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이런 말을 한다. 로마제국의 황제의 칭호였던 카이사르가 러시아의 짜르나 독일제국의 카이저 등으로 남고 또 다른 칭호 황제를 의미하는 임페라토르에서 후의 황제라는 단어인 emperor란 단어가 유래하였다는 것이며, 여러나라가 로마의 독수리 깃발을 사용해 로마제국의 계승국임을 아직까지 자랑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제정 로마의 계승과 관련된다. 그러면, 공화정을 계승한 것은 없었을까. 제국의 상징이 황제 즉 카이저라면, 로마의 공화정을 상징하는 것은 브루투스가 왕정을 타파하고 가져온 집정관 즉 콘술(Consul) 직이다. 이 공화정 로마를 계승하려던 시기가 프랑스 혁명 중에 당연히 있었다. 로마제국의 집정관직이 부활되었던 것인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통령정부의 통령이 원래 바로 이 집정관이었다.

 

1795년 테르미도르반동을 겪고 국민공회와 공안위원회가 이끄는 정체가 소위 총재정부(Directory)로 바뀌게 된다. 여기서 의회는 각기 그리스와 로마의 의회를 본 뜬 듯한 상원의 원로원(Conseil des Anciens 원로들의 의회)과  하원의 500인의회(Council of Five Hundred)로 바뀐다. 5명의 총재가 행정을 담당한 것이다.

 

그리고 1799년 이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의 쿠데타 이후 극적으로 집정관의 정부 즉 통령정부로 바뀌게 된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제1통령 즉 제1집정관이 되고 미래를 예견하듯 로마공화정적 칭호를 부활시켰다. 로마원로원 즉 세나투스(Senatus)와 호민관(tribune)이 의회로 부활되었다. 이에 의하면 세개의 입법기관 Sénat conservateur, Tribunat, the Corps législatif가 존재했다. 또한, 이들은 나폴레옹이 제정을 성립시켰을 때도 존속했는데 마치 로마제국하에서 원로원과 "공화국"이라는 이름뿐인 명칭이 존재했던 것과 같다. 다만 집정관 통령이라는 명칭은 없어진 채 황제로 바뀌었다. 황제가 나타난 이후에도 집정관이 여전히 뽑혔던 제정로마와는 역시 조금은 다른 일면이다.

 

아마도 이런 로마적 논리의 연장에서 황제인 나폴레옹이 '공화국'과 혁명정신을 유럽에 전파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이런 논리라면 나폴레옹의 제정 역시 동시에 형식적으로나마 "공화국"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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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3번이 본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될 것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베토벤의 후원자는 체코의 로브코비치(Lobkowicz) 가문의 제7대 요세프 프란쯔 막시밀리안(Joseph Franz Maximilian) 공이었다. 만일 그것이 베토벤에게 헌정되었다면 베토벤은 후원금을 반환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공식피헌정인은 바로 로브코비치인 듯하다.[각주:1]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의 구현체로 나폴레옹을 존경하였는데 1804년에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모습을 그의 동료 페르디난트 리에스(Ferdinand Ries)는 이렇게 기술한다.

 

이 교향곡을 쓰면서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를 생각하고 있긴 했으나 그것은 그가 제1통령일 때의 보나파르트였다. 그 때 베토벤은 그에게 최상의 평가를 내리면서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들에 비견했다. 나뿐 아니라 많은 그의 가까운 친구들이 그의 책상 위에 아름답게 복제된 사본에 "보나파르트"란 말이 제일 윗 표지에 가장 아레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라고 새겨진 이름과 함께 한 그 교향곡을 보았다. ... 내가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한 첫번째 사람이었는데, 이 때 그는 격노하여 "그 역시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그 역시 인간의 모든 권리를 짓밟고 그의 야심에 탐닉하겠지. 스스로 모든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고 그저 한 폭군이 될 것이다!"라 외쳤다. 베토벤은 책상으로 가서 첫 표지 장을 잡아 반을 찟어내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 장은 다시  다시 복제되었으며 이제 그 제목은 "신포니아 에로이카(Sinfonia eroica 영웅교향곡)"가 되었다.

 

바로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한 일화의 한 장면이다.

 

한편 다른 사본도 전하는데 거기에는 "Intitolata Bonaparte (제명 보나파르트)"가 흠집으로 지워지고 그 밑에 "Geschriben auf Bonaparte (보나파르트를 위하여 쓰여짐)"라고 연필로 덧붙여졌다고 한다. 그는 1804년 8월에 이 곡의 제목을 "보나파르트라고 했지만 1806년 판에는 Sinfonia Eroica...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i un grand Uomo (" 한 위대한 인간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영웅적 교향곡")라 했다. 1821년 성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이 숨을 거둘 때 베토벤은 "이 슬픈 비극을 위해 내가 17년 전 그 음악을 썼노라"고 외쳤다고 한다.   

 

 

 

지워지고 다시 제목이 쓰여진 사본의 제명 부분

 

 

  1. 아마도 Lobkowicz Collections의 일부라는 http://www.luxurytraveladvisor.com/czech-republic/prague-museum-celebrates-noble-familys-art-collection-5968 와 http://www.lobkowicz.cz/en/Highlights-from-The-Collections-47.htm?item=113 가 그것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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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몇 해 전에 했던 헛수고 중의 하나가 소위 공짜 텍스트로 영어로 고전을 읽겠다는 것인데 새삼 돈 몇 푼 아끼겠다고 정말 쓸데 없는 짓을 한 것이다. 스캔텍스트의 단점 중 하나인 잦은 엔터키 정도는 삭제해 놓았으니 그래도 필요한 사람들은 한 번 다운 받아보시기를.

 

Peloponnesian War.txt

(주의: 상저작권자가 상업적 목적으로의 무단배포는 금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시간낭비라는 것이 이미 번역판들이 나와 있고 외국어로는 이미 굉장한 주석판들이 나온 상황에서 달랑 번역텍스트만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으며, 그와 동시에  점점 과거에 왜 그랬는가 하는 후회가 든다. 한 1-2권 정도 프린트하고는 통 못보고 있다고 최근에서야 번역판을 구입하여 대충 한 번 훑어라도 볼 수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을 더구나 읽기 어려운 말로 읽으려 고집하면 남보다 뒤쳐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영역(英譯)이 그리 읽기 쉬운게 더구나 아니다.

 

1.

 

의외로 이 책의 번역판은 종류가 많지 않은 모양인데, 썩 잘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대표적으로 가장 불만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야만인으로 통상 번역되는 "바바리안(barbarian)"을 박광순의 경우에 이어족(異語族)이나 천병희의 경우에 비헬라스인(非Hellas人)으로 번역하였다는 것인데 과연 이것이 얼마나 정당화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스 당대에 이 말이 "야만"이나 "경멸"의 의미가 없었다는 논리인 듯한데 여러 사정으로 보아 확실치 않은 것 같다. 위키백과의 다음 기술만 보더라도

 

http://en.wikipedia.org/wiki/Barbarian

 

그 말의 유래가 그리스 선형문자B까지 거슬를 정도로 유래가 깊기는 하고 그 당시에는 단순히 이어족으로 생각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나, 애당초 호메로스 등에서 외국인이 그리스말을 어눌하게 발음하는 것에 붙인 이름이라는데 거기서 경멸의 의미가 없었을 수 있는가하는 원초적인 의문이 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필자가 장담할 말은 아니지만 통상 외국 역자들도 그렇게 번역하는 것을 이렇게 바꾸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민주화 이후로 과거 서구일변도로 세상을 보는데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만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다문화도 좋지만 그렇다고 외국인들만을 위해 내국인도 누리지 못할 호화감옥을 지어주었다는 웃지못할 이야기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아무리 좋고 바람직해도 중용에서 벗어나는 것은 도리어 역겨워 보일 때가 있다. 그냥 고대 그리스에서 바바로이란 말이 단순히 이어족을 의미하기도 했다고 한 번 정도 언급하는 정도가 더 적절해 보이는데 통째로 이렇게 바꾸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2.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으면서 가장 생각났던 것은 중국의 춘추시대와 비슷한 면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대국 진(晉)이 소국인 형(邢)을 쳐서 제(齊) 나라에서 원병을 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을 때 포숙아(鮑叔牙)는 제의 군주인 환공(桓公)에게 "구원하는 것이 너무 이릅니다. 형이 망하지 않으면 진이 피폐하지 않고 제의 위세도 오르지 않습니다"고 늦장을 부릴 것을 주장하는데 이런 것이 강대국 아테네와 스파르타에게서는 일상다반사이다. 사태를 좀더 면밀하게 보면 사실 약소국이라고 해서 마냥 속은 것 만은 아닌 듯 싶다. 스파르타의 우유부단함과 늦장에 속터져하는 코린트의 사절 같은 경우 이런 경우가 하두 흔해서 펠로폰네소스인들 앞에서 당신들 약속 믿고 기다리다 망한 나라가 한둘이 이냐고 대놓고 질타하기도 한다.[각주:1] 그러나, 국제정치사나 전쟁사의 냉엄한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요즘 북한핵을 놓고 돌아가는 국면도 크게 보면 그러하지 않은가?

 

3.

 

초두에 자주 나오는 페리클레스의 명연설 중 내 개인에게 인상적인 것은 그의 호메로스에 대한 낮은 평가다. 한마디로 "호메로스나 그 밖에 그 미사여구가 당장은 우리를 즐겁게 해주어도 실체적 진실에 의해 허구로 드러나게 될 다른 시인의 찬사가 필요없다"는 것으로 현실에서 대 아테네 제국을 건설한 "우리"에게는 호메로스의 문학세계는 어디까지나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호메로스가 노래하고자 한 것은 트로이 전쟁의 현실과 영웅들의 실행적이 아닌 바로 후 세기[각주:2] 페리클레스 치하의 민주주의와 번영이 함께하는 국가 건설을 고무 격려하려는 것일지 모르겠다.

 

4.

 

아무튼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고 아끼고 아껴두고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는데 역시 시간이나 돈이 아깝지 않을 명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으 듯, 지성인이라면 읽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작이다. 물론 번역판들이 그 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도서관에서라도 빌려다가라도 꼭 한 번 읽어볼 만 하다.

 

 

 

 

 

  1. 천병희 역, 제1권 69장. [본문으로]
  2. 호메로스의 시가 정리된 것은 참주 피시스라토스 때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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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고대인 사이에 이슈가 되었던 논쟁거리 중에 하나에 대해 소개하는 포스팅을 올린 적이 있다. 다름 아니라 고대인들은 풍랑을 만났을 때 즉 위기일발의 해난사고를 눈앞에 두었을 때 말을 던질 것인가 아니면 사람인 노예를 던져야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위선적 도덕 

 

고대의 현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냉정하게도 "이성"을 내세워 말보다는 노예를 버릴 것을 권했다는 사정을 알 수 있다. 좌우간, 세월호 사고를 접하면서 과연 이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과연 어찌 생각했는지 저 사람들의 문답을 보면 답이 보이는 것 같다. 뭐 이단종파가 운영한다는 회사와 직원들의 태도를 보면 노예는 커녕 벌레만큼으로도 안 본 것 같고, 정부당국의 태도 자체도 도올의 말처럼 국민을 하나의 관리의 대상으로 보고 인격을 가진 존엄한 인간으로서 보는 것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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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쿠오바디스>에서 삼촌인 페트로니우스가 조카인 비니키우스에게 한 말 중엔 세계 만국인 중 유독 그리스인 아니면 로마인이 되어야 한다는 충고가 있다. 그는 연인 리기아에 의해 기독교에 감화된 로마의 청년장군 비니키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네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것 같아 안됐구나. 그리스인이 될 수 없다면 로마인이 돼라. 소유하거나 즐기란 말이다. 우리들의 광기들엔 어떤 지각이 있는데 그들 안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붉은수염(네로)을 경멸하는 것은 그가 그리스 광대로 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로마인으로 살았다면, 나는 그가 미치게 된 것도 그의 옳은 행동이었다고 인정할 것이다."

 

위 구절에 보이는 그리스인에 대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극중에 등장하는 그리스인은 대개 부정적이다. 의사이자 철학자이자 점술사 킬로가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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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를 사랑했던 네로는 시민들에게 그리스식 제전 "네로제"를 열어주고, 그리스의 경기대회에 참석 전차경기, 문학경연의 우승을 휩쓸었다.

 

 

 

네로 황제 시기를 다룬 유명한 소설에 <쿠오바디스>란 것이 있는데 이는 1905년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로 그때까지 명작이 되어있었고 후에 영화화되어서도 유명해 졌다. 여기서 주인공은 연인 리기아(Lygia)와 비키니우스(Vinicius)라는 두 가상 인물이며, 네로의 한 때는 친구요 말년에는 정적이 되어버린 후자의 삼촌 페트로니우스(Petronius)는 실존 인물이다. 실존 인물이라고 해봐야 그 다지 분명하게 알려진 것은 많지 않은 인물이고 단지 네로의 잔인함에 의연하게 죽음을 맞은 것으로 유명할 뿐이다.

 

여기선 영화와 소설을 역사에 비교해 보자.

 

우선 네로의 별명으로 페트로니우스가 잘 쓰는 "붉은 수염"은 실은 네로가 입양되기 전의 씨족의 성으로 그의 부계의 도미티우스 씨족에서 아헤노바르부스(Ahenobarbus) 가문명이 붉은 수염이란 말에서 유래된 것인데 로마의 쌍둥이 신인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가 그들의 선조의 수염을 검은 빛에서 밝은 황동 빛깔로 바꾸었다는데서 유래가 된 것이다. 페트로니우스는 무슨 뜻으로 이 말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네로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훗날 반란을 일으킨 빈덱스(Vindex)가 네로를 이 이름으로 불렀다. 모계를 통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의 황제가문과 연결된 그는 황후가 된 어머니를 통해 입양 형식으로 자기 본래 성을 버리고 클라우디우스가에 입양된 것이기 때문이다.   

 

네로가 불을 질렀을 때 '불타는 트로이'에 관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다만, 네로의 방화혐의가 오늘날엔 널리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긴 하다. 원로원에 의해 국적(國敵)으로 단죄된 직후의 네로의 최후에 관해서는 역시 기록을 충실히 옮긴 편이다. 이 때 원로원은 그를 산채로 잡아오도록 백인대장을 파견하는데 고통과 치욕 속에 죽음임을 잘 아는 네로는 그 동안 갖은 추태를 부리다가 한 측근 해방노예 신분의 신하의 도움을 받아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른다. 소설에서는 이 때 백인대장이 들어와 "나는 그대를 살린다는 선고를 가지러 왔었소"라고 말하자 네로가 "하지만 늦었다. 그게 충성스런 행동이란 말이냐"라 답하고 삶을 마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는 백인대장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백인대장은 네로를 산 채로 잡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랬는지 최후를 맞는 네로를 위하는 척하는 모습이라도 마지막으로 보이려 그랬는지 상처에 외투를 대서 고통을 줄이려 했었다고 기록되었다. 허나 대체로 이는 신뢰성이 조금 떨어지는 수에토니우스라는 풍속사가에 의한 것이고 디오 카시우스의 경우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네로의 마지막 말은 "예술가의 최후란 이런 것인가"하는 정도다.

 

페트로니우스의 의연한 죽음의 장면도 타키투스가 칭찬한 그대로다. 다만, 그와 정사(情死)한 에우니케의 경우는 창작 인물이다. 기록에만 빠지고 실제로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러하다. 네로를 사랑하던 해방노예 악테가 향에 싸서 고이 묻어주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의 매장은 후임 황제 갈바의 측근에 의해 매장이 허용되었지만 도미티우스 가문의 묘지에서 였으며 그 곳에 악테와 함께 묻혔다고 한다.

 

 

 영화 속 페트로니우스와 에우니케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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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화화는 로마에 맞서 옛 로마의 전통을 수호하고자 했던 원로원 의원 심마쿠스가 색슨족 포로들을 검투시합을 위해 구매했을 때 이들 29명의 용사들은 시합을 하루 앞두고 단순히 로마관중 앞에서 눈요기거리로 죽음을 맞는 것을 거부하고 차례로 목을 매어 전원 자살하는 쪽을 택했다. 로마의 전통과 명예를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심마쿠스는 이것에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 포로의 무가치함을 자신의 글에서 비난했던 것은 유명하다.

 

당시의 로마식자층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 당시 기준으로 보면 심마쿠스 의원만 유독 위선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유와 공화국과 민주주의를 찬양했던 그들이 엄연한 한 인간인 노예들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그에 비해 볼 때는, 그들이 그렇게도 자주 동방의 국가들에 우월감을 갖고 표하곤 했던 자유에 대한 사랑은 도리어 위선적 허풍으로 생각이 된다.

 

로마인의 이런 도덕관은 노예제가 존속된 한 꽤 오래로 거슬를 수 있는 듯, 공화적 말의 정치인이자 문사라 할 수 있는 키케로에게서도 암시된다. 그의 <의무론(De officiis)>[각주:1]에서 그는 도덕적인 행동들에 대해 평가해 보면서 비슷한 냉정한 결론을 소개하고 있다. 가령 소위 "적성시험" 같은 곳에 자주 출제되는 인정과 실리에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선택의 선구라 할 수 있는 것이 고대 헤카톤(Hecato)이라는 스토아 철학자의 책에서 이미 많이 문제시 되었던 것 같다. 가령 물에 빠진 두 명의 사람 중에 먼저 구조되어야 하는 사람 쪽에 대한 질문이다. 현재는 전하지 않는 그의 저서에서 키케로가 소개하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각주:2]

 

"선인(善人)의 의무는 기근에 곡식 값이 (아마도 노예 가치 이상으로) 올라갈 때 그를 굶겨죽게 놔두는 것일까?"

"폭풍우에 배가 뒤집히려 해 짐을 버려야 한다면 비싼 말을 던져야 하나 더 싼 노예를 던져야 하나?"

 

이런 질문들에 대한 키케로의 입장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헤카톤의 다른 질문들의 답이 거의가 옳은 판단인 것으로 보이고 첫 문제에 대해 그가 긍정하였던 것을 보면 키케로 역시 동의했다고 보여진다. 아니면, 노예제 소유자가 많은 귀족당파의 지도자였던 키케로가 자신을 선호할 독자층을 위해 눈치를 봤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자신이 추종하던 도덕가가 실은 위선자임을 발견하는 때 만큼 인생에서 비참한 것은 없다. 특히, 블로그를 하는 중에 자주 공격을 당하고는 하는데 필자의 기억에 의하면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 중에 그의 지식에 관해서는 경탄을 하다가도 인격적인 면에서 실망하는 경우가 자주있다.[각주:3] 특히 키케로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이들로부터 배척 혹은 린치를 당한 바도 있는데, 점잖은 충고나 자신의 정당한 분노를 내세워서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대해 주제넘게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각주:4] 그런가 하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 감는 진짜 위선자도 있었다. 대개는 특정 집단의 이익이나 의사가 강요한 것이지만 그들이 여전히 입으로는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적어도 나의 눈에는 좋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키케로의 처신과 생각이야 시대적 한계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되고 변명될 수 있을 텐데 과연 그들은 어떤 식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날로 인정이 매말라가고 도덕이 쇠퇴하는 지금의 세태만큼이나 키케로 역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시대를 살았다. 공공심은 자취를 감추고 사적 이익과 영예를 추구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야심가형의 선동가와 장군들이 극성을 부리던 시대였다. 그가 그 책을 쓴 이유도 국가나 사회를 위해 겉만 선으로 보이는 것 그리고 유용하게 보이는 것을 참된 것과 분별해 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지조를 쉽게 바꾸어 공화파를 지지하면서도 카이사르가 득세하면 소신을 접었고 마침내는 카이사르 2세와 영합해 보려다 그 자신이 비참하게 배신으로 살해당하기까지 한 것에 대해 그의 높은 정치가로서나 문필가로서의 업적과 별개로 실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각주:5] 공화국몰락이라는 로마의 정치적 격변의 와중의 한 에피소드가 되어버린 그의 희생은 이와 같이 그릇된 도덕을 안고 있었던 그들의 자유와 공화국이 가진 원죄였을까 아니면 키케로 개인이 그릇된 가치관 때문이었을까?

 

 

노년의 키케로의 흉상

 

 

 

 

  1. 이 책은 서광사에 의해 그 번역판이 나와 있다. [본문으로]
  2. Cic. Off. iii. 89. [본문으로]
  3. 인터넷의 익명성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대개 특정 학과 같은 전공자들의 모임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 단체에 집단적 공격이란 성향이 더 강했다. [본문으로]
  4. 그의 경우는 다른 대부분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위선보다는 친구를 잘못 사귄 탓으로 보인다. 사실 인터넷에서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인격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심지어 사회에서 지탄받는 "일베충"과 같은 행태를 보이는 자도 있는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인간과 약간이라도 공격성향을 보이는 소위 그 친목써클 내에 있는 이들은 한두 다리 건너 건너 아는 사이들이더라는 것이다. [본문으로]
  5. 테오도르 몸젠은 그를 힘있는 사람을 추종하는 단순한 아첨군 이상으로 평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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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하면 조선 최대의 폭군 아니 그보다는 광인(狂人) 군주로, 각종 잔인함과 가렴주구 그리고 음행으로 악명이 높았으면서도, 누구보다 문학 시(詩)를 사랑했다고 한다. 다만, 주색을 아울러 함게 좋아했기에 대신들에게 빈번히 기생들을 두셋씩 옆에 끼고서 기생의 이름을 시제(詩題)로 내려 거스르면 벌을 내렸다. 관공서를 헐어 자기 놀이터를 만들고 각지에 채홍사를 파견하는 등의 난행도 많았고 폐비사건 등의 앙갚음으로 여러번의 참사를 벌인 것도 유명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김처선(金處善)의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더이상 충간할 신하들이 없자 환관이었던 김처선이 나섰다가 분노한 연산에 의해 다리가 잘리고 죽음을 당했다. 다리가 잘린 그에게 연산이 일어나라고 명령했을 때, 처선은 "상은 다리가 잘리고도 일어나실 수 있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일을 하고도 연산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칠촌까지 죄주게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대개는, 자기의 잘못도 잘못이려니와 환관따위가 감히 군주를 비방했다는 것이다.

 

 

殘薄臨民莫類予 (잔박임민막류여)

那思姦閹犯鸞輿 (나사간엄범난여)

羞牽痛極多情緖 (수견통극다정서)

欲滌滄浪恨有餘 (욕척창랑한유여)

 

백성에게 잔인하기로 나같은 이 없다지만

감히 천한 환관이 난여(천자)를 범하다니

부끄럽고 통분한 마음

창랑수(浪恨水)에 씻어도 한이 없으리.

 

 

반성이나 뉘우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과연 어렸을 때 부당히 어머니를 잃고 핍박된 상처가 이렇게도 후안무치한 연산의 광기를 낳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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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관우(關羽)가 묻 제후들의 비웃음과 외면 속에 <삼국지 연의>에서 화웅(華雄)을 베러 나가기 전에 했다는 유명한 그 말인데 정작 읽어보니 그런 말이 없는 듯하다. 이 말을 유행식힌 것은 찾아보니 오히려 1984년 이문열이 신문지상에 연재한 <평역: 삼국지>에서 인 듯하다. 찾아보니

 

계단 아래 한 사람이 크게 외치며 나와 말했다.

"소장이 원컨대 가서 화웅의 머리를 참하여 막사 아래 바치리다!"

뭇사람들이 보는데 신장이 9척이고 수염 길이만 2척인 사람이 붉은 봉황의 눈에 누에가 누은 듯한 눈썹을 하고 었다. 낯은 대추나무와 같이 무겁고 목소리는 종소리처럼 큰이가 막사 앞에 있었다. 원소가 누군지 물으니 공손찬이 유현덕의 동생 관우라고 했다. 원소가 직책을 묻는데 공손찬은 유현덕을 따라다니는 말탄 궁수(弓手)라 했다. 막사 위에서 원술이 크게 꾸짖으며 말했다.

"네가 우리 뭇 제후들을 속이고 대장을 없이 하느냐? 한낱 궁수 따위가 어지럽히느냐. 매를 쳐 쫒아내라!"

조조가 급히 제지했다.

"노여움을 거두시오. 이 사람이 큰 소리를 하였으니 필히 용기와 지략이 있을 것이오. 시험삼아 나가게 해서 이기지 못할 때 꾸짖어도 늦지 않으리다."

원소는 일개 궁수가 나가면 필히 화웅의 웃음거리가 된다고 했으나, 조조는 그 사람의 차림새가 속되지 않으니 화웅이 이가 궁수로 알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관우는 이에 이기지 못하면 "모(某:자기의 겸칭)의 머리를 베라"로 했다.

조조가 술을 데우게 해 한 잔을 데워 마시고 말에 오르게 하니, 관우는 "술은 그대로 두시오. 모가 곧 돌아오겠소"라고 말하고 막사를 나와 칼을 들고 몸을 날려 말에 올랐다. 뭇 제후들이 고성소리를 들었는데 천지가 진동하고 산이 꺼지는 것 같아 크게 놀랐다. 겨우 들으려 하는데 방울소리가 알리며 말이 중군에 도착하자 관우 운장이 화웅의 머리를 땅에 떨어뜨렸는데 그 술이 아직 식지 않고 따뜻했다.

 

 

내가 처음 로마사 공부를 시작하며 글을 쓸 때는 관우의 출전과 같은 생각이었는데 어느 덧 많이 쓰지는 못한 채 시간은 정말 많이 흘러렸다.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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