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라쿠스형제시대까지 종속된 지역들

 

 

[종속국들] 마케도니아 제국의 소멸을 맞아 로마의 주도권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에서 부터 나일강과 오론테스강의 하구 쯤에 이르는 지역에서 기정사실이 되었을 뿐만은 아니었다. 마치 운명의 최종 판결처럼, 불가항력적인 압력이 그들 민족들을 억눌러 가망없는 저항에 죽든 희망없는 고통의 감내 속에 죽든 택일케 하였다. 만일 역사가 열성 독자들을 역사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모든 나날들, 봄과 겨울의 정경들 구석구석을 동행시킬 권리가 없다면, 역사가는 이미 로마제국의 병합된 스페인 속주들과 아프리카-희랍-아시아라는 아직 로마의 보호국으로 대우받는 지역들 양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월한 세력과 철저한 약자 사이의 이런 다층적이나 단조로운 변화들을 추적하는 황량한 작업은 피하고 싶도록 유혹될 것이다. 그러나, 개별 충돌이 아무리 하찮고 부수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에 총체적으로 깊은 사적 중요성들이 속하며, 이 시기 이탈리아의 여건들도 속주들이 모국에 보이는 반작용을 통찰함으로서 이해 가능한 것이다. 

[스페인] 자연적으로 이탈리아에 속할 것으로 간주되는 지대들을 제하고--그 마저도 토착민들이 완전 복속된 것은 절대 아니어서 리구리아인(Ligurian), 사르데냐인(Sardinians), 코르시카인(Corsicans)은 로마의 영예("마을 정복 기념 개선식"-윌리엄 딕슨 역)를 높여주었다, 이 시기의 시작 즈음 공식적인 로마의 주권은 피레네산맥(Pyrenees) 너머 동부와 남부의 대부분인 두 개의 스페인 속주에서만 확립되었다. 이 전에[1] 이 반도 내의 사태들을 기술하는 것이 시도되었었다. 이베리아인(Iberians), 켈트인(Celts), 페니키아인(Phoenicians), 희랍인(Hellenes), 로마인(Romans)이 거기서 잡거하였다.  문명화의 가장 다양한 형태와 단계가 거기에 공존하였으며 다양한 지점에서 교차하여, 이베리아의 고대문화가 완전한 야만풍과 병존했고, 페니키아와 그리스 상업도시들의 문명화된 상태가 시민(대규모 수비대-딕슨 역) 주도적 라틴화와 공존했다. 이는 은광(銀鑛)에서 쉴새 없이 일하는 수많은 이탈리아인에 의해 가속되었다.  이런 면에서, 소도시 이탈리카(Italica: 세비아Seville 근처)와 라틴식민시 카르테이아(Carteia:: 지브롤터만 상)는 언급할 가치가 있다--후자는 라틴어와 이탈리아 정체를 가진 최초의 해외 도시공동체였다. 이탈리카는 노(老) 스키피오가 스페인을 떠나기 전 (548년[기원전 206년]) 그 반도에 잔류하고 싶어하는 그의 퇴역병들을 위해 세웠다. 아마 시민공동체라기 보다는 시장(市場) 위주의 소도시 정도로 였을 것이다[2]. 카르테이아(Carteia)의 설립은 583년[기원전 171년]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로마 병사와 스페인 비녀들 사이에 낳은 자식들인 병영 아이들 다수에 의해 유래되었다. 그들은 법률상 노예이나 사실상 자유 이탈리아인으로 자란 이들로, 이제 국가적으로 해방되어 카르테이아의 옛 거주민들과 연계된 상태로 라틴 식민시로 제도권으로 들어간 것이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가 이 에브로강(Ebro)의 속주를 조직한(575년[기원전 179년], 576년[기원전 178년],[3])  이후 거의 30여년간의 스페인 속주들은, 켈트이베리아(Celtiberians)와 루시타니아(Lusitanians)에 대한 한두 번의 원정 전쟁에 대한 언급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평화의 축복을 누렸다.

[루시타니아 전쟁] 그러나, 더욱 심각한 일들은 600년[기원전 154년]에 있었다. 루시타니아인들은 푸니쿠스(Punicus)라는 족장의 지도로, 로마영토에 침입 그들에게 협력해 맞선 두 로마 총독령을 덮쳐 다수의 로마인을 죽였다. 베토네스족(Vettones)-타구스강(Tagus)과 상두에로강(Upper Douro)사이에 있다-은 그 때 루시타니아족과 이해를 같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제 지중해 까지 뻗쳐나가 심지어 로마인들의 주도 신카르타고(카르테헤나Cartagena)에서 머잖은 바스툴리-페니키아인(Bastulo-Phoenicians)들의 땅까지 약탈했다. 로마에서도 이를 중대히 여겨 스페인에 집정관 한 사람을 파견하기로 결론 내리는데 이는 559년 이래 없던 일이었다. 원병 배치를 서둘기 위해 새해 집정관들의 법적 취임일을 두달 반 앞당겼다. 이리하여, 마르스 달(3월)의 15일에서 야누스 달(1월)의 초하루로 집정관 취임일이 변경되어 오늘 날에 이르기 까지 이날이 신년으로 정해지게 된 시초인 것이다.  그러나 집정관 퀸투스 플라비우스 노빌리오르(Quintus Fulvius Nobilior)와 그의 군대가 닿기도 전에, 타구스 우안 상에서, 먼 스페인 속주총독 법무관 루키우스 뭄미우스(Lucius Mummius)와 푸니쿠스 몰후 후계자인 카이사루스(Caesarus)에게 지도되었던 루시타니아인들 사이에서  아주 심각한 교전 하나가 일어났다(601년[기원전 153년]). 운명의 여신은 처음에 로마인들에게 미소지었다. 루시타니아 군대는 무너지고 진지는 탈취되었다. 그러나, 로마인은 일정 부분 행군에 지치고 일정 부분은 무질서한 추격에 분산된 상태에서 결국 패배당한 적들에게 완패하였으며, 적의 진지는 물론 아군 진지 마저 잃고 9000명의 사망자를 감수하였다.

[켈트이베리아 전쟁] 전쟁이 불길이 더 깊숙히 더 멀리까지 타올랐다.  카우카이누스(Caucaenus)가 지도하는 타구스 좌안의 루시타니아인들이 로마인에게 복속하였던 켈티키족(Celtici: 알렌테주Alentejo에 있었다)을 덮쳐 그들의 소도시 코니스토르기스(Conistorgis)를 빼앗았다. 루시타니아족은 뭄미우스 부대에게서 빼앗은 로마 군기들을 즉시 켈트이베리아인들에게 주어 승전보와 경계로 삼았으며, 이들 중에도 역시 동요가 없을 수 없었다. 강력한 아레바카이족(Arevacae 또는 Averaci; 두에로강과 타구스 강의 수원 주변)과 인접해 사는 켈트이베리아계의 두 개 소부족 벨리족(Belli)과 티티족(Titthi)은 자신들의 소도시 중 하나 세게다(Segeda)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성벽을 짓는데 여념이 없는 그들에게 로마인들은 종속 공동체들이 자의로 도시 세우는 것을 금하는 셈프로니우스의 규제에 따라 이를 단념토록 명하면서 동시에 조약에 명시되었으나 상당기간 요구하지 않은 인력과 자금의 공납을 요구하였다. 이 스페인 부족들은 두가지 모두를 거부하여, 도시의 창설이 아닌 확장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하였으며 공납 역시 유예된 것이 아니라 면제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아피아누스의 전쟁사(43장)에 의하면 면제된 것은 사실이나 로마는 로마인의 이익에 부합할 때까지만이라고 답한다.] 이에 노빌리오르가 가까운 스페인 속주(Hither Spain)에 누미디아 기병과 10마리의 코끼리를 포함한 근 30,000의 병력으로 나타났다. 신도시 성벽은 여전히 미완인 만큼 대부분의 거주민들은 항복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인 동조자들은 처자와 함께 강력한 아레파카이족에게로 달아난 후, 그들을 불러내어 로마인에 대한 공동투쟁을 결의했다.  아레바카이족은 루시타니아인의 뭄미우스에 대한 승리에 고무되어 그에 동의하며 세게다의 망명객인 카루스(Carus)를 장군으로 뽑았다. 선출 후 3일 째, 이 용감한 장군은 쓰러졌지만 로마군 역시 패했고 거의 6000의 로마시민이 살해되었다. 8월 23일 볼카날리아(Volcanalia) 제일(祭日)은 이 슬픈 날을 기념했다. 장군의 몰락은 아레바카이족에게 자기들의 최강력 요새인 누만티아(Numantia: 지금의 가라이Guarray로 두에로강 상의 소리아 북쪽 스페인 동맹)로 후퇴하게 하였고, 누빌리오르는 그들을 쫓았다.  이 도시 성벽 아래에서 두번째 교전이 일어났다. 로마인들은 처음에 코끼리 부대를 이용 스페인부족을 성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동안 상처입은 한 마리의 동물로 인한 혼란에 뒤엉켜 성벽에서 튀어나온 적에게 두번째 패배를 당했다. 이런 저런 또 다른 불운들--원병을 불러모으려 배치된 로마기병대의 섬멸 등--은 히스파니아 키테르오르(Hither Spain) 속주 사태에서 로마인들을 곤란하게 했으며 로마인들이 금고와 창고를 둔 오킬리스(Ocilis) 요새가 적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가져왔고, 이에 반해 아레바카이족은 승리는 아니라도 로마인들에게 평화를 받아쓰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하였다. 이러한 불리는 뭄미우스가 남부 속주에서 거둔 성공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그 패배에 그의 군대가 약화됐지만, 그는 군대와 함께 타구스 우안에서 무심히 흩어져있던 루시타니아인들을 물리치며 다시 로마인들이 완전히 구축당했던 좌안으로 도하해냈다. 아프리카에도 진출했던 그는 적의 남부속주를 완전히 쓸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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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는 인근의 그리스 동족 국가들을 복속시켜 그 주민들을 헬로트(농노)화한 자유민 스파르타인과 그 외의 피지배계급이 전혀 다르게 국가에 의해 기획된 삶을 살아가는 신분제 국가였으며 그런 악명높은 계급신분제를 떠받치는 악명높은 비밀경찰 조직의 고대적 효시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스파르타의 크립테이아(Krypteia)로 플루타르크에 언급된다. 그들은 유능해 보이는 피지배인들에 대한 각종 테러 살인을 감행하고 이 과정을 훌륭하게 마친 자만이 스파르타 국가의 진정한 남자 자유민으로 거듭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과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류의 기획 프로그램의 소재였던 HID부대의 활동도 왠지 그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는 분단국가의 비극이다. 최근 남한 대통령의 "목을 따러" 왔던 북한남파부대원이었던 김신조 목사의 과거의 회고에서 현대의 "크립테이아"라 부를 만한 임무를 수행하는 부분을 찾아낸 것 같다. 그의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에는 청화대공격을 위해 남파되기 전 훈련과정 중에 겼었던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는 부분이 있는데 흥미롭긴 한데 자세하지가 않아 고대의 임무와 얼마나 유사한지 가늠하긴 어렵다.

 

우리들은 대덕리 외딴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길을 가던 허름한 차림의 사내 둘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산 속 깊숙이 끌고 갔다. 수갑을 채워 우리 앞에 꿇어 앉힌 후, 몰래 녹음기를 틀어 놓았다.

"우리는 남반부 특공대다.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라. 그렇지 않으면 알지?"

옆구리에 단도를 들이대면서 위협했다.

"당신들, 당원이지?"

"예."

"직책이 뭐야?"

"세포 위원장입네댜."

"무슨 일로 어디 갔다 오는 일이가?"

"군당에 강습 맏으러 갔다 옵네다."

"우리에게 협조하겠소?"

"......."

대답이 없었다.

조장이 소리쳤다.

"해치우시오."

그 때서야 늙어 보이는 자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목숨만 살려......"

젊은 놈도 옆구리를 단도로 지르려 하자, 악 소리를 지르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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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서방의 복속

 

[서방의 로마화]

역사적 경로가 정치적 이기심의 시시한 단조—이는 원로원의사당에서 수도거리에서 있던 전투들이다—에서 로마의 첫 군주가 그나이우스냐 가이우스냐 마르쿠스냐로 불릴지에 관한 문제 보다 더 중대한 문제로 전환하려 할 찰나—그 영향이 세계의 운명에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는 사건의 문턱—에, 우리는 이제 잠시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로마인이 지금의 프랑스에 대한 정복한 것과 독일과 영국의 거주민과 접촉한 것을 관점이 세계사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도록 하는 것을 역시 허용할 수 있다. 한 국가로 성장해 온 민족이 정치적 미성년자로 있던 이웃을 흡수한다는 것과 문명화된 민족이 지적미성숙에 있던 이웃을 흡수한다는 법에 따라 보편적으로 유효하고 중력법칙만큼이나 자연법칙인 이 법 덕에,이탈리아 국민(문명화가 외적이고 불완전한 방식이긴 하나 우월한 정치발전과 우월한 문명화를 동시에 결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국민)은 멸망을 눈앞에 둔 운명의 동방의 그리스인들을 복속시키고 그보다 낮은 등급의 서방의 민족들—리비아인들(Libyans), 이베리아인들(Iberians), 켈트족(Celts), 게르만족(Germans)—이 이주민들을 통해 밀려나게 했다. 잉글랜드가 같은 권리로 아시아에서 뛰어나나 정치적으로 무능한 경쟁문명을 복속하고 아메리카와 호주에서 광범위한 야만국들을 상대로 그 국민성에서 고귀한 인상을 남겼고 그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로마귀족정은 이 업무수행할 예비조건인 이탈리아 통일을 성취하였다. 그 과제를 자체로 해결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외의 정복은 언제나 단순 필요악이나 국가의 범위외의 재정적 소유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최고의 목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고 정력적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로마의 민주정 혹은 군주정—왜냐면 둘은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의 불멸의 영예인 것이다. 환경이란 불가항력이 그 길을 놓은 것으로 원로원이 그 의지에 반해 동방은 물론 서방에서의 로마 미래 지배역의 기초를 확립한 것, 속주들로의 로마인의 이민—공적인 근심거리로 온 것을 의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방 지역에서는 어쨌든 상위문화의 개척자로서 온 것—이 본능의 문제로서 추구한 것, 이것들은 로마 민주정의 주조자인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가 정치인다운 명확함과 확신으로 이해하여 실행하기 시작했던 것들이었다. 새로운 정책의 두가지 기본적 관념—희랍적일 때 로마권력 아래 그 영토를 통합하고 희랍적이지 않을 때는 식민화한다—은 이미 그라쿠스 시대에 실제적으로 아탈루스(Attalus)의 왕국을 몰수할 때와 플라쿠스(Flaccus)가 알프스이북을 정복할 때 인식되었던 바다. 하지만 유력한 반작용이 다시 한번 방해했다. 로마국가는 철저한 점령이나 적당한 경계없이 나라들의 황폐한 집합체로 남았다. 스페인과 그리스화된 아시아 지역의 소유는 해안을 따라 로마에 속하지 않은 경계지대를 겨우 가진 넓은 영토로 모국에서 분리되었다. 아프리카 북해안에 카르타고(Carthag)와 키레네(Cyrene)의 영지만 당랑 오아시스 같이 점령되었다. 종속된 영토조차도 많은 부분 특히 스페인에서 이름만 로마에 종속된 상태였다. 그들 영역에 집중하고 주변영지 정리하는 것에서 정부측에서 한 일은 절대적으로 없었고, 함대의 쇠퇴가 드디어 먼 소유지들 간의 마지막 묶음을 끊었다. 민주주의파는 분명히 그 고개를 들자마자 그라쿠스적 정신—특히 마리우스가 이 생각을 아꼈다—으로 대외정책을 주조하기 시작했다만 키를 제대로 쥘 수 없는 상태라 계획은 충족되지 못하다가, 민주주의파가 684년[BC70] 술라체제의 전복 후 복귀해서야 이 관점에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지중해에 대한 그들의 주권이 우선 회복되었는데 이런 것은 로마처럼 한 국가에는 생존의 중대문제였다. 동쪽으로는 더우기 유프라테스(Euphrates)의 경계가 폰투스(Pontus)와 시리아(Syria) 속주들의 병합으로 보호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알프스 건너로는 북쪽으로나 서쪽로 로마 영토의 주변정리를 하고 동시에 그곳에 희랍문명을 위한 그리고 이탈리아 종족의 혈기와 열정을 위한 처녀지를 얻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카이사르 정복의 역사적 중요성]

이 과업을 수행한 것이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였다. 갈리아를 단순히 카이사르가 임박한 내전을 위해 자신과 자기 군단이 훈련하는 연병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한 개 실수 이상이며 역사를 지배하는 성령(신성한 정신)에 대한 테러다. 서방의 복속은 카이사르에게 알프스너머의 전쟁에서 후대 그가 세운 세력의 기초를 놓는다는 목적에 한 수단이었을지라도, 그것은 수단이 그 자체로 목적도 되는 천재적 정치인의 특권이다. 카아사르는 물론 그의 당파를 위해 군사적 힘을 목적으로 두었지만 그 당원으로서 갈리아를 정복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계속되는 게르만족의 침입의 위협에 맞서 로마 세계의 평화를 수호할 댐을 쌓아야 하는 직접적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 중한 목표도 카이사르에게 갈리아가 정복된 최고의 궁극적 이유는 아니다. 로마시민들에게 옛 고향은 너무나 좁아 쇠퇴의 위기 중에서, 원로원의 이탈리아 정복 계획은 이들을 파멸에서 구한 것이다. 이제 이탈리아란는 집이 너무 협소하여졌다. 다시 한번 국가가 방식은 비슷하나 더 대규모로 반복되는 동일한 사회악들 아래 신음하였다. 카아사르를 알프스 너머로 이끈 것은 천재적 발상이자 거대한 희망으로, 곧 그의 동료시민들에게 새로운 무한경계의 집을 마련하여 국가를 두번째로 더 넓은 기초 위에서 재생시키려는 이상과 확신적 기대였던 것이다.

 

[스페인의 카이사르]

어떤 의미에서 카이사르가 693년[BC61] 먼스페인에서 수행한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서방정복의 목적을 예견할 수 있기도 하다. 스페인이 로마인을 따라온 이래 그 서해안은 칼라이키족(Callaec)에 대한 데키무스 브루투스(Decimus Brutus)의 원정 이후까지 실질적으로 독립상태였고[각주:1], 북해안은 숫제 발를 딛이지도 못했다. 복속된 속주들이 그런 곳으로 부터 노출되어 일어난 노략질은 스페인의 문명화와 로마화에 적지 않은 장애였던 것이다. 이에 맞서 서해안을 따라 카이사르는 원정의 방향을 잡았다. 북으로 타구스(Tagus) 강과 경계한 헤르미니우스 산맥(Herminian mountains: 세라 다 에스트렐라Sierra de Estrella)을 가로질렀다. 주민들을 정복해 부분적으로 평지로 옮긴 후 그 나라를 도루(Douro) 강 양안으로 축소시키고 반도의 북동지점에 도달했다. 거기서 가데스(Gades)에서 온 소함대의 지원으로  브리간티움(Brigantium: 코로나Corunna)을 점령했다. 이에 의해 대서양 인접 종족들, 루시타니아인(Lusitanian)과 칼라이키인(Callaecian)들이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였으며, 정복자측에선 즉시 로마에 지불할 세공을 줄이고 공동체의 재정문제를 맡음으로써 더 관용적으로 속민들의 위치를 정하는데 주의하였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장군이자 정치인의 군사적이고 행정적인 데뷔에서 후에 더 큰 무대에서 입증한 같은 재능과 지도자적 이상을 분별해 낼 수 있긴 하지만, 이베리아(Iberia) 반도 내의 그의 대리는 깊은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나 잠정적이 것이었다.  특히 강한 신체적 민족적 특성 때문에 상당기간 꾸준하게 계속 유지된 행동 외에는 거기에다 지속적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Tätigkeit hier eine dauernde Wirkung äußern konnte.]

[갈리아]

서방에서의 로마의 발전상에 더 중요한 부분은 피레네(Pyrenee) 산맥과 라인(Rhine) 강,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로 펼쳐진 나라 아우구스투스 시대이래로 켈트인의 땅—갈리아(Gallia)—으로 특히 호칭된 나라에 그 운명이 유보되어 있었다. 켈트인의 땅이란 엄밀히 어떤 때는 더 좁고 다른 때는 좀 더 넓게 볼 수 있는 말로, 그 나라는 아우구스투스 이전에는 민족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이유로 카이사르가 696년[BC58] 그의 도착시에 만났던 아주 이질적인 이 국가의 분명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

 

[로마속주 갈리아]
지중해 위에 있는 이 지역은 론강 서편에 랑그독(Languedoc)을 그 동편에 도피네( Dauphine )와 프로방스(Provence)를 아우르면서 60년간 로마의 한 속주였는데, 로마의 칼은 이 곳을 휩쓴 킴브리아족의 침공 이래 거의 쉴 날이 없었다. [전쟁과 반란] 664년[BC90], 가이우스 카일리우사(Gaius Caelius)가 살리에스(Salyes)족과 아쿠아이 섹스티아이(Aquae Sextiae) 쯤에서 싸우고, 674년[BC80] 가이우스 플라쿠스(Gaius Flaccus)[각주:2]가 스페인으로 진군할 때 다른 켈트 주의 민족들과 싸웠다.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총독 루키우스 만리우스(Lucius Manlius)가 피레네산맥 너머 그의 동료들을 원조하려고 서두를 때 일레르다(Ilerda: 지금 레리다Lérida)에서 패해하여 돌아오는 귀국 도중에 로마속주의 서방 이웃들이라 할 아퀴나티아(Aquitani)족에게 두번째로 패배당하였을 때(676년 쯤[각주:3]), 이는 피레네산맥과 론강 사이의 속주민들의 일반적 봉기에 불을 집힐 것처럼 보였다. 폼페이우스는 칼로 반란의 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칼로 길을 뚫고[각주:4], 반란의 벌로 볼카아 아레코미키(Volcae-Arecomici)족과 헬베족(Helvii)의 영토(가르와 아르데슈주 주: Dep. Gard und Ardêche)를 마실리족(Massiliot)에게 넘겨주었다. 총독 마니우스 폰테이우스(Manius Fonteius:678-680[BC76-74])는 이런 계획을 실행하였고 보콘티족(Vocontii: 프랑스 드롬주)을 정복하여 반도들에게 마실리아(Massilia)를 보호하고 그들이 공성중던 그곳의 로마수도 나르본(Narbo)을 해방함으로써 속주의 평화를 회복하였다. 스페인전쟁의 고통의 분담[각주:5]과 로마인의 공식 비공식 수탈이 갈리아 속주들에게 가져다 준 재정난은 절망과 함께 평온하게 놔두지를 않는 것이었다. 특히 나르보에서 가장 먼 알로브로게스족의 마을은 항구적 소요에 있어던 점은 가이우스 피소(Gaius Piso)가 688년[BC66]에 이룬 "평화구축"은 물론 로마에서 알로브게스의 사절단이 691년[BC63] 무정부주의자음모에서 한 행동으로[각주:6] 뒷받침되거니와 또 후에는 (694년[BC61]) 이 절망적 전쟁 속에서 알로브로게스의 지도자 카투그나투스(Catugnatus)의 공개적 반란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처음 선전하였으나 솔로니움(Solonium)에서 영광스러운 저항 후에 총독 가이우스 폼프티누스(Gaius Pomptinus)에게 정복되었던 것이다.   

[경계]

이 모든 충돌들에도 불구, 로마 영토의 경계는 실질적으로 별 진전이 없었다. 폼페이우스(Pompeius)가 세르토리우스군의 잔당을 정착시킨 루그두눔 코페나룸(Lugudunum Convenarum)[각주:7], 그리고 톨로사(Tolosa)와 비엔나(Vienna)와 제네바(Genava) 들이 여전히 서쪽과 북쪽을 향하는 가장 먼 거리의 로마 마을이었다. [로마와의 관계] 그러나 동시에 모국을 위한 이와 같은 갈리아 소유의 중요성이 끊임없는 증대되는 중이었다. 이탈리아에 친숙한 빛나는 기후, 비옥한 토양, 브리타니아까지 상업항로가 열린 유리한 위치의 크고 부유한 지역, 모국과의 수륙으로 쉬운 교통이 남부 갈리아에게 이탈리아를 향해 그 중요성을 급속히 더해갔는데, 이는 다른 소유지들 예컨대 스페인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시기 정치적 난파를 당한 로마인들이 도피처를 특히 마실리아(Massilia)에 차리면서 한번 더 이탈리아의 문화와 사치를 거기에 세우자, 이탈리아로 부터 자발적인 이민이 점차로 더 론강과 가론강에 매혹되었다. "갈리아 속주"란 카이사르 도착 10년 전에 그려진 풍경으로도 "상인들로 가득찼고 로마시민들로 북적댁 있으며 갈리아의 토민은 로마인의 간섭없이 어떤 사업도 하지 못하고 갈리아에서 도는 모든 동전들도 로마시민의 회계장부를 거친다"는 것이다. 같은 묘사에 나르보(Narbo)의 식민가들 외에도 경작을 하고 가축을 기르는 로마인들이 다수 갈리아에 거주하였다 하며,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로마인에 의해 소유된 속주 토지 대부분이 마치 아메리카의 초기 시대 영국 소유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 처럼 이탈리아에 사는 고위 귀족의 손에 있어 농민과 목축업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사환—노예나 해방노예—으로나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로마화 발단]

이런 환경에서 문명화와 로마화가 얼마나 급속히 토민들 중에 퍼졌는지 이해하는 것은 쉽다. 켈트족들은 농경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주인들은 검과 쟁기를 바꾸도록 강제하였으며 알로브로게스족 주민들이 부분적으로 이에 거세게 저항한 것은 아주 신뢰할 만하다. 이전 시기 희랍주의 문화도 일정 정도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고급문화 요소, 포도와 올리브 경작[각주:8]에 대한 그리고 문자사용에 대한[각주:9] 돈의 주조에 대한 자극이 마실리아에서 들어왔던 것이다. 희랍문화는 이 경우 로마인들이 보류했다고 볼 수 없다. 마실리아는 그들에게 통해 잃은 것보다 영향 받은 바가 많았으며 심지어 로마시기에 조차 그리스 의사와 수사학자들이 공공연히 갈리아 주들에 고용되었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로 남부 갈리아의 희랍주의는 로마인에 의해 이탈리아에서와 같은 것을 획득했다. 뚜렷하게 희랍문명은 라틴-그리스 혼성문화를 주었고, 이는 거기서 곧 대거 개종자들을 만들어 냈다. 남부 갈리아의 거주민으로서의 "토가걸친 갈리아인"은 이미 로마화가 종료된 후자와 같지 않았지만, 북부 지구에 아직 복속되지 않은 "장발의 갈리아인"과는 뚜렷이 구분되었다. 그들 중에 자연스럽게 된  세미컬춰(semiculture)가 야만스러운 라틴어에 대한 조롱 소재를 충분히 주었으며, 민중들은 틀림없이 "토가와의 관계"로 켈트 후손이라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형편없는 라틴어는 먼 알로브로게스인들 조차도 로마당국과 거래하고 통역없이 로마법정에서 할 수 있게 했다. 

이들 지역의 켈트계 그리고 리구리아계 인구가 그 민족성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희망없는 반란으로 충분히 증명되는 불관용성으로 대표되는 정치경제적 억압 속에 고통받으면서, 토착인구는 우리가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발견하는 똑같은 고급문화의 자연수용과 나란히 나아갔다. 아쿠아이 섹스티아이(Aquae Sextiae) 나아가 나르본은 상당한 도회였는데 아마도 베네벤툼(Beneventum)과 카푸아(Capua)와 나란히 거명되었으며, 최고로 조직되고 더 자유스럽고 자위능력이 최고였으며 로마의 종속된 그리스 도시 중 가장 강력한 마실리아는 로마보수파가 아마 좋은 도시 체제의 모범으로 지목하였던 철저한 귀족정 아래서 로마인에 의해 상당히 넓혀진 중요 영토와 무역권을 소유하면서 레기움(Rhegium)과 네아폴리스(Neapolis)가  베네벤툼과 카푸아에 그러한 것과 같이 라틴계 소도시들과 병립했다.

 

 

 

 

 

 

 

  1. V. IV. Aggregate Results [본문으로]
  2. IV. IX. Spain [본문으로]
  3. V. I. Renewed Outbreak of the Spanish Insurrection [본문으로]
  4. V. I. Pompeius in Gaul [본문으로]
  5. V. I. Indefinite and Perilous Character of the Sertorian War [본문으로]
  6. V. I. Indefinite and Perilous Character of the Sertorian War [본문으로]
  7. V. I. Pompeius Puts and End to the Insurrection [본문으로]
  8. IV. II. Scipio Aemilianus [본문으로]
  9. 예를 들어, 보콘티족 주(Vocontian canton)인 베종(Vaison)에서 발견된 그리스 알파벳으로 기록된 켈트어 비문이 발견된 것을 들수 있다. —σεγομαρος ουιλλονεος τοουτιους ναμαυσατις ειωρου βηλησαμισοσιν νεμητον—. 마지막 단어는 "신성(神性)함"을 말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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