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인의 폭군들

 

그리고 불운한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 사후 갈리에누스(Gallienus) 재위 중에 있었던 또 하나의 문제는 로마가 여러 참칭(僭稱)의 황제들로 뿔뿔히 분열된 상황에 있었다는 점이다, 흔히 이들을 아테네의 30의 폭군들과 비교해 로마의 30인의 폭군들(the thirty tyrants of Rome)들이라 불렀다. <황제역사>에는 30명 정도의 인물을 거론하고 있지만 실제로 참칭자의 아들들까지 다 합친 것이므로 실제로는 19명 정도라고 한다. 기번은 이 많은 사람을 다 일일히 다루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았는지 이들 중 몇몇 중요한 사람들만을 설명하고 있다. 비록 적법한 절차로 황제가 된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사가들은 오히려 정통황제인 갈리에누스의 무능을 비난하고 오히려 이들 30명의 폭군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기번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 그의 말을 보자.


 

폭군(Tyrant)이라는 끔찍스런 호칭이 종종 고대인들에 의해 최고 권력의 불법적 장악을 표현하는데 그의 남용에 대한 어떤 언급없이 이용되고 있었다. 참칭자들 중 여러명이 덕의 빛나는 덕의 모델이였고 거의 모두가 용력과 능력의 상당부분을 소유했다. 그들의 재능은 그들을 추천하여 발레리아누스의 호의를 갖게 했고 점차 그들을 제국의 가장 중요한 명령권으로까지 승진시켰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칭호를 보유했던 그 장군들은 능력있는 지휘와 엄한 군율로 그들의 군단들에 존경을 받거나 전쟁에서 용기와 승리로 경배되거나 솔직함과 관후함으로 사랑받았다. 승리의 전장은 종종 그들의 선출의 광경을 보였고 어의(御衣)에 대한 모든 후보들 중 가장 경멸스런운 무기장인 마리우스(Marius) 조차 두려움 없는 용기와 당할 자 없는 힘과 우직할 정도의 정직성을 보여 주었다.

 

기번은 비록 생략이 많았던 이 부분에 대해서 여기서 자세히 다루어 보려고 한다. 우선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던 당시로 돌아가 그의 소관이었던 동방의 문제부터 시작하자. 여기에는 뜻밖에 키리아데스(Cyriades)라는 일종의 로마입장에서 향도가 되어서 사푸르(Sapor)의 침략을 충동질했고 안티오크(Antioch)와 카이사리아(Caesarea)를 함락하던 그 날 스스로 카이사르(Caesar)를 칭하였으니 일종의 괴뢰황제가 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미 발레리아누스가 첫 출전하던 당시 제거된 셈이었다.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때에는 이미 언급했던 마크리아누스(Macrianus)와 프라에토리안 근위대 장관 발리스타(Ballista)가 남은 군단을 모아서 갈리에누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실은 이 두명이 마크리아누스(Macrianus)의 두 아들인  소(小) 마크리아누스(Macrianus)와 퀴에투스(Quietus)를 황제에 세웠다고 한다. 패잔병들을 추스려 드디어 발리스타가 발레리아누스 패배 후 페르시아 사푸르에게 첫번째 일격을 가하고 그의 퇴로를 팔미라의 군주 오다이나투스(Odaenathus)가 공격한다. 오다이나투스는 갈리에누스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면에서 마크리아누스와는 대립하게 되었다. 대소(大小)의 마크리아누스가 일리리아에서 황제로 추대된 아우레올루스(Aureolus)를 치기 위해 출전하였을 때 그에게 패하게 된 틈을 타서 오다이나투스는 아시아에 남아있던 발리스타와 퀴에투스를 제거하여 장차 제국을 삼분할 팔미라 제국의 기초를 쌓는다. 사실 마크리아누스는 몸소 출전하기 전에 갈리에누스(Gallienus)에 의해 아카이아(Achaea)의 총독으로 임명된 발렌스(Valens)를 제거하기 위해 피소(Piso)를 파견하였는데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고 테살리아(Thessaly)로 물러나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발렌스 부자와 피소 모두 얼마 못가 살해된다. 이 밖에 소아시아의 이사우리아(Isauria)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트레벨리아누스(Trebellianus)를 황제로 추대하고 점차 실리시아(Cilicia)로 영토를 넓혔다. 이집트(Egypt)의 경우 특히 알렉산드리아(Alexandria)가 극도의 혼란을 겪었으면서 갈리에누스에 대항해 아에밀리아누스(Aemilianus)를 세웠다. 아에밀리아누스는 이집트가문 출신의 정통황제의 장군인 테오도투스(Theodotus)에게 패하여 호송되었으며, 전자의 경우는 역시 테오도투스의 형제인 캄시소레우스(Camsisoleus)와 맞서 요새를 나와 싸우다가 제거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요새를 근거로 저항을 계속한다. 또한 폰투스(Pontus)에는 갈리에누스의 가장 뛰어난 장군이라는 사투르니누스(Saturninus)가 할거하였으나 병사들에게 너무 엄격히 대한 나머지 인기를 잃어 살해된다.

일리리아와 다뉴브 국경지대에서도 끊임없는 반란과 진압 그리고 배신이 이어진다. 인게누우스(Ingenuus)와 레길리아누스(Regillianus)와 아우렐우스(Aureolus)가 번갈아 일어났다. 우선 갈리에누스가 게르만을 상대로 고전하던 258년에 판노니아 총독인 인게누우스가 메시아 군단에 의해 추대되었으며 갈리에누스는 이를 진압하고서 이 지역과 관련자들에 대해 잔인하고 철저한 복수를 명한다. 또한 이 곳에서 사르마티아계 부족과의 싸움에서 공이 많은 레갈리우스(Regalianus) 역시 황제가 되지만 곧 살해되고 마지막으로 아우레올루스(Aureolus)를 추대하는데 여러 역학관계에 의해서 이 인물은 갈리에누스와 동맹관계를 유지한다. 그는 동방에서 진격해온 마크리아누스의 야욕을 분쇄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갈리아에서 일어난 포스투무스(Postumus)를 상대로 갈리에누스와 이해를 같이 하게 된다.

포스트무스의 배신은 서방을 맡도록 책임지운 갈리에누스의 아들 살로니우스(Saloninus)를 죽인데서 시작되어서 갈리아 전토를 회복하고 향락에 다소 빠진 갈리에누스를 대신해서 프랑크를 몰아내고 이 땅을 지킨다. 그리고 갈리에누스의 성난 공격도 잘 막아내 그를 화살에 맞게 하고 이후 갈리에누스는 아우레올루스와 동맹하여 그에 대항하려 한다. 이후 역시 배신이 끊이지 않아 그 역시 살해되나 이 갈리아 제국은 롤리아누스(Lollianus), 빅토리누스(Victorinus)와 그의 어머니 빅토리아(Victoria), 삼일천하의 마리우스(Marius)와 그 다음의 테트리쿠스(Tetricus)로 이어져 제노비아 여왕의 팔미라와 함께 나중에 로마를 삼분하게 된다. 

아프리카(Africa)에서는 한 때 셀수스(Celsus)가 추대되지만 칠일만에 갈리에누스의 누이에게 살해되었다. 베리(J. B. Bury)에 의하면 시기적으로는 늦지만 펠리시시무스(Felicissimus)라는 인물도 이에 추가되어야만 한다고 한다. 또 그에 의하면 고귀한 혈토을 가졌다는 피소는 참칭자가 아니며 마크리아누스, 발리스타, 오다이나투스, 제노비아 역시 엄밀히는 황제가 아닐 것인데 이는 그들의 아들들이 대신했거나 오데나투스 처럼 정통황제의 인정을 받은 경우이다. 오데나투스-제노비아 부부에게는 헤렌니우누스(Herennianus)와 티몰라우스(Timolaus)의 두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기번은 비록 이들 유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의 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더 비천한 계급의 농부나 노예의 지배를 받게 된 중에 농업이 황폐화된 시칠리아의 예를 추가로 언급하였다.


 


30인의 폭군 표[각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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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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