 그가 세르토리우스 부대와 맞선 중대한 충돌과 집정관 옥타비우스(Octavius)에게 마리우스가 수비대 장교들 중 하나를 통해 야니쿨룸을 뚫었을 때 주어 실상 반도들에게 그것을 통해 큰 손실을 입히고 성공적으로 격퇴시킨 지원은, 그가 반란지도부와 결합하거나 아니면 그 밑에 들어가기라도 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통스러워 하는 정부와 수도시민들에 반도들을 복종시키는데 힘을 보태는 보답으로 다음 해 집정관직을 얻고 정부를 자기 손에 넣는 것이 차라리 그의 계획에 가깝다.

 

<이탈리아인들과 당파들의 협상>그러나, 원로원은 한 참칭자에게 벗어나려 도움을 다른 곳에서 얻고 스스로를 다른 참칭자의 무력 앞에 무릎꿇게 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무기를 내려놓고 결과적으로 옛 동맹 위치를 잃은 동맹전쟁 참가 이탈리아내 공동체들 전부에게게 시민권이 원로원 결의로 수여되었다.[각주:2] 이는 마치 이탈리아에 대해 전쟁하는 모라가 대단한 목표가 아니라 허영에 자신을 저당잡히고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보이려는 그들의 의도처럼 보였다.  그 첫순간의 당황에서, 추가적으로 일이천명의 병사들을 전장으로 보내려는 목적에 동맹전쟁에 그렇게 비싼 끔찍한 값을 치르고 얻었던 모든 것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실제로 이 유연성으로 수혜받은 공동체에서 군단들이 도착했지만, 약속된 수의 레기온 대신에 다 해서 기껏해야 만명이나 될까하는 정도의 원군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철두철미 더 믿을만한 메텔루스(Metellus)의 군단들이 수도 방위를 위해 채용되도록 삼니움족(Samnites)과 놀라인(Nolans)과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니움인들은 카디움(Caudium)의 멍에—삼니움에게서 취한 전리품과 그들의 포로와 투항자들에 대한 보상, 로마인에게서 삼니움인이 빼낸 전리품은 무효화, 삼니움인 뿐 아니라 그들에게 넘어간 로마인에 대한 시민권 수여—를 기억하게 할 요구를 했다. 원로원은 이 위기중에도 이런 치욕스런 평화조약은 거부했지만 메텔루스에게 작은 분대는 남기고 몸소 남이탈리아에 흩어진 가용 군단을 끌고 최대한 빨리 로마로 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복종했다. 하지만,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삼니움인들이 메텔루스가 남겨둔 부관 플라티우스(Plautius)와 그의 약체부대를 공격해 패배시켰다. 놀라의 수비대가 나아가 로마와 동맹한 아벨라(Abella)의 인근 소읍들을 불질렀다. 킨나와 마리우스는 게다가 삼니움인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전부를 부여했—로마의 명예가 그들에게 무슨 문제였을까! —으며 삼니움의 분견대가 이 반도들의 진영을 보강했다. 정부군에 유리치 못했던 한 전투 이후 아리미눔(Ariminum)이 반도들에 점령되고 그리하여 로마에서 인력과 물자를 제공받으려 기대하던 포(Po) 계곡 간 주요 연락망이 교란됨은 심각한 손실이었다. 품귀와 기근이 펼쳐졌다. 군단 수비대를 가진 이 큰 밀집도시는 적절한 공급을 받을 수 없었으며, 마리우스는 특히 보금에 대해 점점 더 차단하는데 신경을 썼다. 그는 이미 선교(船橋)를 통해 티베르강을 차단했다. 이제는 안티움(Antium)과 라누비움(Lanuvium)과 아리키아(Aricia)와 다른 소읍들을 함락하여 개방된 육상교통수단을 지배한 동시에 저항하던 곳의 전 시민들을 배신으로 그에게 돌아선 듯한 자들만을 예외로 처형시킴으로써 자신의 복수심을 달랬다. 역질이 이 고통 뒤를 따랐고 수도 주위에 빽빽하게 몰린 병사들 사이에는 가공할 참상이 있었다. 스트라보의 고참병 군대에서 11,000과 옥타비우스의 군단에서 6,000이 그들에게 희생되었다. 허나 정부는 절망은 하지 않았으며, <스트라보의 죽음>스트라보의 갑작스런 죽음은 다행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는 페스트로 죽었다.[각주:3] 그에게 많은 면에서 맞선 군중들은 상여의 시체를 찢어 거리로 끌고 다녔다. 그의 군단의 여당은 옥타비우스에게 합병되었다.

 

<주저하는 정부>메텔루스의 도착과 스트라보의 죽음 이후, 정부군은 다시 적대자에게 적어도 한 번은 맞서고 알바산에서 반도들과 전투태세에 있었다. 킨나가 그들 앞에 나타나자 그들은 그가 아직 집정관이자 장군인 것처럼 갈채로 맞이했다.  메텔루스는 전투를 지속하기 보다 진영으로 귀환시키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옵티마테스당은 흔들렸으며 서로간 일치되지 않았다. 영예롭지만 완고하고 근시적 집정관 옥타비우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한 파는 고집스레 모든 양보를 반대하였으나, 전쟁에 더 경험많고 더 현명한 메텔루스는 타협을 타진했다. 하지만 킨나와 그의 회담은 양쪽의 극렬분자들의 화를 돋구었다. 킨나는 마리우스에게 약골이란 소리를 들었고 옥타비우스는 메텔루스를 반역자라 했다. 결정은 못한 병사들은 미숙한 옥타비우스의 지도력을 불신할 동기가 없지 않아 메텔루스에게 최고명령권을 취할 것을 제안하고, 거절되자 대거 무기를 버리거나 심지어 적에게로 투항했다. 시민은 날로 더욱 고통과 압박을 받았다.킨나의 전령이 넘쳐나는 노예들에게 자유를 보증한다는 선언하자, 이들이 무리지어 수도로 부터 적진의 군단으로 몰렸다. 그러나 원로원이 군대에 들어가고자 하는 노예들에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제안이 옥타비우스에 의해 단호히 반대되었다. <굴복하는 로마>정부는 패배했다는 것과 여객이 산적 두목을 만나듯 그 부대 지도자들과 협상해야 할 밖에 도리 없음을 시인했다. 사절단이 킨나에게 갔으나, 그들은 어리석게 그를 집정관으로 인정하는 우를 범하였고 킨나는 이를 기화로 성문 더 가까이 진을 옮겼다. 이젠 어떤 협상도 더이상 불가능했다. 원로원은 무조건 추방된 집정관에게 굴복하면서 오직 유혈을 자제하라는 요구만을 더했다. 킨나는 이를 약속했으나 맹세하기는 거부했다. 마리우스는 협상 중에 그의 곁을 지키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묵하였다.

 

 

 

 

  1. 다음에 말하는 것의 전부는 최근 발견된 리키니아누스(Licinianus)의 보고에 의거한 것으로, 이는 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실들을 전해주며 우리들에게 전에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던 이런 사건들의 관련과 연쇄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준다. [본문으로]
  2. IV. VII. The Bestowal of the Franchise and Its Limitations. 코미타 의회에 의해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에 명백하다. 원로원은 대신 플라우티우스-파피리우스 법( Plautio- Papirian law) (IV. VII. Bestowal of Latin Rights on the Italian Celts)을 연장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는 관습적으로 그 점을 열어두었으며(i. 409) 실질적으로 전 이탈리아에 대한 시민권 부여까지 이르게 했다. [본문으로]
  3. 리비우스 말( Obsequens 56에 따라)로 "-Ad flatus sidere-," 는 "페스트에 걸렸다" (Petron. Sat. 2; Plin. H. N. ii. 41, 108; Liv. viii. 9, 12)는 의미지, 후대 작가들의 오해처럼 "번개에 맞았다"는 것이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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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체제복귀

<공석이 된 정부> 가이우스 크라쿠스(Gaius Gracchus)가 보여준 새로운 구조는 그의 사망에 임해 폐허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실제 그의 형의 죽음처럼 기본적으로 단순 복수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달리는 겨우 동시에 구정체(舊政體)로의 복귀를 향한 실질적으로 한 걸음이었는데 군주적 인물이 막 확립되려는 군주제를 빼앗겼을 때의 일이다. 가이우스(Gaius)의 몰락과 오피미우스(Opimius)의 전면적이고 유혈적인 재판 이후, 그 공석을 감히 차지하려는 시도에서 쓰러진 국가의 수장과 혈연관계로나 개인적 탁월성에 의해 합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는 절대적으로 없었다. 가이우스는 자식없이 이 세상을 떠났고 티베리우스가 남긴 아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소위 전 민중적 당파에서 문자그대로라도 지도자란 칭호를 받을 자는 없었다. 그라쿠스식 정체는 사령관 없는 요새를 닮았다. 성벽과 수비대는 다치지 않아도 장군은 부족하며 타도된 정부의 빈 자리를 취할 무언가는 전혀 없었다.

<복귀된 귀족정> 그래서 일은 그렇게 된 것이다. 상속자 없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사후 원로원정부가 자동적으로 그에 자리잡았는데, 이는 호민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거되지 않고 그에 의해 단순히 예외적 절차로 실질적 무화 상태로 되어있어 있었다는 면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복귀과정에서 국가란 장치가 수세기를 굴러온 옛 궤적으로 들어가는 것 이상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단한 잘못이다. 복귀란 언제나 혁명인 법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그것이 옛 통치라기 보다는 복귀된 옛 섭정(군주)이다. 과두제는 이미 타도된 참주정이란 갑옷을 새로 입은 채 나타났다. 원로원이 자신들의 무기로 그라쿠스를 두드려 팬 만큼이나 그들은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그라쿠스식 정체의 지배방식을 이어갔다. 물론 숨은 동기상으로 완전히 일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배귀족에 실질적으로 적대적인 요소들을 철저히 씻어내는 것이 함께였다.

<민주당파의 고발들>우선 반동은 주로 인물을 향했다.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Publius Popillius)가 그에 관한 조치가 취소된(633년[BC121]) 이후 유배지에서 돌아왔고 고발전쟁이 그라쿠스 지지자들에 대해 수행되었다. 반면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를 사임 후 반역죄로 단죄하려는 민중당파의 시도는 여당에 의해 좌절된다(634년[BC120]). 이 복귀정부는 귀족정치에 대한 지조에서 특징이 발견된다. 한 때 그라쿠스 형제의 동맹이던 가이우스 카르보(Gaius Carbo)는 오랫동안 개종자로 있었으나[각주:1], 이젠 오피미우스의 수호자로서 그의 열정과 쓸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변절자로 남게 되었다. 오피미우스를 향한 것과 같은 고발이 민주당파에 의해 그에게 제기되었을 때 그의 몰락을 기꺼이 막지 않으려 하는 정부에 대해 카르보는 자신이 양파에서 버려진 것을 알고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반동적 인물들은 개인신상에서 순수 귀족당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반동은 즉시 식량배분, 아시아 속주의 과세, 배심원과 법정에 대한 그라쿠스안을 즉각 공격치 않았다. 오히려 상인계급과 도시무산자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이들 세력들 특히 무산자들에게 그라쿠스 형제가 한 이상 단호하게 리비우스 법들의 소개에서 했었던 것처럼의 존경을 계속 보였다. 이 과정은 단순히 그라쿠스 혁명이 동시대인을 여전히 떨게 하고 그 창출물을 보호하였기 때문에 채택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민중의 이익을 양성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귀족층의 개인적 이익과도 부합하여서 공공복리 외엔 희생될 것은 없었다.

<복귀기의 영지문제>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서 공공복리증진을 위해 고안된 이 모든 조치들—최상이나 명백히 그의 입법상 가장 인기없는 부분들—이 귀족파에 의해 버려졌다. 그의 계획의 가장 고귀한 것인 로마시민들 간을 우선으로 하고 다시 이탈리아와 속주간에 평등성을 도입하려는 그리고 국가의 지배장악하는 자들과 단순 봉사근로하는 자들의 구분을 없앤 만큼 동시에 역사상 알려진 가장 체계적 이주를 통해 그런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계획만큼이나 빠르고 성공적으로 공격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런 황소고집과 망령으로 회복된 과주정은 죽은 세대의 원칙—이탈리아가 지배자로 남아야 하고 로마가 이탈리아의 지배도시여야 한다는 것—을 현재 새롭게 강요했다. 그라쿠스 생시조차 이탈리아 동맹들의 주장은 결정적으로 거부되었으며 해외식민의 위대한 이상은 아주 심각한 공격에 노출되어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사후, 카르타고 재건계획은 비록 개별할당분은 그 수혜자에게 남겨졌지만 간단히 여당에 의해 유보되었다. 민주당파에 의한 비슷한 사업을 다른 지점에서 추진할 때엔 그들은 싸울 수 없었다. 마르쿠스 플라쿠스(Marcus Flaccus)가 시작한 알프스 이북의 정복과정에서, 나르보(Narbo)의 식민지가 636년[BC118]에 로마제국 사상 가장 오랜 해외의 시민도시로 설립되었다. 여당에 의한 여러방면의 공격과 원로원의 제거를 위한 직접적 결의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가 가진 상업적 수익성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 예외—고립에 있어 그리 중하지 않다—를 제하면 이 정부는 이탈리아 밖 영토 할당을 꾸준히 금지해 낼 수 있었다. 

이탈리아 영지문제는 비슷한 관점에서 토대지어 졌다. 가이우스의 이탈리아 식민지들 특히 카푸아(Capua)는 취소되었고 이미 이주된 곳도 해산되었다. 타렌툼(Tarentum)의 중요치 않은 곳 하나만 넵투니아(Neptunia)라는 신도시 형태로 이전 그리스 공동체와 나란히 위치되었다. 이미 비식민적 할당으로 배분된 영지는 수익자 손에 많이 남은 만큼이나 국익을 위해 그라쿠스에 의해 그들에게 부과된 제한—토지임차와 양도금지—은 마르쿠스 드루수스(Marcus Drusus)에 의해 제거되었다. 점유권에 의해 여전히 소유된 영지—라틴인들에 향유되는 영지를 넘어 서서 그라쿠스 최고치기준[각주:2]에 따라 그 보유자에게 남겨진 부동산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에 관해서는 반대로, 이제껏 점유자였던 자들에 대해 그것들을 보존해 주고 미래분배의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단호히 결의되었다. 드루수스가 약속한 36,000의 새로운 농장할당의 대상은 의심할 바 없이 이런 땅들이 주된 것이었다. 하지만, 수십만 에이커의 이런 이탈리아 영지를 어디서 찾을 지에 관해 조사하는 수고를 그들은 스스로 면하면서 그 목적에 봉사하는 리비우스 식민법을 암묵적으로 보류했다—아마도 오직 스코라키움(Scolacium: Squillace)의 작은 식민지만 드루수스의 식민법에 언급된다. 민중호민관 스푸리우스 토리우스(Spurius Thorius)가 원로원의 지시로 통과시킨 법은 반면, 배분위원회가 635년[BC119] 없어지도록 했고 공유지 점유자에게 고정임차료를 부과했다. 이 절차는 수도의 민중에게는 이익이 되었는데 곡물배분 자금일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곡물기금의 증가를 포함한 제안들은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같은 현명한 호민관에 의해 회피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8년 후(643년[BC111])에 있었는데, 이 때 민중의 새로운 결의로[각주:3] 점유된 공유지가 직접 전점유자의 사유재산으로 전환되었다. 거기서 미래에는 공유지가 점유되지 않고 임대되거나 공공방목지로 개방되도록 한다는 것도 추가했다. 후자의 경우 큰 가축 10두와 작은 가축 50두의 아주 낮은 상한을 고정하여서 큰 가축소유자는 실질적으로 작은 가축을 포기해야 했다. 이런 현명한 규제로 오랫동안 방치된 점유방식의 유해성[각주:4]은 드디어 인정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언제나 국가에서 그 소유를 빼앗을 때만 적용되었다. 로마귀족파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지켰고 어떤 공유지든 그들 손에 있는 것은 자기 재산으로 전환시켰다. 이탈리아 동맹들을 다룰 때는 특히 자치를 담당한 그들의 귀족층이 누리던  라틴의 영지의 소유권을 주지 않고 그들의 규약에 의해 그들에게 보증된 권리들을 손상없이 보존하는 것으로 달랬다. 반대당은 불리한 위치에서 있기에, 가장 중한 실질문제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이익은 도시의 반대파들과 정면 충돌했다. 실상 이탈리아인들은 로마정부와 동맹을 이루어 로마의 다양한 선동가들의 이상한 계획에 맞서 원로원의 보호를 찾았다.

<복귀기의 무산층과 기사계급> 복귀정부가 이렇게 그라쿠스식 정체에 존재했던 개선의 씨앗을 박멸하는데 철저히 주의한 반면, 그라쿠스가 보편행복을 위한 것이 아닌 일로 일깨운 적대세력들의 존재 앞에서는 완전히 무능한 채로 남았다. 수도의 무산자들은 공인된 칭호로 남았다. 원로원은 마찬가지로 상업계급에서 배심원을 뽑는 것에 침묵했는데 이 멍예는 귀족층의 우수하고 자랑스런 부분에 대해 더 불쾌한 멍에였다. 귀족층이 쓴 족쇄는 그 위엄에 맞지 않았으나 이를 그들이 심각히 제거한 것을 발견치 못한다. 632년[BC122]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법은 해방노예의 투표권에 대한 적어도 헌정적 제한을 강제하였는데 오랫동안 원로원측이 그들의 하층폭군들을 억제하는 유일한 시도이자 아주 약한 시도로 남았다. 집정관 퀸투스 카이피오(Quintus Caepio)가 기사관직의 도입(684년[BC106]) 후 다시 재판을 원로원계급의 배심원에게 위임하도록 한 제안은 이 정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지만 문제를 영향력 있는 수준으로 밀고 가는 것 까지일 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멈춰섰다.[각주:5] 이 정부는 그 권력을 공유한 불편한 협력자들에게서 해방되지 못했지만, 이런 조치들은 상인계급과 무산계급과의 지배귀족과의 그리 신중치 못한 협정을 계속 교란은 했을 것이다. 양자 모두 원로원이 꺼리지만 두려움에서만 양보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은혜로나 이익으로나 원로원의 지배에 항구적으로 밀착한 것이 아닌 양자는 그들에게 더 많이 주는 다른 주인에게는 언제든지 비슷한 봉사를 하려했고 기회가 있으면 원로원을 속이고 방해하는 것을 서슴없이 했다. 이처럼 복귀체제는 합법적 귀족층의 욕망과 감정은 물론 참주정부의 국제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그 지배는 그라쿠스의 것돠 같은 기초에 근거할 뿐 아니라 못지않게 병들었고 실상은 더 나쁘게 쌓아졌다. 대중과 합심되어 그 힘을 받으면 강하였으나, 거리의 패거리와 상인의 이익과 상충되면 철저히 무력해졌다. 이는 공석의 왕좌 위에 비양심과 사분된 희망과 함께 앉은 셈이다. 지배하는 국가조직에 화가 나 있지만 체계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하며 자기의 실제 이익이 결정을 재촉하지 않으면 우유부단했다. 자당과 반대당에 한결같이 불성실, 내적 불일치, 최고의 무능, 비천한 이기심의 잘못된 지배의 비길 데 없는 관념들의 초상이었다.

<복귀기의 인물들>달리 될 수는 없었다. 전국이 지적 도덕적 쇠퇴기에 있었고 특히 상류계급에서 심했다. 그라쿠스기 이전 귀족층은 사실 재능면에서 과할 정도로 충만하지는 않았으며 원로원좌석은 겁약한 귀족들로 붐볐다. 그럼에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 가이우스 라일리우스(Gaius Laelius), 퀸투스 메텔루스(Quintus Metellus), 푸블리우스 스카이볼라(Publius Crassus)와 많은 다른 존경받는 능력자들이 있었고, 호의적인 관찰자들은 불의 중에도 절제와 잘못된 정치의 속에서도 일정한 예의를 원로원이 가졌다는 의견을 가졌을 것이다. 이 귀족층이 타도된 후 부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귀족층은 복귀의 저주에 의존했다. 귀족층이 전에 잘했든 잘못했든 한세기간을 별 현저한 반대없이 다스리는 동안 이제 헤쳐온 위기는 어둔 밤의 불빛 처럼 그 앞에 아가리를 벌린 깊은 수렁을 보이고 있었다. 원한과 공포가 구귀족 대가들의 정부를 특징짓는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자가 단일정예로 뭉친 당으로 지금까지 지배에 참여못하는 대중보다 더 단호한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가족정부가 파트리키우스정체(patriciate)의 최악의 시기에 그런 것이 다시 한번 이제 성행하여 퀸투스 메텔루스의 네 아들과 아마 두 조카되는 이들—예외는 있지만 철저히 범용한 자들로 그 단순성 때문에 공직에 나간 이들이다—이 그 사위야 말할 것 없이 15년 내(631-645년간[BC123-109]) 집정관직에 모두 도달했고 한 명 빼고 개선식을 올렸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반대당을 향한 마음에 폭력과 잔인성을 가질 수록 영예를 받고 격정과 치욕이 진짜 귀족이라며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지배자나 피치자 모두 전쟁하는 두 당파를 모든 면에서 닮고 그 전쟁에선 어떤 국제법도 소용없다는 것만 다른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구귀족이 민중을 방망이로 두들겼다면 이 복귀귀족은 타이른 셈이다. 권력으로 돌아갔으나 현명함과 개선과는 거리가 있다. 그라쿠스 혁명에서 킨나 혁명 까지인 이 복귀기 만큼이나 로마 귀족이 정치군사적 능력에서 이렇게도 결핍한 것은 이제껏 없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이런 것의 중한 예시가 이 당시 원로원파의 수장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에게서 주어진다. 고위귀족이나 부하지 않은 부모를 두어 그의 비범한 재능을 사용해야 했던 그는 집정관(639년[115])과 감찰관(645년[BC109])에 까지 뛰어올랐고 오랫동안 원로원의 수장이자 정치적 신탁을 가졌고 연설가나 작가로 뿐 아니라 이 세기 지어진 주요 공공 건물의 창조자로 그 이름이 불멸화되었다. 그러나, 그를 더 가까이보면 그의 크게 칭송되는 업적은 단순히 장군으로서는 알프스의 싸구려 마을을 얻은 것이요 정치가로는 투표나 사치에 대한 자신의 법으로 이 시기의 혁명적 정신에 대해 승리를 얻은 것 뿐이다. 그의 진짜 재능은 이에 있었다. 다른 올곧은 원로원의원 처럼 매수가능한 자이면서 교활하게도 위험해지려할 때를 분간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괜찮은 정직한 외모로 파브리키우스(Fabricius)의 역을 공중의 앞에서 해냈다. 군사적 면에서 볼 때, 의심할 바 없이 최고귀족 동아리내에 속하는 유능한 관리의 존경할 만한 예외를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규칙이란 군대지휘를 하게 될 때 급히 그리스 군사교본과 로마연대기를 군사적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만큼 뒤척이다가 전장에 나가 실제 지히권을 천한 출생이나 능력과 절제 있는 관리에게 양도하는 현명함을 보이는 것이 다였다. 사실 두세기 이전에 원로원이 왕의 의회를 닮았어도 그 후계들은 군주 역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복귀 귀족들의 무능은 그들의 정치도덕적 무용성과 완전히 등치되었다. 그가 돌아간 국교가 이 시기 야수적 방탕의 진실된 반영은 아니라해도 또 이 시기 외부의 역사가 그 가장 본질적 요소의 하나로 로마 귀족의 철저한 타락을 보여주진 않는다해도 로마 최고동아리 중의 급격한 계승 속에 밝혀진 이 끔찍한 범죄들 하나만도 그 성격을 보이기 충분하다.

 

 

 

  1. IV. III. Democratic Agitation under Carbo and Flaccus [본문으로]
  2. IV. II. Tribunate of Gracchus [본문으로]
  3. 많은 부분이 현전하며 잘못된 이름으로 알려진다. 그 이름은 300년간을 토리우스 법에서 내려왔다. [본문으로]
  4. II. VII. Attempts at Peace [본문으로]
  5. II. VII. Attempts at Peac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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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마르쿠스 레비두스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반대파 술라(Sulla)가 이듬해 676[BC78]년 죽었을 때 그가 회생시킨 과두제(寡頭制)는 로마국가 상에 무제한 군림하였으나, 이는 강제로 확립된 만큼 그에 맞선 수많은 공개 비공개 적들에 맞서 유지되기 위해 또 다른 강제를 요하였다. 이는 인정된 지도자 아래 움직이는 분명한 목표를 가진 단일 당파의 반대이 아니라, 통상 민중파란 이름 아래 뭉쳐 실상 술라가 조직한 공화국조직 여러 이유와 계획으로 반대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단체들의 반대를 부른 것이었다. 법학자들 시민의 삶과 재산을 다루는 임의적인 술라식 정치에 가담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실정법주의 인물들이 있었다. 심지어 모든 반대자들이 침묵한 술라 생시에도 엄격한 법률가들이 이 섭정에 저항했다. 코르넬리우스 법(Cornelian laws)을 예로 들자면 이는 이탈리아 공동체들에게서 로마 시민권을 박탈해 가는 것이나 사법결정으로 무효화되었으며, 이제는 같은 방식으로 법정에서는 시민이 혁명기에 전쟁포로로 노예로 팔릴 때 그의 시민권이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평결했다. 개혁지향귀족파 더우기, 원로원 내에는 전시기 개혁당과 이탈리아인의 협력을 위해 노력한 소수의 옛 진보주의의 여당들이 있어 이제는 같은 이유로 포퓰라레스(Populares) 당임을 선언하면서 술라의 엄한 과두체제를 다소 완화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민주파 또, 본래 포퓰라레스라 부르던 이들도 있는데 솔직하고 순수하며 협소한 마음의 급진자들로 정강에 따른 슬로건을 위해 재산과 생명을 저당잡힐 이들이며 승리 후에는 힘겨운 충격 속에서 자신들이 실제가 아닌 프레이즈를 위해 투쟁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특별한 목적이라면 없앤 것은 아니나 그 본질적 특권을 가져가 버린 호민관 권한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중에게 신비스런 매력을 행사하였으니 분명한 실제 쓰임보다는 헛된 환영에 불과한 탓이었다-민중의 호민관이라는 이 허명은 한 개의 일천년기 이상 후에 로마를 혁명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술라복고기에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던 수많은 중요 계급이 있었는데 그들의 정치적 사적 이익이 그에 손상을 당했었다. 포강북주민들 이런 이유로 반대당에 속했던 이들 중에 포강에서 알프스산맥에 이르는 지역의 조밀하고 많은 인구들이 있었다. 이들은 665년[BC89]의 라틴권리 부여[각주:1]를 완전로마시민권에 대한 단순한 할부로 생각하여 미래 소유의 토양을 제공했던 것이다. 해방노예층 이 범주에 해방노예들 또한 속하였는데 수적으로나 부에 있어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나 수도내의 그들의 결집은 위험했다. 이들은 보다 이른 시기의 실질적으로 무용한 참정권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본가들 같은 위치에 서있는 자들로는 나아가 거대 자본가들이 있었는데 조심스런 침묵 속에서 끈질긴 분노와 동등한 강도의 끈질긴 힘을 전처럼 유지하였다. 도시무산자들 수도의 민중들은 무료 빵과 곡물들에서 진정한 자유를 인식한 만큼, 불만족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재산피탈자 더 깊은 분노는 술라식 몰수형에 영향받은 시민들 사이에 횡행하였다. 그들이 폼페이우스 가문들 처럼 술라식민자들에게 축소된 영지를 후자와의 영구적으로 충돌한 채로 같은 구역 안에서 누리고 살았던지, 아니면 아레티움인들(Arretines)과 보라테라이인들(Volaterrans)처럼 실질적인 영토를 보유하였으나 로마민중이 그들 목에 들이대는 몰수형이라는 다모클레스의 검(Damocles' sword )의 위협을 받던지, 혹은 특히 에트루리아(Etruria)에서 그랬던 것 처럼 전거주지에서 거지나 숲속의 도둑처럼 전락되었거나 마찬가지다. 금지자와 그 지지자들 최후로 소요는 이 복고의 결과 생명을 잃은 민주파 수장들의 친인척이나 해방노예들에게 까지 퍼졌는데 마우레타니아의 해변을 방랑하거나 비참히 떠도는 망명객으로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의 궁정이나 군대에서 체류하였다.  이 시기 정치적 감정을 지배하는 엄격한 가족관계에 따르면 남겨진 자들이 추방된 친척이 고향으로 올 수 있는 특권을 마련해 주거나 사망 경우에도 그들의 기억과 자녀들에게 따르는 낙인을 해소하고 부치의 영지[각주:2]를 찾아주는 것이 영예로 생각되었다. 보다 특별한 것으로, 그 섭정이 법률로 정치적 천민으로 만든 금지된 자들[각주:3]의 자녀들이 그 법으로 부터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하게 하는 초대을 받아들이게 했다.  

 

경제적 몰락자 이 모든 반대파에 더해 재산들이 파멸된 군상들이 있었다. 고상하건 비천하건 간에 세련되면서도 저속한 잔치나 벌이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빚을 빼면 더이상 고귀함의 자질을 보일 수 없는 귀족 출신들이 그들이었다. 자신의 섭정이 토지소유자로는 만들어 주었으나 농부로는 만들지 못한 술라 군단병들 금지된 자들 금지된 자들의 첫 상속분을 받아 낭비해 버리고 두번째 분을 찾아헤매는 자들 등 이 모든 이들이 기존 질서를 뒤엎기 위해 싸우러 불러들이는 기치 밑이라면 무엇이 쓰여 있는지 상관없이 모여들 준비가 되어 있다. 야심가들 비슷한 필요로 부터 재능을 갖춘 야심가들은 인기를 찾아 스스로를 이 야당에 밀착했다. 이들 중엔 극히 폐쇄적인 옵티마테스(Optimates)에서 입당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승진 기회를 거부해서 무력으로 그 팔랑크스(phalanx)를 뚫고 민중적 지지로 과두제적 배타성과 서열을 가진 법률을 박살내려 하는 자들 뿐 아니라 야심상으로 공모의 반경에 세계의 운명마저 결정짓는 이상에 뜻을 둔 더 위험한 자들까지 있었다. 특별히 변호인 석—술라가 개방해 둔 유일한 합법적 반대의 터전—에서는 그 섭정의 생시에도 이런 야심가들이 법학의 공인된 무기와 전투적 언변으로 이 복고체제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예를 들어, 아르피눔(Arpinum)의 지주의 아들인 노련한 연설 마르쿠가스 툴리우스 키게로(648년[BC106] 1월 3일 출생)가 이 독재관에 대한 반대에서 대담함과 신중함을 섞어 자기 이름을 급속히 알렸다. 그 맞수가 고관 의자를 마련해 남은 여생을 만족스럽게 앉아 지내는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런 노력들은 대단한 중요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좌석이 대중적 인물을 주인으로 찾지 못하고 가이우스 크라쿠스(Gaius Gracchus )가 후계자를 찾게 되면 생사의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허나 그런 이름은 그 주인이 이런 대단한 목적을 제안할 수 있는 이름의 소지자는 적어도 언급되지는 않았다.

 

반대당의 실력 술라가 조직한 과두정부가 힘겨루기하는 반대당은 이런 류로 되어서, 아마 술라 자신이 예상한 것 보다 이른 이 때 그의 죽음에 의해 지시되었다. 그 작업은 전혀 쉬운 것이 아니며 이 시기 다른 정치사회적 악들로 더 어렵게 되었다—특히나 민간분야 최고정무관에 속한 속주들에 군사적 수장들을 유지해야 한는 것과 군단 없이 수도에 몰려든 이탈리아와 이탈리아외부 인구 그리고 사실상 거기서 엄청난 자유상태로 살아가는 노예들를 다루어야 한다는 지독한 이중의 곤란이 컸다. 원로원은 마치 사면에서 위협에 노출된 요새에 위치한 것 같았으나 심각한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술라에 의해 조직된 저항수단은 상당하고 지속가능한 것이었으며, 술라가 세운 정부에 대다수 국민이 분명히 취향을 달리하면서 적대감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정부는 오랜 기간 그 목적 혹은 수단에 동의하지 않는 반대파의 지도부 없이 수십조각 나 있는 혼란스런 오합지졸 무리에 대해 견고한 성벽을 이루었다. 오직 자리를 지키며 그런 그 요새를 건설했던 정력의 불꽃 정도만 그 방어에 붙여주는 정도만 필요했다. 스스스로를 방어하지 않는 수비대들의 경우에는 공들여 지은 요새성벽과 해자도 헛되기 때문이다.

 

지도자 부재 양 진영에서 모든 것이 지도적 인사들에게 궁극적으로 더 의존할 수록 양쪽 다 지도자가 없을 때는 더 불행해진다. 동아리체제 이 기간의 정치란 철저하게 더 타락된 형태의 동아리정치 영향하에 있었다. 이는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가문과 동아리들의 닫힌 연합들이 국가에 대한 귀족적 조직화와 불가분했고 수세기간 로마에서 성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들어서야 그들이 전권적이게 되었는데 지금(690년[BC64] 처음)에야 그들의 영향이 억압의 법적 수단에 의해 견제되기 보다는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질있는 모든 인사들 과두적 자산보다는 대중적 지지를 가진 자들이 헤테이리아이(Hetaeriae)에서 회합했다. 마찬가지로 시민들도 할 수 있다면 무리지어 군사조직과 밀접히 연계된 자기 선거구에서 있는 정치적 행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선거구에는 "부족분배자(divisores tribuum)"라 불리는 그 구를 대표하는 자연적 수장이나 대리인들이 있었다. 이런 정치적 동아리들을 통해 모든 것이 사고 팔렸다. 유권자의 표가 특히 그랬으나 원로원 의원이나 재판관들의표도 마찬가지며 거리소요를 만들어내는 주먹들과 그를 감독하는 두목들도 그랬다. 상하계급의 모임은 요금으로만 구별되었던 것이다. 헤테이라이가 선거를 결정했고, 헤테이라이가 탄핵을 의결했고, 헤타이라이가 그 방어를 수행했다. 이들이 빼어난 변호사를 확보했고 비상한 때에 판관투표권이라는 수익성 좋은 거래를 대규모로 쫓는 투자들 중 하나와 무죄거래를 했다. 헤타이리아이는 효과적 소규모 부대로 수도의 거리를 호령했고, 이 수도와 함께 더무 자주 국가를 호령했다. 이 모든 일들은 특정 규칙에 따라 소위 공개적으로 행해졌다. 헤테이라이 체계는 국가행정의 어떤 부서보다 잘 조직운영되었다. 문명으로 포장된 사기꾼들 중에 흔히 그렇듯 부정한 절차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어야 한다는 묵계는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비밀로 하지 않았고 뛰어난 변호사들은 고객의 헤테이라이와의 관계에 대해 드러내놓고 암시함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이런 일로부터 초연하고도 공직에 나감을 주저하지 않는 한 개인이 있다면 그는 정치적 돈키호테 마르쿠스 카토(Marcus Cato)이다. 당파와 당파싸움은 이 동아리와 그 경쟁자들로 대체되었고 정부는 이들의 공모로 대체되었다. 푸블리우스 케테구스(Publius Cethegus)라는 더 애매한 인물로 전에는 최고의 열심 마리우스파 중 한사람이자 후에는 술라에게 환영된 투항자가 있었는데[각주:4], 이 기간 중의 정치적 행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역할을 했다—교활한 고자질장이이며 원로원정파간 중재자로서 그리고 모든 도당들의 비밀에 정치가다운 투시안을 가진 데 있어 비길데가 없는 자였다. 때로 가장 중요한 명령권직에 대한 지명은 그의 정부인 프라이키아(Praecia)의 말로 결정되었다. 이런 맹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평범을 넘지 못할 때 있는 것이다. 보통 이상의 재능의 어떤 사람도 거미줄 같은 당파체계를 쓸어내지 못했지만, 실상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능력있는 이들에 대한 비참할 정도의 부족함이 뒤에 있었다.

 

 

 

 

 

 

  1. IV. VII. Bestowal of Latin Rights on the Italian Celts, 527년. [본문으로]
  2. 뛰어난 문학교사로 해방노예인스타베리우스 에로스(Staberius Eros)가 금지된 자들의 자녀들에게 무료로 강의를 듣게 하였다는 것에 중요한 특징이 볼 수 있다. [본문으로]
  3. IV. X. Proscription-Lists [본문으로]
  4. IV. IX. Pompeius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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