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 초 게르만족

 

기번은 아홉번째 장(章)에서 게르만 민족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이는 주로 제정 초기까지 알려진 그들의 생활방식에 관한 것이다.[각주:1] 사실 후에 로마제국(서로마)을 멸망시킨 것은 게르만족이었지만 이 제정초기의 게르만족의 상태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아직 로마의 힘이 충분히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의 분열은 고도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기번은 주로 게르만을 한 민족으로보고 그들의 기질이나 풍습에 대해 주로 다루었지만 나는 여기서 각 부족들의 분포나 그들이 걸어온 역사를 살펴보고 싶다.

우선 게르마니아의 범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대 게르마니아는 로마의 멍에에 굴복한 라인(Rhine) 동쪽의 속주(province)의 경계를 제하고 유럽의 3분의 1정도 까지 뻗쳐있었다. 거의 현대의 독일(Germany), 덴마크(Denmark), 노르웨이(Norway), 스웨덴(Sweden), 핀란드(Finland), 리보니아(Livonia), 프러시아(Prussia:프로이센), 폴란드(Poland) 대부분이 한 민족(nation)의 여러 부족(tribes)에 의해 거주되었다.그들의 체질, 풍속, 언어는 공통된 기원을 보여주고 분명히 닮은 점이 유지되었다. 서쪽에서 고대 게르마니아는 갈리아로 부터 라인(Rhine)으로 남쪽에서 제국의 일리리아 속주들과 다뉴브(Danube)로 분리된다.



 

 

 제정 초 게르마니아의 민족 분포

 

대체로 라인과 다뉴브의 국경 밖에 게르만족들이 살았으며 그 안에 살던 게르만족들은 결국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기번은 당시에 게르마니아의 기후가 오늘날보다 훨씬 추었을 것이라는 설득력있는 가설을 이야기했는데 라인강과 도나우의 겨울의 결빙되는 정도가 달랐고 순록같이 극한대에 사는 동물이 카이사르 당시에 존재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이런 점은 고대 게르마니아인들이 지금보다 훨씬 혹독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상태가 후에 극적으로 개선된 것은 당시의 울창한 숲이 제거되었기 때문이고, 늪지에서 물을 빼내자 차츰 농경에도 적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와 분포


어쨌든 이들 분열된 각 부족들과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그 첫 군사적 충돌로 기억되는 것은 킴브리(Cimbri)인들이다. 그것이 기원전 113년 집정관 카르보(Carbo)가 이탈리아 경계에서 그들의 남진을 막았다. 그후로도 이탈리아 국경과 갈리아에서 계속 소란을 피운 이들은 로마의 큰 위협이 되었고 이탈리아 침입까지 계획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마리우스(Marius)가 그의 개혁된 군단을 이끌고서야 그들을 물리쳤는다. 이렇게 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탈리아 까지 위협한 이들은 의외로 원주지가 지금의 덴마크인 유틀란드 반도고 제정초기에도 그곳에 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들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스페인이나 갈리아 등 서유럽 전역을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도 게르만 족의 이동 동기는 인근 부족과의 싸움에서 밀리거나 이런 동기에서 국경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중에도 게르만족과 적잖이 힘을 겨루었다. 이들은 대체로 제정시대의 갈리아의 동쪽에 있던 부족들이다. 벨기카에 속하는 네르비(Nervi)인들도 카이사르를 괴롭힌 부족 중의 하나다. 라인강 바로 우안에 살면서 카이사르를 치러 넘어왔던 부족으로 우시페스(Usipetes)족과 텐테리타이(Tencteri)족이 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재위 때에는 대체로 라인을 넘어 엘베(Elbe) 강까지 로마의 경계를 넓히려는 시도를 했다. 첫번째로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인 드루수스(Drusus)가 기원전 12년부터 9년까지 4년간의 게르마니아 원정에 나섰으며 그의 활동무대는 라인과 엘베 사이에 있고 그 동안 이 지역의 여러 부족과 정벌과 친선의 방법으로 로마의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다. 북쪽 해안의 프리시(Frisi)족과는 우호관계를 맺고 카우키(Chauci)족을 쳤고 궁극적으로 엘베강까지 도달했으며 겨울에는 라인으로 귀환했으나 그 곳에 수비대를 두었다. 대체로 카우키족의 남쪽에는 체루스키(Cherusci)족이 있고 그 남쪽엔 카티(Chatti)족이 있는데 바로 이 체루스키 족의 추장이 게르만족의 영웅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였다. 로마군에서 한때 일했던 그는 서기 9년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후 바루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을 전멸시켜 이 지역의 로마 지배를 포기하게 만들어 다시 국경선을 라인으로 후퇴시겼던 것이다. 후에 게르만족의 자유를 찾아주었던 이 강력한 부족은 차티족의 공격을 받고 약화된다. 잠시 이 지역을 티베리우스가 담당하다 그가 황제가 된 후에는 드루수스의 아들인 게르마티쿠스(Germanicus)가 다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나섰지만 결국 티베리우스에게 소환되고 다시 라인이 국경으로 확정된다. 라인 이동의 게르마니아에는 상·하 2개의 속주가 설치되어 8개 군단이 배치될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그 동쪽 즉 엘베강에는 수에비(Suebi)라는 타키투스가 여러 부족을 거느린 대부족이라고 생각했던 강력한 부족이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중 처음 물리쳤던 게르만 족 왕인 아리오비스투스(Ariovistus)가 이곳 출신이며 이후에 이 수에비족의 압박으로 그 이서의 부족들이 라인을 넘어 로마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 더 동쪽에는 루기(Luggi)라는 대부족이 존재하여 Harii, Helvecones, Manimi, Helisii, Naharvali등이 그 일파였다고 한다. 더 동쪽으로 발트연안에 고토네스(Gotones)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후대 게르만 정복시대에 서유럽을 휩쓴 고트족의 선조라고 한다. 이들은 이 시대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갖 남하한 아주 먼곳에 사는 야만인이었을뿐이다. 그리고 더 멀리에 스웨덴의 옛 이름으로 보이는 수이오네스(Suiones)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이미 강력한 선단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다시 라인국경에서 다뉴브로 들어서면 헤르문두리(Hermunduri)족이 산다고 하는데 타키투스는 이 부족은 로마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 계속해서 그런 관계만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있는 종족이 마르코마니(Marconmanni)족과 콰디(Quadi)족이다. 바로 이 종족의 침입과 더불어 야만인들이 다뉴브 전선을 넘어 그리스까지 쳐들어오는데 이로써 오현제의 황금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된다. 다뉴브를 더 따라가면 이들과 행동을 함께했던 야지게스(Jazyges)족이 살며 흑해 연안을 따라가면 다키아 족이나 게르만족과는 다르면서 종종 그들과 연합을 이루어 로마를 침공했던 사르마트(Sarmat)인들이 있었다.

적어도 팍스로마나의 시대에는 이들 부족과 충돌도 있었고 여러번 정벌한 기록이 있지만 대체로 이들은 그렇게 강하지도 단결되지도 못했고 상대적으로 로마의 입장에서 이들에 대한 지배는 무난했다고 볼 수 있다. 기번은 그들이 이렇게 약한 입장에 놓이게 된 이유 성격적인 결함을 비롯한 그들의 약점들에 대해 상세히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앞에서 말한 것 이상으로 여러 부족들로 나뉘어졌던 것도 사실은 그렇게 나누어 지배하는 것이 로마의 전략이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게르만족의 이야기를 하면 타키투스의 태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다. 대체로 타키투스의 태도를 보면 게르만 족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것은 <게르마니아>가 르네상스 시대 발굴된 이래 독일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데 많이 이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오현제시대에 글을 썼지만 그러면서도 동시대의 로마인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 반대되는 기풍을 게르만족이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 그 호의적 태도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의 명언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자유와 가난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는 게르만족은 가난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알듯 모를듯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과 소유가 전제 정치를 허용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잘 이해는 되지 않으나 왠지 이 말을 들으면 플루타르크에 나오는 두가지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하나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이탈리아를 배회하는 들짐승들도 모두 몸을 숨길 동굴이나 은신처가 있지만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은 공기와 햇볕빼고는 아무것도 누릴게 없습니다." 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카이사르의 부하들이 스페인으로 부임하러 알프스를 넘어 야만인 마을을 보면서 나눈 대화 중에 “이런 동네에서는 최고의 자리를 놓고 싸우고 권력자들처럼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는 일은 없을거야"라고 수근거리는던 것이다. 어쨌든 그가 민주적인 기풍과 자유를 누릴만큼 충분히 용맹하고 명예롭다고 생각하던 게르만족들이 로마의 패권을 빼앗을 것은 염려했지만, 그와 함께 로마가 힘겹게 쟁취한 인류사적인 성취마져 깡그리 파괴해 버릴 줄은 그도 몰랐을 것 같다. 로마는 단지 패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침략아래 유래없는 최악의 폭정을 경험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분열되었던 이들은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 후 한 반세기 후에는 로마의 단순한 이간책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만큼 강해진다. 그들 부족은 프랑크니 고트니 하는 유럽을 뒤흔드는 대규모 연맹체로 통일되니 이것이 로마제국에 최고의 해악이 되었고 인류문명사의 재앙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1. 대체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De origine et situ Germanorum)>를 인용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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