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해서 인류들 중에 그렇게도 명성높은 로마(Rome)라는 위대한 이름이 지어졌는지에 대해 여러 저자들은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펠라스기족(Pelasgian)이 거주가능한 지역을 전부 돌아다니며 대부분의 인류를 정복하고 나서 그 지역에 정착했다고 하여 그들의 전쟁을 하는 '힘'을 가리켜 로마라 불렀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트로이 몰후 달아난 사람들이 함선을 타고 폭풍우를 해치고 투스카니(Tuscany) 해안에 닿아 티베르 강에 정박하게 된 이야기를 한다. 이에 따르면 그 때 배멀미를 여자들이 느끼자 그들 중 태생상 고귀하고 최고의 지성을 갖춘 로마(Roma)라는 여인이 배를 불태우자고 했다는 것이다. 배를 태우자 남자들이 화를 냈지만 팔라틴누스(Palatine) 언덕에 정착하여 기대보다 상황이 좋고 이웃들이 환영하자 그들은 로마 여인에게 큰 존경을 바치고 그녀에게서 도시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로물루스>,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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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역사를 창출한 로마. 그러나, 그 이름의 유래는 불명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의 건국 초기 전설과 신화의 여러 버전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선 아이네이아스의 고사를 소개하면서 로마란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므로써 로마사의 처음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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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자기 방식을 강요하려 했으나 이미 그는 선동가들과 파벌정치인들에게 압도되어 절망 끝에 자식들을 몰래 에우보이아(Euboea)의 칼코돈의 아들 엘레펜노르에게 보냈다. 그 자신도 지금 아라테리온(Araterion)이라 부르는 가르게투스(Gargettus)에서 아테네인들을 저주하고 선조의 영지와 자기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는 스퀴로스(Scyros) 섬으로 같다. 이 때 뤼코메데스(Lycomedes)가 왕으로 있었다. 테세우스는 땅을 돌려받을 요구를 거주 이후로 했는데 어떤 이들은 아테네인들과 싸움에 원조를 구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뤼코메데스는 이런 명성을 가진 사람을 두려워했으며 정적인 메네스테우스에게 호의를 품었기에 테세우스를 섬의 전망을 보여주겠다며 높은 지대로 데려가 절볕밑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어떤 이들은 테세우스의 평소 습관 때문에 미끄러져 넘어진 것이라고도 한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세우스>, 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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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아테네인들에게 민주주의를 선물한 테세우스는 선동가들에게 나중에 배척받고 권력을 잃은 반유배상태에서 누구들의 바램과 말대로 '운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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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게우스 왕 사후, 테세우스는 놀라운 계획을 품고 아티카(Attica)의 모든 주민들을 한 도시에 모아 그 때까지는 산재된 채 살아 한데 모여 공공선이나 전체이익을 도모하기 어려웠으며 실질적으로는 자주 서로 다투던 사람을 한 도시민으로 만들었다. 그는 집집마다 방문하여 마을과 마을 부족과 부족에 그의 계획추진에 동의를 얻었다. 평민족과 빈민족은 재빠르게 그의 호출에 응했다. 강자들에게 그는 왕이 없는 정부와 자신은 전쟁사령관과 법의 수호자일 뿐인 민주정체를 공약했다. 반면 그 외에 모든 이들은 평등한 체제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설득되어쓰나 이미 강력해진 그의 권력과 담대한 용기를 무서워하는 자들은 강압으로 마지못해 동의할 것을 피해 설득되어준 것이다. 따라서, 각 소공동체에서 시의 청사와 의사당과 정무관직을 없애고 현재의 공동 시청사와 의사당을 현재 상도(아고라)가 있는 곳에 지은 후 이 도시에 아테네(Athens)라는 이름을 붙이고 범아테네 축제를 제정하였다. 

그는 메토이키아(Metoecia) 혹은 창건제를 헤카톰바이온(Hecatombaeon) 달의 16일로 제정하였는데 지금도 기려진다. 그 후, 왕권을 버린 그는 정부를 조직하여 신의 허가를 구하였다. 델피(Delphi)에서 도착한 신탁은 이 도시에 대한 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테세우스! 피테우스의 외손. 아이게우스의 아들,
내 아버지가 그대의 요새울타리 내에
경계와 운명을 주었다.
고로 당황하지 말고 확고한 기개를 가지라. 

이렇게 신탁한다. 고무주머니는 바다와 물결을 가로지른다.

 

이 신탁은 시빌경서에서 후에 이 도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복된다.

‘고무주머니는 물에 잠겨도 가라앉지는 않는다.’

 

도시를 확장하려는 마음에 그는 평등한 조건으로 모든 이들을 초대하여 '모든 이들이여 여기로 오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갖가지의 인민들을 정착시켰다. 하지만, 그 자신의 민주주의가 몰려든 무분멸한 대중들에 무질서화되고 혼란을 겪는 것을 감내하지는 않았다. 민중을 귀족, 농민, 장인으로 구분하였다. 귀족에게 그는 종교의식과 정무관후보자, 법률의 교수, 신의 뜻에 대한 이해에 대한 임무를 맡겼고, 나머지 시민들에게는 특권상의 균형을 확립하여 귀족은 우월한 존어을 갖고 농민은 실용에서 장인은 수에서 우세하게 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세우스>, 24-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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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까지 괴물과 도적 퇴치, 팔라스 족과의 내전 승리, 크레타의 미노타우로스 퇴치 등을 이룬 후,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죽자 테세우스는 왕위를 거부하고 아테네민주공화국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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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테세우스는 육체의 왕성함과 지적 능력와 현명함이 확고히 결합된 정신을 보여주어 어머니 아이트라(Aethra)가 그를 (아버지가 이야기 해주었던) 바위로 데려가 그 탄생에 관한 진실을 알려주고 거기에 있는 아버지의 신표를 찾아내 바다를 건너 아테네로 가라고 명했다. 테세우스는 그의 어깨로 바위를 쉽게 들어렸지만 바다를 통해 가라는 것은 거부했다. 안전성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에게 간청한 것이었다. 당시 육상으로 아테네로 여행하는 것은 들끊는 도적들과 무법자로 위험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손발이나 신체에 관해 뛰어나고 강인한 사람들을 만들어낸 시대였지만, 그들의 힘은 적절하고 유용한 곳이 아닌 곳에 쓰였다. 그들은 괴물적 거만함을 뽐냈고 그들의 힘으로 잔인함이란 수확을 거두었고 길목을 지나는 모든 것들을 정복하고 강제하고 파괴하였다. 경건성과 올바름, 정의와 인류애에 관해서라면 잘못을 범할 용기가 없어서라거나 잘못을 오히려 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탓이라고 여겨 주도권을 쥘 만큼 강한 자가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들 중의 몇몇은 헤라클레스(Heracles)가 가서 없애버렸지만, 몇몇은 이 때 납작 웅크리면서 비겁하게 그의 시선에서 피해 목숨을 건졌다. 헤라클레스는 재앙을 만나 이피투스(Iphitus)를 죽인 후 뤼디아(Lydia)로 가서 오랫동안 옴팔레(Omphale)의 집에서 친구를 죽인데 대한 속죄로 노예의 봉사를 바쳤고, 이 때 뤼디아는 평화와 안전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희랍 지역에 오랜 악행들이 다시 터져나오자 이를 제지할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펠레폰네소스(Peloponnesus)에서 아테네(Athens)로 가는 육상여행은 위험한 것이었고 피테우스(Pittheus)는 그런 위험요소들을 어떤 괴물인지 일일히 설명해주면서 해상 여행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헤라클레스의 무용담에 은근히 가슴을 불태웠고 그 영웅만을 생각해와서 그에 대해 보고듣고 그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러 다녔었다.  또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가 수 세대 후에 경험한 일 즉 밀티아데스(Miltiades)의 승전보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그 역시 경험하였다. 마찬가지로 테세우스 역시 헤라클래스의 용맹을 숭상하여 밤이면 그 영웅의 성취를 꿈꾸고 낮이면 그  그 비슷한 것을 성취할 것을 고무했다. 

더구나, 그들 사이는 친척으로 재종형제였다. 아이트라는 피테우스의 딸이고, 알크메네(Alcmene)는 뤼시디케(Lysidice)의 딸이며, 뤼시디케와 피테우스는 동기간으로 모두 히포다메이아(Hippodameia)와 펠롭스(Pelops)의 자식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명성높은 형제가 악당들을 여기저기서 물리치고 수륙에서 그들을 일소하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은 그러지 못하는 것을 끔찍하고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세우스>,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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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를 물리친 밀티아데스의 이야기를 듣고 부러운 공명심에 잠을 설치던 테세우스는 드디어 진짜 아버지를 알게되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헤라클레스가 한 것과 같은 그리스에서 도둑들을 일소하고 정의를 찾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그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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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우스 세네키오(Socius Senecio)여! 지리학자들은 자기들의 지도 바깥 구석으로 자기들의 지식 밖에 있는 지구 상의 지역을 몰아넣으며 '여기를 넘어가면 물도 풀도 없이 사나운 맹수들만 들끊는 모래사막이'라거나 '알지 못하는 늪지대' 또는 '스키티아 같은 한대 지역', '얼어붙은 바다'라고 주석을 달아놓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비교열전>을 쓰는 데 있어, 보통의 이성으로 추적할 수 있는 시대와 사실을 다룰 수 있는 역사에 대한 기초를 제공할 시대로 곧장 직행하는 지금, 나는 이보다 이른 시대란 '그것을 넘어가면 신비와 비현실성으로 가득찬 시인과 동화작가들의 땅이자 의심스럽고 불분명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법자 뤼쿠르고스(Lycurgus)와 누마 왕에 대한 설명들을 출판한 후로 나는 무리하지는 않고 더 시간을 거슬러 로물루스(Romulus) 까지 가려고 한다. 그리하여 나의 역사는 나를 그 시대로 데려간다. 아이스퀼로스(Aeschylus)의 말대로 나는 스스로에게 

‘이 같은 용사 앞에 맞설 자 누구냐?’ 
'누구를 그에 맞서게 할까? 누가 마땅할까?'

 

라고 자문했다. 이에 대해 나는 훌륭하고 명성있는 도시 아테네의 창건자를 영광된 무적의 로마의 아버지와 비교하고 대조시켜야만 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내가 그에 대한 우화들을 걸러내고 이성에 종속시킴으로써 역사와 비슷하게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끝내 신뢰될 수 있는 것을 거부하는 가능성이 없는 곳에 이르면, 나는 고대의 친절한 독자들에게 전설을 받아들이는데 관용을 베푸라는 양해를 구하겠다.

내게는 많은 닮은 점들이 테세우스를 로물루스의 알맞은 비교상대로 보게 한다. 두 사람 모두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가계를 가졌고 신의 후손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양자 모두 전사였다고 전세계인이 알고 (일리아드의 한 구절)

힘과 현명함이 결합된 인물들이었다. 두 세계적으로 뛰어난 도시인 로마와 아테네 중에 로물루스는 전자를 테세우스는 후자를 만들었으며 각기 겁탈로 배우자를 얻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국내의 불화와 친족간 재난을 피치 못하였고, 시적 과장으로 한 말일 수 있으나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면 말년에는 그들 자신의 동료 시민들과 충돌했다는 말조차 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세우스>,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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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의 시작 부분인 테세우스전의 첫머리다. 이 글에서 보듯 플루타르코스는 본래 지금 편집된 순서나 인물의 년대에 상관없이 두 인물에 대한 한 쌍의 비교열전을 발표해 나갔다. 누마왕의 전기는 로물루스왕의 전기보다 이른 시기에 씌여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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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담당할 때 탄원에 대한 결정을 익일 전에 주지 않았으며 후에 서면으로 주었다. 청취하는 버릇은 한쪽 탄원이 계속되게 하기보다 번갈아가면서 들었다. 그의 보좌관들에게 자문하고자 물러나면 한 번에 전체의사를 공개적으로 묻기 보다  서면으로 제공된 그들의 개별적 의견을 조용히 읽어보았다. 그는 마치 다수의견인 듯 사건에 대한 자신의 기호에 따라 법정에서 판결을 선고했다. 오랫동안, 그는 해방노예들의 아들들을 원로원에 들이지 않았으며 전임자들에게 허가되었던 자들도 모든 공직에서 배제해버렸다. 직위가 없는 여분의 후보군들에게 그는 군단의 지휘권을 주었는데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었다. 집정관직은 보통 6개월간 수여했으며 두 집정관 중 하나가 정월 초하루를 조금 앞두고 죽으면 그 자리를 대신 채우지 않았다. 칸니니우스 레빌리우스(Caninius Rebilus)에게 전에 있었던 일[각주:1]을 싫어했는데, 그는 단 하루만 집정관이었다. 그는 재무관급의 인사와 기사계급의 인사들에 조차 약식개선식[각주:2]을 허락했다. 심지어 전혀 군사업무에 관하지 않은 때에도 그것을 수여했다. 그의 의사가 원로원에 읽히도록 할 때 그 자리에 적합한  재무관들[각주:3] 대신 자주 집정관들을 시켜 읽혔다.

 

 

  1. (Jul. lxxvi. 2,) [본문으로]
  2. ornamenta triumphalia 혹은 ovation 이라는 것으로 개선식이 황실인사에 제한되어 수여된 제정 후에는 장군들에게 약식개선식을 하게 했다. [본문으로]
  3. (Aug. lxv. 2.) 아우구스투스 이래의 황제가 원로원에서 의사를 발표하는 관례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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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통산 네번 집정관직을 수행했다.[각주:1] 처음에는 두달, 세번째와 마지막에는 여섯달, 세번재는 네달간이었다. 두번은 연이은 해에 보유했었지만, 다른 것은 그와는 한 년도를 건너서 두었다.[각주:2]

 

 

 

 

  1. 각각 A.U.C. 808, 810, 811, 813 년(A.D. 55, 57, 58,60)이다. [본문으로]
  2. 네로는 서기 68년에도 집정관이었으나 그것은 보결집정관으로 공식적으로 연대를 대표하는 집정관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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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공한 화려한 볼거리 중에 티리다테스(Tiridates)의 장중한 도시 입성[각주:1]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아르메니아(Armenia)의 왕인 이 사람을 로마에 후한 선물 약속으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좋지 못한 날씨 탓에 민중들에 선포식에서 그를 보여줄 길이 막히게 되자 다른 첫 기회를 택했다. 수개 연대 병사들을 완전 무장 시킨 채 포룸(forum)내의 한 사원에서 자신은 로스트라(rostra)의 옥좌 위에 개선식 의상을 입고 군단기와 예비대기 아래서 그를 맞았다. 그를 향애 다가오는 티리다테스가 자기 발밑에 꿇어 업드리는 것을 허용하였으나 곧 재빨리 바른 손으로 그를 일으켜 세워 키스하였다. 이왕의 요구에 항제는 그의 머리에서 터반을 벗기고 왕관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 동안 법무관급의 인사가 탄원자의 말을 라틴어로 바꾸어 선포하였다. 이 의식이 있은 후, 왕은 극장에 갔는데 복종의무를 갱신한 후에 네로는 그의 우측에 앉게 했다. 임페라토르(Imperator)[각주:2]라는 칭호의 보편적 인사로 환영받으며 그의 월계관을 카피톨 신전에 보내며, 네로는 로마 제국을 통틀어 전쟁이 이제 없는 양 두얼굴의 야누스의 사원을 닫았다.[각주:3]

 

 

루브루 박물관의 티리다테스가 로마에 세운 방문 기념상("Trdatrome". Licensed under PD-US via Wikipedia.)

 

  1. A. U. C. 819. 제30장을 보라. 티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로마를 방문한 그에게 네로가 왕관을 씌워주었다. [본문으로]
  2. 개선장군의 의미에서 제정 때 황제의 의미로 바뀜. [본문으로]
  3. 야누스의 문을 닫는 것은 누마왕 이래 전쟁이 그쳤음을 보이는 로마의 관습.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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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제전을 그는 프로스케니움(proscenium)[각주:1]의 위에서 바라보았다. 그가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 연병장 지구에 한 해 전 지은 목재원형극장[각주:2]에서 시전한 검투시합에서는 결투를 위해 죽일 사형수를 비롯해 누구도 살해되지 않도록 했다. 엄청난 재산과 명성을 지닌 400명의 원로원 의원과 600명의 로마 기사계급일원들을 검투사로 연기하게 했다. 같은 명령으로, 사람들이 맹수와 겨루는 것을 비롯 극장의 다른 여러 일들을 하도록 했다. 공중에게 거대한 물고기를 푼 물 위에서의 모의해전을 제공했다. 또한 어떤 그리스 젊은이들에게 피릭댄스(Pyrrhic dance)[각주:3]를 추게 하여 끝난 후에 로마시민의 자유를 수여하기도 했다. 바로 이 중에 관중들이 믿기로 암소의 목형 속에 감춰진 파시파에(Pasiphae)를 황소 한 마리가 덮쳤다. 이카루스(Icarus)는 하늘로 날으려는 첫 시도에서 황제의 좌석 가까이 있는 무대로 떨어졌으며 피를 튀기게 되었다. 그가 축제를 주재하는 것은 아주 드물었으나 침상에 누워 보기는 했고 처음에는 작은 틈새를 통해 보다가 나중에는 포디움(apertures)[각주:4]에서 보았다. 그는 그리스식을 모방해 음악[각주:5], 격투, 전차의 세 분야의 경합 경기를 5년마다 로마에서 열리도록 제도화한[각주:6] 첫 인물이었다. 그는 이 축제를 네로제(Neronia)라고 불렀다. 목욕탕과 체육관(gymnasium)[각주:7]을 봉헌하고 그는 원로원과 기사 계급에 오일을 보내주었다. 그는 집정관급 인사에 추첨에 의해 판정자으로 지명했고 그는 법무관들과 앉았다. 이 때 그는 원로원 의원들이 있는 오케스트라 쪽으로 가서 라틴어 웅변과 시 경연에 대해 우승관을 받았다. 그에 대해 최고의 재능을 가진 여러 인사들이 경쟁했지만 만장일치로 그에게 양보했다. 최고 경연자에 대한 관과 하프가 마찬가지로 판관들에 의해 그에게 수여되기로 했고 그는 이를 무릎꿇고 받았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상 앞으로 가져가게 했다. 세프타(Septa)에서 그가 연 체육 경연에서는 소의 호화 희생의식을 준비하는 동안 처음으로 면도를 했고[각주:8], 이를 고가의 진주장식의 보석함에 두고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Jupiter Capitolinus)에 봉정하였다. 그는 베스타 성녀들을 초대해 격투기를 보게 했는데, 이는 올림피아에서는 케레스(Ceres)의 여사제들이 그런 것을 보는 특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 "장면 앞 혹은 무대 앞(before the scene)"이란 어원의 말로 무대 바로 앞. [본문으로]
  2. A.U.C. 810 (A.D. 56) [본문으로]
  3. 처음에는 전쟁무였다. [본문으로]
  4. 원형극장의 일부로 오케스트라(orchestra) 근처에 원로원석과 황제석 혹은 주최인석이 배정되는 자리다. [본문으로]
  5. 시와 웅변 포함함. [본문으로]
  6. A. U. C. 813 (A.D. 60) [본문으로]
  7. 네로의 목욕탕은 판테온(Pantheon)의 서편에 있었다. 후에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가 만든 것과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그 흔적은 없지만 굉장한 규모였을 것이다. 이 로마에서의 첫 그리스식 체육관은 목욕탕에 붙어있었다. [본문으로]
  8. 로마에서 첫 면도는 특별의식으로 보통 20세에 했으나 사람에 따라 조금식 달랐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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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민중에게 엄천나게 많고 다양한 대형 볼거리들, 즉 유베날리스제전, 키르쿠스제, 연극, 검투시합들을 제공했다. 유베날리스제[각주:1]에서, 그는 집정관급 의원과 나이 든 부인들이 참가경연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키르쿠스제에서, 그는 기사계급의 좌석을 일반민중석과 떨어뜨려 놓게 배치했고[각주:2] 네마리 낙타가 끄는 전차 시합을 하게 했다. 그가 제국의 영속을 위하여 제정해 그리하여 막시무스(Maximus)라 부르게 된 이 축제에서 많은 원로원 계급 및 기사 계급의 인사들이 몸소 경연에 참가했다. 한 뛰어난 로마 기사계급의 인사가 밧줄로 무대로 내려와 코끼리 등에 올라탔다. 아프리카누스가 지은 한 로마극이 비슷하게 무대에 올려졌다. 그 제목은 "화재"로 붙여졌는데, 극 중 공연자들은 극장에서 타도록 되어있는 가구들을 가져가도록 허락되었다. 매일 엄숙하게 많은 물품들이 민중에게 뿌려졌다. 곡물쿠폰, 의류, 금은보석, 진주, 그림, 노예, 가축, 맹수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배와 집 땅들이 복권 경품으로 제공되었다.

 

  1. 그의 처음 면도를 기념한 것이었다. (12장) [본문으로]
  2. 전에는 테아트레(Theater)에서만 그렇게 했다. (Jul. xxxix. 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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