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족의 재편과 반격

 

그리고 게르만족도 이 시기 점차 또 다른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로마를 멸망시켜 문명세계를 암흑구덩이속으로 던져 놓은 것이 이들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경우가 페르시아보다 더 치명적일 것이다. 로마 멸망의 최종적인 원인이 된 이들은 이 시기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종래에 분열되었던 그들은 더 강력하고 통합된 몇개의 민족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재편성 과정은 사료상으로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나 상대적으로 그리 분명하지는 않다고 한다. 

 

1세기에 라인 밖에는 수많은 군소 게르만 부족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가 쇠약한 시기에 이들은 단결하여 보다 큰 집단을 이루는데 제 10장에서 이들의 대표로 기번은 프랑크(Franks), 알레마니(Alemanni), 고트(Goths)를 들고 있다. 여기서는 여전히 불확실한 이들의 생성과정을 대략 기번의 말을 빌어 살펴보고자 한다.

 

프랑크족

 

먼저 로마가 멸망한 뒤 프랑스를 장악하여 그 선조가 된 프랑크 족에 대해서 특히 그 후손인 프랑스인들에 의해 여러가지 시조에 대한 추측들이 많았지만 가장 유력한 결론은 그 지역에 있던 부족들 즉 라인 저지와 베이저 강 주변의 부족들이 하나의 동맹을 결성한 것으로 프랑크는 그 동맹의 이름이라 한다. 로마군을 무찌른 적이 있던 카우키(Chauci)족, 게르만족의 영웅 아르미니우스의 체루스키족(Cherusci) 그리고 가공할 보병대를 가진 카티족(Catti) 등 라인 바로 건너에 살며 갈리아를 약탈하던 이 부족들이 하나로 통일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부터 이들은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동맹의 이름 프랑크는 곧 자유인(Freemen)이란 말로 아마도 그 자유란 로마에 대한 자유일 것이며 로마가 자신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으로 로마에 대한 자신들의 침략을 그에 대한 정당방위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알레마니족

 

알레마니는 프랑크보다 일찍 문헌에 등장한다. 카라칼라(Caracalla) 황제 재위시에 수에비(Suevi)계통의 사람들이 마인(Mein)강변에서 나타나 로마에게 식량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타키투스가 머리장식이 다른부족과 노예들을 구분짓는 독특한 방식을 가졌다는 게르만 최대의 부족이라고 말한 이 수에비족이 알레마니족의 선조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셈노네스족(Semnones)이 이들 중 가장 오랜 고귀한 혈통으로 존중받았다고 하는데 여기(엘베Elbe와 오데르Oder강 사이)에서 이동한 알레마니(Allemnai)와 훗날의 스크바벤(Schwaben)이 유래하였다고 한다.[각주:1] 알레마니의 뜻은 남자 답다 혹은 용맹함과 관련이 있다. 알렉산더 세베루스에 의해 놀라게 되어 주춤하지만 이후 꾸준한 성장을 계속해서 라인-다뉴브 국경에 정착해 로마를 위협하고 데키우스(Decius)황제를 전사시킨다.

 

고트족

 

고트 역시 로마 멸망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부족이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마치 로마를 약탈과 함께 파괴하고 멸망시키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 느낌마져 준다. 그들의 역사는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지만 기원설은 문헌상의 판단으로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고트가 오도아케르를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다스리면서 라벤나의 궁정의 총리인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가 쓴 고트사가 후대 요르다네스(Jordanes)의 요약된 책으로 전한다. 거기서 그들의 기원을 스칸디나비아라고 하였다. 그들의 남하경로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흑해 주위까지 도달했다.[각주:2] 이렇게 해서 야지게스(Jagyges), 알란(Alani),록소라니(Roxolani) 등이 사는 사르마트 영역 보리스테네스(Borysthenes)와 타나이스(Tanais) 하구에 이른 첫 게르만 게통의 민족이 된다. 이 민족의 스칸디나비아 기원은 사실 많은 의심이 있었다. 또 요르다네스의 책에 오스트로고트(Ostrogoths)와 비시고트(Visigoths)가 각기 동쪽의 고트와 서쪽의 고트를 의미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흔히 이러한 탓으로 이들을  동고트와 서고트라고 번역하는데 요르다네스의 설명이외에는 그다지 신뢰성있는 말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기번 자신은 이것들을 다 받아들였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요르다네스의 스칸디나비아 기원설은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될 수는 있지만 부분적으로만이다. 그리고 동서 고트의 의미에 관한 설도 기번은 그 당시에도 동서의 고틀란드가 있었다고 기독교 전파당시에 스웨데스(Swedes)와 고트족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지금도 그런 지명이 있다) 상당히 근거있고 정확한 기억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리고 가장 이른 시대의 문헌으로는 프톨레미의 " 고우타이(Goutai)"가 첫 등장이라고 한다. 또한 타키투스의 고토네스(Gotones)가 이주전의 그들이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이 많이 이루어진 지금에도 앞서 말한 이유때문에 더이상의 구체적인 이동경로나 전파양상을 알기는 힘들다고 한다.

 

다음 시대부터는 이들의 종횡무진한 활약을 보게 될 것이다.




 

<선사 시대 게르만족의 확산


 


게르만족의 이동

 

 

  1. Tacitus 1-Germania, Loeb Classic Library. [본문으로]
  2. 고고학적으로 흑해 등지의 체르니야코프 문화(Chernyakhov culture)가 고트족을 말하는 것은 거의 확살한 것 같다. 폴란드 비엘바르크 문화(Wielbark culture)가 준 영향은 제한되어 있어서 고트족의 이동이라고 반드시 단언하기 힘들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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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3세기 문턱에서

 

세베루스 왕조 이후 로마에 대해 기번은 이렇게 말한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재위시에서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시기까지 로마의 적들은 자기 가슴 안에 있었다. 즉 폭군과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번영은 라인(Rhine)과 유프라테스(Euphrates) 상에 일어날 수 있는 혁명들에는 아주 우원하고 미미한 이해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군사적인 질서가 험한 무정부상태속에서 군주의 권력과 원로원의 법률과 부대내의 기율마저 무너뜨렸을 때 북쪽과 동쪽의 야만인이 국경을 맴돌다 대담하게 쇠퇴하는 군주국의 속주들을 공격했다.

 

이제 그 나마 로마 내부에서 목격했던 눈쌀 찌푸리는 사태들은 행복한 시대로 향수할 만했다. 이제는 군사적인 힘에서도 로마는 외부의 도전을 받아야 했다. 물론 그 적은 북쪽과 동쪽에서의 혁명적 사태에 의해 발단되었다. 그 첫번째는 동방에서 파르티아(Partia)를 대치한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d Persia)의 흥기였다. 두번째는 게르만족의 재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쇠락하는 왕조를 끊임없이 위협하면서 로마멸망의 주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미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시절에 그들과 어쩔 수 없는 숙명의 대결을 시작한다. 우선 페르시아가 그의 재위시에 탄생한다.

 

사산조 창업

 

기번이 말하는 창업과정은 이러하다. 이 왕조의 창시자는 아르다시드(Ardashir) 또는 라틴어화된 말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ares)로 파르티아의 마지막 군주인 아르타반의 군대에서 명성을 쌓은 것이 왕의 질투를 받아 추방되었다가 파르티아로 부터 페르시아를 해방시킬 군대를 이끌고 아르타반과 세번의 전투를 치른 끝에 그 마지막 전투에서 그를 죽이고 그리고 아르사케스 왕가와 파르티아를 복속시키고 왕중왕(King of King) 즉 샤안샤(Shahan Shah)의 칭호를 거머쥔 후 고대 페르시아의 영광을 재현할 정복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따라서 재위말년의 알렉산더 세베루스와 외교와 전쟁 양면에서 격돌하게 된다.

 

아르다시드는 비문에서 확인되는데 그의 아버지는 파팍(Papak)이라고 하며 사산가문에서 기원한 것은 맞지만 그의 출자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바가 많아 그의 부모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고[각주:1], 특히 서양측에 전해지고 기번이 썼던 것 처럼 그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Achaemenes Persia)의 후손이며 그 고토를 회복하고 파르티아로부터 페르시아를 해방하려 했다는 것은 이란 쪽이나 그 자신의 전승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라 한다. 하지만 페르시아적인 전통이 부활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왕조의 특징은 전의 파르티아의 느슨한 봉건제적 국가를 보다 중앙집권화 한 것이다. 기번이 서술한 아르다시드의 조로아스터교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기번에 따르면 다소 과장된 말이겠으나 그는 모든 제국 관할 속주들을 강한 군대와 함께 방문하고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서는 왕의 칭호를 빼앗고 민중과 자신사이의 모든 중간 세력들을 제거했다고 한다.[각주:2]

 

그리고 외부세계에 새롭게 일어난 자신의 힘을 알리는데도 성공했다. 주변 세력중 인도와 스키티아에 대해서는 쉬운 승리를 거두었는데 남은 것은 로마였다. 여기서 잠깐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 이후의 로마와 파르티아 관계를 살펴보면, 그 후 처음 40년간은 평화가 계속되었다. 마르쿠스 황제 때 165년 크테시폰과 셀레우키아의 중요한 도시를 함락하고 나아가 셀레우키아를 완전히 파괴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파르티아가 멸망하기전에 216년 오스로에네(Osroene)를 빼앗아 속주화시킨다. 헤로디안에 의하면 새 왕중왕이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지배영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로마에 도전했고 이에 대해 외교적으로 알렉산더가 주의를 주었으나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고 한다.


 

 

 

 

새롭게 로마에 병합된 오스로에네 속주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동방원정

 

그후,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동방 원정에 나서는데 그 기록이 엇갈린다. 표면적으로 알렉산더는 전쟁을 마치고 귀환한 후 메소포타미아 정복에 대한 성대한 개선식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선식은 이런 점들을 은폐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선 가는 곳마다 적지 않은 군대의 반란이 있었다는 점이 그 하나였고 이런 불복종에는 마마보이라는 비난을 받게 하는 그의 모든 덕성에서 오는 신뢰감을 빼앗는 그의 유약함에 도 일정한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3방향에서 페르시아를 침략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첫 군단들은 아르메니아를 뚫게하고 두번째는 적의 동쪽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의 늪지로 마지막은 자신이 지휘하여 중앙으로 뚫고 가려고 했다. 계획자체는 그의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훌륭한 것이었지만 운이 좋지 않아 동쪽 군단이 너무 빠르게 진군하다가 수적 우위에 있는 페르시아군에게 완전히 궤멸되었고 이것은 가장 강한 군대를 이끌고도 어머니의 간섭때문에 우물쭈물하여 진격이 늦은 알렉산더의 우유부단때문이라고도 한다. 알렉산더는 동방의 수도인 안티오크로 철수했고 그곳에서 다시 원정을 재개하려다 게르만 족이 소동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돌아온다. 어쨌든 더이상의 페르시아왕의 영토확장 야망을 꺾었던 것으로 보아서 원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 무승부였었다. 훗날 아르다시드의 후계자인 샤푸르에게 로마와 발레리아누스 황제 등이 겪게 되는 치욕에 비한다면 차라리 알렉산더의 일은 "선방(善防)"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캠브리지 고대사 [본문으로]
  2. <캠브리지 이란사>에 의하면 사산가문의 (지방) 통치자들과 왕들은 필요와 정책에 따라 영지를 바꾸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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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세베루스[재위 222-235년]의 선정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가 코모두스 이래의 로마제국 쇠락기를 주제로 한 것이고 그 쇠락기는 약 300년간이며 기번은 그 전후로 약간 더 넓게 약 400년간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베루스 왕조의 성립까지를 이야기 했었다. 지난 편까지는 기번의 이름을 빌려서 나의 주관적인 생각들을 피력한 점이 다소 많았던 듯 한데, 여기에서는 좀더 기번의 원문에 충실한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

 

사실 세베루스 왕조에서는 역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또 하나의 비중 있는 인물이 있다. 그는 코모두스 이래 쇠락하는 로마의 기풍을 바로잡은 개혁군주로 평가되는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이다. 일반적인 로마사가의 것으로서이기도 하고 기번 역시  평하기를 몇몇 성격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쇠락하는 로마를 일으킨 명군(明君)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으론 그 시대라고 폭정(暴政)이 종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현명한 군주가 있다하더라도 그 혼자의 힘으로는 혼탁한 시대를 바로잡기는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는 군주가 선정(善政)을 베풀지만, 군주를 대신해 폭군(暴君)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 시대에도 전대와 다를 바 없이 적지 않은 의인(義人)들이 폭군 아닌 폭군들의 칼에 쓰러진 점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시대를 생각하면서 사마천(司馬遷)이 노자전(老子傳) 중에 쓴 공자에 대한 충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孔子)가 주(周)나라에 가서 그의 관심사인 예(禮)에 대해 노자(老子)에게 물었다. 노자(老子)가 말하길 「그대의 말하는 바는그 사람과 뼈가 이미 썩어버렸소. 오직 그 말만 남은 것이오. 더구나 군자(君子)가 그 시기(時期)를 얻는다면 수레를 타고 거들먹거리지만 그 시기(時期)를 얻지 못한다면 누추히 이곳저곳을 떠돈다오. 내 이를 듣건데 좋은 장사군은 깊이 감추어 마치 텅빈듯하고 군자가 덕(德)이 성(盛)하면 용모가 마치 어리석은 것 같다하오. 」

 

 

울피아누스

 

비교적 연소했던 세베루스가 사촌의 살해로 황제가 되었을 때 그를 사실상 지배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 마매아(Mamea)였으며 그녀는 중요한 국정을 프라에토리안 장관(Praetorian prefect)인 울피아누스(Ulpian)에게 맡겼는데 이 사람이야 말로 그 시대의 첫번째 의인(義人)이자 사실상 그 시대의 중흥을 이룬 실질적인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 시대의 선정이라면 단순히 엘라가발루스의 폐풍을 몰아낸 것이 아니다. 카라칼라에 발명된 과중한 세금을 다시 낮추었으며 사치품에 대한 규제는 남겨두고 필수품에 대한 가격이나 이자율은 낮춤으로서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켰고 원로원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시켜 새로운 번영과 평화를 꽃피웠 던 것이라고 기번은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이 군대에까지 미쳤을 때가 역시 문제였다. 이 개혁가이자 법학자였던 울피아누스는 어린 황제를 대신해 과거 페르티낙스(Pertinax)가 그랬고 무수한 황제들이 그랬듯 그 자신이 장관으로 있었던 프라에토리안 부대의 칼에 쓰러져야 했다. 기번의 말에 의하면 당시 이 선량한 개혁가는 민중과 근위대간의 내전이 로마에서 삼일간 계속된 후에 궁전으로 들어가 황제의 보호를 청했고 근위대는 황제 앞에서 끌어내 처형했다고 한다[228년]. 그러나 그 책임자의 처벌은 즉시에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일시적이지만 근위대의 혁명은 성공했던 것이다.

 

또한 이 사람이 유명한 법학자였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 로마가 세계에 남긴 가장 독특한 유산 중의 하나가 법률이라고 하고 제정로마를 통틀어 그런 만큼 법학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보여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세베루스 왕조시대에 황제를 제외한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프라에토리안 장관으로 법학자가 된 인물이 많았고 이 울피아누스가 그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파피아누스(Papinian) 같은 인물도 울피아누스와 비슷한 운명을 맞은 축에 속한다. 황제역사는 카라칼라가 공동황제였던 동생 게타(Geta)를 죽이나서고 법률가였던 그에게 그의 범죄를 원로원과 민중 앞에서 해명하라는 부탁을 거절했고 그래서 그 역시 살해되었다고 한다.[각주:1]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을 당당히 하는 한국의 법률가에 비하면 두 사람의 행동은 소신있는 법학자와 그와 다른 쪽의 차이를 잘 보여주지 않은가 싶다. 파피아누스의 경우 그의 죽음이 단순히 그런 청을 거절해서라기 보다도 그 자신이 게타의 파로서 그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 속에 자신도 연루된 것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현명한 군주가 있었어도 여전히 의인이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기는 여전히 힘든 시대였던 것 같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

 

그리고 또하나의 의인을 기번은 울피아누스와 나란히 소개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로마사>를 지은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이다. 그 역시 앞서 울피아누스와 같이 개혁가다운 마음을 가졌었고 만일 그가 그의 신변을 걱정한 알렉산더 황제의 배려로 황제와 함께하던 집정관직에서 은퇴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울피아누스와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아마 두 사람은 사육신과 생육신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많은 분량의 저술을 남긴 것 같다. 울피아누스의 저작은 <유스티아누스대법전>속에 전하고 디오의 <로마사>도 많이 읽히는데 디오의 경우는 그 자신의 역사책에 언급된 부분이 아니었다면 역사적으로 잊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사려깊은 황제의 배려로 그는 성난 군대의 비수를 피해 은퇴후 그가 오래전 부터 기획해 왔다는 <로마사>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정작 자신과 관계를 맺었던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에 대해서는 그 다지 많은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는데 아마 있었더라도 그들간의 관계를 생각했을때 공정했다고 평가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단지 그 황제 즉위에 약간의 정당성을 보태려고 했는지 엘라가발루스에 대한 안좋은 이름들만 소개하는데 대개 가짜 안토니누스, 아시리아인, 사르다나팔루스, 티베리누스다. 티베리누스는 그가 성난 군중에 의해 티베르강에 버려졌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라는데 디오 외에 다른 사람들도 많이 썼던 말인지는 모르겠다.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

 

그리고 이 황제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며 기번역시 이 점을 간과치 않는다. 그 약점은 바로 그의 어머니 마매아에 대한 것으로 그녀는 사실상 섭정을 하는 여제(女帝)였고 동시에 황제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황제의 약점이 될 수 있다. 헤로디안은 그녀가 재물에 욕심이 많았다고 황제의 비난을 샀다고도 한다. 그녀의 가장 큰 잘못은 아마도 단독의 황후(Empress)자리를 지키기 위해 며느리를 추방하고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장인을 사형시킨 일이며 이 모든 것은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실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울피아누스를 기용하고 16명의 유능한 원로원 의원들의 협의회에 모든 국사를 다루게 했던 것도 그녀의 수완이었고 알렉산더가 고대 로마의 덕성을 지킬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도 그녀였다는 것을 볼 때 황제와 마찬가지로 이 여제에게도 공과(功過)가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그에 다소 나마 지배된 그녀의 유약한 아들에 대해서도 기번은 순수성에 비해 단호함이 부족했다고 평했다.


 

 

<황후 Sallustia Orbiana 의 조상>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위험속에서도 알렉산더가 그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맞선 세번째 의인이었음도 분명한 것 같다. 비록 단지 훌륭한 군주상에 대한 이상화에 불과하다고 기번이 평하듯 과장이 많이 섞여있었겠지만 <황제역사>는 이 황제의 훌륭한 면모들을 많이 보여준다. 그의 재위 말년은 외정(外征)으로 점철되었는데 처음은 신흥의 페르시아와 마지막으로는 게르만족과 싸우다가 최후를 마쳤다. 불평불만으로 고대 로마로 부터 전해지는 군기를 거부하는 병사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호통을 치는 모습들이 기록에 남아 있으며 아마도 그로 인해 울피아누스가 먼저 겪었던 운명을 자신이 맞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원정 중에 그곳 군단의 반란으로 어머니와 함께 사망한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엊갈리는 설이 있는데 자세한 실상은 알수 없다. 일단 그의 개혁에대한 군대의 불만이 가장 의심되는 경우이지만 군대 반란의 명분은 그가 게르만족과 비겁한 강화를 맺으려 한 것이라 한다. 물론 <황제역사>는 이것이 군단내에서 제위를 이어받은 막시미누스(Maximin) 측의 모함이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경위는 알 수가 없다. 군단에서 그가 살해된 뒤에 사태를 수습한 새 황제 막시미누스(Maximin)가 로마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군단을 이끌고 게르만 전선을 지휘한 이유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세베루스 왕조는 끝나고 이제 군인황제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다음편들에서는  다른 시대로 가기 전에 이 시대에 시작되었고 말년 황제를 괴롭혔던 외정의 이유가 되었던 이민족 페르시아와 게르만족 등의 일들을 좀 다루어 보겠다.

 

 

  1. Historia Augusta,viii.1‑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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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가발루스[재위 218-222년]의 로마 입성과 로마의 여인천하

 

로마에서 승리한 장군은 화려한 개선식을 가지며 수많은 로마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승리에서 얻은 전리품들이 많을 수록 그의 영광은 더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보물들과 함께 전쟁에서 패하여 나라를 잃은 야만인들의 왕들이나 장군들의 관람이 이 승리 축하 행사의 하일라이트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했을 때 그는 수많은 갈리아의 보물을 가지고 들어와서 시민들을 놀라게 하고 그 이익을 나누었다. 그리고 비슷한 이벤트로 구성된 축제를 마치고 나서 마지막 갈리아의 저항세력의 수장이었던 베르킨케토릭스를 사형시켰다. 로마의 개선식은 이처럼 장수가 거둔 승리와 전리품이 화려한 만큼에 비례해서 빛이 나는 것이었지만 개중에 로마가 타락하면 타락할 수록 외적인 화려움에 치중에서 실제로는 비웃음을 살 만한 촌극들도 많아진다.[각주:1] 세베루스 조에선 엘라가발루스의 로마 입성이 그런 것이었다.  

이 왕조의 시조격인 세베루스의 아들 폭군 카라칼라(Caracalla)에게는 이모인 율리아 매사(Julia Maesa)가 있는데 그녀의 과부가 된 두 딸이 고향 에메사(Emesa)에서 여전히 과부가 되어 살아 있었다. 두 딸은 각기 소애미아스(Soaemias)와 마매아(Maemma)였고 각기 아들 하나씩을 두었는데 소애미아스와 그 아들의 경우는 전혀 로마 문화를 접해 본 적이 없는 시리아 시골의 사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매아와 그의 아들의 경우도 비슷한 출신이었지만 꽤 로마-그리스 문화를 접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번의 관점에서도 마매아의 아들은 높이 평가된다. 그들의 두 아들들이 이런 면에서 자신의 어머니들에게 휘둘리는 유약한 군주란 면에서는 같지만 성격에 있어서는 상반되었다.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는 엘라가발루스는 처음으로 여자(할머니)를 원로원에 들인 로마 황제라고 하며 뿐만 아니라 여성만의 원로원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로마전통에서 여성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납득이 될 수가 없는 일이었으며 알렉산더 세베루스 치세까지 이것은 이어졌다.[각주:2] 자신의 고향에서 숭배되는 태양 신전의 최고 사제를 세습했다는 소애미아스의 아들 엘라가발루스의 경우는 그의 입성과 함께 거의 로마에 문화적 충격을 야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의 로마 생활은 로마인들과 기번이 비웃는 우스꽝스런 동양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그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꽤나 흥미로울 것 같다.

우선 찬탈자라할 수 있는 매크리누스(Macrinus)에 대항해서 일으킨 군대에서 그의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장군 역을 맡은 사람부터 그의 집안의 환관(宦官)이었고 이 사람과 가문을 책임진 두 모녀들이 거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승리가 결정되고 황제로 인정받은 후에도 로마에 이르기 까지 요란한 행진을 오래도록 계속한다. 서기 219년 겨울을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보낸다. 시리아의 지방의 사제였던 그는 자신의 종교나 생활 방식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로마에서 이를 바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로마인들이 자신의 화려한 모습에 감동해서 자신을 숭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몸을 금은 비단으로 장식된 종교적인 제사복과 여러 색깔의 보석이 박힌 왕관으로 치장하면서 가는 곳마다 그의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의 제사음악에 맞춰 무당처럼 춤을 었다. 그래도 로마의 경험이 있었던 할머니인 매사가 그런 사치스런 복장은 로마에선 여자들이나 입는 것이라며 로마 옷을 입으라고 충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에 가면 원로원과 민중들이 자신의 스타일에 익숙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번은 그의 로마 입성을 이렇게 말한다.


 

 

 

 

화려한 왕관과 팔찌

 

그의 머리는 우뚝한 왕관으로 덮고 목걸이와 팔찌는 가치매길 수 없을 정도의 보석들로 꾸몄다. 그의 눈썹은 검게 하고 뺨은 일부러 붉고 하얗게 칠했다. 심각한 의원들이 탄식하며 그들 자신의 나라 사람들의 혹독한 폭정을 경험한 후에 로마가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의 여자같은 사치 아래로까지 떨어졌다고 했다.

 

더군다나 금가루를 뿌리고, 전차를 끄는여섯마리 백마에게 조차 호화로운 옷을 입힌채 로마의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물론 아시아의 군주답게 많은 첩도 거느리고 다녔다. 그 지방에서 최고 사제였던 이 황제가 국정에 대해 아는 것은 종교의식 뿐이었는데 그것 조차 종래의 로마 정책과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로마의 황제로 엘라가발(Elagabal)이라는 자기 지방의 타이틀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를 로마 최고의 종교로 삼을 생각에 팔라틴의 최고 신전에서 자신의 신에 대한 제식을 거행했고 동양적 사치품들로 이 의식을 채웠다. 로마 입성 전에는 자신의 초상화를 원로원의 중앙에 걸게 하고, 모든 원로원의원과 민중들에게 자신의 숭배라하고 명령했다. 그의 5명의 수시로 바뀐 아내 중에는 베스타의 성녀(聖女)들도 있는데 이는 로마 종교에 대한 모독이었다. 교외 곳곳에 새로운 신전을 세워놓고 저런 복장을 하고 쏘다녔다.

매관매직이 물론 성행했고, 근위대 장관은 무동(舞童)을 임명하고 마부(馬夫)따위도 중용되었는가 싶다. 이 밖에 원로원을 무시하는 등 폭군으로 할 짓도 빠짐없이 하고나서 민심을 잃게 되었으며 근위대의 불만까지 사게 되었다. 물론 로마인의 외국인혐오증 때문에 그 악행이 다소 과장될 수도 있지만, 잘한 점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안되겠다 싶은 그의 할머니와 이모가 은밀히 이종사촌인 알렉산더 세베루스를 추대하려하고 군대가 때마침 일어나서 그를 제거했다. 그들 모자는 무자비하게 처치되어 불명예스럽게도 티베르 강에 버려졌다. 뒤를 이은 매마와 그의 아들은 같은 혈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배경을 가졌는지 오히려 로마의 무너지는 기강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로마인 자신은 앞서 엘라가발루스에 대해서도 경멸했지만,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개혁도 그다지 환영하지 않았다.

 

 

 

  1. 제정초에는 영토확장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와 황실인원에게만 개선식 헌정이 제한된 탓으로 개선식이 오래동안 중단되었다가 이 즈음 부터 별다른 결정적인 외국에 대한 승리 없이도 개선식이 남발되고 내전의 승리도 기념되었다. [본문으로]
  2. 로마에서는, 나이든 성인 여성이 장성한 남성 가장에게 보호 받아야 하는 로마의 관습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성 섭정은 세베루스조 후에는 서로마의 말기 극도의 혼란기에 테오도시오스의 어린 황제들이 즉위했을 때에나 나타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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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 조[193-235년]

 

앞서 와 같이 조금 교활한 방법으로 세베루스 조(Severan Dynasty)는 성립되었다. 아마도 초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조, 베스파니시누스 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조에 이은 4번째 왕조이고 비교적 단명의 왕조였다. 그 중간에 마크리누스(Macrinus)[재위 217-218년]같은 경우 1년간 황제 자리를 빼앗겼던 때도 있었다. 세베루스는 죽기 전에 두 명의 아들 카라칼라(Caracalla)[재위 211-217년]와 게타(Geta)[211년]를 공동황제로 올려 놓았는데 카라칼라가 게타를 죽이고 곧 단독 황제가 된다. 이 카라칼라의 경우 물론 동생도 잔혹하게 죽였다.

 

세베루스 조의 가계도
 

 

카라칼라 사후엔 그 제위가 카라칼라의 이종사촌 누이들의 아들들에게로 넘어간다. 그 중 첫 번째로 황제가 된 엘라가발루스(Elagabalus)의 경우는 기번이 비웃어마지 않는 아시아적 우승꽝스런 면모를 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단지 이 왕조에서는 마지막 황제인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만이 로마를 구할 인품을 갖추었다. 사실 기번은 이 왕조에 대해서 제정초기의 원수정이란 형태에서 타락한 군사적 전제주의로의 이행이 있었다고 규정했었다. 군 부대에서 그 가족들이 신의 가족으로 숭배되고, 어떤 주화에서는 그의 아들 게타(Geta)가 태양신으로 묘사되는가 하면 그의 묘비명은 현존하는 영이라고 언급되기 까지 했다.[각주:1] 그런 관점에 대한 반증예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예이다. 베리(J. B. Bury)는 만일 그러나 변화가 있었더라도 알렉산더 세베루스에 의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비록 전제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왕조시기에 로마의 체제상 많은 변화가 있었던 전환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기번은 그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다.

 

세베루스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재위시의 행복과 영광을 만끽하면서 그것들을 들여왔던 잔인성은 용서했다. 후손들은 그의 유지와 예들의 치명적인 효과를 겪고서는 그를 단지 로마제국 쇠락의 주요 저자로 간주했다.

 

세베루스는 죽기전에 두 명의 아들 모두를 공동후계자로 생각해서 그들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주어 사상 최초로 로마에 세명의 공동황제가 있게 되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었는데 첫 부인은 갈리아의 총독의 딸이었고 상처후의 두 번째 결혼을 율리아 돔나(Julia Domna)란 시리아(Syria) 여자와 했다. 이 두 후계자들은 여기서 낳은 아들이고 그녀에게는 언니인 율리아 매사(Julia Maesa)가 있었는데 나중에 이 쪽으로 황제가 계승된다. 이들은 태양신을 섬기는 그 지역 사제의 딸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두 후계자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았지만 아버지는 똑같이 사랑했다. 그래서, 죽기전에 원로원따위는 무시하고 군대를 잘 다루어야 한다는 충고를 하고 죽었다. 그들의 나쁜 사이에 대해서는 이미 체념을 하고 둘 중에 강자가 약한 쪽을 쓰러뜨리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공평한 사랑을 장자인 카라칼라(Caracalla)는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아마도 제위를 동생과 나눌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듯 아버지의 수명을 단축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암살을 기도했고 그의 아버지가 브리튼 원정 중에 자연사했을 때 따랐던 그는 제일 먼저 자신의 독살 요구를 거절한 아버지의 주치의를 죽였다. 세베루스는 그래도 자신이 죽어도 그들의 생모 율리아가 있는 한은 다투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티베리우스역시 어머니 리비아가 살아있는 동안은 동생의 혈족인 아그리피나 모자들에 잔인한 보복까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율리아가 역시 그 역할을 하려고 두 형제를 화해시키려는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 때를 틈타 카라칼라는 동생을 찔러 죽이고는 도리어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원래 잔인한 카라칼라 보다는 게타 쪽을 편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할 수 없이 후계자가 혼자 밖에 안남았으므로 군대는 일단 카라칼라를 따랐고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유언만은 잘 받들어 군대에는 좋은 대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반대자에 대한 잔인함은 부전자전인지라 이제 생전의 게타의 편을 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에 나섰다. 게타의 편이 많았는데 자그마한 혐의도 무자비하게 다루었으므로 규모도 컸다. 게타가 관할했던 속주의 총독들은 모두 죽였으며 전 황족들 코모두스의 마지막 누이, 페르티낙스의 아들, 세베루스의 사촌, 루킬라의 아들들도 죽였다.

 

카라칼라는 많은 면 사치와 오락을 좋아하는 면에서 코모두스와 닮았지만, 한가지 차이는 코모두스가 할렘과 검투장을 오가는 지극히 단조로운 도시생활에 만족한데 비해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러 도시나 전장을 떠돌면서 그러했다는 것이 다르다. 그 역시 어디를 가나 사치나 오락의 축제에 물쓰듯 돈을 썼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가서는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다.

 

그는 전쟁도 좋아했다. 파르티아 정복을 위해서 아버지가 알비누스에게 썼던 속임수를 쓰려 했다. 페르시아 왕에게 결혼동맹을 청해 그 딸과 결혼해 가장 큰 두 제국을 합치자고 속이고나서 그들을 유인해 학살했다. 그러나 그가 원정에 데리고 갔던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에는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카라칼라는 암살당한다. 승진탈락자를 시켜 이 암살을 계획한 장관 마크리누스가 드디어 황제로 선출된다, 카라칼라가 군대에 베푼 호의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이로써 일시 세베루스조가 단절되는 것 같았다.

 

마크리누스가 동방원정을 수행하는 동안 박해받은 카라칼라와 게타의 어머나 율리아 돔나는 자살하고 전황실의 율리아 매사가 그녀의 고향인 에메사(Emesa)로 쫓겨나고 그녀의 두 딸 소애미아스(Soaemias)와 마매아(Mamaea)의 환영을 받는다. 이 때 마크리누스가 군대개혁 등을 요구했던 개혁군주였으나 그로 인해 군대의 불만을 사는데 에메사에 마침 주둔한 로마 군단의 도움을 얻어 이 가문이 마크리누스를 물리치고 황제직을 계승하게 된다. 처음에는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라고도 잘못 알려져 있는 소애미아스의 아들 엘라가발루스(Elagablaus)[재위 218-222년]가 제위에 오른다. 그의 고향의 온갖 동양적인 보물들을 가지고 그가 로마로 개선하는 날 시민들을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에라가발루스는 그 지역에서 숭상하는 태양신의 사제를 말하는 칭호로 그의 로마식 이름은 카라칼라와 같이 안토니누스였다. 이 사치빼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동양적 군주는 로마인들의 비웃음을 받고 자신의 이모인 마매아에게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마매아는 어린 아들 알렉산더 세베루스[222-235년]를 황제로 세우고  사실상 최초의 여군주가 되다. 기번이 그나마 찬양하고 있는 이 알렉산더 세베루스에 의해 세베루스 조간의 다소 타락했던 로마가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그는 군대의 방종된 모습을 꾸짖고 로마의 군율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 위엄을 보였지만, 역시 원정중 병사들에게 야만족에게 평화를 산 겁많은 동양 군주란 비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사후 점차 로마의 혼란은 내부에서 외부로 확산되고 수많은 단명황제들이 등장하며 그들 중 적잖은 수가 군인황제들이 된다.



  1. 로마사, 하이켈하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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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티무스 세베루스


세 라이벌과 내전

 

결국 앞서 황제직을 산 디디우스가 아무런 군사적 뒷받침없이 허무하게 무너지자, 코모두스 시대의 장군들 세베루스(Severus)[재위 193-211년], 알비누스(Albinus), 니게르(Niger)에 의해 제국은 다시 삼분되게 된다. 훗날 새 왕조를 여는 세베루스가 자신의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이들 두 사람을 제거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십중팔구 내전(Civil war)을 피할 수 없다. 물론 그는 다른 노련한 경쟁자들을 군사적 재능에서 압도하고 최종적인 승자가 되지만 거기에는 그 특유의 간교함과 잔인함을 포함하는 전략이 많이 섞여 있다. 기번은 이러한 군사적인 과정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는 않다. 나 또한 전쟁 자체보다는 그가 다시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기 까지 보여주었던 일관된 잔인성과 교활함에 촛점을 맞추어 이 내전기를 살펴보려 한다. 이 과정과 후의 통치기에 보여준 세베루스의 특징은 상대가 충분히 강할 때는 그를 조심조심다루면서 치켜세우는 감언이설로 상대를 속이지만, 일단 만만하게 생각이 되고 싸움을 피할 수 없을 때는 이전의 약속따위는 가차없이 져버리고 잔인한 적대행위를 하고, 상대가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나아가 쓰러지는 날에는 무자비한 보복을 가한다는 점이다. 

우선 세베루스에게는 둘 중에 누구를 먼저 제거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런데 과거 삼두정 시기처럼 셋 중의 크라수스나 레피두스 처럼 하나의 완충으로 약자가 한 명있으면 좋은데 그런 상황은 아니다. 브리튼(Britain)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Clodius Albinus)나 시리아(Syria)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Pescennius Niger) 모두 군사적 경험에서나 세력이 만만치 않다. 기번의 말대로 "만일 두 경쟁자가 서로의 공통된 위험에 의해 화해해 그를 향해 지체없이 진군했다면 아마 세베루스는 그 통합된 힘에 침몰했을"지도 모른다. 세사람 중 알비누스의 경우는 귀족 출신이었고 니게르의 경우는 그 태생이 불분명한 밑바닥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그런 사람이었고, 그 중간에 세베루스는 기사계급 출신이었다. 혹은 니게르와 세베루스 모두 기사계급 출신으로 집정관(consul)자리 까지 오른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귀족 출신으로 명예를 존중하고 공화국과 원로원의 권위를 중시하는 알비누스가 세베루스의 교활함의 먹이가 되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세베루스는 먼저 니게르를 정벌할 결심을 한다. 여기서도 그를 약간 칭찬해 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원로원으로 부터 황제로 인정받은 권위를 이용해서 알비누스가 그 어부지리 얻지 못하도록 미끼를 던진다. 그의 중립을 조건으로 그를 후계자 즉 카이사르(Caesar)로 인정하겠다고 하자 자신의 야망과 그럴듯하게 포장된 로마식의 대의명분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이 알비누스는 여기에 만족하게 된다. 아마도 그 자신은 페르티낙스 같은 훌륭한 황제를 죽이는데 대한 복수를 넘어선 개인적 야심을 위한 행동에는 몸을 사리는 "갈바(Galba)"와 같은 기질을 가진 것 같았다. 훗날 증명되지만 이것은 세베루스의 교활함과 정말 잘 어울리는 조합이 되었다.

 

 

출전해온 세베루스에 맞서 니게르 역시 적국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자신의 지역의 단속을 강화하는 등 만만치 않은 전략으로 맞선다.  헬레스폰투스 해협의 키지쿠스(Cyzicus)에서의 싸움에서 세베루스가 이긴 후 파죽지세로 소아시아를 가로 질렀다. 첫 싸움의 결과로 많은 속주들이 그에게 귀순하고 니게르의 군대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드디어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를 상대했던 이수스(Issus)의 평원에서 회전을 벌였고 주변 강물이 피빛으로 물드는 혈투를 벌였다. 승리는 세베루스의 것이었고, 니게르는  겨우 소수의 패잔병을 이끌고 달아나다가 추격대에 의해 살해된다.

 

이렇게 한 "국가의 적"이 토벌되자 다음은 알비누스의 차례인데 그를 후계자로 세운 뒤라 토벌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사절에게 비밀 명령을 주어 알비누스를 암살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알비누스에게 발각이 되고 결국 그를 브리튼으로부터 나와 갈리아로 끌어 내게 된다. 한편으로 비록 194년 비록 니게르는 죽었지만 그 잔당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이제 승리는 자신의 것임을 확신한 잔인한 세베루스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니게르 추종자들은 사방에 숨어들어 항전을 했고 특히 비잔티움의 요새에서는 결사적인 항전이 벌어졌는데 그의 잔인한 처벌을 두려워한 그들은 결코 쉽게 요새를 내어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 역시 갈리아로 출전하여 갈리아의 중심인 리옹 즉 루그두눔(Lugdunum) 인근에서 마지막 경쟁자를 물리쳐서 내전은 이렇게 197년에야 끝을 보게 된다.

세베루스의 잔인성은 그 후로도 그치지 않는다. 출신상 알비누스는 원로원에 지지 기반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승리자가 된 후 이런 사람들을 용서치 않았다. "35명의 의원"들을 용서한 것처럼 꾸미더니 다른 41명의 의원들은 그들의 가족 들까지 몰살시켰고 내전 중에 알비누스 편이었을 속주의 귀족들 역시 같은 형벌에 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베루스가 일인 황제로 자신의 왕조를 로마에 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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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티낙스의 짧은 치세[193년]

 

페르티낙스(Pertinax)와 근위대와의 갈등이 어디서 부터 싹튼 것일까? 기번은 그가 황제가 된지 불과 삼일째 되는 날에 근위대가 다른 원로원 의원을 잡아 병영으로 데리고 가서 황제로 즉위시키려 했다고 했다 실패했다. 날짜상으로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장인 라에투스가 즉위시킨지 얼마 안되어 이런 일이 있었으니 라에투스가 충분히 근위대의 의사를 대변하고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황제 부재 중 소시우스 팔코(Sosius Falco)라는 의원은 역시 근위대의 반란 음모를 꾸몄으나 로마로 귀환한 황제에 의해 분쇄되었다. 페르티낙스 자신이 실질적으로 근위대에서 즉위하고 로마시민들의 환영을 받고도, 아무 실권도 없는 비굴한 의원들이 모인 원로원에서는 그들의 승인을 받기 전에는 황제가 아닌 듯한 겸손을 보인것도 근위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가 네로 이래의 신황제 즉위시의 관습이 되어버린 근위병들에 대한 사례금 지급조차 하지 않았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각주:1] 그리고 그가 갑작스럽게 황제위에 올랐고 코모두스에게서 인계받은 상황이 워낙 안 좋았던 것도 그럴 가능성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다더라도 이미 관습화된 것을 하지 않았다면 근위대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내었을 수 있다. 전황제와의 사이는 막역한 사이였지만 신황제와는 사실 그들이 요주의시 하던 일개 귀족이었을 뿐 아무런 친분도 없다. 어쨌든 기번이 말하는 당시의 재정 상황은 이 정도였다.

 

국가 재정은 황제의 가장 엄한 주의를 요했다. 비록 부정과 강탈의 모든 기준이 적용되어 신민들의 재산을 군주의 금궤로 바꿀 수 있었지만, 코모두스의 탐욕은 그의 사치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 기껏 8000 파운드 정도가 금고에서 발견되었으나 정부의 현 지출을 충당하고 후한 사례금의 압박적 수요를 채울 것이었다. 그것은 신 황제가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에게 약속해야 했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괴로운 환경 하에, 페르티낙스는 후한 단호함으로 코모두스에 의해 생긴 억압적인 세금을 면제하고 국고에 대한 모든 부당한 요구들을 취소하면서 원로원에서 " 그는 폭정(tyranny)이나 불명예를 통해 부를 획득하기 보다는 선량함이 있는 가난한 공화국을 다스리는데 더 만족한다"  라고 선언했다. 경제와 산업은 그가 순수하고 진정한 부의 원천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곧 모든 공공필수재에 대한 엄청난 공급을 유도했다. 가구 지출은 곧 반으로 줄었다. 페르티낙스는 모든 사치품을 공공경매에 부쳤는데 금은의 그릇, 전차, 비단 예복, 남녀의 아름다운 노예 여럿-물론 인간성에 대한 배려로 자유상태로 태어나서 부모들의 강압으로 그리된 경우는 예외-를 내놨다. 폭군의 무가치한 애호품을 잘못된 것으로 버림과 동시에, 그는 국가의 채권자로 만족했고 정직한 서비스의 긴 체납은 의외로 풀어주었다. 그는 상업에 대한 억압적인 제한을 없앴고 모든 이탈리아와 속주의 모든 비경작지를 그것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불하하면서 10년간의 기간으로 공납(세금)을 면제했다.

 

마르쿠스 황제의 덕에 비기는 이러한 개혁에 민중의 지지는 당연했지만 이를 통해서 자신의 것을 도리어 잃게 되는 사람들의 불만도 커졌다. 하지만 특히 이 모든 것이 바로 그의 침실앞까지 경호하는 근위대와는 끝내 화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페르티낙스의 개혁이 가져올 "고대 훈련의 엄격성"을 참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에 대한 금전전 보상이 실망스러운 것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거기에다 그들에게 폭군시절에 그들이 시민들에게 했던 폭력적인 행동들까지 금지 시켰다. 근위대만이 페르티낙스의 선정(善政)에서 소외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엄격함은 마르쿠스의 것이기도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갈바(Galba)의 인색함과 비슷한 꼴이 내었다. 엄격함에 관해서 특히 팔코의 음모 때 원로원 의원이던 팔코는 몸을 보전한 반면 병사들은 사형으로 다스려진데서 근위대의 불만은 폭발했다. 자신도 해방노예 출신 아버지를 둔 평민 출신이었만 원로원에 대한 태도와 군대의 아래부터 차차 최고지휘관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그의 사병들에 대한 태도는 극과 극이었다.[각주:2] 갈바는 네로 시절에 부당하게 지급되었던 돈을 도로 빼앗으려고 까지 했었다. 근위대는 차라리 코모두스의 시대가 그리웠고, 드디어 황제의 궁전으로 들어가서 그를 살해했다. 이미 보고를 들은 황제는 그가 황제로 옹립되었을 때 이미 죽음을 예상하고 의연했던 것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 이것이 193년 3월 28일의 일이었다. 시민들의 분노에 대해서 근위대는 나름의 준비를 했다. 그들이 분노가 곧 식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며칠간 그들의 병영의 요새안에 웅크리다가 여론이 가라앉을 때 쯤 그곳을 나와서 로마사상 아니 세계사상 가장 흥미로운 촌극을 연출했다.

 

황제직 팝니다


 

 

불황 중의 세태

 

페르티낙스의 엄격함과 검소로 인해 마땅히 보상받아야 할 돈을 못 쥐어 본 그들은  이번에야 말로 말뿐인 감사말고 확실하게 금액을 결정지어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황제직"을 팔겠다했다. 기번은 경매에 붙였다고 했지만 최고금액을 제시하면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완전히 개방된 경매는 아니었다. 죽은 페르티낙스의 장인도 여기에 참가했지만 그와의 관계때문에 복수를 두려워한 근위대측으로 부터 거절되었다. 그런 경우만을 제외하면 누구든 최고액을 베팅하는 쪽이 좋다. 이렇게 해서 디두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라는 귀족[각주:3]이 황제직을 사게 되었다. 황제직을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그것을 사는 멍청이가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거수기가 되어있던 원로원이 이를 승인하는 때에는 이런 거래가 성공할 것처럼도 보였다. 물론 형식상 원로원의 결의야 말로 황제로서의 가장 큰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었지만 저와 같은 권위도 양심도 없는 결의를 더구나 이러한 난세에 모두 승복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것을 산쪽도 판쪽도 모두 크나큰 실수를 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소신없이 눈치만 보는 원로원과 달리 각지에 나가있던 유력 장군들 그 중에서도 세 사람이 원로원의 권위와 근위대의 무력에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각주:4] 그리고 페르티낙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제일먼저 로마로 진격해 왔던 사람은 유난히도 적에게 철저하게도 무자비했던 세베루스(Severus)였다. 그는 돈으로 등극한 황제는 물론 가족과 연루자까지 철처하게 찾아내 학살하고 그에게 대항한 근위대 역시 철처하게 해체해 버렸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근위대를 다시 창설했다. 숫자상 4배로 증가 시켰고 로마인 뿐 아니라 각지에서 그 대원을 모아서 충당했기에 더욱 강력해진 힘을 갖게 되었다. 당연히 프라에토리안 장관의 권위도 높아졌다. 실권에 있어서는 이미 황제를 제외한 1인자였지만 이제는 공식적으로도 더 높은 지위가 인정되었다. 그들은 이제 "단순한 군대의 우두머리가 아닌 재정과 사법 문제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예로 티베리우스가 그의 충복인 세자누스에게 그토록 집요하게 거부했던 혼인을 세베루스는 자신의 프라에토리안 장관인 프라우티아누스(Plautianus)에게 허용했다. 이 이후로 프라에토리안 장관 중에서 황제가 나왔으며 황제가 원정 중에 사망했을 때는 높은 우선순위의 계승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1. 통상 클라디우스 이래의 관례대로 즉위에 대해 사례금을 약속했고 이를 지키려고 코모두스의 재산을 경매에 붙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2. 로마 백부장 한 사람은 "한대 더"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본문으로]
  3. 전형적인 귀족으로 군단장 경험도 있었다. [본문으로]
  4. 마이클 그랜트의 <로마황제들>에서는 그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지지자였다. 하지만, 세베루스가 로마로 들어가 율리아누스를 살해하자 그는 니게르에 대항해 세베루스와 손을 잡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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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2년의 끝

 

클레안데르의 죽음으로 코모두스의 공포감은 더 커졌다. 그의 신하들에 대한 커가는 두려움과 불신이 수많은 집정관급의 의원들을 숙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의 의심은 물론 그의 가장 가까운 근위대장과 궁정내부의 인물들에게도 미쳤고 조금의 의심으로 전임자를 죽이고 다시 새로운 인물들로 끊임없이 갈아치우는 일을 했다. 클레안데르 사후에는 두 명의 프라에토레안 장관을 두는 것에도 별로 주의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기반이 굳혀지기 전에 죽이고 새로 세우면 족했다. 그런데 결국 이것이 그를 지척에서 보호하는 프레토리안 장관(근위대장)과 그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까지 관리하는 환관에 까지 이른다면 이것은 자신에게 부메랑이 될 수 있다. 그의 변덕과 잔인성에 위협을 느꼈던 것은 이들 뿐 아니라 그의 정부까지 있었다. 기번은 코모두스의 최후까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코모두스는 이제 악덕과 불명예의 정점에 달했다. 알랑거리는 궁정의 갈채 중에, 그는 스스로 자신의 제국내의 모든 양식있는 이들의 경멸과 적대를 사고 있다는 것을 속일 수 없었다. 그의 맹렬한 정신은 그러한 적대에 대한 의식에 의해, 각종의 재능에 대한 부러움에 의해, 그런 위험에 대한 불안에 의해, 도살의 습관에 의해 자극받았다. 역사는  그의 고의적인 의심으로 희생된 집정관급의 의원들의 긴 명단을 보존해왔다. 그 의심은 특별한 근심으로 안토니누스 가문과 멀건 상관없이 연결된 불운한 사람들을 찾았는데 그 범죄와 즐거움을 준 장관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잔인성은 드디어 그 자신에게도 치명적이었다. 그는 무사히도 로마의 가장 고귀한 이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 그 자신의 집안 살람들에게 두려움을 받게 되자마자 그는 죽게 되었다. 그의 애첩인 마르키아(Marcia), 그의 집사인 에클렉투스(Eclectus), 프라에토리안 장관(Praetorian praefect) 라에투스(Laetus)는 그들의 동료와 전임자들의 운명을 깨닫고 폭군의 미친 변덕이나 혹은 민중의 갑작스런 분노로 부터 올 매 시간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파멸을 막기로 결심했다. 마르키아가 그가 맹수들을 사냥한 후 피로한 후로 그의 애인에게 술 한모금을 줄 기회를 잡았다.  코모두스는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가 독의 효과와 취기로 곤욕을 치를때 직업이 레슬링선수인 한 건장한 젊은이가 그의 침실에 들어와 아무 저항없는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 황제의 죽음에 대한 자그마한 의심이 새어나가기 전에 사체는 비밀스럽게 궁전을 빠져나갔다. 이것이 마르쿠스의 아들의 운명이였고 적대적 폭군을 파멸시키는 것은 너무 쉬웠다.그는 정부의 인위적인 권력으로 13년간 너무나 많은 신민(臣民)들을 억압했으며 그들 각각은 개인적인 힘과 능력에서는 그들의 주인과 동등한 사람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이 바로 192년의 한해를 마감하는 12월 31일이었다고 한다. 디오는 그 다음 새해를 맞이하여 할 일로 코모두스가 두 명의 집정관(consul)들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고 하고, 헤로디안은 코모두스가 다음 날 죽일 사람들의 살생부를 작성했는데 거기엔 수많은 의원들과 함께  음모에 연루된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던게 그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이것이 음모자들에게 이 살해 동기를 더욱 구체화 시켰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과연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곧대로 믿어야하는데는 좀더 신중해야 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코모두스의 죽음과 함께 네르바-안토니누스 조 역시 최후를 맡는다. 코모두스와 그의 통치를 받았던 로마인의 삶은 비참했지만 어쨌든 그가 속했던 왕조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남긴 것도 많았다. 이후로 이 왕조가 남긴 안토니누스란 이름이 왕조가 끝난 후에도 황제들에게 많이 쓰였다. 거의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황제로서의 의미는 아니지만 그 만큼 선호된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음모자들은 이 사태를 장악하기 위해 근위대나 민중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밤을 기다려 행동하기 시작했다. 죽은 황제의 시신을 몰래 숨겨서 운반해 파묻었다. 물론 원로원에 알려진 후에도 그는 기록말살형이라는 다른 폭군들이 받았던 불명예를 피할 수는 없었다. 프라에토리안 장관인 라에투스는 행동을 개시했다. 이 사태를 해결하고 적어도 자신들의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차기 황제를 자신의 손으로 결정해야만 하는 시점에서 그는 생존한 몇 안되는  명망높은 원로중에 페르티낙스(Pertinax)를 찾아간다. 헤로디안은 이 긴박한 순간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날 밤 모두 잠든 틈에, 라에투스(Laetus)와 에클렉투스(Eclectus)는 몇 공모자들과 동행해 페르티낙스(Pertinax)에게 갔다. 그의 집의 잠긴 문앞에 서서, 거길 지키는 문지기를 깨웠다. 그 자가 깨어나 프라에토리안 장관이라고 알고 있는 라에투스와 문앞에 선 병사들을 보자 놀라서 그의 주인에게 가서 보고했다. 페르티낙스는 그의 손님들을 들어오도록 지시하며, 그가 예상하던 운명이 마침내 닥치려 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한에서도 그는 너무도 침착하게 일어나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그들을 받아들였다. 비록 그는 라에투스가 에클레투스와 함께 그를 죽이러 왔다고 믿었지만 안색의 변화없이 침착하게 이야기 했다.
"오랫동안" 
그가 말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이 끝을 기다려 왔다. 그리고 코모두스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지명한 조언자 중의 유일한 생존자인 나에 대한 행동이 이렇게 늦은게 뜻밖이다. 당신들은 왜 이를 미루었는가? 당신들은 당신들의 명령을 수행할 것이고 나는 줄어드는 희망과 끊임없는 공포에서 벗어나 겠지."
이에 대해 라에투스는 대답했다.
 "부디 그대와 그대의 과거 행동에 걸맞지 않는 말들을 멈추시오. 우리 방문은 당신의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안전과 로마의 안전과 관계되오. 그 폭군은 죽었소. 그 자신이 자초한 운명의 희생이오. 그가 우리에게 계획했던 것들을 우리가 그에게 해버렸소. 우리는 당신 손에 나라를 맡기려고 왔소. 당신이 절제된 인생으로 인해 가장 두드러진 의원일 뿐 아니라 당신의 위대함과 일생의 고귀함으로 존경을 받았음을 알고 있소. 이런 모든 이유들이 우리가 하는 일이 민중을 기쁘게 하고 우리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고 믿게 하고 있소."
페르티낙스는 답했다.
"왜 늙은 사람을 기만하시나? 왜 당신들은 나를 우선 조롱해 두고 나중에 죽일 겁장이로 보는가?"
이에 에크렉투스는 말했다.
"당신이 우리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이 필기판(tablet)을 읽어보시오. 그의 필체를 자주 봤으니 알겠지. 이로부터 당신은 우리가 벗어난 위험을 알고 우리말에 거짓이 없고 진실이 있음을 알게 될 거요."
필기판을 읽고 나서 페르티낙스는 그의 옛 친구의 말을 믿엇다. 이제 모든 일을 알고 그들을 따랐다.

 

심야의 불청객


이렇게 라에투스의 손에 이끌려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의 병영으로 가서 황제로 추대됐다. 모든 민중들이 폭군의 죽음으로 찾아온 해방의 기쁨으로 훌륭한 인품을 갖춘 황제의 즉위를 반겼다. 기번은 코모두스의 악덕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이 고귀한 아우렐리우스의 동료였던 새 황제의 덕을 보여주는 개혁 조치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는 자유의 달콤함만을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파탄난 재정을 충실히해야 할 입장에서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경자유전 차원에서의 개혁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근위대와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왜 늙은 사람을 기만하시나? 왜 당신들은 나를 우선 조롱해 두고 나중에 죽일 겁장이로 보는가?"라는 페르티낙스의 말은 3달동안 연기되었다가 실현된다. 이때까지 라에투스가 근위대를 지휘했다면 정확하게 맞지만, 그를 즉위시킨 그의 친구는 아마도 갖 임명되어서 근위대의 뜻을 대변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그는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에게 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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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대와 장관

 

로마 제국에서 황제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요한 관직 중의 하나가 뜻 밖에도 현재 우리말로 "근위대장" 혹은 "호위대장"이라 흔히 쓴다. 라틴어로는 프라에펙투스 프라에토리오(Praefectus Praetorio)이며 프라에토르가 법무관으로 번역되는 점을 생각하면 법무 담당관이라고 보기 쉽겠지만 그 보다는 유래상 공화정 시기부터 군대안에서 장군이나 법무관(praetor)을 호위하는 부대에 대해서 프라에토리안(Praetorian) 코르호즈(cohors:대대)라고 했고 이것이 내전기까지 유지되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된 이후에 기원전 2년에 이것에 담당관(prefect)을 임명했는데 바로 이것이 소위 근위대장(Praetorina prefect)의 기원으로 생각이 된다. 초기에는 단순하 근위대장으로 보여지지만 그 역할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이를 프라에토리안 장관(Praetorina prefect)으로 불러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단순히 근위대장 혹은 호위대장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더 적절할 것 같아서 이하 프라에토리안 장관이라고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후대의 경우는 물론 신설당시 부터 내 생각으로는 사실상 총리와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기번은 그 유래에서는 단순히 근위대(guards)의 우두머리로 시작했고 세베루스(Severus, 재위193-212) 황제에 의해서 재정과 사법 등의 수장을 겸했다고 하는데 아마 단순한 근위대의 우두머리였던 것은 공화정시기였을 것이다. 이미 아우구스투스가 신설할 당시 부터 그가 2 명의 장관을 두어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이들이 휘두를 권력이 어느 정도가 되며 황제에게 어떤 위협이 될지 예상되었다는 것이 아닐까한다.

기번은 역시 별도로 이 부대와 관직에 대해 로마 제국 쇠퇴의 중요한 첫번째 징후와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만 역시 현대사가와 같은 정확성을 가지고 이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기원에 있어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부대와 장관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같다. 아우구스투스는 다만 이미 있었던 부대에 두 명의 장관을 두기 시작했던 것에 불과하다. 그의 설명은 이러하다.


그 교활한 폭군(tyrant)은 현명히도 법으로 그의 찬탈을 덧칠했지만 무력만이 이를 유지케함을 잘 인식하고 점차로 강력한 호위부대 조직을 형성해서 상시 그의 신변을 보호하고 원로원에게 경외감을 주며 반란의 첫 행위들을 막거나 분쇄하는데 대비케 했다. 그는 이 훌륭한 군단을 두 배의 봉급과 우월한 특권으로 차별화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공할 측면이 즉시 로마 민중을 놀라게 자극하하자, 3개 코르호트(cohort:대대급)만을 수도 내의 그들의 병영에 배치시켰다. 반면, 나머지는 이탈리아의 인근 마을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50년의 평화와 노역 후에 티베리우스(Tiberius)가 결정적인 모험을 시도했고, 이것이 영원히 그의 나라에 대갈못을 박았다. 군영의 무거운 짐을 이탈리아로 부터 덜어준다는 그리고 호위대 속에 더 엄격한 훈련을 도입한다는 미명하에, 그는 로마의 항구적 병영안에 이를 조직했다. 이것이 세심한 주의를 통해 강화되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가공할 종들은 전제주의의 왕좌에 언제나 필수적이지만 종종 치명적이기도 했다. 프라에토리안 근위대( Praetorian guards)를 궁정과 원로원에 들여놓음에 의해, 황제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힘과 시민 정부의 약점을 인식하고, 그들 주인의 악덕을 친숙한 경멸감으로 보며, 숭배심에 찬 경외감을 져버리도록 가르쳤다. 그것은 충분한 거리와 신비함만으로 가상적 권력에 대해 유지 될 것들이었다. 호화로은 도시의 사치스런 태만 속에 그들의 긍지는 그들의 대항할 수 없는 무게감으로 성장되었다. 주권자나 원로원의 권위, 공적 재산, 황제의 자리까지도 모두 그들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감출수도 없었다. 위험한 징후로부터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의 관심을 돌려놓으려고 가장 굳건하고 잘 확립된 군주들조차 감안이설과 명령을 처벌과 포상을 섞어놓고 그들의 긍지에 알랑거리고 그들의 탐닉을 눈감고 헤이함을 묵인하여 그들의 불안한 충성을 후한 선물로 사야만 했다. 그것이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등극이래 합법적인 청구가 되어 모든 신황제에게 그렇게 되었다.


세번째 황제인 칼리굴라가 근위대에 의해 살해되었고 네번째와 다섯번째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네로가 이런식으로 근위대의 병영에서 즉위했던 것만 봐도 그들의 권력이 이미 어떤 수준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라에토리안 장관의 경우 반드시 2명만도 아니었다. 그들의 두드러진 역할은 이미 티베리우스 시절부터 악명을 떨쳤다. 아버지에 이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세자누스(Sejanus)의 경우 이미 단독의 장관이 되어 호위대를 독점했고 티베리우스의 아들마저 그의 아내와 공모하여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 후에도 오히려 티베리우스의 충복이 되어 그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아그리피나와 그 아들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서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아래 로마에서 비길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대개 장관들이 그렇듯 기사계급출신에 불과하면서도 리빌라의 아들이자 유일한 티베리우스의 손자에 대한 보호자로서 리빌라와의 결혼 요구 등을 통해 스스로 황제 즉 티베리우스의 후계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단 숙청이 완료되자 그 역시 폭군의 희생양이 되는 것으로 끝났다. 원로원에서 자신이 후계자로 인정받을 황제의 메세지를 기다리던 그는 도리어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된다.

코모두스가 자신의 암살기도이후 극도의 두려움을 보였을 때 그를 대신해서 첫번째로 로마를 통치했던 페레니스 역시 그의 근위대 장관이었다. 몇번의 고비를 넘겨 마지막으로 암살되었던 것도 근위대 장관의 손에 의해서이다. 그후로도 황제가 유약하건 강한 규율로 그들를 통제하려하건 간에 숱한 황제들이 그들의 칼날에 쓰러지고 그 위에 다시 세워졌다. 거의 제정말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대를 통해 황제를 제외한 로마 제1의 권력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이 근위대 장관을 로마 정치사에서는 좀 모호한 존재지만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제정시대 근위대 병영 카스트라 프라에토리아(Castra Praetoria)의 로마시내에서의 위치 안의 선은 제정초 성벽이고 밖의 선은 후대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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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글레디에이터>

 

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전혀 다른 성향의 아들 코모두스 황제의 이야기는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통해서 유명해 졌다. 이 영화는 알려지다시피 마르쿠스 황제와 같은 대철학자이자 현군(賢君)이 아들 코모두스가 장래 폭군(暴君)이 될 만한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 보지 못할 이유가 없었으며 죽기 전에 로마를 다른 사람 즉 장군 막시무스(Maximus)에게 넘겨주려 했다고 의혹에서 시작해서 막시무스에 의한 코모두스의 제거 과정을 다루고 있다. 물론 잘 알려지다시피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있었던 사실들을 짜깁기해서 등장인물들이나 상황들을 설정했다. 완전히 역사적 기록을 외면한 것은 아니지만, 기록에 충실한 부분은 많지 않으며 단지 사실들은 여러가지 짜집기를 통해서 일종의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과 결합했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코모두스가 후계자가 누구될지 걱정하고 있는 장면 등이 있어 마르쿠스 황제 사망당시 후계자가 미정이었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코모두스는 황제가 죽기 3년전 부터 이미 공동황제였다. 결국, 영화는 새로운 역사적인 의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판타지"를 즉 있었으면 좋았지만 도저히 있었을리 없는 이야기를 영상화하고 있다. 특히 아마도 코모두스의 즉위 후와 그의 사망 까지 그의 어린 조카의 나이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영화 전체가 마르쿠스 황제의 죽음에서 코모두스 재위의 몇년간을 다룬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서기 182년에 있었던 코모두스의 맏누나이자 황후(전 공동황제였던 죽은 루키우스의 부인)였던 루킬라(Lucila)의 음모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


마르쿠스 황제가 게르만 전선에 나가있을 때 전선을 지휘하는 실질적 지휘관은 막시무스 데키무스 메리디우스(Maximus Decimus Meridius)로 그들에 대한 마지막 공세를 취한다. 여기서도 게르만인들은 머리없는 로마인의 시신을 말에 태워 보내 로마군을 격분시키는 야만스럽고 흉포한 존재로 나온다. 장군 막시무스의 꿈은 이 싸움을 마지막으로 은퇴해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 지으며 살아 것이다. 막시무스에 의해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에 황제가 애지중지 하는 유일한 혈육들인 코모두스-루킬라 남매가 찾아온다(실제로는 아들은 코모두스가 유일하지만 마르쿠스의 딸들은 꽤 많다). 루킬라의 경우 죽은 전공동황제의 재가하지 않은 과부로 그 사이에 8살 난 아들을 가지고 있다고 영화상 설정되었지만, 실제 루킬라는 코모두스 이후로 살아남았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코모두스의 능력이나 인격에 대해 비관적인 마르쿠스 황제는 죽음을 예감하고 후계에 관해 막시무스에게 넘겨 로마의 영광을 되찾을 모종의 계획을 실현하려 한다. 코모두스가 이 계획을 듣자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고 이를 눈치 챈 장군 막시무스와 그 가족(어린 아들과 아내)들을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여기서 구사일생 살아난 막시무스가 가족을 구하러 고향에 가지만 이미 늦고 그 자신은 노예 검투사(gladiator)가 되어 생존을 위해 동료를 죽여야하는 처지가 된다.그러나 그는 황제가 죽은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대대적인 축제에서 훌륭한 검투 실력을 발휘하여 이 위대한 장군이 검투사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로마의 민중들에게 알린다. 그의 생존 소식에 로마의 민심은 흔들리며 원로원을 무시하는 코모두스의 행동에 대해 반발하는 원로원과 자신과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루킬라와 검투사이지만 아직 군단에 대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막시무스가 힘을 합쳐 음모를 꾸민다. 이 음모는 근위대에 의해 발각되어 사실상 진압되고 관련자는 황제에 의해 구금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코모두스의 헛된 야망에서 나온 그릇된 판단으로 상황이 뒤집히게 된다. 이 부분은 판타지스러운 부분이다. 코모두스가 이렇게 빨리 죽은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구금된 막시무스에게 상처를 입힌채 몸소 그와 검투시합을 해서 그를 죽인다는 것이고 후계자로 생각했던 루킬라의 아들 대신 그가 누나 루킬라와 결혼해서 순수한 혈통의 후계자에게 로마를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이전에 루킬라와 막시무스가 옛 연인사이로도 나온다. 오현제시대의 계승 방식을 따르자면 친아들이 아닌 능력을 인정받은 자가 사위가 되어 후계가 되므로 오히려 루킬라의 남편이 황제계승권을 가졌다고 볼 수 있고, 만일 마르쿠스가 막시무스를 후계자로 바꾸었다면 전부인과 이혼하고 루킬라나 임신이 가능한 자신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시켰을 것이다. 이 시합에서 두 사람 모두 죽게 되고 황후 루킬라는 공화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역시 현실성없는 말을 남긴다.

 

실제 역사 속의 코모두스 황제[단독재위 180-192년]와 루킬라의 음모[182년]


그럼 실제 기록들은 어땠을까?

단지 마르쿠스의 죽을 때의 일들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디오의 경우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코모두스"가 이미 천박하고 잔인한 기질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죽기 이틀 전에 그의 동료들을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런 성격에 대한 우려 이상은 아니었고 후계자를 그의 동료 중의 하나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미숙한 황제를 보좌해서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헤로디안(Herodian) 역시 이 때 마르쿠스가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불러 모아 그의 아들을 사이에 두고 한 유언을 전하고 있다. 거기서 그는 아들이 그릇된 길로 빠져 로마를 위험에 빠뜨릴 것인가를 걱정했고 이를 막기 위해 그들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을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 한편 디오는 이미 그의 아들에게 절망한 나머지 생전에 자주 아들이 일찍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고도 한다. 문제는 그런 그가 왜 오현제식의 양자 입양이라는 방식을 무시하고 끝까지 아들에게 세습을 고수했는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영화상으로는 루킬라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신변에 대한 걱정으로 음모를 꾸몄다고 말하고 있지만 헤로디안은 그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루키우스(Lucius, 전공동황제, 루킬라의 남편)가 죽은 후 루킬라는 그녀의 황실에서 지위(황후)에 따른 특권을 가진 채 아버지에 의해 폼페이아누스(Pompeianus)와 결혼했다. 코모두스 역시 그런 황실의 영예를 가지는 것을 허락했으며 극장에서 황실좌석에 계속 앉았으며 성화(聖火)가 그녀 앞에 놓여졌다. 하지만 코모두스가 크리스피나(Crispina)와 결혼했을 때 관습상 극장의 앞줄은 (새) 황후에게 배당된다. 루킬라는 이것이 견딜수 없었고 황후에게 주어진 영예는 그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남편 폼페이아누스가 코모두스에게 충직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제국 찬탈의 계획에 대해 그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젊고 부유한 귀족인 쿼드라투스(Quadratus)를 시험하려고 그녀와 함께 동침한다는 소문을 냈다.


이렇게 해 쿼드라투스와 그를 통해 원로원의 몇 인사들을 끌어들인 후에 코모두스를 암살할 계획을 짠다. 젊은 원로원 의원인 퀸티아누스(Quintianus)가 검투장에서 비수로 코모두스를 암살하기로 한다. 그러나 찌르기도 전에 "원로원이 이걸 너한테 보냈다"라는 말을 꺼내 근위대에게 붙잡히고 연루자들은 모두 사형당하게 된다. 이것이 루킬라의 음모의 전모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 이후로 코모두스의 성격은 크게 변하고 네로와 도미티아누스같은 폭군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 사건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본다. 영화에서는 코모두스가 짧은 시간안에 막시무스의 등장에 의해서 대중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로마민중들은 적어도 189년까지 현제의 아들인 코모두스까지를 그다지 싫어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민중들은 그의 잘못보다 그를 오도하는 몇몇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집사인 크레안데르(Cleander)를 처형하는 것에 만족했고 그 뒤 3년이나 더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대체적인 영화 내용과 역사기록은 차이가 많지만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은 비슷한 기록이 많이 있다. 코모두스에게 처형된 막시무스란 이름을 가진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퀸틸리우스 집안의 두 형제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들에 대한 기막힌 처형명령에 대해서도 디오가 전하고 있다. 단지 살아남아 도망간 경우는 막시무스가 아닌 그의 아들이었다. 루킬라와 코모두스가 연인관계였다는 암시는 그들의 나이차로 보아 가능성이 없고 그들의 최악의 관계에서도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다만, 실제로 최후에 코모두스가 사망하게 된 것은 그의 변덕스러운 기질을 두려워한 마르키아(Marcia)라는 코모두스의 첩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10여년 뒤의 일이다. 그리고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는 코모두스의 방탕하고 문란한 사생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검투시합에 대해 말하자면 코모두스는 물론 대중들에게 여러차례의 검투시합의 볼거리를 제공했고 그 자신이 검투시합을 몸소 즐겼다는 기록이 많으며 그 때문에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 아닌 검투사와 사통해서 얻은 아들이란 비아냥을 들었다고 한다. 또,  로마의 코모두스가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영화의 설정도 가능성이 희박하고, 오히려 이런 시도를 했던 것은 훗날의 카라칼라 황제이다.

대개의 동양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서양사가들도 권력자 등 역사상 주요인물들에 대한 인격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고 근대사가인 기번역시 이런 코멘트를 황제에는 어김없이 남기고  중요인물일 때 역시 남긴다.  이런 코모두스의 약점과 학정에도 기번은 코모두스에 대해 주로 디오의 말을 받아들인 듯 한데  이런 평가를 내린다.


코모두스는 이 처럼 사람의 피에 대한 미친듯한 갈증을 타고나 그의 어린 시절로 부터 가장 반인간적인 행동을 할 호랑이는 아니었다. 자연이 그에게 사악하기 보단 유약한 그의 기질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의 단순성과 겁많음이 그를 그의 시종들의 노예로 만들었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부패시켰다. 그의 잔인성은 처음 다른 사람의 말에 복종했고 습관으로 고착되어 그의 영혼의 지배적인 격정이 되었다.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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