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세베루스[재위 222-235년]의 선정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가 코모두스 이래의 로마제국 쇠락기를 주제로 한 것이고 그 쇠락기는 약 300년간이며 기번은 그 전후로 약간 더 넓게 약 400년간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베루스 왕조의 성립까지를 이야기 했었다. 지난 편까지는 기번의 이름을 빌려서 나의 주관적인 생각들을 피력한 점이 다소 많았던 듯 한데, 여기에서는 좀더 기번의 원문에 충실한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

 

사실 세베루스 왕조에서는 역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또 하나의 비중 있는 인물이 있다. 그는 코모두스 이래 쇠락하는 로마의 기풍을 바로잡은 개혁군주로 평가되는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이다. 일반적인 로마사가의 것으로서이기도 하고 기번 역시  평하기를 몇몇 성격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쇠락하는 로마를 일으킨 명군(明君)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으론 그 시대라고 폭정(暴政)이 종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현명한 군주가 있다하더라도 그 혼자의 힘으로는 혼탁한 시대를 바로잡기는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는 군주가 선정(善政)을 베풀지만, 군주를 대신해 폭군(暴君)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 시대에도 전대와 다를 바 없이 적지 않은 의인(義人)들이 폭군 아닌 폭군들의 칼에 쓰러진 점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시대를 생각하면서 사마천(司馬遷)이 노자전(老子傳) 중에 쓴 공자에 대한 충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孔子)가 주(周)나라에 가서 그의 관심사인 예(禮)에 대해 노자(老子)에게 물었다. 노자(老子)가 말하길 「그대의 말하는 바는그 사람과 뼈가 이미 썩어버렸소. 오직 그 말만 남은 것이오. 더구나 군자(君子)가 그 시기(時期)를 얻는다면 수레를 타고 거들먹거리지만 그 시기(時期)를 얻지 못한다면 누추히 이곳저곳을 떠돈다오. 내 이를 듣건데 좋은 장사군은 깊이 감추어 마치 텅빈듯하고 군자가 덕(德)이 성(盛)하면 용모가 마치 어리석은 것 같다하오. 」

 

 

울피아누스

 

비교적 연소했던 세베루스가 사촌의 살해로 황제가 되었을 때 그를 사실상 지배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 마매아(Mamea)였으며 그녀는 중요한 국정을 프라에토리안 장관(Praetorian prefect)인 울피아누스(Ulpian)에게 맡겼는데 이 사람이야 말로 그 시대의 첫번째 의인(義人)이자 사실상 그 시대의 중흥을 이룬 실질적인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 시대의 선정이라면 단순히 엘라가발루스의 폐풍을 몰아낸 것이 아니다. 카라칼라에 발명된 과중한 세금을 다시 낮추었으며 사치품에 대한 규제는 남겨두고 필수품에 대한 가격이나 이자율은 낮춤으로서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켰고 원로원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시켜 새로운 번영과 평화를 꽃피웠 던 것이라고 기번은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이 군대에까지 미쳤을 때가 역시 문제였다. 이 개혁가이자 법학자였던 울피아누스는 어린 황제를 대신해 과거 페르티낙스(Pertinax)가 그랬고 무수한 황제들이 그랬듯 그 자신이 장관으로 있었던 프라에토리안 부대의 칼에 쓰러져야 했다. 기번의 말에 의하면 당시 이 선량한 개혁가는 민중과 근위대간의 내전이 로마에서 삼일간 계속된 후에 궁전으로 들어가 황제의 보호를 청했고 근위대는 황제 앞에서 끌어내 처형했다고 한다[228년]. 그러나 그 책임자의 처벌은 즉시에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일시적이지만 근위대의 혁명은 성공했던 것이다.

 

또한 이 사람이 유명한 법학자였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 로마가 세계에 남긴 가장 독특한 유산 중의 하나가 법률이라고 하고 제정로마를 통틀어 그런 만큼 법학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보여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세베루스 왕조시대에 황제를 제외한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프라에토리안 장관으로 법학자가 된 인물이 많았고 이 울피아누스가 그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파피아누스(Papinian) 같은 인물도 울피아누스와 비슷한 운명을 맞은 축에 속한다. 황제역사는 카라칼라가 공동황제였던 동생 게타(Geta)를 죽이나서고 법률가였던 그에게 그의 범죄를 원로원과 민중 앞에서 해명하라는 부탁을 거절했고 그래서 그 역시 살해되었다고 한다.[각주:1]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을 당당히 하는 한국의 법률가에 비하면 두 사람의 행동은 소신있는 법학자와 그와 다른 쪽의 차이를 잘 보여주지 않은가 싶다. 파피아누스의 경우 그의 죽음이 단순히 그런 청을 거절해서라기 보다도 그 자신이 게타의 파로서 그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 속에 자신도 연루된 것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현명한 군주가 있었어도 여전히 의인이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기는 여전히 힘든 시대였던 것 같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

 

그리고 또하나의 의인을 기번은 울피아누스와 나란히 소개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로마사>를 지은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이다. 그 역시 앞서 울피아누스와 같이 개혁가다운 마음을 가졌었고 만일 그가 그의 신변을 걱정한 알렉산더 황제의 배려로 황제와 함께하던 집정관직에서 은퇴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울피아누스와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아마 두 사람은 사육신과 생육신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많은 분량의 저술을 남긴 것 같다. 울피아누스의 저작은 <유스티아누스대법전>속에 전하고 디오의 <로마사>도 많이 읽히는데 디오의 경우는 그 자신의 역사책에 언급된 부분이 아니었다면 역사적으로 잊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사려깊은 황제의 배려로 그는 성난 군대의 비수를 피해 은퇴후 그가 오래전 부터 기획해 왔다는 <로마사>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정작 자신과 관계를 맺었던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에 대해서는 그 다지 많은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는데 아마 있었더라도 그들간의 관계를 생각했을때 공정했다고 평가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단지 그 황제 즉위에 약간의 정당성을 보태려고 했는지 엘라가발루스에 대한 안좋은 이름들만 소개하는데 대개 가짜 안토니누스, 아시리아인, 사르다나팔루스, 티베리누스다. 티베리누스는 그가 성난 군중에 의해 티베르강에 버려졌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라는데 디오 외에 다른 사람들도 많이 썼던 말인지는 모르겠다.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

 

그리고 이 황제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며 기번역시 이 점을 간과치 않는다. 그 약점은 바로 그의 어머니 마매아에 대한 것으로 그녀는 사실상 섭정을 하는 여제(女帝)였고 동시에 황제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황제의 약점이 될 수 있다. 헤로디안은 그녀가 재물에 욕심이 많았다고 황제의 비난을 샀다고도 한다. 그녀의 가장 큰 잘못은 아마도 단독의 황후(Empress)자리를 지키기 위해 며느리를 추방하고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장인을 사형시킨 일이며 이 모든 것은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실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울피아누스를 기용하고 16명의 유능한 원로원 의원들의 협의회에 모든 국사를 다루게 했던 것도 그녀의 수완이었고 알렉산더가 고대 로마의 덕성을 지킬 훌륭한 교육을 받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도 그녀였다는 것을 볼 때 황제와 마찬가지로 이 여제에게도 공과(功過)가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그에 다소 나마 지배된 그녀의 유약한 아들에 대해서도 기번은 순수성에 비해 단호함이 부족했다고 평했다.


 

 

<황후 Sallustia Orbiana 의 조상>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위험속에서도 알렉산더가 그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맞선 세번째 의인이었음도 분명한 것 같다. 비록 단지 훌륭한 군주상에 대한 이상화에 불과하다고 기번이 평하듯 과장이 많이 섞여있었겠지만 <황제역사>는 이 황제의 훌륭한 면모들을 많이 보여준다. 그의 재위 말년은 외정(外征)으로 점철되었는데 처음은 신흥의 페르시아와 마지막으로는 게르만족과 싸우다가 최후를 마쳤다. 불평불만으로 고대 로마로 부터 전해지는 군기를 거부하는 병사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호통을 치는 모습들이 기록에 남아 있으며 아마도 그로 인해 울피아누스가 먼저 겪었던 운명을 자신이 맞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원정 중에 그곳 군단의 반란으로 어머니와 함께 사망한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엊갈리는 설이 있는데 자세한 실상은 알수 없다. 일단 그의 개혁에대한 군대의 불만이 가장 의심되는 경우이지만 군대 반란의 명분은 그가 게르만족과 비겁한 강화를 맺으려 한 것이라 한다. 물론 <황제역사>는 이것이 군단내에서 제위를 이어받은 막시미누스(Maximin) 측의 모함이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경위는 알 수가 없다. 군단에서 그가 살해된 뒤에 사태를 수습한 새 황제 막시미누스(Maximin)가 로마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군단을 이끌고 게르만 전선을 지휘한 이유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세베루스 왕조는 끝나고 이제 군인황제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다음편들에서는  다른 시대로 가기 전에 이 시대에 시작되었고 말년 황제를 괴롭혔던 외정의 이유가 되었던 이민족 페르시아와 게르만족 등의 일들을 좀 다루어 보겠다.

 

 

  1. Historia Augusta,viii.1‑9.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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