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의 경우, 그의 가계는 자신의 명성에 비해 너무나 불분명하다. 그의 아버지는 네오클레스(Neocles)란 사람으로 아테네에서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레온티스(Leontis) 부족의 프레아리아(Phrearrhia) 구에 살았고 그의 모계로는 외부인인데 그 묘비명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아브로토논(Abrotonon)인 나는 트라키아 여자지만, 그리스의 위대한 빛을
낳았음을 알라! 그가 테미스토클레스니라.

 

그러나, 파니아스(Phanias)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어머니가 트라키아인이 아니라 카리아인이라고 하고 이름도 아브로토논이 아닌 에우테르페(Euterpe)라고 했다. 네안테스(Neanthes)는  그 이름에 카리아의 도시 이름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라고 덧붙였다. 

그 이유는 이렇다. 외부인들은 키노사르게스(Cynosarges)라는 성문 밖 헤라클레스 체육관 중의 하나를 찾았다. 어머니만 불멸의 신이어서 자격있는 신이 아니라고 헤라클레스가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몇몇 출생 좋은 젊은이들을 키노사르게스로 불러 함께 훈련을 했고, 이런 교활한 계획을 성공시켜 외부인과 합법적 시민의 구분을 제거하려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가 뤼코미다이(Lycomidae) 가문과 관련이 됨은 분명한데, 그 가문에 속한 프뤼아(Phlya)의 사당이 야만인들에게 불타자 자신의 비용으로 재건하고 벽화 등을 덧붙였다고 시모니데스(Simonides)는 진술하고 있다.   

이렇게 출생은 미천하나 모든 면에서 충동적일 정도의 정력과 소년이면서 본성적인 현명함이 있었고 선거로 부터의 공직 생활 즉 정치를 열망하였다. 학습을 마친 후엔 여가로 다른 아이들 처럼  쉬거나 빈둥대지 않고 연설연습 등을 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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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그리스의 쇠퇴와 로마의 흥기의 이유로 배타성과 관용을 든다. 그 한 예로 그리스를 동방전제주의로 부터 구한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천한 신분이 모계로 외국인이었던데 비롯되었던 탓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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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레리우스(Valerius)에 관해 민중들을 불쾌하게 한는 것은 이런 것이다. 민중이 자유의 아버지로 받드는 브루투스는 결코 혼자 다스리는 일 없이 즉시 함께 다스릴 동료 집정관을 뽑으려 했을 것이었다. 민중은 '하지만 이 발레리우스는 권력을 자기 혼자에게 집중시키니, 브루투스의 집정관 체제의 후계자로는 적합하지 않은 타르퀴니우스 식의 참주정의 후계자인가 보다'라고 말하곤 햇다. 또 이런 말도 했다. '그가 부순 왕궁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나온다는 것만 다르지 실제로는 도끼와 몽둥이 든 놈들의 호위로 홀로 포룸에 나오는 타르퀴니우스나  흉내내면서, 왜 말로는 브루투스를 추켜세우는 거지? ’ 실상 발레리우스는 벨리아(Velia)[각주:1]라는 화려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 곳이 포룸에서도 높이 솟아 있어 지나다니는 모든 것을 보며 경사져 다가가기 어려웠고, 그래서 그가 거기서 나오면 그 장관이 대단해 마치 왕이나 하는 것 같은 것이었다.

발레리우스는 권력과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아첨보다는 진실과 솔직함에 귀를 열어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친구들의 가벼운 말로 대중들에게 그에 대한 악평을 듣자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장인들을 모아 자신의 집을 완전히 헐어버렸다. 아침이 되자, 로마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모여들었다. 민중은 그의 도량에 사랑과 존경을 품게 되었지만 집에 대해서는 애석해 했는데 나라에서 빼어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질투심이 파괴를 가져온 이 마당에 이제는 마치 그 집이 사람이라도 되었던 것 처럼 슬퍼햇다. 이제 집없는 거지 처럼 다른 사람들과 집을 공유하는 그륻의 지배자에 화가 났다. 그에게 부지를 마련해 집을 지어 줄 때까지 발레리우스는 그의 친구들 집에 들어가 잤다. 새 집은 전보다는 소규모로 지금 파카 포타(Vica Pota)의 사원이 있는 곳에 있었다. 자신 뿐 아니라 정부조차 대중에 고분고분한 것처럼 보이려고, 그는 릭토르의 몽둥이에서 도끼를 빼버렸고, 회의에 갈 때 이를 비스듬히 낮추어 민주주의의 위엄을 강조햇다. 이 관습을 집정관들은 오늘날까지  준수한다.  민중이 알아채기 전에, 그는 겸손함과 절제를 통해 시기심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실질적 권력은 이런 것을 제거한 만큼 많이 확대했고 민중은 그에게 기거이 복종하면서 멍에를 쓰게 되었다. 그들은 그를 곧 푸블리콜라(Publicola)라고 불렀는데 "민중을 사랑하는 자"란 뜻이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푸블리콜라>,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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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우스 '민중을 사랑하는 자'란 별명으로 사랑받은 푸블리콜라는 처음엔 폭군 타르퀴니우스와 무엇이 다른가하는의심을 받기도 했다.  

 

 

 

 

  1. 팔라틴 언덕에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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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위조를 막기 위해, 끊으로 세번 묶은 구멍을 내 봉한 문서들을 고안했다. 마찬가지로 유언에서 첫 두쪽은 유언자의 이름만 서서 공란 채로 증인으로 서명해야 할 사람에게 보내지게 되고 다른 이를 위해 유언장을 쓰는 누구도 그 자신을 위한 유증을 삽입할 수 없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피후견인인 클리안테스(client)는 자기의 변호자에게 적정한 수수료를 지급하여야 했지만[각주:1] 무료봉사하며 국고로 비용을 지불받는 법관들에게는 아니다. 국고와 세무에 관한 재판의 경우는 포룸(forum)에서의 보통 관리들에게로 이전되었고 판관들은 원로원에 호소해야 했다.[각주:2]

 

 

  1. 204 B.C. 의 킬리키아법(Cincian law)은 수수료를 금했으나 아우구스투스가 17 B.C.에 다시 허용하였다(Dio, 54. 18). 클라우디우스(Claudius)는 수수료를 10,000 세스테리우스로 제한했다(Tac. Ann. 11. 5-6). 원로원이 네로 재위 중에 없앴지만(Tac. Ann. 13. 5), 그는 클라우디우스의 법을 다시 부활시켰다.. [본문으로]
  2. 국고담당관(prefects of the treasury)에게 배정되었다. cf. (Claud, ix. 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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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에서 새로운 양식의 건축물을 고안하여 길가든 떨어져 있든 모든 아파트들과 저택 앞에는 현관을 내도록 하였다. 그 평평한 지붕은 불을 끄기 쉽게 하였으며 그 비용은 자신이 지출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도시 성벽을 오스티아(Ostia)까지 확장시켜 그 구시가까지 운하로 바다에 잇게 했다. 많은 가혹한 규제와 새로운 명령들이 그의 시대에 만들어졌다. 사치규제법도 제정되었다. 공공 연회는 스포르툴라이(Sportulae)[각주:1]에 한정했고, 여관에서 조리된 식품을 파는 것은 공과 채소를 빼면 금지되었다. 전에는 모든 진수성찬이 팔렸다. 마찬가지로 새롭고 불경한 미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처벌했다. 전차선수들의 특권인 거리휘젖기놀이를 금햇고 자기자신을 위해서 비슷한 장난삼아 속이고 도둑질할 권리를 만들었다. 경쟁적 극장 판토마임 배우들과 그 당파들이 추방되었다.

 

  1. 원래 돈 등을 담는 작은 바구니. 곡물이나 돈이 뿌려지는 연회를 말하는데 기원은 자신의 피보호인엑 후견인인 귀족이 베풀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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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투스(Brutus)가 이 때 공회당을 오래 떠나있자, 실망과 공포와 침묵이 사람들 사이를 지배했다. 하지만 곧 그들은 동료집정관 콜라티누스(Collatinus)의 우유부단이 아퀼리우스(Aquillius) 형제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방어를 위한 시간을 요구하면서 빈디키우스(Vindicius)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노예이며 고발자가 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콜라티누스는 이 요구를 들어주고 싶어서 회의를 해산하려 하였다. 하지만 발레리우스(Valerius)는 인파에 섞인 이 노예의 인도를 할 수도 없었고 민중이 반역자들을 풀어주는 피해를 감수하게 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그는 아퀼리우스 측 인사들을 체포하고 브루투스를 소환하여 이를 보이며 콜라티누스를 책망하여 두 아들마저 죽음에 처한 그의 동료 집정관 브루투스의 행동에 반하여 반역자들과 국가의 적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들을 살려주려 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 집정관이 그에 화를 내어 빈디키우스를 데려가라고 명하자 릭토르 수행자들이 군중을 헤치고 그 자를 체포하고 그를 구하려는 사람을 구타했다. 그러자 발레리우스와 그의 친구들은 그의 인신을 지켰고 민중은 다른 집정관 브루투스를 불렀다. 브루투스가 뒤를 돌아와 침묵이 흐르자 그는 아들들에 대한 판관은 자신이 했지만 다른 반역자들의 운명은 시민들의 투표에 맡겨두어 누구나 민중에게 연설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민중은 어떤 변호 연설도 듣지 않고 만장일치로 사형을 언도하고 모두 목을 베었다. 콜라티누스는 이미 추방된 왕가와의 연계로 의혹을 받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두번째 이름 자체가 타르퀴누스라는 말소리 조차에도 진저리치는 민중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일들을 겪고 불안해하며 사임후 도시를 떠났다. 새로운 선거가 열려 발레리우스가 집정관으로 선언되고 그의 열정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 이런 보상을 그는 빈디키우스와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로마의 첫 해방노예이자 로마 시민의 한사람으로 만드는 법률을 통과 시켰다. 그에게 어떤 쿠리아 선거구에도 그의 선택으로 등록될 수 있게 했다. 다른 해방노예들은 후대 아피우스(Appius)에게 선거권을 얻었다. 이 빈디키우스에게서 완전한 해방에 '빈딕타(vindict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푸블리콜라>,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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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퀴니우스의 오만과 폭정으로 로마에 왕정이 끝나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최고정무관인 집정관은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에게 돌아갔고 푸블리콜라로 알려진 발레리우스는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첫해 추방당한 타르퀴니우스에 동조하는 음모가 명문가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콜라티누스는 그 처리에 미온적이게 된다. 브루투스와 발레리우스가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위기를 수습한다. 이 과정에서 '빈딕타'라는 말의 유래가 보이는데 이 음모의 고발자로 노예에서 자유민이 된 빈딕티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발레리우스는 콜라티누스 대신 집정관이 되어 일찍 죽은 브루투스를 대신해 공화정 로마를 위기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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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소스(Croesus)와의 면담에 관해서는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가공임을 연대기로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가 너무나 유명하여 잘 증언되고 솔론의 성격에 잘 맞고 그의 아량과 현명함에 적합하다 싶다면 연대기적 문헌들에 얽매여 그것을 빼버리지는 않으려 한다. 그런 문헌들은 오늘날 까지 수천번 수정을 받으면서도 그 모순점에 대한 일반적 답이란 없기도 하다. 그리하여, 솔론이 크로이소스를 사르디스로 초대받게 되자 내륙에 사는 사람이 바다를 처음 구경한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마주치는 모든 강을 바다로 생각하는 것처럼 솔론도 각 궁전을 지나고 많은 비싼옷을 입고 많은 수행자와 호위병을 거느린 왕의 종사들을 다 진짜 크로이소스를 만나게 될 때까지 크로이소스로 생각했다. 왕은 보석과 염색된 의류와 정교한 금제품으로 치장하고 자신의 위엄과 멋진 모습을 보이려 하였다. 그러나 솔론이 이런 모습에 조금도 놀라워 하지 않고 크로이소스의 기대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실제적으로 그가 이를 저속하고 하찮게 보았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이목에 분명했다. 왕은 그의 보물함을 이 손님을 위해 열어제쳐 자신의 나머지 호화로운 물건들을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 솔론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자료를 준다. 솔론이 모든 것을 보게하고 반복해 보고서,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자신보다 더 행복한 사람을 아느냐 물었다.

솔론은 자신의 동료시민인 텔루스(Tellus)란 남자라고 대답했다. 이어 그는 계속 텔루스가 스스로 정직한 사람임을 증명하였고 명망있는 아들들을 남겼으며 조국을 위해 영광스론 위용을 보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답했다. 크로이소스는 즉시 솔론을 이상하고 천박한 친구라고 판단했는데 금은 재보의 넘침을 행복의 근거로 삼지 않고 평범한 한 사인(私人)의 생사를 권력과 통치권을 보유한 자보다 존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또다시 텔루스 말고 그 다음 자신보다 운좋은 이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클레오비스(Cleobis)와 비토(Bito)라는 이름을 다시 말했는데, 형제애와 어머니에 대한 효의심에 어느 누구도 앞지르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녀가 탄 수레가 황소가 느리게 되자 그 멍에를 짊어지고 헤라 신전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녀의 나랏사람들이 그녀를 행복한 여자라 불렀고 그녀의 마음은 대단히 기뻤다. 제사와 연회를 마친 후 그들은 휴식하려 엎드리고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지만 고통없이 평온한 죽음을 많은 영예들이 그들이 바쳐주는 동안 맞이했다. 

크로이소스는 그 때 화가 나서 이라고 외쳤다.

"뭐라고! 그는 그대는 전혀 행복한 사람들 중에 나를 념두에 두지 않는군!"

솔론은 그에게 아첨하기 싫었고 고"라고 왕의 화를 돋구기도 싫었기에 

"오 뤼디아의 왕이시어! 신들이 우리들 그리스인에게 절제 속에 축복으로 준 것같이 절제란 우리에게 보통사람들에게 맞는 작은 지혜를 주었으나 왕에게 어울리는 화려한 것들은 아닙니다. 인생이 모든 운명의 부침들에 종속된 것이라는 것을 봐온 이 지혜는 우리가 가진 좋은 물건으로 우쭐해지는 것과 한 여전히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동안에 인간의 행복을 평가하는 것을 금하고 있있습니다. 변해가는 미래 속에서 모든 것은 변하고 불확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최후까지 번영을 수여한 때에는 그 인간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를 행복하다하는 것은 그가 살아서 생명의 위험을 받는 동안은 여전히 상을 두고 경쟁하는 동안에 선수에게 승리를 선언하고 시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판결은 불안정하고 승인될 수 없습니다"

고 말했다. 이를 말하자 솔론은 화난 크로이소스를 두고 떠났고 그의 말은 채용되지 않았다.      

우화작가 이솝은 크로이소스에게 초빙되어 존경을 받으며 사르디스에 있었다. 그는 솔론이 친절히 왕과 회견치 않은 것에 화가 나 충고했다.

"솔론! 왕들에게 우리가 할 말이란 적고 대부분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을 말해야죠."

솔론은

"그렇지 않소."

라 답하고 다시

"그들에게 말을 많이 않던가 유용한 말을 해야 하오."

라고 말했다.

이 때 크로이소스는 솔론을 경멸했지만 후에 퀴로스(Cyrus)에게 전투에서 패해 나라를 잃고 사로잡혀 화형을 선고받았다. 페르시아인들과 퀴로스 안전에 장작에 묶여있을 때 그는 모든 힘을 다해 '오! 솔론이여'를 세번 외쳤다.

퀴로스가 놀라 이런 극한에서 외치는 솔론이란 어떤 신이나 또는 인간이냐고 사람을 시켜 물었다.  

그러자, 크로이소스는 숨김없이 답했다.

"그 사람은 그리스의 현자이며 내가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누리는 행복의 증언을 위해 불러들였던 사람입니다. 그 행복과 재산이 지금 내가 잃은 것의 악이 소유했을 때의 선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내것이었을 때 그것으로 부터 온 선은 인간의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지만 나로 부터 떨어질 때는 실제로 엄청난 아픔과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때 그가 본 것으로 미래를 짐작하여 나를 내 인생의 끝을 보게 했고 불완전한 짐작으로 감히 내가 우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보고를 받자, 퀴로스는 크로이소스보다 현명하였고 솔론의 말이 그 앞에서 실현되었으므로, 크로이소스를 석방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게 살아 있는 동안 명예를 부여했다. 이렇게 솔론은 한 왕을 구하고 다른 왕에겐 교훈을 전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솔론>, 27-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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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행복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크로이소스 왕에 대한 솔론의 충고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여기서도 소개된다. 필자 개인에게 조금 찔리는 일이 있다면 필자 자신도 그 동안 너무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잘 소화해 내지 못한 무리한 포스팅을 남발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피로함마저 느끼는 이런 일들에 대해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 수정해 보려하지만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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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론(Kylon)의 소동이 끝나고 부패한 사람들이 추방되자 아테네인들은 정부형태에 관한 오랜 분쟁으로 다시 빠져들었고 도시는 그 구획상의 다양함만큼이나 많은 파당들로 나뉘어졌다. 산악지에 사는 이들은 극단적 민주정를 선호하고, 평야에 사는 이들은 극단적 과두정을 선호하였다. 해안사람들은 제3당으로 중간절충적 정부형태를 원하면서 다른 둘과 대립하여 어느 쪽도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했다. 그 때 빈부의 대립과 불화가 고조되어 도시는 다시 위태한 상태였다. 무질서를 잠재우고 소란을 그칠 유일한 길은 참주정을 세우는 일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평민들이 부자들에게 빚을 졌다. 그들에게 땅을 빌리고 6분의1세라는 헥테모이로이(Hectemoiroi)를 내거나 그들의 가족들이 채권자에게 저당잡혀 노예가 도기도 하고 외국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식들을 팔아야 했고 추방당했는데 대금업자들의 가혹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가장 강한 이들이 뭉치기 시작하여 악에 굴복하기를 거부하였고 진실된 인물을 지도자로 뽑았다. 채무자를 해방하고 토지를 재배분하며 정부형태를 완전히 바꿀 인물이 필요했다.

이 때 아테네의 최현인이 솔론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그 시대의 오류에 가장 적게 오염된 인물을 보았다. 그는 불의에 부자들과 교제하지도 않고 빈자의 부족함에 연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불화를 종식하기를 공간청했다. 레스보스인 파니아스(Phanias)는 솔론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동의로 양당을 속였다고 썻다.빈자들에게는 토지분배를 부자들에게 안전확보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솔론 자신은 공직에 기꺼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전자의 욕심과 후자의 거만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필롬브로토스(Philombrotus) 다음으로 아르콘(archon)이 되어 중재자이자 입법가가 되었다. 부자들은 그가 노련하므로 받아들였고 빈자들도 정직함에 찬성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솔론>, 13-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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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론의 개혁전 아테네의 빈부 등으로 분열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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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로마에 이중의 문을 가진 신전을 세웠는데 그 두 문을 전쟁의 문이라 불렀다. 전시에 사원은 개방되었지만 평화시엔 닫혔던 것이다. 후자의 유지는 어려운 문제로 나라가 확장에 따라 야만적인 나라들과 접경함에 따라 충돌하여 전쟁으로 지새던 시기에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안토니우스가 타도되자 닫히게 되었다. 그전에 마르쿠스 아틸루스(Marcus Atilius)와 티투스 만리우스(Titus Manlius)가 집정관인 때 잠깐 닫혔을 뿐이다. 그 후 곧 전쟁이 다시 일어났고 열리게 되었다. 누마왕 당대에는 하루조차 열린 적이 없어 43년 재위간 닫혔을 만큼 비전쟁이 완전한 것이었다.

로마 민중은 이 왕의 의로움과 온유함으로 유화되고 매력을 갖게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이웃도시들 조차 시원하고 맑은 바람을 로마에서 맞기라도 한 것처럼 평화에 대한 깊은 바램을 갖게 되고 땅을 경작하고 아이들을 평화속에 기르고 신을 숭상하게 되었다. 축제와 향연, 차별없이나 두려움 없이 서로를 방문하는 이들간의 후대와 친선교류가 이탈리아 구석구석 성행하였다. 영광과 정의가 누마의 지혜로 부터 모든 이의 가슴에 분수처럼 흘러넘쳤다. 그의 정신의 잔잔한 엄숙성은 세계로 퍼져갔다. 이리하여 시인들의 과장은 이 시대의 인간상태를 그리는데 부족하였다.  

 

철테의 방패손잡이엔 거미줄이 있고

곰팡이가 이제 날카로운 창과 양날 검을 잠식한다.

이제 더이상 시끄러운 나팔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꺼풀이 달콤한 잠을 빼앗는 일도 없다. 

 

전쟁이나 분열 정치적 혁명에 대한 기록이 로마 왕대에는 없다. 그 인물됨에 대해 미움이나 질시가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야심이 그의 왕좌에 대한 음모를 빚게 하는 일도 없었다. 반대로, 그를 틀별히 보살핀 신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의 덕에 대한 존경 혹은 놀아울 정도의 행독은 그의 나달들에 삶을 모든 악에서 떨어지게 하고 순수함을 유지케 하여 그를 플라톤이 여러 세대 후에 감히 정부에 관해 단언했던 다음의 말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요 확증이되었다. 

 

인간의 병은 어떤 신성한 복에 의해 왕의 권력이 철학자적 안목을 갖춘 한 사람에 의해 통일될 때 그치고 사라진다. 거기서 절제 속에 덕을 세우고 악을 지배하게 된는 것이다. 이런 현자야 말로 축복된 인물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는 자들도 축복된 사람들이다.   

 

대중을 다루는데 있어 강제와 위협은 아마 조금도 필요 없다. 그러나 지배자의 생애에서 뚜렷하게 빛나는 예를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볼 때는 기꺼이 현명한 이의 발자국을 따르고 한편으로 정의와 절제가 있는 친선과 일치가 있는 흠잡을 데 없는 축복된 삶을 따라간다. 이런 인생은 모든 정부의 가장 고귀한 목적이며 그는 그의 신민들에게 이와 같은 인생과 생각을 심어줄 왕이었다. 이는 누마에게 두드러진 것이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누마>,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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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젖을 먹고 큰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된 로마 역사는 전쟁과 투쟁으로 점철된 것이었으나, 예외적으로 2대왕 누마는 로마인을 이런 거친 면을 다듬어 평화를 가져오고 평화롭고 온유한 행복으로 인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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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스(Agis)의 재위 중에 금화와 은화가 처음 스파르타(Sparta)로 밀려들고 이 돈들과 함께 부에 대한 욕심과 바램들이 뤼산데르(Lysander)의 대리자들을 통해 성행하였다. 그 자신은 부패하지 않았지만 자기 조국을 부와 사치에 대한 동경으로 채웠고 전승으로 금은이 조국에 유입되면서 뤼쿠르코스(Lycurgus)의 법들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 법들이 아직 유효할 때 스파르타는 한 헌법체제로 운영되는 도시가 아닌 충만된 지혜와 훈련된 전사에 인도되는 도시였다. 시인들의 헤라클레스의 무용담에서 망방이와 사자가죽으로 세계 곳곳을 가로지르며 무법적이고 야만적인 폭군들을 혼내주는 것처럼 우리는 스파르타 역시 망토를 두른 사절단으로 헬라스의 자발적인 복종을 받았으며 때론 방패한 번 휘두루지 않고 한 명의 사절을 보내는 것으로 만 다른 나라들의 불법적 과두정과 참주정을 타도하였고 전쟁에 중재를했고 소요는 끝냈으며, 그 사절의 명령은 각 나라들의 지도자들이 나타나자 마자 지켜졌다. 좋은 통치와 정의를 이로써 도시들은 충만히 누렸다. 

나는 이 스파르타인들이 복종은 알지만 지휘하는 법을 이해하진 못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 놀라 스파르타 왕들이 지휘할 줄을 알기에 나라가 안전이 확보된다는 말을 듣고 '그것 보다는 시민들이 복종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라고 답한 테오폼포스(Theopompus) 왕의 말을 인용해 준다. 인간은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 복종을 기꺼이 바치려하지 않지만, 복종은 한 지휘관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수업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지도자는 좋은 추종자들을 만들고, 기마술의 최종 목적이 말을 다루기 좋게 길들이는 것인 것 처럼사람에게 복종심을 심어주는 것이 통치의 기교인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은 다른 헬라스인들에 자발적 복종심뿐 아니라 그들의 추종자와 신민들이 되고픈 바램까지 심어주었다.   

사람들이 배나 돈 혹은 중장보병을 그들에게 요구하지 않고 단 한 사람의 스파르타 지휘관 만을 요구했다. 그를 얻어쓸 때는 그들이 그에게 영예와 존경을 바쳤다. 이는 시칠리아인들이 길리포스(Gylippus)에게, 할키스인(Chalcidian)들은 브라시다스(Brasidas)에게 아시아(Asia)에 사는 전 그리스 거주민이 뤼산데르(Lysander)와 칼리크라티다스(Callicratidas)와 아게실라오스(Agesilaüs)에게 그러했던 것과 같다. 이들이 민중과 관리의 조정자와 징벌자로 수식되었고 그들의 출신인 스파르타 시는 잘 질서지어진 사적인 삶과 잘 확립된 시민행정의 교사로 간주되었다. 

스파르타의 이런 위치에 대해 비유로 스트라토니코스(Stratonicus)는 그가 아테네인들에게 은밀한 비교의식에 대한 법을 엘레아인들에게는 축제 주관을 그들의 특별한 그 분야 재능 때문에 맡기고 스파르타인에게는 다른 이들이 잘못할 때 곤봉을 들게 한다는 법을 제안하겠다고 농담을 했었다. 이는 농담이나 소크라테스 학파의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는 레우크트라(Leuctra) 전투 후 테베인에게서 드높은 사기를 발견하고 진지하게도 스승을 혼내주는 학생 같았다고 말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뤼쿠르고스>, 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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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는 뤼쿠르고스 전에서 주로 스파르타의 제도와 풍속을 소개하고 비평한다. 스파르타의 다른 그리스 사회와 다른 엄격성을 처음 도입한 입법가로 뤼쿠르고스를 들고 있지만 실존인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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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테세우스와 로물루스가 타고난 정치가였으나, 왕으로서 그 자질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전자는 민주주의로 후자는 참주정(폭정)를 지향하였으며 결국 서로 반대이지만 같은 잘못을 범하였다. 통치자는 우선 지배권을 유지하여야만 하며, 그것은 부적절한 것을 삼가하고 적절한 것은 힘써 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의 권위를 회피하는 자는 더이상 왕도 지배자도 아니다. 그런 사람은 선동가나 전제자 중 하나가 되고, 피통치민들 사이에 경멸과 미움을 심어주게 된다. 그 첫 오류는 호의와 자비에서 두번째는 이기심과 가혹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세우스와 로물루스의 비교>,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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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와 로물루스가 각기 지배층과 불화로 권력을 잃거나 암살당했다면서 통치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능한 선동자들이나 통치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나라를 넘겨주게 된 것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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