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인 오다이나투스

 

로마사상 248년 부터 268년까지는 불운했던 시대 중 하나였으며, 특히 발레리아누스(Valerian)가 산채로 페르시아의 포로가 된 것은 전 로마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치욕이었다. 하지만 이민족의 종횡무진한 침략으로 경황이 없는 로마측에서도 그에 대해 통쾌한 복수를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단독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이 아닌 갈리에누스(Gallienus)가 아닌 로마인들에게 그렇게도 용기없는 온화한 기질을 가졌다고 조롱받던 시리아인 팔미라(Palmyra) 사람 오다이나투스(Odaenathus)였다. 이 시기의 역사는 안팎의 혼란으로 인한 극도의 참상을 겪었기 때문이었는지 연대기가 불확실하다고 하지만 다음에서 이 인물과 그에 얽힌 동방정세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발레리아누스와 참제들


당시의 로마를 둘러싼 동방정세를 보면 데키우스 황제의 전사 이후 로마의 쇠약함이 노출됨에 따라 페르시아 측이 이미 발레리아누스가 잡힌 사태 이전에도 몇번 로마의 국경을 흔들어 보였다는 기록들이 있다. 사푸르의 비문을 보면 안티오크(Antioch)가 이 와중에 한 번 함락되 일이 있었고 발레리우스가 포위된 바로 그 때에도 그의 소유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서방의 일은 아들이나 공동황제인 갈리에누스에게 맡긴 상태에서 이 와중에 황제가 출정을 하였으므로 포로가 되기 전에는 일진일퇴의 싸움을 두 제국의 대표들이 벌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황제 역사>에 보면 이 때 황제를 따라나왔던 사람들 중에 프라에토리안 근위대 장관인 발리스타(Ballista)와 황제의 장군인 마크리아누스(Macrianus)가 새 황제가 동방을 다스릴 자질이 결여됨을 생각하여 군단과 함께 마크라아누스와 그의 두 아들인 소(小) 마크리아누스와 퀴에투스(Quietus)를 추대하게 된다. 당시 발레리아누스의 사태(260) 후에 이른바 30폭군이라는 찬탈자들이 각지에서 할거하며 서로 황제를 칭했기 때문에 별로 놀라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사실 "여자라도 그 보다는 잘 다스렸을 것"이라고 이 정통 황제를 조롱하는 <황제역사>의 사가는 그에 관한 이러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집트의 반란을 듣고서는 "어쩌라고! 우리가 이집트의 리넨(linen아마 섬유)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라 하고, 아시아가 유린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쩌라고! 우리가 초석(saltpetre)없인 어떻게 되나!" 라고 영토 하나 잃어버릴 때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그의 아버지가 포로가 되었을 때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로마인으로 동방을 책임지던 마크리아누스 일파역시 전황제를 찾아올 생각이나 보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갈리에누스를 치기 위해 바다를 건너게 된다. 

 

오다이나투스의 설욕전

이런 상황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로마의 쓰러진 위대성을 다소 나마 회복한 것이 시리아인 오다이나투스였다. 그는 264년에 인근 지역을 장악하고 끌려간 황제의 송환을 목표로 사푸르에 대해 전쟁을 선언했다. 사실 <황제역사>에도 나오는 것 처럼 사푸르는 누차 로마 황제를 잡은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의 위험함에 대해 충고하는 동맹들이 여럿이 있었음에도 이를 들은채도 하지 않다가 오다이나투스의 맹공을 받게 된다. 오다이나투스는 그 때까지 사푸르가 이 지역에서 성취한 업적을 한꺼번에 허물어 버리고 니시비스(Nisibis)를 재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두 번씩이나 사산조의 수도 크테시폰(Ctesiphon)까지 나아갔다. 비록 전황제를 찾지는 못했지만 사푸르의 첩들과 왕자들을 데려와 로마의 수치를 다소나마 씻어냈다고 전한다. 이 때 페르시아 영토를 황폐화 하였으며 그 전 제후들이 모여 가까스로 수도를 사수할 정도로 공세를 퍼부었다고 하지만 끝내 사푸르는 로마황제를 넘겨주지 않았다. 어쨌든 이로 인해 정통황제라 할 수 있는 갈리에누스도 이 공적을 인정해서 그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란 칭호[각주:1]를 인정하고 그를 믿음직한 동맹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역시 동방에 할거하며 갈리에누스에 반기를 들었던 마크리아누스가 퀴에투스와 발리스타를 남겨두고 일리리아 정복을 위하여 역시 그곳에 황제로 추대되고 있던 아우레올루스(Aureolus)를 치기 위해 출격해서 패하게 되었는데, 이 때 그 군단들이 배반하여 퀴에투스를 죽이고 항복해와서 더욱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발리스타에 관해서는 그 후 행적이 분명치 않아 달아나 황제가 되었다고도 한다.

 

오다이나투스의 죽음과 그 후의 팔미라 왕국


그리고 이 위대한 영웅도 비열한 배반자의 칼에 갑작스럽게 쓰러지게 된다. 기번에 의하면, 위의 혁혁한 업적에 더해 고트족의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원정에서 돌아와 엘레가발루스의 고향이기도 한 시리아의 에메사(Emesa)에 돌아왔을 때 그의 조카인 매오니우스(Maeonis)가 눈앞에서 창을 내질렀는데 이 일로 자신의 아들 헤로드(Herod)와 함께 살해된다. 갈리에누스에 대해서는 그렇게 시종 비웃음을 던지는 <황제역사>도 이 순간에 이르자 로마의 불운을 진지하게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찬탈한지 얼마되지 못해 그 역시 헤로드의 계모이자 오데나투스의 후처인 제노비아(Zenobia)의 복수를 받게 되어 팔리마 제국은 이 동양의 여왕의 차지가 된다. 그녀의 후에 보여준 재능으로 미루어보면 실은 오데나투스가 이룬 업적도 그녀와 함께 이룬 것이 아닐까 한다. 그녀는 스스로 조상인 클레오파라에 비길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실제로도 군주로서의 자질들 뿐아니라 학문적인 재능도 가진 보통의 로마 황제 이상의 능력이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오데나투스는 전쟁 이외에도 사냥을 취미로 하여 매번 그 용맹함을 드러냈는데 거기에서 조차 그녀는 전혀 밀리지 않았으며 남편사후의 새로운 국제정세에도 영리하게 대응하여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페르시아가 다투어 그녀와의 불화를 두려워 하여 동맹을 맺기를 간청하였고 실제로 사푸르와는 동맹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로마가 세력을 회복하여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도전했을 때는 때마침 사푸르가 죽어서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여 이집트를 병합하여 남편에게서 받은 영토도 더 넓혀서 갈리에누스의 후계자의 로마 제국과 그 서쪽의 갈리아 제국과 함께 로마세계를 삼분하였다고 한다. 

 

제국의 삼분 지도



그러나 그 영토에 비해 막상 아우렐리아누스가 제국을 안정시키고 쳐들어왔을때는 그다지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점차 속한 도시들이 회유되어 넘어가는 바람에 손쉽게 항복하였고 그 신하였던 유명하 롱기누스(Longinus)도 이 때 여왕을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며 팔미라 제국은 더 이상은 역사상에 그와 같은 빛을 발하지는 못하나 그 옛날의 화려한 시대를 유적을 통해서는 볼 수 있다고 한다.

 

팔미라 유적 전경

 

 

 

 

 

  1. 공동황제의 지위를 인정한 것은 아닐 것이라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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