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위대와 장관

 

로마 제국에서 황제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요한 관직 중의 하나가 뜻 밖에도 현재 우리말로 "근위대장" 혹은 "호위대장"이라 흔히 쓴다. 라틴어로는 프라에펙투스 프라에토리오(Praefectus Praetorio)이며 프라에토르가 법무관으로 번역되는 점을 생각하면 법무 담당관이라고 보기 쉽겠지만 그 보다는 유래상 공화정 시기부터 군대안에서 장군이나 법무관(praetor)을 호위하는 부대에 대해서 프라에토리안(Praetorian) 코르호즈(cohors:대대)라고 했고 이것이 내전기까지 유지되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된 이후에 기원전 2년에 이것에 담당관(prefect)을 임명했는데 바로 이것이 소위 근위대장(Praetorina prefect)의 기원으로 생각이 된다. 초기에는 단순하 근위대장으로 보여지지만 그 역할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이를 프라에토리안 장관(Praetorina prefect)으로 불러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단순히 근위대장 혹은 호위대장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더 적절할 것 같아서 이하 프라에토리안 장관이라고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후대의 경우는 물론 신설당시 부터 내 생각으로는 사실상 총리와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기번은 그 유래에서는 단순히 근위대(guards)의 우두머리로 시작했고 세베루스(Severus, 재위193-212) 황제에 의해서 재정과 사법 등의 수장을 겸했다고 하는데 아마 단순한 근위대의 우두머리였던 것은 공화정시기였을 것이다. 이미 아우구스투스가 신설할 당시 부터 그가 2 명의 장관을 두어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이들이 휘두를 권력이 어느 정도가 되며 황제에게 어떤 위협이 될지 예상되었다는 것이 아닐까한다.

기번은 역시 별도로 이 부대와 관직에 대해 로마 제국 쇠퇴의 중요한 첫번째 징후와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만 역시 현대사가와 같은 정확성을 가지고 이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기원에 있어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부대와 장관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같다. 아우구스투스는 다만 이미 있었던 부대에 두 명의 장관을 두기 시작했던 것에 불과하다. 그의 설명은 이러하다.


그 교활한 폭군(tyrant)은 현명히도 법으로 그의 찬탈을 덧칠했지만 무력만이 이를 유지케함을 잘 인식하고 점차로 강력한 호위부대 조직을 형성해서 상시 그의 신변을 보호하고 원로원에게 경외감을 주며 반란의 첫 행위들을 막거나 분쇄하는데 대비케 했다. 그는 이 훌륭한 군단을 두 배의 봉급과 우월한 특권으로 차별화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공할 측면이 즉시 로마 민중을 놀라게 자극하하자, 3개 코르호트(cohort:대대급)만을 수도 내의 그들의 병영에 배치시켰다. 반면, 나머지는 이탈리아의 인근 마을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50년의 평화와 노역 후에 티베리우스(Tiberius)가 결정적인 모험을 시도했고, 이것이 영원히 그의 나라에 대갈못을 박았다. 군영의 무거운 짐을 이탈리아로 부터 덜어준다는 그리고 호위대 속에 더 엄격한 훈련을 도입한다는 미명하에, 그는 로마의 항구적 병영안에 이를 조직했다. 이것이 세심한 주의를 통해 강화되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가공할 종들은 전제주의의 왕좌에 언제나 필수적이지만 종종 치명적이기도 했다. 프라에토리안 근위대( Praetorian guards)를 궁정과 원로원에 들여놓음에 의해, 황제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힘과 시민 정부의 약점을 인식하고, 그들 주인의 악덕을 친숙한 경멸감으로 보며, 숭배심에 찬 경외감을 져버리도록 가르쳤다. 그것은 충분한 거리와 신비함만으로 가상적 권력에 대해 유지 될 것들이었다. 호화로은 도시의 사치스런 태만 속에 그들의 긍지는 그들의 대항할 수 없는 무게감으로 성장되었다. 주권자나 원로원의 권위, 공적 재산, 황제의 자리까지도 모두 그들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감출수도 없었다. 위험한 징후로부터 프라에토리안 근위대의 관심을 돌려놓으려고 가장 굳건하고 잘 확립된 군주들조차 감안이설과 명령을 처벌과 포상을 섞어놓고 그들의 긍지에 알랑거리고 그들의 탐닉을 눈감고 헤이함을 묵인하여 그들의 불안한 충성을 후한 선물로 사야만 했다. 그것이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등극이래 합법적인 청구가 되어 모든 신황제에게 그렇게 되었다.


세번째 황제인 칼리굴라가 근위대에 의해 살해되었고 네번째와 다섯번째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네로가 이런식으로 근위대의 병영에서 즉위했던 것만 봐도 그들의 권력이 이미 어떤 수준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라에토리안 장관의 경우 반드시 2명만도 아니었다. 그들의 두드러진 역할은 이미 티베리우스 시절부터 악명을 떨쳤다. 아버지에 이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세자누스(Sejanus)의 경우 이미 단독의 장관이 되어 호위대를 독점했고 티베리우스의 아들마저 그의 아내와 공모하여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 후에도 오히려 티베리우스의 충복이 되어 그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아그리피나와 그 아들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서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아래 로마에서 비길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대개 장관들이 그렇듯 기사계급출신에 불과하면서도 리빌라의 아들이자 유일한 티베리우스의 손자에 대한 보호자로서 리빌라와의 결혼 요구 등을 통해 스스로 황제 즉 티베리우스의 후계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단 숙청이 완료되자 그 역시 폭군의 희생양이 되는 것으로 끝났다. 원로원에서 자신이 후계자로 인정받을 황제의 메세지를 기다리던 그는 도리어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된다.

코모두스가 자신의 암살기도이후 극도의 두려움을 보였을 때 그를 대신해서 첫번째로 로마를 통치했던 페레니스 역시 그의 근위대 장관이었다. 몇번의 고비를 넘겨 마지막으로 암살되었던 것도 근위대 장관의 손에 의해서이다. 그후로도 황제가 유약하건 강한 규율로 그들를 통제하려하건 간에 숱한 황제들이 그들의 칼날에 쓰러지고 그 위에 다시 세워졌다. 거의 제정말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대를 통해 황제를 제외한 로마 제1의 권력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이 근위대 장관을 로마 정치사에서는 좀 모호한 존재지만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제정시대 근위대 병영 카스트라 프라에토리아(Castra Praetoria)의 로마시내에서의 위치 안의 선은 제정초 성벽이고 밖의 선은 후대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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