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렌니스와 글레안데르

 

코모두스 즉위 후 대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최고 권력이 사실상 프라에토리안 장관(Praetorian prefect)인 페렌니스(Perennis)의 손으로 들어간다.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었을 때 코모두스는 역시  다뉴브 전선에 있었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이루었던 이들 지역의 정복사업을 완수하기 전까지 전선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도시의 향락과 유흥과 검투사 시합에 익숙해 있던 코모두스와 그를 둘러싼 친구들은 더 이상 전장에서의 엄격한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 헤로디안(Herodian)은 이 때의 코모두스의 변명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부왕의 옛 동료들에게 떳떳하게 설득시킬 수 없을 것을 알고 자기가 이곳에 있으면 로마에 있는 부유한 귀족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 두렵다고 하면서, 자신처럼 도시생활을 그리워 하는 병사들을 규합하고 로마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서 그는 평화를 애걸하는 게르만족들의 청을 들어주었다. 디오(Dion Cassius)에 의하면 이 때 그는 로마인 포로 들을 돌려받고 그들에게 로마에 정규적으로 공물과 군대를 공급하도록 하였으며 교역에 관해서 그 횟수를 제한하고 로마 백인대장의 관리하에 두도록 하는 것이 이 강화의 조건이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그는 그동안 정복했던 여러 거점들에서 철수하고 로마로 돌아왔다. 이 이후로 60년간의 평화가 지속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게르만족을 완전히 굴복시킨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전선을 각 장군들에게 맡겨 놓은 것에 불과했고 브리타니아의 전선과 다뉴브 전선에서는 여전히 이들과의 소규모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단지 60년의 평화라는 것은 게르만족이 대규모 연맹체로 발전해서 로마에 큰 피해르 주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훗날 코모두스가 죽었을 때 각지에서 실력을 쌓았던 장군들이 제국을 나누어 갖게 된다. 어쨌든 코모두스는 로마에 돌아와서 성대한 개선식을 올렸고 당시 로마 민중들은 어쨌든 이제 고된 전역이 끝났고 현제의 아들이 즉위한 만큼 아우구스투스 이래의 평화와 오현제 시대의 행복이 다시 시작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코모두스는 황제의 정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큰 문제 없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처음 몇 년을 잘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누나 루킬라가 자신을 죽이려한 암살 시도를 했다는 것과 원로원과의 공모사실을 알았을 때 정치에 대한 염증과 원로원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을 느꼈다. 이 때의 숙청에서 프라에토리안 장관 중의 한 사람이 이 대처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함께 죽음을 당하게 되어 아마도 이로 인해서 페렌니스가 단독의 프라에토리안 장관으로서 마치 티베리우스 아래 세자누스가 그랬듯이 막강한 권한을 갖고 급기야 황제를 대신해서 로마를 통치하게 된다. 코모두스는 자신의 오락말고는 관심이 없었고 페렌니스 역시 탐욕한 인물로 그 동안 엄청난 재산을 모은다. 그리고 이미 제국은 분열상태였고 통제불능인 지역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이미 브리타니아에서 군단이 다른 황제를 추대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못했다. 오히려 로마에서는 페렌니스 자신이 제국을 찬탈할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이 번 돈을 이용해서 자신의 아들을 일리리아 전선에 보내어 놓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페렌니스에 대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자주 반란을 일으켰던 브리타니아의 군단이 사람을 보내서 페렌니스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으니 그를 제거하라고 충고하자 뒤늦게 이를 깨달아 페렌니스와 그 아들을 죽였다고 한다. 헤로디안의 경우 그의 제거에 대해 다른 일화도 소개하는데 한 제전에 코모두스와 많은 관중들 앞에서 한 철학자가 나타나 코모두스의 위험을 극적으로 충고하다가 죽음으로 이를 깨우쳤다고도 한다. 분노한 코모두스에 의해 페렌니스 부자는 아주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다시 코모두스는 두명의 프라에토리안 장관을 둔 아우구스투스의 심모원려를 깨닫게 되어 두명의 장관을 두었다. 190년에는 25명의 집정관을 두게했다. 하지만 정권은 이번에는 그의 집사인 클리안데르(Cleander)에게로 넘어갔는데 하는 짓은 페렌니스와 비슷했던 것 같다. 사실 클레안데르와 페렌니스는 이전부터 경쟁관계였고 페렌니스의 몰락과정에서 클레안데르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에 식량 문제에 휩싸이자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군대가 이에 동조하게 되어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코모두스는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클레안데르가 쳐논 인의 장막을 넘을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이었을 그의 애첩과 누이가 클레안데르를 성난 군중들에게 넘겨주어야만 목숨을 건질 수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이를 따르고 나서야 황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 190년의 일이다. 이 두명의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힐 때 코모두스는 정치사에 관심을 끊고 대중적인 스포츠와 향락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두 간신들은 그런면에서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다. 그가 검투사로서 명성을 날리던 것도 대중을 위해 돈을 펑펑 써가며 호화로운 검투시합과 운동경기를 개최하던 것이 바로 이들이 정권을 잡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사자 가죽을 쓴 헤라클레스로 분장한 코모두스의 반신상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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