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가발루스[재위 218-222년]의 로마 입성과 로마의 여인천하

 

로마에서 승리한 장군은 화려한 개선식을 가지며 수많은 로마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승리에서 얻은 전리품들이 많을 수록 그의 영광은 더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보물들과 함께 전쟁에서 패하여 나라를 잃은 야만인들의 왕들이나 장군들의 관람이 이 승리 축하 행사의 하일라이트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했을 때 그는 수많은 갈리아의 보물을 가지고 들어와서 시민들을 놀라게 하고 그 이익을 나누었다. 그리고 비슷한 이벤트로 구성된 축제를 마치고 나서 마지막 갈리아의 저항세력의 수장이었던 베르킨케토릭스를 사형시켰다. 로마의 개선식은 이처럼 장수가 거둔 승리와 전리품이 화려한 만큼에 비례해서 빛이 나는 것이었지만 개중에 로마가 타락하면 타락할 수록 외적인 화려움에 치중에서 실제로는 비웃음을 살 만한 촌극들도 많아진다.[각주:1] 세베루스 조에선 엘라가발루스의 로마 입성이 그런 것이었다.  

이 왕조의 시조격인 세베루스의 아들 폭군 카라칼라(Caracalla)에게는 이모인 율리아 매사(Julia Maesa)가 있는데 그녀의 과부가 된 두 딸이 고향 에메사(Emesa)에서 여전히 과부가 되어 살아 있었다. 두 딸은 각기 소애미아스(Soaemias)와 마매아(Maemma)였고 각기 아들 하나씩을 두었는데 소애미아스와 그 아들의 경우는 전혀 로마 문화를 접해 본 적이 없는 시리아 시골의 사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매아와 그의 아들의 경우도 비슷한 출신이었지만 꽤 로마-그리스 문화를 접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번의 관점에서도 마매아의 아들은 높이 평가된다. 그들의 두 아들들이 이런 면에서 자신의 어머니들에게 휘둘리는 유약한 군주란 면에서는 같지만 성격에 있어서는 상반되었다.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는 엘라가발루스는 처음으로 여자(할머니)를 원로원에 들인 로마 황제라고 하며 뿐만 아니라 여성만의 원로원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로마전통에서 여성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납득이 될 수가 없는 일이었으며 알렉산더 세베루스 치세까지 이것은 이어졌다.[각주:2] 자신의 고향에서 숭배되는 태양 신전의 최고 사제를 세습했다는 소애미아스의 아들 엘라가발루스의 경우는 그의 입성과 함께 거의 로마에 문화적 충격을 야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의 로마 생활은 로마인들과 기번이 비웃는 우스꽝스런 동양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그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꽤나 흥미로울 것 같다.

우선 찬탈자라할 수 있는 매크리누스(Macrinus)에 대항해서 일으킨 군대에서 그의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장군 역을 맡은 사람부터 그의 집안의 환관(宦官)이었고 이 사람과 가문을 책임진 두 모녀들이 거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승리가 결정되고 황제로 인정받은 후에도 로마에 이르기 까지 요란한 행진을 오래도록 계속한다. 서기 219년 겨울을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보낸다. 시리아의 지방의 사제였던 그는 자신의 종교나 생활 방식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로마에서 이를 바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로마인들이 자신의 화려한 모습에 감동해서 자신을 숭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몸을 금은 비단으로 장식된 종교적인 제사복과 여러 색깔의 보석이 박힌 왕관으로 치장하면서 가는 곳마다 그의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의 제사음악에 맞춰 무당처럼 춤을 었다. 그래도 로마의 경험이 있었던 할머니인 매사가 그런 사치스런 복장은 로마에선 여자들이나 입는 것이라며 로마 옷을 입으라고 충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에 가면 원로원과 민중들이 자신의 스타일에 익숙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번은 그의 로마 입성을 이렇게 말한다.


 

 

 

 

화려한 왕관과 팔찌

 

그의 머리는 우뚝한 왕관으로 덮고 목걸이와 팔찌는 가치매길 수 없을 정도의 보석들로 꾸몄다. 그의 눈썹은 검게 하고 뺨은 일부러 붉고 하얗게 칠했다. 심각한 의원들이 탄식하며 그들 자신의 나라 사람들의 혹독한 폭정을 경험한 후에 로마가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의 여자같은 사치 아래로까지 떨어졌다고 했다.

 

더군다나 금가루를 뿌리고, 전차를 끄는여섯마리 백마에게 조차 호화로운 옷을 입힌채 로마의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물론 아시아의 군주답게 많은 첩도 거느리고 다녔다. 그 지방에서 최고 사제였던 이 황제가 국정에 대해 아는 것은 종교의식 뿐이었는데 그것 조차 종래의 로마 정책과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로마의 황제로 엘라가발(Elagabal)이라는 자기 지방의 타이틀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를 로마 최고의 종교로 삼을 생각에 팔라틴의 최고 신전에서 자신의 신에 대한 제식을 거행했고 동양적 사치품들로 이 의식을 채웠다. 로마 입성 전에는 자신의 초상화를 원로원의 중앙에 걸게 하고, 모든 원로원의원과 민중들에게 자신의 숭배라하고 명령했다. 그의 5명의 수시로 바뀐 아내 중에는 베스타의 성녀(聖女)들도 있는데 이는 로마 종교에 대한 모독이었다. 교외 곳곳에 새로운 신전을 세워놓고 저런 복장을 하고 쏘다녔다.

매관매직이 물론 성행했고, 근위대 장관은 무동(舞童)을 임명하고 마부(馬夫)따위도 중용되었는가 싶다. 이 밖에 원로원을 무시하는 등 폭군으로 할 짓도 빠짐없이 하고나서 민심을 잃게 되었으며 근위대의 불만까지 사게 되었다. 물론 로마인의 외국인혐오증 때문에 그 악행이 다소 과장될 수도 있지만, 잘한 점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안되겠다 싶은 그의 할머니와 이모가 은밀히 이종사촌인 알렉산더 세베루스를 추대하려하고 군대가 때마침 일어나서 그를 제거했다. 그들 모자는 무자비하게 처치되어 불명예스럽게도 티베르 강에 버려졌다. 뒤를 이은 매마와 그의 아들은 같은 혈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배경을 가졌는지 오히려 로마의 무너지는 기강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로마인 자신은 앞서 엘라가발루스에 대해서도 경멸했지만,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개혁도 그다지 환영하지 않았다.

 

 

 

  1. 제정초에는 영토확장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와 황실인원에게만 개선식 헌정이 제한된 탓으로 개선식이 오래동안 중단되었다가 이 즈음 부터 별다른 결정적인 외국에 대한 승리 없이도 개선식이 남발되고 내전의 승리도 기념되었다. [본문으로]
  2. 로마에서는, 나이든 성인 여성이 장성한 남성 가장에게 보호 받아야 하는 로마의 관습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성 섭정은 세베루스조 후에는 서로마의 말기 극도의 혼란기에 테오도시오스의 어린 황제들이 즉위했을 때에나 나타났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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