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제의 제위 계승법

 

오현제(五賢帝)에 관해서 기번이 가장 주목한 것은 역시 그들의 황제 계승 방식에 대한 것과 황제 개인의 인격 혹은 성격에 관한 것이다. 오현제의 첫번째인 네르바(Nerva)[재위 96-98년]는 거의 죽음을 앞둔 늙은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척이 아닌 트라야누스(Trajan)[재위 98-117년]를 후계자로 삼았는데 이는 결코 그의 선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로마의 황제는 기본적으로 군대에 대한 영향력이나 그들의 지지를 요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제정사에서 이미 입증되었던 바였으며 네르바의 경우 그 점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각주:1] 만일 그가 유능한 군 지휘관이었던 트라야누스 같은 사람을 후계자로 정해두지 않았다면 그가 죽기 전에도 이에 대한 분쟁으로 제국이 소란해 질 수 있었고 그 화(禍)는 자기 자신에게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Hadrian)[재위 117-138년]의 경우는 트라야누스가 원정 중에 급사한 경우라서 통상적인 후계자가 되는 절차없이 계승했다. 단지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조카뻘의 친척인데다가 그의 조카 딸과 결혼으로 관계가 더 긴밀해 진 것이었으며 황위 계승을 위한 최소한의 절차였던 입양도 조작된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어쨌든 이 하드리아누스에 대해서 그가 정말 현제(good emperor)인지 아님 단순 폭군(tyrant)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될 수 있다. 우선 그의 재위 초기에 네 명의 집정관급의 원로원 의원들을 죽였고 말년에는 병으로인해 잔혹해 졌다고 한다. 말년의 잔혹함은 후계자로 생각되던 자신의 친척을 죽인 것일 것이다. 그의 사후 원로원은 폭군으로 선언해야 할 지 망설였는데 그의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년]가 울며 간청하는 바람에 이를 모면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드리아누스의 변덕은 후계자 선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음 속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러 사람을 올려보고 인정하기도 증오하기도 하면서 흔치않은 미모때문에 안티노우스(Antinous:하드리아누스가 사랑한 미남으로 황제가 아님에도 신격화됨)의 애인에게 추천되었던 게이이면서 관능적인 귀족인 아엘리우스 베루스(Aelius Verus)를 입양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그 자화자찬과 굉장한 기부금으로 동의를 확보해둔 병사들의 박수 중에서 혼자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동안 새로운 카이사르(Caesar)는 때이른 죽음으로 그의 포옹속에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외아들 하나를 남겼다. 하드리아누스는 그 소년을 안토니누스 집안에 추천했다. 피우스(Pius)에 의해 소년이 입양됬다. 그리고 마르쿠스(Marcus)[재위 161-180년]에게 주권에 대한 동등한 지분이 인정됐다. 이 어린 베루스(Verus)는 많은 악덕(惡德)들을 가진 중에도 한가지 덕(德)이 있었는데 그의 더 현명한 동료에 대한 의무적인 존경으로 기꺼이 그를 위해 제국에 대한 저열한 관심을 포기했다. 철학자적인 황제는 그의 어리석음을 해체했고 그의 이른 죽음을 탄식하며 그의 기억 위로 정중히 베일을 던졌다.  
하드리아누스의 격정이 충족되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하는 때마다 그는 가장 고귀한 재능있는 자를 로마의 왕좌에 올림으로써 후손들에게 감사받기로 결심한다. 그의 훌륭한 안목은 공직에서 평생 욕을 먹지 않은 쉰먹은 나이의 원로원 의원과 숙성한 후에는 모든 덕(德)에서 훌륭하게 될 가능성있는 17살 젊은이를 찾아냈다. 이 중 나이먹은 사람이 아들이자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로 선언되었는데 그러나 동시에 더 어린 쪽을 즉시 입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 두 안토니누스(Antoninus)들이 똑같은 현명함과 덕성으로 로마 세계를 42년 다스리게 된다. 비록 피우스(Pius)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각주:2] 가족의 이해보다 로마의 복지를 더 좋아했고 그의 딸 파우스티나(Faustina)를 어린 마르쿠스(Marcus)의 배우자로 주었고, 원로원으로 부터 호민관과 프로콘술(proconsul)의 권력을 얻어주었으며 질시같은 것은 고귀하게 버리거나 혹은 차라리 무시하고 그를 정부의 모든 업무에 친숙하게 했다. 마르쿠스(Marcus)는 한편 그의 후견인의 성격을 존중했고 그를 부모처럼 사랑하고 그의 주권에 복종했고 그가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된 후에는 그 전임자가 남긴 선례와 금언들로 자신의 정부를 규제했다. 그들의 연이은 치세는 사람들의 행복이 정부의 유일한 목표이던 역사상 유일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는 아엘리우스 베루스(Aelius Verus)를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그가 죽었고 별로 검증도 없이 형식상으로 그의 아들을 후계자로 염두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명의 나이차가 나는 참신한 두 인물을 발견했는데 그들이 훗날 각기 피우스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로 불리게 되는 두 안토니누스들이다. 더 어린 쪽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원 이름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재위 161-169년]로 아마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다음 황제로 정해진 피우스 황제는 두 명의 후계자를 입양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루키우스 베루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은 공동 황제가 되지만 루키우스는 형식적인데 그쳤다. 그리고 마르쿠스는 루키우스의 누이와 결혼하도록 정해졌었다. 하지만 피우스가 즉위하자마자 파혼하고 자신의 딸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도록 하는데 이 사이에서 훗날 코모두스가 태어난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동양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중국의 소위 오제(五帝)라는 것과 로마의 오현제(five good emperors)가 썩 비슷하다는 것이 흥미롭다. 중국에도 소위 오제가 있는데 그 중에 잘 알려진 것이 그 중에 으뜸인 황제(黃帝)와 요순(堯舜) 이렇게 세 사람이고 그 중간의 두 임금은 그 다지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소위 선진(先秦) 문헌에도 잘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오현제의 시대를 행복한 시대로서의 향수를 느꼈다면 요순의 시대는 그와 비슷한 어떤 이상적인 시대이기도 했다. 특히 요순의 경우는 유가의 뿐 아니라 제자백가 전체가 그리워 하던 회귀해야 할 이상사회였다. 그리고 요순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능력있는 순(舜)을 골라 사위로 삼아 천자(天子) 자리를 넘겨주었다는 것인데 이런 점이 아주 비슷하다. 또한 5제 중에 실질적으로 요순의 시대가 특히 주목되었던 것처럼 오현제 중에도 하드리아누스나 네르바의 경우는 현제임이 의심스런 경우이며 실질적으로 마지막 두 안토니누스들만이 확실한 현제였다는 것 역시 잘 들어맞는다. 이런 평화로운 황제 계승이 있어서 앞서 있었던 그를 둘러싼 내전과 친족간의 골육상쟁 등을 겪었던 로마인에게 더욱 행복한 시대로 자리매김된 것이었다. 이렇게 사양하면서 능력과 분수에 맞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만 어쩐일인지 마지막 현제의 사후에 로마는 계속 쇠락의 길을 걷고 최고의 자리를 놓코 벌이는 싸움은 갈수록 심해진다.

 

행복의 시대


이 오현제 시대의 행복에 대해 기번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일 세계의 역사상에 한 시대-그 동안의 인류의 상태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를 고르라고 한다면 그는 주저없이 도미티아누스(Domitian) 사후 코모두스 재위 전까지를 들 것이다. 로마 제국의 광대한 영역이 덕과 현명함의 인도하에 절대적인 권력의 지배를 받았다.  군대는 4명의 잇달은 황제들의 굳고 온화한 수중에 억제되었으며 그들의 성격과 권위는 의식못할 존경을 받았다. 시민 정부 형태는 네르바(Nerva), 트라야누스(Trajan), 하드리아누스(Hadrian), 안토니누스(Antoninus)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유지되었는데, 그들은 자유의 이미지를 즐겼고 자신들을 법률에 대한 책임있는 장관으로 여김을 기뻐했다. 그 때 로마인들이 이성적인 자유를 누릴 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원수(prince)들은 공화국을 회복했다는 영예를 받을만 한 자격이 있었을 것이다.

 

기번에 의하면 로마의 옛 터는 포도농장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그 행복이란 로마 귀족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로마인이 오늘날 유적으로 보더라도 그 번영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는 있다. 더구나, "행복함"이라 하는 것은 너무 주관적인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을 보더라도 경제적인 성장 면에서 세계 정상급에 있다고 하지만 행복의 지표상으로는 가장 뒤쳐진 나라 중의 하나이다. 기번 자신도 이러한 행복의 한계에 대해 몇가지 주의를 환기했다. 그것은 같은 로마제국내에 시민권자와 속주민 사이의 차별이 존재하며 노예같은 비참한 계층도 여전히 존재하는 단지 평균적이고 "일반적인 행복"이다. 그리고 행복의 근거의 취약함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단지 한 사람 황제의 인품에 달려있고 언제든 폭군이 나타나면 살벌한 다툼과 시민에 대한 박해가 일어날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연구 결과는 더 구체적으로 이런 기번의 평가 조차 의문을 던진다. 버트란트 러셀의 경우 그의 철학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시대에는 노예 제도가 있고 검투사의 쇼가 있어서  대중들은 그런 광적인 스포츠를 구경했고 둔한 칼로 싸우도록 한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법도 곧 소용없이 되었다고 한다. 경제는 더욱 더 엉망이어서 이탈리아는 농경에 불모지처럼 되고 로마인들은 곡물 배급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수의 황제나 그 측근들만 권력을 가지고 누리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좀더 체계적인 연구도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이 그 시대에는 단지 도시지역에만 영향을 줄 수 있었고 대다수의 농촌사회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도시조차도 무산계층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러한 제한된 행복마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망으로 끝나고 로마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죽음으로써 팍스 로마나도 더할 수 없는 행복의 시대도 종말을 고한다. 그래서 그 후의 역사를 주로 기록한 기번의 이 책의 제목이 <로마제국쇠망사>인 것이다. 그래서 이 <로마제국쇠망사>가 어쩌면 우울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기번 역시 자신이 비록 쇠락하는 군주제의 연대기를 쓰기는 하지만 되도록 이전 시기의 순수하고 활기찬 시대를 느껴보기도 하겠다고 한 것도 역시 그런 이유일 것이다.


 

 

  1. 네르바와 트아야누스 간 계승에 있어서 이러한 군사문제에 대한 양자의 대비는 마이클 그랜트(Michael Grant)도 "The Roman Emperors(1985)" 에서 언급하였다. [본문으로]
  2. 이미 어린 나이에 사망해서 제위계승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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