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비누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4.01.01 귀족의 반격 -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25

 

막시미누스 황제[재위 235-238년]

 

기번은 알렉산더 세베루스 사후의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태생적으로 우월한 특권은 시간과 여론의 허가를 받을 때 인류들간의 모든 특징들 중 가장 간단하고 부당함이 적은 것이다. 이 승인된 권리는 파벌의 희망을 꺽고 의식된 안전이 군주의 잔인성을 해체한다. 이 이상의 굳은 확립에 우리는 유럽 군주제들의 평화적 계승과 온화한 행정의 공을 돌린다. 그 결핍에 대해 우리는 잦은 내전의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인데 이것은 아시아적 폭군이 그의 아버지의 왕좌를 찬탈할 때 써야 할 방법이었다. 그러나 동방에서 조차 논란의 반경은 흔히 왕가의 군주들에 한정되며 더 운좋은 경쟁자가 그의 형제들을 칼과 활시위로 제거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의 더 천한 신민들에게 어떤 질투도 품지 않는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원로원의 권위가 경멸의 대상으로 떨어진 후에 혼란의 일대 장관이었다. 속주의 왕가의 적어도 귀족의 가문들은 오래동안 오만한 공화파들의 차앞에서 개선식으로 이끌려 왔다. 로마의 고대 가문들은 계속해서 카아사르들의 폭정 밑에 깔렸고 이런 군주들이 공화국 형태의 굴레를 쓰고 그들 후손의 반복되는 실패로 실망할 때는 세습의 어떤 생각도 그들 신민들의 마음속에 뿌리 박는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왕위에 대한 권리는 누구도 태생으로 부터 주장할 수 없었으며 모두가 재능으로 부터 맡을 것이었다. 야심적이고 대담한 기대가 법과 편견의 유익한 규제에서 해방되었고 인류의 가장 천한 자들이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용기와 행운에 의해 군대에서 고관으로 올라갈 희망을 품었는데 그곳에서 한개의 범죄로 그를 그의 쉽고 인기없는 주인에게서 세계의 왕의 홀(笏)을 탈취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와 막시미누스(Maximin)의 즉위후 어떤 황제도 왕좌 위에서 스스로 안심할 수 없었고 변경의 모든 야만인 농부도 그 위엄있지만 위험한 위치를 열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제위를 찬탈한 것으로 보이는 막시미누스의 경우 더할 수 없이 비천한 태생이었다. 기번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고트족(Goth)이고 어머니는 알라니족(Alani)이었으며 따라서 태생은 트라키아의 변경 지대였을 것이며 그 이후 트라코-로만(Thraco-Roman emperor)들의 첫번째였다. 헤로디안에 의하면 그는 그 지방의 양치기출신으로 로마보조병이 되어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런 비천한 출신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은 형식적이지만 카라칼라 황제의 칙령의 혜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아버지 세베루스(Severus)에게 일찍부터 눈에 띄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은혜 만큼이나 세베루스 왕조에 충성하는 면을 보였다. 마크리누스(Macrinus)의 찬탈에 그 왕조가 단절되었을 때 잠시 고향으로 은거하다가 엘라가발루스(Elagabalus)가 돌아오자 다지 군대를 맡았다.[각주:1] 하지만 이런 충성심은 오래가지 않았고 앞서 언급했던 이유로 황제의 약점을 보면서 자신의 야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기번은 반란이 없었다면 알렉산더가 그의 누이와 막시미누스의 아들을 결혼시켰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성격에 대해 기번은 이렇게 말한다.

 

전의 폭군들 칼리굴라(Caligula), 네로(Nero), 코모두스(Commodus), 카라칼라(Caracalla)는 전적으로 방탕하고 경험없는 젊은이로 황제의 교육을 받고 제국의 긍지와 로마의 사치와 믿을 수 없는 아첨소리에 부패되었다. 막시미누스의 잔인성은 다른 근원 즉 경멸에 대한 공포에서 유래하였다. 그들 자신처럼 그의 덕을 사랑했던 병사들의 지지에 의존했지만 그는 그의 천하고 야만인적 기원, 그의 흉직한 모습, 예술과 민간 생활 제도에 대한 전적인 무지를 의식했다. 그는 비천한 운명속에서 종종 로마의 오만한 귀족앞에 기다리고 그들 노예의 무례에 의해 입장이 거절되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역시 그의 가난을 구제하고 그의 떠오르는 희망을 조력해 주었던 소수의 친교를 기억했었다.  하지만 트라키아인(Thracian)을 퇴짜놓고 보호한 이들도 동일한 범죄 그의 기원상의 불분명에 대한 앎에 대해 죄가 있었다. 이 범죄에 대해 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했고  그의 후원인 여럿의 사형으로 막시미누스는 그의 천함과 배은망덕의 지울 수 없는 역사를 혈통상의 특징으로 공표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위는 항상 도전 받았다. 첫 도전은 그가 게르만족을 공격하려고 도강했을 때 다리를 끊어 적에게 그를 내주려는 음모였는데 좌절되었고 관련자들은 재판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두번째는 오스로에네(Osroene)의 궁수(弓手) 부대에 의해 일어났다. 그들은 알렉산더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여 새로운 황제를 세우려 했으나 배신적인 음모로 제위는 유지되었다. 이후 정신을 추스리고 게르만 전선으로 나간 뒤에도 이 폭군에 대한 음모는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숙청이 일어났고 드디어 로마의 귀족들이 이 비천한 황제에 대해 맞서 설욕에 나선다.

 

아프리카의 고르디아누스 가문

 

문제는 속주에 나가 파견되어 황제를 위해 재산을 긁어모으는 재정관(procurator)에 의해 발단이 된다. 아프리카(Africa)에서 부당한 갈취를 일삼는 황제 대리인이 살해되고 이것이 반란으로 번진다. 그리고 여든 나이의 아프리카 총독 전집정관(前執政官, proconsul) 고르디아누스(Gordianus)에게 황제 즉위를 강권했고 이 위험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모면하려 했지만 결국 그의 부관이었던 아들 2세와 함께 이를 받아들이고 원로원의 승인을 얻는다. 고르디아누스 가문에 대해서는 황제와 대조되게 로마의 명문 귀족의 일원이었다고 말해진다. 막시미누스는 이제 국적(國敵)으로 처지가 완전히 바뀌었다. 신황제측은 물론 수도에 남아 있던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에 더 많은 돈을 약속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친 막시미누스파 근위대장을 제거함으로써 이가 달성되었다. 이렇게 로마는 해방되다. 하지만 막시미누스 밑에서 호의호식하던 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것도 바로 아프리카의 코앞 마우리타니아(Mauritania)에서 카페리아누스(Capelanus)가 그와는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면서 폐제(廢帝)에게 충성을 보이며 군사를 일으켜 두 황제를 죽였다.

 

 

 

복위를 꿈꾸던 막시미누스가 포위 공격을 수행하다 살해된 아퀼레이아의 위치

 

 

 

로마의 황제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 그리고 어린 고르디아누스

 

이에 로마도 당황하지만 곧 귀족들이 단결하여 콩코르디아 사원(Temple of Concord)에서 원로원이 회의를 열고 새로운 황제 두사람을 선출한다. 한사람은 국적에 대항해 전쟁을 지휘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은 로마에서 민간 행정을 맡게 하는데 이들이 막시무스(Maximus)와 발비누스(Balbinus)이다. 군사면을 맡은 막시무스 즉 푸피에누스(Pupienus)는 <황제역사>에서 비천한 혈통으로 발비누스와 대조적으로 그려지나 두 사람 다 집정관을 역임한 명문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민중은 고르디아누스 일세의 손자이자 이세의 조카인 13세 소년을 동시에 후대에 부황제가 되는 카이사르(Caesar)로 추대한다. 바로 이 사람이 살아남아서 고르디아누스 왕조를 이어가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이러한 사태에 화가난 전선의 막시미누스가 로마를 향해 알프스를 넘어 진군해 온다. 아퀼레이아(Aquileia)의 포위 도중 로마에 가족을 둔 근위대의 반란으로 폐제는 그의 아들과 함께 살해되고 전쟁은 싱겁게 끝난다. 하지만 로마 역시 그 동안 근위대 측과의 내전에 휩싸이고 결과는 휴전으로 끝난다. 두 황제가 로마에서 다시 불화를 겪는 틈을 타 238년의 7월 15일 드디어 근위대 측이 황제를 살해하고 카이사르인 어린 고르디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한다. 몇 달 안에 6명의 황제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장인인 미시데우스(Misitheus)가 근위대의 장관이 되어 나름대로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선정을 베푼다. 하지만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을 때 이 장관이 급사하자 기번은 독살을 의심하였고 이번에는 막시미누스에 이어 두번째 야만인 황제가 될 필립(Philip)이 장관직을 이어받게 되고 곧이어 역시 어린 황제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야만인 장군이 또다시 황제가 된 것이다. 서기 244년 3월의 일이다. 이러한 귀족들과 군인 황제간의 권력다툼에 대해 기번은 민권 권력과 군사 정부간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은 원로원이 근위대를 배제한체 선출한 두 명의 황제가 다른 임무를 맡게 했던 것도 비록 실패했지만 이 문제를 염려한 그들에 의해 세심히 준비된 것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1. 막시미아누스의 황제즉위전의 황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11>에 원사료에 대한 번역문이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