셉티무스 세베루스


세 라이벌과 내전

 

결국 앞서 황제직을 산 디디우스가 아무런 군사적 뒷받침없이 허무하게 무너지자, 코모두스 시대의 장군들 세베루스(Severus)[재위 193-211년], 알비누스(Albinus), 니게르(Niger)에 의해 제국은 다시 삼분되게 된다. 훗날 새 왕조를 여는 세베루스가 자신의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이들 두 사람을 제거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십중팔구 내전(Civil war)을 피할 수 없다. 물론 그는 다른 노련한 경쟁자들을 군사적 재능에서 압도하고 최종적인 승자가 되지만 거기에는 그 특유의 간교함과 잔인함을 포함하는 전략이 많이 섞여 있다. 기번은 이러한 군사적인 과정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는 않다. 나 또한 전쟁 자체보다는 그가 다시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기 까지 보여주었던 일관된 잔인성과 교활함에 촛점을 맞추어 이 내전기를 살펴보려 한다. 이 과정과 후의 통치기에 보여준 세베루스의 특징은 상대가 충분히 강할 때는 그를 조심조심다루면서 치켜세우는 감언이설로 상대를 속이지만, 일단 만만하게 생각이 되고 싸움을 피할 수 없을 때는 이전의 약속따위는 가차없이 져버리고 잔인한 적대행위를 하고, 상대가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나아가 쓰러지는 날에는 무자비한 보복을 가한다는 점이다. 

우선 세베루스에게는 둘 중에 누구를 먼저 제거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런데 과거 삼두정 시기처럼 셋 중의 크라수스나 레피두스 처럼 하나의 완충으로 약자가 한 명있으면 좋은데 그런 상황은 아니다. 브리튼(Britain)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Clodius Albinus)나 시리아(Syria)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Pescennius Niger) 모두 군사적 경험에서나 세력이 만만치 않다. 기번의 말대로 "만일 두 경쟁자가 서로의 공통된 위험에 의해 화해해 그를 향해 지체없이 진군했다면 아마 세베루스는 그 통합된 힘에 침몰했을"지도 모른다. 세사람 중 알비누스의 경우는 귀족 출신이었고 니게르의 경우는 그 태생이 불분명한 밑바닥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그런 사람이었고, 그 중간에 세베루스는 기사계급 출신이었다. 혹은 니게르와 세베루스 모두 기사계급 출신으로 집정관(consul)자리 까지 오른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귀족 출신으로 명예를 존중하고 공화국과 원로원의 권위를 중시하는 알비누스가 세베루스의 교활함의 먹이가 되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세베루스는 먼저 니게르를 정벌할 결심을 한다. 여기서도 그를 약간 칭찬해 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원로원으로 부터 황제로 인정받은 권위를 이용해서 알비누스가 그 어부지리 얻지 못하도록 미끼를 던진다. 그의 중립을 조건으로 그를 후계자 즉 카이사르(Caesar)로 인정하겠다고 하자 자신의 야망과 그럴듯하게 포장된 로마식의 대의명분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이 알비누스는 여기에 만족하게 된다. 아마도 그 자신은 페르티낙스 같은 훌륭한 황제를 죽이는데 대한 복수를 넘어선 개인적 야심을 위한 행동에는 몸을 사리는 "갈바(Galba)"와 같은 기질을 가진 것 같았다. 훗날 증명되지만 이것은 세베루스의 교활함과 정말 잘 어울리는 조합이 되었다.

 

 

출전해온 세베루스에 맞서 니게르 역시 적국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자신의 지역의 단속을 강화하는 등 만만치 않은 전략으로 맞선다.  헬레스폰투스 해협의 키지쿠스(Cyzicus)에서의 싸움에서 세베루스가 이긴 후 파죽지세로 소아시아를 가로 질렀다. 첫 싸움의 결과로 많은 속주들이 그에게 귀순하고 니게르의 군대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드디어 알렉산더 대왕이 다리우스를 상대했던 이수스(Issus)의 평원에서 회전을 벌였고 주변 강물이 피빛으로 물드는 혈투를 벌였다. 승리는 세베루스의 것이었고, 니게르는  겨우 소수의 패잔병을 이끌고 달아나다가 추격대에 의해 살해된다.

 

이렇게 한 "국가의 적"이 토벌되자 다음은 알비누스의 차례인데 그를 후계자로 세운 뒤라 토벌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사절에게 비밀 명령을 주어 알비누스를 암살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알비누스에게 발각이 되고 결국 그를 브리튼으로부터 나와 갈리아로 끌어 내게 된다. 한편으로 비록 194년 비록 니게르는 죽었지만 그 잔당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이제 승리는 자신의 것임을 확신한 잔인한 세베루스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니게르 추종자들은 사방에 숨어들어 항전을 했고 특히 비잔티움의 요새에서는 결사적인 항전이 벌어졌는데 그의 잔인한 처벌을 두려워한 그들은 결코 쉽게 요새를 내어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 역시 갈리아로 출전하여 갈리아의 중심인 리옹 즉 루그두눔(Lugdunum) 인근에서 마지막 경쟁자를 물리쳐서 내전은 이렇게 197년에야 끝을 보게 된다.

세베루스의 잔인성은 그 후로도 그치지 않는다. 출신상 알비누스는 원로원에 지지 기반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승리자가 된 후 이런 사람들을 용서치 않았다. "35명의 의원"들을 용서한 것처럼 꾸미더니 다른 41명의 의원들은 그들의 가족 들까지 몰살시켰고 내전 중에 알비누스 편이었을 속주의 귀족들 역시 같은 형벌에 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베루스가 일인 황제로 자신의 왕조를 로마에 세울 수 있었다.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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