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 그리고 갈리에누스의 최후

 

전통적인 로마사가의 말대로 갈리에누스(Gallienus)가 정말로 그렇게 형편없는 인간이며 동시에 황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재위중의 제국이 내적 분열과 외적 침략 등의 온갖 재난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268년 음모에 의해 죽음을 당했을 때를 기점으로 제국은 급격히 회복되었는데, 이는 마치 마법에서 풀려나 악몽에서 갑자기 깬 것 같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이 사람의 최후에 관하여 기번은 아마도 조시무스(Zosimus)의 설을 취하여 대략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즉, 황제가 로마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을 때 상(上) 다뉴브(Danube)에서 아우레올루스(Aureolus)가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Milan)를 점령하면서 이탈리아의 패권에 도전하고 갈리에누스는 다른 다뉴브 군단의 반란때와 같이 신속히 이를 진압하러 나선다. 폰티 롤로(Pontirolo)라는 요충지를 놓고 격전을 치른 후 아우레올루스는 치명적 상처를 입고 밀라노로 물러나 포위되어 농성을 시작한다. 그의 최후의 수단은 포위진영을 이간하는 음모를 꾸미는 것이었는데 근위대 장관인 헤라클리아누스(Heraclianus)와 장군 마르키아누스(Marcian) 그리고 달마티아(Dalmatia) 호위대의 세크롭스(Cecrops)에 의해 황제가 살해된다. 황제는 야밤에 그들에게 포위된 채 치명상을 입고 죽기전 기적이 일어나서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애국적 감정이 그에게 자격있는 후계자를 지명하도록 유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이에 따라 장군 클라우디우스(Claudius)가 정통의 황제가 된다. 이것을 그대로 믿는다면 참으로 적을 포위한 중에 도리어 적의 음모에 의해 살해된 갈리에누스는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한 황제임에 틀림없을 일이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정말로 기적적으로 그의 죽음과 동시에 로마의 구제불능으로 보였던 국가적 재난들은 서서히 사라진다.

 

클라우디아누스 시기의 회복[268-270년]


황제는 죽었지만 우선 적의 분열을 틈타 포위에서 풀려나 강화를 맺을 수 있다는 참칭자의 희망은 사라지고 신황제는 그의 즉위에 본의아니게 나마 일정부분 기여했을 아우레올루스의 강화 요청을 거절하고 그를 죽인다. 그리고 그 동안 미루어졌던 군 및 사회 개혁에 착수한 후 야만인과 내란 세력을 일소할 계획을 세운다. 그가 즉위하던 해는 아마도 고트족(Goths)족의 마지막 해상원정과 병행한 일리리아 약탈이 계속되던 시기로 보이며, 동시에 제국의 여러 참칭자에게서 기원한 세력이 동서로 팔리마 제국과 갈리아 제국으로 각기 통합되어 제국이 삼분된 상태였다. 드디어 다뉴브 전선으로 나아간 신황제는 거의 20년간 로마를 괴롭히던 이들을 축출하여 이 지방을 재확립하여 클라우디우스 고디쿠스(Claudius Gothicus)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이 때 그는 다소나마 야만인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신의 도움을 받는데 역병이 적진에 만연했던 것이었으나 불과 재위 2년만에 동일한 재난이 그에게 덮쳐 시르미움(Sirmium)에서 숨을 거둔다. 그 역시 태생이 다소 불분명한 다뉴브 국경지방의 사람으로 군사적 경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으로 생각이 되며 훗날의 콘스탄티누스 집안이 이 사람에서 기원했다 하여 당시의 사가들은 이 사람의 덕을 많이 칭찬한다고 한다-즉 어느 정도 근거있는 말인지는 모르나 이 황제의 형인 크리스푸스(Crispus)의 증손이 콘스탄니누스(Constantine)라는 것이다. 그의 사후 그의 형제인 퀸틸리우스(Quintilius)가 아퀼레이아(Aquileia)에서 황제를 선언하나 오래지 못하고 같은 해 270년에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에게 정권을 내어준다.   

 

아우렐리아누스의 계승과 통일[270-275년]


혹은 애당초부터 황제가 후계자로 아우렐리아누스를 지명했다고도 한다. 그의 경우 역시 전황제들과 마찬가지로 변경지대 시르미움 지역의 농가 출신이다. 입대하여 차차 초급 지휘관에서 장군에 까지 올라갔고 고트전쟁 등에서 전공을 세워 다른 장군들 처럼 발레리아누스의 신망을 얻었다. 갈리에누스의 치세에도 황제에게 클라우디우스와 더불어 중요한 장군이었을 것이다. 그의 군율은 너무나 혹독했고 심지어 잔인해 보일 정도였으며 원로원이나 귀족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분열을 해소하고 침략자들을 로마에서 몰아내어 20년간 계속된 로마의 수치를 씻어냈지만 아쉽게도 그이 재위 기간도 4년 9개월밖에는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분명 영웅이었고 그의 가장 인상적인 업적은 갈라진 로마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고 멸망직전의 나라를 다시 소생시킨 것이리라. 그 때까지 동방에서는 오다이나투스(Odaenathus) 이래 갈리에누스와의 협조하에 세력을 키운 팔미라 제국(Palmyrene Empire)이 그의 아내인 제노비아(Zenobia)에 의해 더욱 성장한다. 이미 269년 당시의 동방정세를 이용해 티마게네스(Timagenes)의 도움을 얻어 이집트를 자신의 영역에 추가했고 로마측의 프로부스(Probus)가 편성한 로마의 이집트-아프리카 혼성 군단이 바빌로니아(Babylon) 근처에서 티마게네스에게 패하면서 그녀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 진다. 갈리아 제국 역시 빅토리아(Victoria)라는 여제(女帝)의 통치를 받기도 하는데 그녀는 아들과 손자의 섭정으로서 그리한 것이며 포스트무스 이후의  갈리아제국의 대부분의 황제들은 즉위시 그녀의 금전적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을 군대의 반란으로 역시 잃었을 때 그녀는 테트리쿠스(Tetricus)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유해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테트리쿠스는 도리어 배은망덕으로 그녀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먼저 팔미라 정복에 나선다. 그가 바다를 건너자 비티니아(Bithynia), 앙키라(Ancyra) 티아나(Tyana)가 귀순하거나 쉽게 굴복한다. 시리아의 안티오크(Antioch)의 황제의 관대한 조치를 기대하며 항복하게 되어 이제 팔미라 제국은 풍전등화의 운명을 맞는다. 드디어 안티오크(Antioch)와 엠사(Emesa)로 여왕이 군대를 파견에 결전을 벌이고 패하자 사실상 제국은 와해된다. 팔미라는 포위되고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동방으로의 탈출을 하는 도중에 체포된다. 테트리쿠스의 운명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항복문서에는 <아이네이아스>를 인용했다고 하는 이런 구절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Eripe me his, invicte, malis.  (나를 구해주시오. 극복할 수 없는 악덕에서) " 


이로써 로마는 분열과 쇠망의 위기에서 다시 회복되고 예전대로 광대한 영역의 패자로 다시 올라서게 된다. 카이사르와 같은 정복자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사상 가장 성대한 개선식을 올린다. 내전뿐 아니라 그의 클라우디우스 사후 다시 도전해 오는 게르만 족들 고트(Goths)와 알레마니(Alemanni) 들을 굴복시킨다. 또한 그의 당대에 로마의 성벽을 새로이 쌓는 일을 했는데 프로부스 황제 때 완성이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성벽

그리고 그에 대한 음모도 많고 그에 대한 처벌도 그의 군기만큼 엄했다. 펠리치시무스(Felicissimus)의 반란도 그런 것이다. 그는 카이사르 처럼 갈리아를 정복한 후 동방원정을 계획했지만 채 페르시아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음모에 의해 희생된다. 아마도 군단을 엄하게 다룬 댓가라고 보여진다. 그의 재위시 로마의 영광은 다시 찬연한 빛을 발하는 듯 하지만 내용을 잘 들여다 보면 의혹스런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야만인을 굴복시켰다지만 그 후로 국경침입이 완전히 멈춘 적도 없고 그 굴복의 조건을 보면 다키아(Dacia)의 철수가 있는데 이는 아마 하드리아누스의 첫 예이후 로마인이 자청해서 영토를 내준 아주 드문 경우의 하나였으며 야만인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그들을 로마군대에 받아들인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Posted by DreamersFle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