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문들

 

오현제 중의 하나인 하드리아누스가 지방관에게 보낸 한 서신에는 자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곧 신성한 트라야누스 파트리쿠스의 아들이자 신성한 네르바의 손자이며 최고제사장

 

네르바와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혈연적 관계가 없고 비록 친척이나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도 친부자간이 아니지만 후계자 지명을 위한 입양을 통해 그들은 이렇게 각기 할아버지, 아버지로 불렀다. 그래서 결국 네르바에서 부터 코모두스까지를 하나의 가문으로 묶을 수 있다. 따라서, 제정초 로마는 왕조별로 서기 68년까지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조(Julian-Claudian Dynasty), 두번재로 베스파시아누스 조(Vespasian Dynasty, 서기 69-96), 세번째로는 오현제(96-180)와 코모두스(Commodus) 까지를 합쳐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조(Nerva-Antonine Dynasty, 96-192)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들 가문의 황제 외에도 네로 사후의 혼란기에 갈바(Galba), 오토(Otto),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세명의 단명황제들이 잠깐 제위에 올랐다.

 

공동황제 마르쿠스와 베루스

 

코모두스의 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잘 알려지다 시피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이다. 그의 이 방면에서의 두드러진 면이 양조부인 하드리아누스에게 눈에 띄어서 차차기 후계자로 차기 후계자인 베루스(Verus)에게 입양되었다. 형식상이지만 마르쿠스와 공동황제로 즉위하는 루키우스(Lucius) 역시 입양이 되는데 원래 마르쿠스의 첫 약혼자는 이 아이의 어린 누이였다. 하지만 베루스가 즉위하자마자 파혼과 함께 자신의 딸인 파우스티나(Faustina)와의 결혼을 권하고 마르쿠스는 이를 받아들이다.

 

피우스 황제가 죽자 다음 계승자는 명백히 그 혼자였지만 오히려 그는 모든 형식상의 권한[각주:1]을 공유하며 루키우스와 공동황제가 된다. 그러니까 루키우스가 죽는 169년까지는 형식상 로마에는 두 황제가 있었던 셈인데 이것은 로마사에서 형식적이지만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공유한 최초의 공동 황제의 사례라 할 만했다.[각주:2] 함께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루키우스의 이름은 루키우스 코모두스였고 이 때 루키우스 베루스로 바꾸고 훗날 마르쿠스의 후계자이자 유일한 아들이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마르쿠스는 그와 11살인 장녀 루킬라(Lucilla)와 약혼시켰다. 바로 그 해 즉 서기 161년에 파우스티나가 쌍둥이 형제를 낳았는데 그 중 나중까지 살아남은 아이가 훗날의 코모두스 황제이다. 그리고 곧 동방이 반란의 기운이 생겨나자 곧 동료황제인 루키우스를 파르티아 전선으로 보내고 2년 후 파우스티나가 13살이 되자 마자 급히 그와 결혼을 시킨다.

 

내외의 시련

 

비록 현제 시기의 절정이라고는 하지만 아우렐리우스 시대는 전쟁이 그칠날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162년에서 166년까지의 파르티아 전쟁은 그다지 큰 문제없이 해결이 되지만 뒤이어 터진 게르만 전쟁은 그의 남은 생애까지 계속되게 된다. 시간상으로도 길었지만 거의 라인-다뉴브 전선의 구석구석에서 많은 게르만이나 사르마티아 계통의 부족들이 로마를 침공해 왔으며 한 때 그리스는 물론 이탈리아 북쪽의 아퀼레이아(Aquileia)까지 약탈하게 된다. 결국 168년 두 황제가 몸소 마르코만니와 콰디족을 정복하러 떠나게 되고 결국 두 사람 모두 이 전쟁 중에 죽게된다. 루키우스는 169년에 마르쿠스는 한참 뒤인 180년에 사망한다. 이러한 사태의 심각성을 잘 이해한 마르쿠스는 야만인들을 상대로 여러차례 승리하여 로마의 위력을 그들에게 보여주는데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이들 부족들의 땅을 속주화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지속적인 공세를 편다.

 

이러한 마르쿠스의 계획에 첫번째의 차질을 빚게 했던 것이 그의 친구였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Avidius Cassius)였다. 기번은 그에 대해 "시리아(Syria)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자발적인 죽음에 의해 적을 친구로 바꾸려는 그의 바램을 좌절시켰다"라고 말했는데 그가 자살을 한 것은 아니다. 기번도 지적했듯이, 이 사람에 대한 처리에서 마르쿠스는 그 특유에 "자신에게만 엄격하고 다른 사람의 불완전성에겐 관대함"의 극단적인 편향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그의 반란 소식을 듣고도 신속한 대응을 하지않고 오히려 지연시켰으며 반란이 종료된 후에도 공모자들에 대한 처벌은 물론 그에 대한 조사조차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대체로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친구에 대한 관대함 때문이다. 디오에 따르면 그가 행한 연설에서 이러한 반란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두 사람 사이의 제국의 운영에 대한 입장차가 우연한 계기로 인해 불행한 사태까지 가게 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고 대화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반란의 계기가 되었던 것 중에는 마르쿠스가 죽었다고 잘못 알려진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고 한다. 사실 시오노 나나미가 번역한 <황제 역사> 중에 카시우스의 편지를 보면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를 칭한 그 역시 당시 로마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로마역사상 최고의 덕성을 가진 황제에 대한 반란은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싱겁게 끝이 난다. 죽었다던 황제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을 안 백인대장이 휘두른 칼에 카시우스의 야망은 덧없이 사라지고 내전을 준비하던 마르쿠스는 다시 야만인들과의 싸움을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바로 그의 아내인 성스런 파우스티나에 대한 것이다. 사실 마르쿠스 역시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특히 말년을 거의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이 전쟁이 전쟁의 첫경험이었다는 것을 보면 파우스티나가 그의 건강에 대해 우려했고 이 때문에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어린 아들 코모두스를 보호하기 위해 카시우스와 공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이 설은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특히 이 반란후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사망하게 되었고 안그래도 그 전후(前後) 처리에 미온적이던 황제가 죽은 그녀를 신성화하면서 카시우스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금지와 그에 대한 서류파기를 요청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아 보인다. 더군다다 황제는 파우스티나의 경우 그의 애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을 높은 관직에 오르도록 배려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어느 경우든 적어도 한 사람에 대해 지나친 관용을 베푼것은 사실이다. 기번은 제4장의 첫머리에서 바로 마르쿠스의 이런 지나친 덕이라는 약점을 지적한다. 기번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뛰어난 이해력은 종종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그의 마음에 의해 기만되었다. 군주들의 기호를 연구하면서 자신은 숨기는 교활한 인간들은  철학적 신성을 가장하고 접근하여 부와 명예를 획득하였다. 형제와 아내 그리고 아들에 대한 그의 과도한 관대함은 사적인 덕의 경계를 넘어 공적 해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관대함은 코모두스의 훗날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오현제 시대의 끝

 

다시 게르만족에 대한 전쟁은 시작되었지만 그의 건강이 보다 빨리 악화되었고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그는 죽음을 맞는다. 177년에 역시 아주 어린 나이로 이미 공동황제가 되어 있던 코모두스가 계승한여 전쟁을 맡게 된다. 죽기 전에 그는 마치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후계자와 시민들에게 그랬듯 코모두스에게 자신이 못다 이룬 게르만 정복을 끝마쳐야 한다는 유언과 함께 많은 그와 함께 활약했던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을 남겨준다. 그리고 기번 역시 디오가 그랬듯 코모두스가 천성적으로 피에 굶주린 호랑이의 성질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듯, 적어도 훌륭한 "고명대신"들이 주변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동안은 로마제국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섣부른 강화를 맺고 세계최고의 대도시 로마의 화려한 생활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훌륭한 충고자들은 그의 주변에서 물러나 하나씩 처형을 당하게 된다.

 

다비드 작(1787)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1. 최고대사제직만 단독으로 보유함. [본문으로]
  2. 아우구스투스 시절 아그리파나 티베리아누스의 사정을 보면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빼면 공동통치자가 그렇게 이례적인 일도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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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초 게르만족

 

기번은 아홉번째 장(章)에서 게르만 민족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이는 주로 제정 초기까지 알려진 그들의 생활방식에 관한 것이다.[각주:1] 사실 후에 로마제국(서로마)을 멸망시킨 것은 게르만족이었지만 이 제정초기의 게르만족의 상태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아직 로마의 힘이 충분히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의 분열은 고도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기번은 주로 게르만을 한 민족으로보고 그들의 기질이나 풍습에 대해 주로 다루었지만 나는 여기서 각 부족들의 분포나 그들이 걸어온 역사를 살펴보고 싶다.

우선 게르마니아의 범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대 게르마니아는 로마의 멍에에 굴복한 라인(Rhine) 동쪽의 속주(province)의 경계를 제하고 유럽의 3분의 1정도 까지 뻗쳐있었다. 거의 현대의 독일(Germany), 덴마크(Denmark), 노르웨이(Norway), 스웨덴(Sweden), 핀란드(Finland), 리보니아(Livonia), 프러시아(Prussia:프로이센), 폴란드(Poland) 대부분이 한 민족(nation)의 여러 부족(tribes)에 의해 거주되었다.그들의 체질, 풍속, 언어는 공통된 기원을 보여주고 분명히 닮은 점이 유지되었다. 서쪽에서 고대 게르마니아는 갈리아로 부터 라인(Rhine)으로 남쪽에서 제국의 일리리아 속주들과 다뉴브(Danube)로 분리된다.



 

 

 제정 초 게르마니아의 민족 분포

 

대체로 라인과 다뉴브의 국경 밖에 게르만족들이 살았으며 그 안에 살던 게르만족들은 결국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기번은 당시에 게르마니아의 기후가 오늘날보다 훨씬 추었을 것이라는 설득력있는 가설을 이야기했는데 라인강과 도나우의 겨울의 결빙되는 정도가 달랐고 순록같이 극한대에 사는 동물이 카이사르 당시에 존재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이런 점은 고대 게르마니아인들이 지금보다 훨씬 혹독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상태가 후에 극적으로 개선된 것은 당시의 울창한 숲이 제거되었기 때문이고, 늪지에서 물을 빼내자 차츰 농경에도 적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와 분포


어쨌든 이들 분열된 각 부족들과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그 첫 군사적 충돌로 기억되는 것은 킴브리(Cimbri)인들이다. 그것이 기원전 113년 집정관 카르보(Carbo)가 이탈리아 경계에서 그들의 남진을 막았다. 그후로도 이탈리아 국경과 갈리아에서 계속 소란을 피운 이들은 로마의 큰 위협이 되었고 이탈리아 침입까지 계획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마리우스(Marius)가 그의 개혁된 군단을 이끌고서야 그들을 물리쳤는다. 이렇게 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탈리아 까지 위협한 이들은 의외로 원주지가 지금의 덴마크인 유틀란드 반도고 제정초기에도 그곳에 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들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스페인이나 갈리아 등 서유럽 전역을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도 게르만 족의 이동 동기는 인근 부족과의 싸움에서 밀리거나 이런 동기에서 국경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중에도 게르만족과 적잖이 힘을 겨루었다. 이들은 대체로 제정시대의 갈리아의 동쪽에 있던 부족들이다. 벨기카에 속하는 네르비(Nervi)인들도 카이사르를 괴롭힌 부족 중의 하나다. 라인강 바로 우안에 살면서 카이사르를 치러 넘어왔던 부족으로 우시페스(Usipetes)족과 텐테리타이(Tencteri)족이 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재위 때에는 대체로 라인을 넘어 엘베(Elbe) 강까지 로마의 경계를 넓히려는 시도를 했다. 첫번째로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인 드루수스(Drusus)가 기원전 12년부터 9년까지 4년간의 게르마니아 원정에 나섰으며 그의 활동무대는 라인과 엘베 사이에 있고 그 동안 이 지역의 여러 부족과 정벌과 친선의 방법으로 로마의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다. 북쪽 해안의 프리시(Frisi)족과는 우호관계를 맺고 카우키(Chauci)족을 쳤고 궁극적으로 엘베강까지 도달했으며 겨울에는 라인으로 귀환했으나 그 곳에 수비대를 두었다. 대체로 카우키족의 남쪽에는 체루스키(Cherusci)족이 있고 그 남쪽엔 카티(Chatti)족이 있는데 바로 이 체루스키 족의 추장이 게르만족의 영웅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였다. 로마군에서 한때 일했던 그는 서기 9년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후 바루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을 전멸시켜 이 지역의 로마 지배를 포기하게 만들어 다시 국경선을 라인으로 후퇴시겼던 것이다. 후에 게르만족의 자유를 찾아주었던 이 강력한 부족은 차티족의 공격을 받고 약화된다. 잠시 이 지역을 티베리우스가 담당하다 그가 황제가 된 후에는 드루수스의 아들인 게르마티쿠스(Germanicus)가 다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나섰지만 결국 티베리우스에게 소환되고 다시 라인이 국경으로 확정된다. 라인 이동의 게르마니아에는 상·하 2개의 속주가 설치되어 8개 군단이 배치될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그 동쪽 즉 엘베강에는 수에비(Suebi)라는 타키투스가 여러 부족을 거느린 대부족이라고 생각했던 강력한 부족이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중 처음 물리쳤던 게르만 족 왕인 아리오비스투스(Ariovistus)가 이곳 출신이며 이후에 이 수에비족의 압박으로 그 이서의 부족들이 라인을 넘어 로마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 더 동쪽에는 루기(Luggi)라는 대부족이 존재하여 Harii, Helvecones, Manimi, Helisii, Naharvali등이 그 일파였다고 한다. 더 동쪽으로 발트연안에 고토네스(Gotones)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후대 게르만 정복시대에 서유럽을 휩쓴 고트족의 선조라고 한다. 이들은 이 시대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갖 남하한 아주 먼곳에 사는 야만인이었을뿐이다. 그리고 더 멀리에 스웨덴의 옛 이름으로 보이는 수이오네스(Suiones)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이미 강력한 선단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다시 라인국경에서 다뉴브로 들어서면 헤르문두리(Hermunduri)족이 산다고 하는데 타키투스는 이 부족은 로마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 계속해서 그런 관계만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있는 종족이 마르코마니(Marconmanni)족과 콰디(Quadi)족이다. 바로 이 종족의 침입과 더불어 야만인들이 다뉴브 전선을 넘어 그리스까지 쳐들어오는데 이로써 오현제의 황금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된다. 다뉴브를 더 따라가면 이들과 행동을 함께했던 야지게스(Jazyges)족이 살며 흑해 연안을 따라가면 다키아 족이나 게르만족과는 다르면서 종종 그들과 연합을 이루어 로마를 침공했던 사르마트(Sarmat)인들이 있었다.

적어도 팍스로마나의 시대에는 이들 부족과 충돌도 있었고 여러번 정벌한 기록이 있지만 대체로 이들은 그렇게 강하지도 단결되지도 못했고 상대적으로 로마의 입장에서 이들에 대한 지배는 무난했다고 볼 수 있다. 기번은 그들이 이렇게 약한 입장에 놓이게 된 이유 성격적인 결함을 비롯한 그들의 약점들에 대해 상세히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앞에서 말한 것 이상으로 여러 부족들로 나뉘어졌던 것도 사실은 그렇게 나누어 지배하는 것이 로마의 전략이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게르만족의 이야기를 하면 타키투스의 태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다. 대체로 타키투스의 태도를 보면 게르만 족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것은 <게르마니아>가 르네상스 시대 발굴된 이래 독일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데 많이 이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오현제시대에 글을 썼지만 그러면서도 동시대의 로마인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 반대되는 기풍을 게르만족이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 그 호의적 태도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의 명언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자유와 가난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는 게르만족은 가난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알듯 모를듯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과 소유가 전제 정치를 허용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잘 이해는 되지 않으나 왠지 이 말을 들으면 플루타르크에 나오는 두가지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하나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이탈리아를 배회하는 들짐승들도 모두 몸을 숨길 동굴이나 은신처가 있지만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은 공기와 햇볕빼고는 아무것도 누릴게 없습니다." 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카이사르의 부하들이 스페인으로 부임하러 알프스를 넘어 야만인 마을을 보면서 나눈 대화 중에 “이런 동네에서는 최고의 자리를 놓고 싸우고 권력자들처럼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는 일은 없을거야"라고 수근거리는던 것이다. 어쨌든 그가 민주적인 기풍과 자유를 누릴만큼 충분히 용맹하고 명예롭다고 생각하던 게르만족들이 로마의 패권을 빼앗을 것은 염려했지만, 그와 함께 로마가 힘겹게 쟁취한 인류사적인 성취마져 깡그리 파괴해 버릴 줄은 그도 몰랐을 것 같다. 로마는 단지 패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침략아래 유래없는 최악의 폭정을 경험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분열되었던 이들은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 후 한 반세기 후에는 로마의 단순한 이간책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만큼 강해진다. 그들 부족은 프랑크니 고트니 하는 유럽을 뒤흔드는 대규모 연맹체로 통일되니 이것이 로마제국에 최고의 해악이 되었고 인류문명사의 재앙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1. 대체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De origine et situ Germanorum)>를 인용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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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제의 제위 계승법

 

오현제(五賢帝)에 관해서 기번이 가장 주목한 것은 역시 그들의 황제 계승 방식에 대한 것과 황제 개인의 인격 혹은 성격에 관한 것이다. 오현제의 첫번째인 네르바(Nerva)[재위 96-98년]는 거의 죽음을 앞둔 늙은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척이 아닌 트라야누스(Trajan)[재위 98-117년]를 후계자로 삼았는데 이는 결코 그의 선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로마의 황제는 기본적으로 군대에 대한 영향력이나 그들의 지지를 요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제정사에서 이미 입증되었던 바였으며 네르바의 경우 그 점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각주:1] 만일 그가 유능한 군 지휘관이었던 트라야누스 같은 사람을 후계자로 정해두지 않았다면 그가 죽기 전에도 이에 대한 분쟁으로 제국이 소란해 질 수 있었고 그 화(禍)는 자기 자신에게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Hadrian)[재위 117-138년]의 경우는 트라야누스가 원정 중에 급사한 경우라서 통상적인 후계자가 되는 절차없이 계승했다. 단지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조카뻘의 친척인데다가 그의 조카 딸과 결혼으로 관계가 더 긴밀해 진 것이었으며 황위 계승을 위한 최소한의 절차였던 입양도 조작된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어쨌든 이 하드리아누스에 대해서 그가 정말 현제(good emperor)인지 아님 단순 폭군(tyrant)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될 수 있다. 우선 그의 재위 초기에 네 명의 집정관급의 원로원 의원들을 죽였고 말년에는 병으로인해 잔혹해 졌다고 한다. 말년의 잔혹함은 후계자로 생각되던 자신의 친척을 죽인 것일 것이다. 그의 사후 원로원은 폭군으로 선언해야 할 지 망설였는데 그의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년]가 울며 간청하는 바람에 이를 모면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드리아누스의 변덕은 후계자 선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음 속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러 사람을 올려보고 인정하기도 증오하기도 하면서 흔치않은 미모때문에 안티노우스(Antinous:하드리아누스가 사랑한 미남으로 황제가 아님에도 신격화됨)의 애인에게 추천되었던 게이이면서 관능적인 귀족인 아엘리우스 베루스(Aelius Verus)를 입양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그 자화자찬과 굉장한 기부금으로 동의를 확보해둔 병사들의 박수 중에서 혼자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동안 새로운 카이사르(Caesar)는 때이른 죽음으로 그의 포옹속에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외아들 하나를 남겼다. 하드리아누스는 그 소년을 안토니누스 집안에 추천했다. 피우스(Pius)에 의해 소년이 입양됬다. 그리고 마르쿠스(Marcus)[재위 161-180년]에게 주권에 대한 동등한 지분이 인정됐다. 이 어린 베루스(Verus)는 많은 악덕(惡德)들을 가진 중에도 한가지 덕(德)이 있었는데 그의 더 현명한 동료에 대한 의무적인 존경으로 기꺼이 그를 위해 제국에 대한 저열한 관심을 포기했다. 철학자적인 황제는 그의 어리석음을 해체했고 그의 이른 죽음을 탄식하며 그의 기억 위로 정중히 베일을 던졌다.  
하드리아누스의 격정이 충족되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하는 때마다 그는 가장 고귀한 재능있는 자를 로마의 왕좌에 올림으로써 후손들에게 감사받기로 결심한다. 그의 훌륭한 안목은 공직에서 평생 욕을 먹지 않은 쉰먹은 나이의 원로원 의원과 숙성한 후에는 모든 덕(德)에서 훌륭하게 될 가능성있는 17살 젊은이를 찾아냈다. 이 중 나이먹은 사람이 아들이자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로 선언되었는데 그러나 동시에 더 어린 쪽을 즉시 입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 두 안토니누스(Antoninus)들이 똑같은 현명함과 덕성으로 로마 세계를 42년 다스리게 된다. 비록 피우스(Pius)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각주:2] 가족의 이해보다 로마의 복지를 더 좋아했고 그의 딸 파우스티나(Faustina)를 어린 마르쿠스(Marcus)의 배우자로 주었고, 원로원으로 부터 호민관과 프로콘술(proconsul)의 권력을 얻어주었으며 질시같은 것은 고귀하게 버리거나 혹은 차라리 무시하고 그를 정부의 모든 업무에 친숙하게 했다. 마르쿠스(Marcus)는 한편 그의 후견인의 성격을 존중했고 그를 부모처럼 사랑하고 그의 주권에 복종했고 그가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된 후에는 그 전임자가 남긴 선례와 금언들로 자신의 정부를 규제했다. 그들의 연이은 치세는 사람들의 행복이 정부의 유일한 목표이던 역사상 유일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는 아엘리우스 베루스(Aelius Verus)를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그가 죽었고 별로 검증도 없이 형식상으로 그의 아들을 후계자로 염두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명의 나이차가 나는 참신한 두 인물을 발견했는데 그들이 훗날 각기 피우스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로 불리게 되는 두 안토니누스들이다. 더 어린 쪽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원 이름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재위 161-169년]로 아마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다음 황제로 정해진 피우스 황제는 두 명의 후계자를 입양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루키우스 베루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은 공동 황제가 되지만 루키우스는 형식적인데 그쳤다. 그리고 마르쿠스는 루키우스의 누이와 결혼하도록 정해졌었다. 하지만 피우스가 즉위하자마자 파혼하고 자신의 딸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도록 하는데 이 사이에서 훗날 코모두스가 태어난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동양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중국의 소위 오제(五帝)라는 것과 로마의 오현제(five good emperors)가 썩 비슷하다는 것이 흥미롭다. 중국에도 소위 오제가 있는데 그 중에 잘 알려진 것이 그 중에 으뜸인 황제(黃帝)와 요순(堯舜) 이렇게 세 사람이고 그 중간의 두 임금은 그 다지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소위 선진(先秦) 문헌에도 잘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오현제의 시대를 행복한 시대로서의 향수를 느꼈다면 요순의 시대는 그와 비슷한 어떤 이상적인 시대이기도 했다. 특히 요순의 경우는 유가의 뿐 아니라 제자백가 전체가 그리워 하던 회귀해야 할 이상사회였다. 그리고 요순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능력있는 순(舜)을 골라 사위로 삼아 천자(天子) 자리를 넘겨주었다는 것인데 이런 점이 아주 비슷하다. 또한 5제 중에 실질적으로 요순의 시대가 특히 주목되었던 것처럼 오현제 중에도 하드리아누스나 네르바의 경우는 현제임이 의심스런 경우이며 실질적으로 마지막 두 안토니누스들만이 확실한 현제였다는 것 역시 잘 들어맞는다. 이런 평화로운 황제 계승이 있어서 앞서 있었던 그를 둘러싼 내전과 친족간의 골육상쟁 등을 겪었던 로마인에게 더욱 행복한 시대로 자리매김된 것이었다. 이렇게 사양하면서 능력과 분수에 맞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만 어쩐일인지 마지막 현제의 사후에 로마는 계속 쇠락의 길을 걷고 최고의 자리를 놓코 벌이는 싸움은 갈수록 심해진다.

 

행복의 시대


이 오현제 시대의 행복에 대해 기번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일 세계의 역사상에 한 시대-그 동안의 인류의 상태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를 고르라고 한다면 그는 주저없이 도미티아누스(Domitian) 사후 코모두스 재위 전까지를 들 것이다. 로마 제국의 광대한 영역이 덕과 현명함의 인도하에 절대적인 권력의 지배를 받았다.  군대는 4명의 잇달은 황제들의 굳고 온화한 수중에 억제되었으며 그들의 성격과 권위는 의식못할 존경을 받았다. 시민 정부 형태는 네르바(Nerva), 트라야누스(Trajan), 하드리아누스(Hadrian), 안토니누스(Antoninus)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유지되었는데, 그들은 자유의 이미지를 즐겼고 자신들을 법률에 대한 책임있는 장관으로 여김을 기뻐했다. 그 때 로마인들이 이성적인 자유를 누릴 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원수(prince)들은 공화국을 회복했다는 영예를 받을만 한 자격이 있었을 것이다.

 

기번에 의하면 로마의 옛 터는 포도농장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그 행복이란 로마 귀족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로마인이 오늘날 유적으로 보더라도 그 번영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는 있다. 더구나, "행복함"이라 하는 것은 너무 주관적인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을 보더라도 경제적인 성장 면에서 세계 정상급에 있다고 하지만 행복의 지표상으로는 가장 뒤쳐진 나라 중의 하나이다. 기번 자신도 이러한 행복의 한계에 대해 몇가지 주의를 환기했다. 그것은 같은 로마제국내에 시민권자와 속주민 사이의 차별이 존재하며 노예같은 비참한 계층도 여전히 존재하는 단지 평균적이고 "일반적인 행복"이다. 그리고 행복의 근거의 취약함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단지 한 사람 황제의 인품에 달려있고 언제든 폭군이 나타나면 살벌한 다툼과 시민에 대한 박해가 일어날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연구 결과는 더 구체적으로 이런 기번의 평가 조차 의문을 던진다. 버트란트 러셀의 경우 그의 철학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시대에는 노예 제도가 있고 검투사의 쇼가 있어서  대중들은 그런 광적인 스포츠를 구경했고 둔한 칼로 싸우도록 한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법도 곧 소용없이 되었다고 한다. 경제는 더욱 더 엉망이어서 이탈리아는 농경에 불모지처럼 되고 로마인들은 곡물 배급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수의 황제나 그 측근들만 권력을 가지고 누리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좀더 체계적인 연구도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이 그 시대에는 단지 도시지역에만 영향을 줄 수 있었고 대다수의 농촌사회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도시조차도 무산계층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러한 제한된 행복마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망으로 끝나고 로마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죽음으로써 팍스 로마나도 더할 수 없는 행복의 시대도 종말을 고한다. 그래서 그 후의 역사를 주로 기록한 기번의 이 책의 제목이 <로마제국쇠망사>인 것이다. 그래서 이 <로마제국쇠망사>가 어쩌면 우울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기번 역시 자신이 비록 쇠락하는 군주제의 연대기를 쓰기는 하지만 되도록 이전 시기의 순수하고 활기찬 시대를 느껴보기도 하겠다고 한 것도 역시 그런 이유일 것이다.


 

 

  1. 네르바와 트아야누스 간 계승에 있어서 이러한 군사문제에 대한 양자의 대비는 마이클 그랜트(Michael Grant)도 "The Roman Emperors(1985)" 에서 언급하였다. [본문으로]
  2. 이미 어린 나이에 사망해서 제위계승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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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정시대 내내 로마의 국경은 그 다지 변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Trajan) 황제는 유일하게도 오래도록 유지된 온건 정책을 깨고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가 지난 곳은 새로운 로마의 속주(province)가 되었다. 오현제(五賢帝)의 첫번째였던 네르바(Nerva)와 아무런 혈연관계를 갖지 않았던 그가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네르바에게는 없는 군사적인 능력을 보완하는데 그가 가장 적격이었기 때문임에서 보듯 그의 정복활동은 거침없이 신속하게 행해졌다. 그의 재위 말년에 로마를 떠나 아르메니아, 파르티아로의 진격했고 이 원정 중에 사망했다. 이 중 다키아는 다뉴브를 넘어서 세운 첫번째 로마의 속주가 되어 오랫동안 이름이 유지되었다.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의 경우 일시적인 정복에 그쳤다. 이처럼 파르티아 깊숙히까지 한때나마 위력을 떨쳤던 로마 황제나 군인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간단히 파르티아와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에 대해 다루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선 기번의 8장이 후대에 일어난 페르시아를 다루는데 여기에 간략한 이 지역의 역사가 언급된다. 즉 파르티아가 다스리던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이 멸망시켰던 페르시아였다. 아시리아(Assyria)의 패권을 메디아(Mede)와 바빌론(Babylon)이 양분하다가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고, 그 여세를 몰아 그 군주들이 백만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역으로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후에 그의 제국은 분할되고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조가 로마와 힘을 겨루느라고 힘든 때에는 북방에서 일어난 파르티아인들이 점차 동쪽의 여러 부족들을 흡수해 셀레우코스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이 파르티아에 대해서 기번은 막연히 스키타이(Scyth) 기원의 유목민족이라고 하는데 파르티아의 기마궁수들이 유명했다. 요즘에는 대체로 이란 계통의 페르시아 북쪽에 살던 민족이라고 하는데, 실상 이 파르티아에 대해서는 종족의 기원을 비롯해서 의외로 오늘날까지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멸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다음 정벌했던 곳이 당시 그에 한 지방으로 소속되었던 파르티아와 그 인근의 히르카니아(Hyrcania)였다. 또한 인근 아르메니아도 파르티아와 관계가 깊다고 한다. 다만 굉장히 느슨한 형태의 제국으로 거의 반자치적 독립적인 여러 소왕국들이 그 안에 존재했었다. 기번이 소개한 마케도니아인들이 세운 셀레우키아(Seleucia) 같은 도시는 당시에도 독립적인 공화국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등 헬레니즘적인 전통이 계속 유지되었다. 티그리스 강의 서안에 있는 셀레우키아의 바로 맞은 편에 크테시폰(Ctesiphon)이란 번영하는 도시가 있어 유목적 생활을 즐기는 파르티아의 군주가 자주 머물렀다.

 

파르티아 제국의 최대 영토


파르티아와 로마의 관계는 초기에는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란 북쪽에서 일어나서 인근 부족들을 통합해 점차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와의 경계까지 진출했을 때 셀레우코스는 마침 로마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말처럼 파르티아는 유대왕국과 함께 로마와 아주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굳혀지면서 대립하게 되었고 삼두의 하나였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 중 치욕적인 패배와 죽음을 당한 것으로 양국간의 적대감이 공고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엔 아르메니아란 완충지대가 있어서 파르티아와 로마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113-117년]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은 제정로마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적극적인 대외활동이고 그 신속성을 보면 통쾌한 느낌마저 주지만 남겨진 기록상으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전하는 문헌이 충분치 못하다고 한다. 대략 서기 111년 정도에는 다키아 정복이 끝나고, 그의 총독에 의한 아라비아의 속주화 역시 마무리 되어가는 단계였으며 이러한 여세를 몰아 드디어 113년 가을에 로마를 떠나 114년 초에 시리아의 안티오크(Antioch)에 도착했다. 이는 이 지역에 네로이래의 50년간 평화와 더불어 유지된 관례를 깨고 파르티아 왕이 자신의 동생을 아르메니아 왕으로 세워 이 지역의 영향력을 강화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왕의 사절의 선물 공세와 강화 요청에 대해 말은 필요없고 합당하다고 자기가 몸소 생각하는 일들을 실행할 것이라고 답하고는 아르메니아로 계속 진군했다. 그 지역의 많은 도시와 소국들을 별다른 전투 없이 복속시켰다. 기번이 말했듯 파르티아인들은 그저 도망가기만 했던 것 같은데 마치 스키타이가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을 상대했던 것과 비슷한 전술을 펼친 것인지도 모른다. 엘레게이아(Elegeia)에서 아르메니아왕 역시 맞서는 것을 포기하고 그를 찾아와 무릎꿇고 직접 왕관을 씌워달라고 요청했다. 트라야누스는 이를 거절하고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땅이고 로마의 속주라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원로원은 옵티무스(Optimus)란 가장 탁월하다는 뜻의 칭호를 수여했다. 니시비스(Nisibis)와 바트나에(Batnae) 를 함락하고 아르메니아를 제패하고 조금 성급한 듯 보이지만 파르티쿠스(Parthicus)란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이곳에 수비대를 둔채 114년 겨울 에데사(Edessa)로 물러났고 이듬해(115년)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다시 겨울에 안티오크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정복 등이 역시 116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물론 이미 정복된 지역의 속주화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티그리스 상류를 건너 지금 이라크 북부의 아르빌이 있는 지역이며 고대 앗시리아의 영역인 아디아베네(Adiabene)를 장악했다. 다시 남쪽으로 바빌론에 이르렀지만 파르티아의 내분 때문인지 좀처럼 저항을 볼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이 한해동안 일어났다. 그리고 어려움 없이 크테시폰(Ctesiphon)에 입성해 파르티쿠스란 칭호를 확립했다. 마지막으로 강을 따라 페르시아만의 대양에 도착했는데 이 때가 그의 활동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점령지는 물론 호시탐탐 독립의 기회를 노리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에 곳곳에 장군들을 보내 진압하고 이들이 로마의 새로운 속주임을 분명히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반란으로 그는 더이상의 동방원정의 꿈을 접고 철수해야 했다. 철수 전에는 자신이 몸소 파르티아의 새로운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그는 결국 파르티아에 의해 축출된다. 그리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 117년에 사망하게된다. 이상의 정복활동에 대한 자료는 믿을 만한 것이 많지 않고 실제로 당시의 발행한 동전들은 이들 기록과 부분적으로는 상충되는 가운데 그런대로 기록의 결핍을 보충해 주고 있다. 여기서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등이 로마의 속주로 되어있어 이 황제의 야심을 짐작케 해준다.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의 최대 영토. 정복된 페르시아 영토 등은 곧 반환된다.

 


이 원정의 동기에 대해서는 당시의 많은 로마인들이 트라야누스 개인의 군사적인 야심 때문이라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사후 황제가 되어서 트라야누스의 새로운 점령지들을 포기하고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했고 역시 트라야누스의 공명심을 비난했다. 이렇게 쉽게 점령지를 포기하는 일은 로마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라고 기번은 말한다. 단지 로마의 풍속이나 기강을 바로잡는 감찰관들은 하드리아누스의 이런 행동이 그의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지역은 자연경계가 없어 방어에 불리했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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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왕조[69-96년]와 유대 문제

 

플라비우스 왕조의 경우는 어떻게 보면 유대로 흥하고 또 한편으로 유대로 인해서 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첫번째인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년]가 무엇보다도 유대전쟁[66~73년] 통에 군권을 장악한 밑천으로 내전에서 승리해 제위에 올랐고 그 아들인 티투스 황제[재위 79-81년] 역시 유대전쟁에 아버지와 함께 참전했다. 그리고 역시 폭군으로 유명한 베스파시아누스의 다른 아들인 도미티아누스[81-96년]는 "기독교 박해자"로 알려져 있다. 기번은 이 시대 유대인 박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짧게 언급한다.


예루살렘 신전(the Temple of Jerusalem)과 로마의 카피톨이 동시에 화염에 소실된 것이 거의 동시라는 것[각주:1]은 다소 놀랍다.전자에 바쳐졌던 공물들이 폭력적인 승리자의 권력으로 후자를 회복하고 화려하게 꾸미도록 전환되었다는 것도 못지 않아 보인다. 황제들은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인 인두세를 거두었다. 그리고 각 개인의 머리에 평가된 액수는 대단치 않을 지라도 계획된 방식이나 거둬들이는 방식은 견딜 수 없는 원성으로 생각되었다.


이것이 바로 네로에서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초기까지 로마인들에게 대항한 유대 전쟁 이후에 행해졌던 플라비우스 왕조의 유대 박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는 사실 이 유대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황제가 될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그리고 전쟁에 관한 업적에서 이 유대전쟁의 비중이 큰 편이다.

일단 이 자리를 빌려 유대전쟁을 전후한 유대의 역사를 살펴보겠다. 원래 유대인들이 대부분의 세월동안 나라없는 백성이었고 노예의 후손들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로마의 개입전에 그들은 헬레니즘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에 의해서 이들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그들은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독립의 기간은 짧았고 그들은 분열되어 있었으며 셀레우코스 조 등의 다른 근방의 왕국들이 그랬듯이 이런 크고작은 내부 세력 다툼에 로마의 개입을 이끌었다. 헤롯은 로마의 도움으로 유대를 지배할 수 있었지만 그 사후에 또 다시 왕국은 분열된다. 아우구스투스 재위 중의 어느 때에는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는데 분명치는 않지만 유대의 장관은 시리아 총독의 관할하에 있으며 주로 해안지역인 카이사리아(Caesarea)에 비교적 소규모 병력만을 데리고 와서 세금 등을 거두고 기타 사법과 행정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칼리굴라 황제 때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인해 헤롯(Herod)의 손자인 아그리파(Agrippa) 1세가 3년간(41~44) 왕으로 있었지만 그의 사후에 다시 총독에게 맡겨졌다. 물론 바로 아그리파가 돌아오기 전에 그 유명한 본데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예수를 사형시켰던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때 본데오 빌라도는 카이사리아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이곳을 방문한 예수를 재판했다. (물론 이 아그리파 재위 전의 시대는 유대통치사 중에서  좀 더 불분명한 시대이다. 예수의 죽음에 로마와 유대인 중 누가 더 책임이 큰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기독교들은 껄끄러웠고 실제로 양쪽에서 박해가 이루어졌다.) 이 즈음에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갈등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면서도 세금이나 자신들의 대우 문제 등이 복잡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유대 총독이 부족한 세금을 보충하러 신전의 공물을 약탈해 갔던 일까지 있었고 로마 지배 후에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한 도시였던 카이사리아에 대하여 그 권리에 대한 자존심 싸움에 로마가 끝내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마침 유대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그리파 2세를 비롯해 많은 유대의 기득권 층은 이 세계제국을 향한 소수민족의 가망없어 보이는 전쟁을 말렸지만, 종교적 열성분자들은 달리 생각했던 것 같다. 디오의 기록을 보면 전쟁을 위해서 이들이 많은 준비를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이 그들의 자부심에 불을 짚혔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물이 없어서 고생한 쪽은 오히려 로마군이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땅굴을 곧곧으로 파서 물을 공급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그리고 전쟁전에 많은 유대의 친로마적 지도층이 테러에 의해 숨졌다. 이미 말했듯이 아우구스투스적 평화기에 이곳은 대병력을 주둔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고 유대 총독이 가진 병력이라야 1-2 코르호스(cohort 대대급 부대)정도 였기에 반란에 대처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재위 거의 마지막 해가 임박한 상태였지만 네로는 이 때 더 이상 이 병력으로의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3개 군단(legion)을 거느리게 해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를 파견한다. 그는 다소 반란에 열성적이지 않았던 갈릴리 지역을 먼저 진압하였는데 이 때 장군으로 와 있던 유대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를 사로 잡았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포로의 몸임에도 당당히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자신이 그에게 황제가 되리라는 예언을 주려고 왔다고 하여 이 장래의  황제 가문의 환심을 사게 되었다. 이것이 서기 67년의 일이다. 그리고 네로의 몰락으로 인한 혼란 통의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정복을 잠시 미루고 로마를 향해 진군해 폭군 비텔리우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다. 그리고 서기 69년 전쟁을 재개한다. 책임자는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쓰지만 후대에 티투스 황제라 불리는 그의 장자이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 포위전을 벌인다. 예루살렘에는 신전을 감싸는 마지막 벽까지 3개의 성벽이 있었는데 차례차례 함락되고 성전마저 불탔는데 유대인의 항전은 끝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된다. 또 성전의 경우 기번은 유대인 자신들이 파괴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아마도 티투스의 명령하에 의도적으로 파괴된 것일 것이라 한다. 어쨌든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전체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유대인들은 끝까지 싸우거나 자결하거나 노예로 팔리거나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근의 몇몇 요새들에서 결사항전이 계혹되어 마사다(Masada)의 함락을 끝으로 거의 서기 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에 로마의 통치방식에 변화가 생겨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커져 1개 군단이 예루살렘에 상주하게 되고, 주민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으며 이 와중에 예루살렘 파괴로 주민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오현제 시대에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중에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최후까지 항전했던 마사다 요새와 독립 선언 후 발행한 동전>



이렇게 유대인과 좋지 못한 관계를 갖게 된 베스파시아누스 가문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전쟁 중에 그들과 이런 저런 인연을 맺게 되어서 그런지 일부의 유대인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요세푸스가 그 궁정에 머무른 일부터 티투스 황제의 경우 전쟁중 로마편이었던 아그리파 2세의 누나와의 연애는 꽤 유명했다고 한다.

기번에 의하면, 이 전쟁과 관련이 없던 도미티아누스 자신도 말년에 유대 문제로 골치를 썩혔다고 한다. 물론 도미티아누스 역시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 전형적인 폭군이다. 그의 삼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Flavius Sabinus)의 두 아들들이 그에게는 근심 거리였다. 티베리우스가 그랬듯 그 중 맏이는 반역죄로 죽이고 조금 나약한 듯한 둘째를 내심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클레멘스(Clemens)를 자신의 질녀인 도미틸라(Domitilla)와 결혼시켜서 경력관리상 집정관까지 시켜주었다. 그런데 이들이 나중에 재판을 받고 각각 사형과 유배형에 쳐해지는데 그 죄목이 종교적인 이유 무신론과 유대교를 믿은 탓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들이 초기 기독교와 관계가 되었던지 이것을 네로의 기독교 박해에 이은 2차박해라고 하게 되었다. 어쩌면 못난 클레멘스가 제위를 계승했으면 로마가 훨씬 일찍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지 모를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도미티아누스는 후대 오현제시대를 지난 코모두스가 그랬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궁정에서 살해된다. 이 때까지 도미티아누스 역시 갖가지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사람들을 탄압하고 박해해 왔다. 유달리 많은 간통죄 처벌에 단지 철학을 연구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제 네르바가 즉위하고 로마에 더 할 수 없는 "행복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 카피톨언덕은 비텔리우스와의 내전 중 69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1차유대전쟁 중 70년에 파괴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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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조

 

앞서 말한대로 기번이 자신의 본격적인 연대기가 시작하는 코모두스 즉위 이전의 일들 즉 아우구스투스 사망 후 부터 코모두스 즉위 까지의 일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특히 오현제 이전의 소위 폭정으로 얼룩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나머지 황제들과 플라비안(Flavian:BC69-BC96) 가문의 통치 기와 그 황제들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것이 아깝다며 그들의 성질을 짧게 특징지웠다. 어둡고도 무자비한 티베리우스(Tiberius), 미쳐날뛰는 칼리귤라(Caligula), 유약한 클라우디우스(Claudius), 방탕하면서도 잔인한 네로(Nero) 이것이 성스러운 아우구스투스의 후손들에 대한 기번의 말이다. 플라비안 가문의 도미티아누스(Domitianus)나 그 중간에 잠시 황제였던 비텔리우스(Vitellius) 역시 짐승같은 위험한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이 통치기의 잠깐을 제외하면 아우구스투스 이후 이 불행한 시기의 로마인들은 이 괴물들의 폭정 밑에서 신음해야 했다.

요즘에는 이들 폭군 중에 티베리우스나 도미티우스의 경우는 통치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업적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는 있다. 네로의 경우도 세네카 등의 보좌를 받았던 그의 통치 전기에 대해서는 그 다지 큰 실정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그들 통치기에 보여주었던 그들의 잔인함 때문에 그들이 폭군이란 치욕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불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 특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이런 광기어린 폭정에 제1인자로서 그들의 불안한 위치도 한 몫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제정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공화정이었고 그렇다고 명확한 황제 계승이 확립된 것도 아니었다. 중국의 장자상속처럼 이에 대한 분쟁을 미리 막는 어느정도의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신성한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다음 후계자는 그의 죽은 동생 쪽으로 계승되도록 미리 정해놓고 죽었다. 즉 티베리우스에게는 이미 아들인 드루수스가 있었지만, 동생 드루수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양자로 되어 그의 후계자여야만 했던 것이라 자신의 아들 쪽이 아닌 곳에서 계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고 티베리우스가 보여줬던 잔인함은 이런 불안과 관계되는 것들이었다. 일본의 속담에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참으로 아우구스투스적 평화기의 로마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사실 그 말도 조그만 마을의 일개 영주의 자식에서 거의 맞설자가 없는 패자로 올라서던 시점에서 자신의 측근의 기습을 받고 사망하게 된 오다 노부나가를 빗댄 말이라 한다. 달리 일본을 통일했던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그의 '천하통일'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와 비슷하게 헛되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14-37년]


즉 동료 시민들을 이제 자신의 신민(臣民)으로 부리게 된 로마 황제에게는 외부에선 이제 맞설 수 있는 적이 없어졌을 것 같지만 도리어 자신과 친한 혈족의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가장 큰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대략 다음과 같은 수순을 통해서 적어도 동생의 집안에 다음 계승권을 넘긴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지는 지킨 셈이지만 그 과정이 너무 처참하다. 그 재위시 첫번째 일은 계승권에서 멀어져 있지만 유일한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인 포스트무스를 죽이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게르마니아 전선을 책임지던 후계자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으로 파견했는데 그가 여기서 죽게 되자 속보이게도 자신의 친아들 드루수스를 승진시킨다. 얼마 못가 이 드루수스 역시 사망하고 이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을이 성년의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이 바로 자신의 철천지 원수였던 아내 율리아가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그리피나의 아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물러나 근위대장을 내세워 이들과의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하지만, 그가 자기 가문에 남긴 것은 참혹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은 이들과 싸움을 벌이는 탓에 그는 그의 어머니인 리비아와도 원수처럼 지냈다. 리비아가 죽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 일들을 보면 아그리피나와 그 장자를 유배 생활 속에 죽게 하고 차남은 팔라티노 언덕 황궁 아래 지하실에 유폐시켜 죽게 했다. 물론 반역의 죄를 받았고 이들 파에 대한 숙청이 교묘하고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결국 세째 아들이었던 칼리굴라만이 살아남아 결혼과 관직 등에서 물론 황제의 감시와 견제를 받고서야 황제 사후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티베리우스는 게멜루스(Gemellus)라는 자신의 유일한 친손자를 황위에 올리는 것을 념두해 두고 추진하기도 했지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쨌든 동생의 집안에 후계를 넘겨야 한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지를 지킨 셈이 되었다.

 

칼리귤라 황제 [재위 37-41년]


칼리귤라의 경우 기번이 말한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할 어린 나이에 갑자기 선왕의 죽음으로 용맹하고 현명함을 갖춘 문무백관들의 절을 받게 된 세습군주제 하의 어린 왕들의 경우라고나 할까.[각주:1] 티베리우스의 배려와 감시 속 어느 곳에서도 황제로서의 자질을 단련할 경력을 쌓지 못했던 그는 처음 폭군에 대한 반발로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돌아간다라는 말로 임기를 시작하며 처음에는 신민들에게 인심을 쓴 듯 했지만 자신의 경쟁자가 될 자신의 친족들에 대해서는 티베리우스와 같은 행적을 쫓아갔다. 처음에는 흔쾌히 게멜루스를 후계자로 인정할 듯 하더니 이내 돌연 죽인다. 그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근위대(praetorian band)의 관리들의 음모에 의해 가족이 몰살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 41-54년]


이 두 사람 재위시의 학살로 이제 황위 계승권자가 없어졌다. 여기서 기번은 이후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원로원에 의한 공화정으로의 복고 노력을 전하고 있다. 이 때 카피톨에 모여서 카이사르들의 기억을 저주하고 집정관이 공화국의 대표인 듯 행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회의하고 있는 그 시간에 클라우디우스 집안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가 근위대 병영안에서 황제로 선출되고 원로원은 결국 자유를 포기하고 근위대의 무력앞에 굴복해 이를 승인했고 그 후로 원로원은 공화정 복귀를 위해 영구히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라 불리는 이 사람이 광기의 두 황제의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록 티베리우스이 조카이자 칼리쿨라의 삼촌 그리고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드루수스의 아들이었음에도 그들보다 비천한 신분으로 계속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카이사르 집안에 인정되지 않은 단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 재위시에도 많은 로마의 명문 집안 후손들이 쓰러져갔다고 한다. 

 

네로 황제 [재위 54-68]


네로가 즉위할 수 있었던 것도 황실의 후손인 그의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개 재가했기 때문이다. 네로 자신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어린 아들 브리타니쿠스 외엔 별로 자신의 경쟁자들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안전하게 근위대 안에서 그들에게 사례금을 주고 어머니와 함께 즉위했다. 하지만 네로는 어머니를 죽였다. 그냥 조용히 정권에서 배제하면 될일을 굳이 사람을 시켜 암살한 것은 그녀 입에서 새어나가서는 안되는 비밀이 역시 있어서 였을까? 어쨌든 이 네로의 잔인성에 대해서는 기번은 1권의 마지막 장에 다른 폭군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기록해 놓았다. 물론 타키투스를 인용해서이다. 여기서 이 공화파편에 선 역사가가 이 시대의 역사(아우구스투 사후에서 네로 몰락까지)를 쓰게 되었는지의 이유에 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타키투스의 목적은 역시 이들 영원히 치욕으로 기록될 폭군들을 기록하는 것이 후세에 더욱 교훈이 되리라고 보았겠지만 어쨌든 그는 <아그리콜라>와 <게르마니카>를 시범적으로 쓴 후 네로 몰락에서 네르바 즉위까지 중에 고민하다가 이전 시기를 자신의 <연대기>의 주제로 정했다고 한다. 타키투스가 이렇게 자유롭게 역사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도미티아누스란 폭군이 사망하고 오현제 시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대사를 쓰기가 아직 살아있는 유력자들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러한 탓도 그가 좀 더 이른시기를 다룬 역사를 쓴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아무튼 훗날 바티칸이 세워질 이 세계의 수도 앞에서 벌어졌던 살육극 인간도살의 현장에 대한 타키투스의 묘사가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어쨌든 이들의 폭정으로 네로 이후에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은 더 이상 황제를 배출하지 못했다.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갈바를 맞아들였으며 제정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네로 모자를 새긴 동전>

 

 

  1. 마이클 그랜트의 <로마황제들>에서는 그가 웅변에는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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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유언장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후계자에게 죽어가면서 남긴 것 상속한 것은 단순히 제위(帝位)나 재산(財産)만이 아니었다. 디오(Dion Cassius)는 아우구투스가 죽었을 때 벌어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베스타 처녀들에게 보관됐던 그의 유지(遺旨)를 드루수스(Drusus,티베리우스의 아들)가 그녀들로 부터 받아 원로원(senate)으로 운반했다. 그 문서를 입회한 자들은 봉인을 조사했다. 그리고 원로원에서 청취되었다. 황실의 해방노예인 폴리비오스(Polybius) 그의 유지(遺旨)를 읽었고 그 때에는 그에 관한 어떤 것에 대해 원로원 의원이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유산의 3분의 2는 티베리우스에게 나머지는 리비아(Livia,아우구스투스의 부인)에게 남겨준다는 것이 알려졌다. 적어도 이에 대한 한 보고가 아래와 같다.그는 그녀가 그의 재산을 완전히 누리게 하기 위하여  원로원에 법이 허용하는 이상으로 너무 많이 남기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었던 것이다. 이 둘이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또한 많은 돈을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것을 지시했는데 친척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 계급들은 물론 왕들도 있었다. 민중들에게 4천만 세스테르세스(sesterces)를 남녔다.  시민 병사들의 나머지에겐 사람당 300 씩 남겼다. 게다가, 아이들이 아직 어려 아버지가 상속인이 되어야하는 경우도 이자까지 합해 장성한 후 지급되도록 했다. 이것은 사실 살아있을 때도 그의 방식이었다. 그가 자식을 가진 누구의 재산을 상속할 때는 장성하기만 하면 그 후라도 그 사람 아이들에게 모두 돌려주는데 결코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남의 자식들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고도 자기 딸을 유배에서 풀어주지는 않았다. 물론 선물을 받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녀가 그 자신의 무덤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명했다. 그의 뜻은 이처럼 명확했다. 4권의 책들이 배달되어 드루수스가 읽어나갔다. 첫째에는 그의 장례식에 관한 상세한 지시가 씌어졌다. 둘째엔 그가 수행한 모든 업적을 기록했는데 이것을 청동 기둥에 새겨 그의 신전에 세우라 명했다. 세째에는 군사적 문제, 세수(稅收), 공공 지출, 국고 등의 제국 행정에 관해 명심할 것들이 담겨졌다. 네번째는 티베리우스와 대중들에게 하는 권고와 명령이었다. 그 권고중에 하나는 너무 많은 노예를 풀어주어 도시를 난잡한 자들로 채우지 말것과 또한 너무 많은 수를 시민으로 등록해서 속국민과 그들 자신사이의 뚜렸한 차별을 두라고 했다. 그는 그들에게 공적 사업을 이해와 실행 양쪽에 능력있는 모든이에게 맡길 것과 어떤 한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것을 타일렀다. 이렇게되면 누구도 폭정(tyranny)을 꿈꾸지 않고 한 사람의 실패가 국가를 파멸시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충고하기를 현재의 소유에 만족하고 절대 제국을 더 이상 크게 늘리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말하길 지키기는 힘들고 지금까지 얻은 것도 잃을 위험에 빠진다고 했다. 이 원리는 그 자신이 말 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따랐던 것이다. 아무튼 그는 야만 세계로 부터 많은 것을 얻어냈으나 그리 하길 바랬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의 권고였다.


첫 부분은 그의 유산 처리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뒤의 부분 특히 그의 유언집 중의 제4권은 앞으로의 제국 통치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로마가 창건된 후 7세기 이상을 지속해온 대외 팽창에 대한 문제에 대해 단호히 이것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 후 다른 황제에게도 계승이 되어 이후 팍스 로마나(Pax Roman)의 시대가 2세기간 지속된다.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마련한 이러한 세심한 배려 속에서 평화속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로마 국경: 온건정책?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간에도 그 이후에도 이러한 평화가 거져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그가 유지해야 할 제국의 경계는 자연이 그들에게 영원히 부여한 서쪽의 대서양과 북쪽의 라인-다뉴브 선(線), 동쪽의 유프라테스강과 남쪽의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의 사막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확립한 후로도 비록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확보했지만 이 국경지대 진출과 안정적 지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더 필요했다.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를 사이에 놓고 파르티아와 항상 긴장 상태에 있었다. 한때 안토니우스에게 주권을 빼앗겼던 아르메니아가 다시 내전 중에 떨어져 나갔지만 장성한 티베리우스가 이 일을 훌륭하게 처리한다. 아르메니아의 왕위다툼에 개입해서 로마에서 자란 왕제를 세우고 나아가 제1차 삼두정 때 크라수스의 패배이래 미루어 왔던 파르티아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했다. 그들에게서 크라수스 전쟁 때의 포로들을 돌려받는데 만족했다. 이 후 아르메니아가 다시 파르티아의 영향하에 들어갔는데 후계자로 촉망받던 그의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비슷한 임무로 파견되었다가 결국 로마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연도 있었다.

일리리아(다뉴브) 국경의 확보 문제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처음 이 문제에 대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양팔이라고 할 수 있는 티베리우스-드루수스 형제가 본격적으로 활약을 펼치게 된다. 기원전 15년에 두 형제가 알프스 근처의 라에티아를 평정한다. 그리고 기원전 12년에는 두 형제가 나란히 일리리아와 게르마니아 국경의 추가 확장을 위해 전장으로 떠난다. 로마로 그들의 승전 소식이 날마다 전해져 온통 축제 분위기이나 실제 성과는 그렇게 좋지 만도 않았다. 라인을 넘어 엘베강을 목표로 떠났던 드루수스는 한 때 그곳 까지 진출하였다고 전해지고 귀환하던 중에 낙마 사고로 숨지는데 이 때가 기원전 9년이었다. 그 후에는 게르마니아전선의 책임을 티베리우스와 죽은 드루수의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떠 맡게 되는데 대체로 기원 후 9년에 로마 장군 바루스(Varus) 군단의 궤멸로 라인강으로 후퇴하고 이후 별다른 확장 노력을 중단하게 되나 이곳은 갈리아 방어의 가장 중요한 위치인 만큼 상하의 두개 게르마니아로 나누어 각각 4개 군단을 상주시키게 된다. 다뉴브 선 확보 역시 그리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티베리우스의 원정으로 노리쿰과 판노니아가 복속된 듯했지만 서기 6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켜 다시 굴복시켜서 가까스로 다뉴브-라인 국경이 확보되었고 여기에도 어김없이 수비대를 진주시켰다.

그 밖에 아우구스투스의 장군들 중에서 이른 시기에 아라비아와 에디오피아 정복을 목표로 진군하기도 했었지만 더위와 갈증으로 철수 했다. 대체로 이곳은 인도양으로의 무역로를 확보하는 목적이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곳의 지배자가 로마와 우호를 맺고 이 곳의 통과를 허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아시아와 그 이남의 지역에 대해서는 로마의 영향하에 있지만 아직도 속주화되지 않은 지역들이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비우고 오랜 동안 갈리아로 갔을 때는 브리튼을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브리튼 역시 로마의 영역 밖에 남겨졌었다. 이것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국경 상황이다.

기번이 말하길 이후로는 그의 이 소중한 상속 재산으로서의 온건 정책(moderate system)은 비록 그 후계자들의 무능함과 두려움 때문이지만 대체로 잘 지켜졌다고 한다.[각주:1] 단 두 번의 예외가 있다면 오늘날의 영국인 브리튼과 다키아 속주에 대한 것이다. 브리튼 정복은 비교적 늦게 그것도 천천히 그것도 섬전체가 아닌 일부만의 정복에 그쳤다. 클라디우스 황제 시절에 그 아들이 브리타니쿠스라고 불린 것으로 보듯이 이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도미티아누스 시절에 아그리콜라(Agricola)란 장군이 스코틀랜드 깊숙히 까지 제패했다고 한다. 유명한 역사가 타키투스의 장인이기도 한 이 장군의 소환 후 은퇴와 죽음에 그 후 폭군인 도미티아누스의 질투가 개입된 것으로 생각했다.[각주:2] 당시 황실의 일원이 아니면 개선식을 거행될 수 없을 만큼 추가적 정복사업 및 눈에 띄는 군사활동은 어려웠다.[각주:3] 그후로 제국의 경계는 스코틀랜드를 배제하고 안토니누스 장벽과 그 보다 후퇴한 하드리아누스의 장벽으로 내려온다.


브리튼 정복이 라인-다뉴브 선과는 무관한 어쩌면 당연한 "예외"라면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달성된 다키아 정복과 속주화는 유일하게 아우구스투스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군사적인 명성을 원했던 야심가 였던 이 황제는 파르티아 깊숙히 쳐들어 가 메소포타미아나 아시리아까지 속주화 시켰지만 다음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가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물론 평화시에도 로마인은 전쟁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군단들은 각 속주에 배치되어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부터 제국을 지켰다. 비록 공화정 말기 보다 군단 수를 줄이기는 했지만 그 만큼 이들 군단병들의 봉급과 그들의 은퇴를 위해 새로운 세금들이 로마시민들에게 부과되었다. 이들이 제공하는 평화 안에서 로마는 유래없이 번영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 파편>

 

 

 

 

 

  1. 그러나, 실상 로마의 국경정책을 소극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단순히 영토확장은 로마의 국익과 관련된 일종의 타협일뿐, 로마의 군사행동은 국경 밖 야만인들에 대한 분리 지배를 위한 적극적 행동이었다. [본문으로]
  2.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함. [본문으로]
  3. 장군들은 황실멤버들 아래에서 ornamenta triumphalia 란 영예를 받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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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의 성립: 원수정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의 세번째 장(章) 부터는 본격적인 연대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3장의 경우 연대기의 시작에서 단지 아우구스투스에서 오현제 말기까지의 200년의 기간을 한 장(章)으로 압축해 놓은 데서 생기는 다소 세밀하지 않은 기술도 문제지만, 제정 성립에 대해 요즘의 사가들 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 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면서 중요한 부분은 역시 아우구스투스가 일으킨 제도상의 변화 즉 제정의 성립 과정에 관한 것이다. 흔히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를 꺽은 순간 부터 제정이 시작되었고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형식상)는 정말로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군주)였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역사가 마다의 설명이 제각각이다.

제정 시기 로마인들의 글을 읽다가 보면 아주 늦은 시기 까지도 자신들의 나라를 공화국(Republic)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놀란다. 게다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로도 공화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Consul)이 계속 존재했었으며 로마 제국 시절을 통해서도 아주 혼란한 몇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집정관이 있었다. 집정관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이제 더이상 국가원수로서는 아니지만, 형식상으로나마 로마가 공화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쨌든 아우구스투스 이후 부터 실질적으로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국사가 수행되는 군주정(monarchy)이었다는 점을 뒤집을 수는 없다. 여기서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제스티(Res Gestae Divi Augusti,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에서 단 한 차례도 자신을 후대 로마 군주의 대명사인 황제(imperator)라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6번째(B.C. 28)와 7번째(B.C. 27) 집정관직에서 "나는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국가를 돌려주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 당시 삼두정(triumvirate)이란 과도적 체제를 다시 내란 종료 후엔 원래의 체제인 공화정으로 복귀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에 로마는 분명 형식상으로는 공화정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분명히 실질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 일인이 지배하는 군주제 국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제 즉 임페라토르가 제정로마의 군주에 대한 호칭이 된 것은 분명 그 후대의 일이라 한다. 여기서 그렇다면 도대체 아우구스투스가 무슨 제도적 근거와 권위로 로마의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마치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경우라고나 할까? 과연 아우구스투스는 어떤 속임수를 쓴 것일까 하는 문제가 아우구스투스의 첫 제정 확립과정에서 기번이 주로 다루는 관심사로 생각이 된다. 물론, 그 이후로도 여기에 대한 많은 학자들이 다투어 의견을 내놓아 현재는 이 제정 초기의 정체(政體)를 원수정(元首政, Principate)이라 하여 후대의 더욱 전제화되는 시기와 구별하고 있다.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

 
실제로 아우구스투스의 지위에 관해서 악티움 후 그가 죽을 때까지 여러 차례의 변화가 있어서 과연 정말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였는지도 의심할 만하지만 황제가 되었다면 언제 부터 그러했는지도 확정할 수는 없다. 기번도  아래는 기번이 설명과 미흡한 부분은 내가 보충해서 그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먼저 옥타비아누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가 실제로 패권을 장악한 악티움의 승리는 기원전 31년에 있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멸망시킨 것은 기원전 30년 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 때들을 각기 그가 황제가 된 시점이라고 말하지만, 그간의 일련의 제도적 변화 속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위상을 보면 달리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승리 후에도 그는 한동안 귀국을 미루고 있었으며 이 때 원로원에서 당시 개선장군이란 의미의 임페라토르(Imperator)란 호칭을 그의 첫번째 이름  프라이노멘으로 영구히 사용할 수 있게한다는 결의를 했다. 후에 황제의 의미를 가진 이 칭호의 사용은 이전(공화정 시기 다른 사람)에도 있었고 아직 황제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 후 기원전 29년 8월에 귀국하는데 개선식에서 그의 조카와 양자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나란히 전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런데 기원전 28년에 여러가지 공화국으로서의 다소 비정상적인 관행들 특히 삼두정치 시절의 것들을 폐지하는 일을 하면서 마치 삼두정이 한번 더 갱신이 되어 28년 년말까지 유효한듯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특히 이 해가 27년의 큰 변화에 준비기였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아마 자기 구미에 맞는 순종적인 원로원을 원해서 그랬겠지만 원로원 의원의 명단을 심사해서 그 정원을 줄여버렸다. 이 리스트의 첫번째가 되므로 그는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가 된다. 훗날 그의 원수정에 대한 호칭이라고 불리는 프린켑스 키비타티스(Princeps Civitatis)의 경우는 공식적인 호칭은 아니라고 한다. 27년에는 바로 기번이 말한 교활한 황제가 연출한 코미디가 있었던 해이다. 그 코미디는 이 해에 그가 원로원에서 행한 모든 고대의 권리들을 원로원과 민중에게 회복시킨다는 연설로 시작한다. 그리고 원로원으로 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사흘 뒤에 받는다. 이 때 원로원이 보상차원에서 했던 양보 중에 10년 임기의 프로콘술 권한의 양도가 있는데 이들 속주들이 군사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어 선전포고 강화 등의 권한 등을 독립적으로 가져서 사실상의 왕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황제가 되는 첫걸음을 내딛은 것인 것 같다. 물론 일부의 속주를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원로원에게 돌려주어 황제속주와 원로원속주의 구분이 생긴다. 이 후에도 아우구스투스의 제도적인 지위는 각기 변하고 특히 그의 권한들이 5년 내지 10년 단위로 원로원에서 갱신(이 또한 코미디의 하나지만)되어서 그 때마다 조금씩 체제에 변화가 있었다.  후계자로 생각했던 조카 마르켈루스가 사망한 기원전 23년 역시 또 한번의 큰 조정을 거친다. 여기서 그는 콘술직을 사임하고 호민관 특권을 갖고 통치하게 된다. 그 밖에 레피두스가 죽고는 최고사제의 직위도 물려 받는 등 다소의 위상의 변화가 있지만 대략 이상의 과정을 거쳤다. 이들 시기 중에 과연 언제를 제정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까? 어쨋든 제정의 확립과정은 이런 순서를 통해서 점점 확고하게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기번의 경우 후대에 임페라토르라는 칭호에서 로마의 장군이 가졌던 자기 휘하의 병사들에 대한 전제적 속성의 무제한적 권한을 로마라는 국가에 대해 획득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대개 이런 권한은 군사적인 성격과 민간적인 성격을 함께 결합한 것으로서  이러한 정부형태야 말로 기번이 말하기를 민중에게는 시민적 자유라는 이미지로 한편으로 군대에는 시민정부라는 이미지로 기만하는 아우구스투스의 속임수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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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관용

 

쇠망사의 1-2장의 경우, 로마의 경제 상황이나 사회  문화 등을 기번이 주로 다루는 정치사 이외의 주제들을 조금씩 모아서 한 장으로 엮었고, 2장에서 로마의 경제나 인프라 같은 이 장의 몇몇 하위의 소주제들 이외에 기번이 강조하고 싶었던 본주제를 찾자면 역시 로마가 가졌던 관용의 정신(spirit of toleration)과 로마의 번영 속에 잠재된 쇠락의 조짐이라고 보여진다. 

물론 이 관용에는 여러 민족들에 대한 종교적인 관용도 들어가며, 가장 대표적인 성취는 초기에 로마인들만 배타적으로 누리던 권리들이 차츰 로마제국내의 모든 주민들에게로 확대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 관용에 관해서라면, 시오노 나나미가 인용한 오현제 시대 대표적 웅변가 아리스티데스의  <로마에 바치는 송가(To Rome)>[각주:1]란 연설이 당시 로마인이 가졌던 "관용의 정신"을 기번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가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시대" 였던 오현제 시대에 행했다는 연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제는 나 같은 그리스인도, 아니 다른 어느 민족도,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시민권 소유자라는 것만으로 충분해졌다. 아니, 구태여 로마 시민일 필요도 없다. 로마의 패권 아래서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자유와 안전이 보장된다...당신들 로마인은 ...제국 전역의 안전을 위한 방위체제를 확립하고, 인종과 민족이 달라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법률을 정비했다. 이런 모든 일을 통하여 당신들 로마인은 로마 시민이 아닌 자에게도 질서 있고 안정된 사회에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로마 세계는 마침내 광대한 지역에서 민주적인 통치체제를 실현했다. 그것은 과거의 그리스 도시국가를 확대한 것이라 해도 좋다...그들의 출신지는 모든 속주에 골고루 퍼져 있기 때문에, 제국 전역에서 모인 인재들이 제국 전역을 통치하는 셈이다

그들은 모두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태어났거나 나중에 시민권을 부여 받은 사람들인데, 광대한 로마 제국이 순조롭게 통치된 것은 그들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났고, 행정과 군사가 완전히 조직화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제국을 대표하는 인물과 조직이 서로 원할 하게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제국 통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로마는 만인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래서 다민족·다문화·다종교가 공생하는 로마 세계는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각 분야에서 제각기 맡은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공통된 축제일에는 황제가 주최하는 제의가 거행되지만, 민족이나 종교에 따라 제각기 고유한 제의도 거행되고 있었다. 이는 각자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엄성과 정의를 유지하고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로마는 누구한테나 통하는 법률을 마련하여, 인종과 민족이 다르고 문화와 종교를 공유하지 않아도 법을 중심으로 공존공영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생활방식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익이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의 패배자한테도 많은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이 로마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집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로마 제국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임을 날마다 깨우쳐주는 하나의 커다란 집이다.


이 연설이 당시 로마가 추구하던 이상이 무엇이었는지는 보여주는 것 같다. 로마제국에 노예라는 최후까지도 평등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계층이 있었다는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 실제는 이상과 괴리가 많았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시민권 확대

시민권 확대 즉 로마제국내 주민들의 평등의 실현에 대해 기번은 간략히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로마 제국의 초기 상태 즉 "행복한 시대"에 까지도 이탈리아인(Italian)과 속주민(provincial) 사이의 차별이 존재했다. 이탈리아인 만이 태생적으로 로마 시민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세금 등에서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의 차별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황제나 원로원의 자격으로 이탈리아의 태생이나 적어도 거주를 요구했다. 물론 이 이탈리아의 이런 권리 역시 공화국 시기 동맹시 전쟁을 거치면서 쟁취된 것이다. 이탈리아 이외의 지역이라고 해서 모두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로마에 뚜렷한 공헌을 한 사람(예를 들어 로마 군단에 종군했던 사람)은 그가 누구라도 당연히 로마 시민의 권리를 누린다. 마찬가지로 로마의 확장과정에서 이탈리아 밖에 설치되었던 식민지(colony)의 주민-이들은 대부분 모국에서 이주된 것이지만은 역시 로마인과 동등한 권리와 영예를 누렸다. 로마가 설치한 식민지는 아니더라도 로마의 발전 성장 과정에서 일정한 기여를 한 도시는 자치 도시(municipal city)가 되어 이 보다는 약간 온전하지 않은 소위 라티움(Latium)의 권리 혹은 라틴시민권[각주:2]이라는 제한된 권리를 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치 도시역시 식민지의 지위를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나중에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자치 도시와 식민 도시 중의 더 유리한 쪽이 어디인지에 대한 논쟁마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로마 제국내의 모든 자유인이 로마 시민이 되었던 것은 카라칼라(Caracalla) 황제 때였는데 이것은 세금의 인상으로 인해 황제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고 폄하되기도 한다. 황제 재위시에는 유명무실한 시민 자격 획득이었으니 분명 황제의 업적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황제 몰락 후에 시민권은 계속 유지되고 인상된 세율 등은 다시 회복되었다. 이런 관용의 확대 과정에서도 여전히 비참한 상태로 남았던 사람들은 노예들이었다고 한다. 물론 로마는 초기 부터 이들이 대부분  주인에 의해 해방되는 예가 많았지만 노예제도 자체는 유지되었다. 그들에 대해서도 역시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시대의 칙령에 의해 주인 임의의 생사여탈을 금지하는 등 일정한 진전이 있었다. 불행히도 기번은 이들의 수가 전체 로마 경내 인구의 반 자유민과 같은 수나 된다고 추측하고 있지만, 요즘의 연구는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기번은 이러한 관용의 확대가 로마에 한 기여를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그는 동시대의 그리스 도시 국가 쇠퇴[각주:3]와 도시 국가 로마의 발전 및 팽창은 이러한 관용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관용이 없었다면 일곱 언덕의 작은 도시는 카토 같은 애국자, 마리우스나 키케로 같은 인물들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쇠퇴

기번은 마지막으로 같은 시대의 쇠퇴의 징후도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용기와 천재성의 쇠퇴를 이 시대의 경향이라고 한다. 특히 용기의 쇠퇴는 문자의 보급과도 관계가 되는데 라인이나 다뉴브의 국경까지 문자와 문학을 애호하는 주민들이 생겨났으며 이런 용기의 감소는 자연히 그가 제 1장에서 그렇게도 찬양한 로마의 군사적인 정신을 약화시켜 로마의 방위를 시민 자신들이 아닌 용병이나 야만인들에게 맡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지성화 로마화가 문화의 수준을 높여주지 않았다. 속주민들은 자신의 말로 자신들의 사상을 과감하게 표현하던 사람들과 제대로 경쟁하지 못하고 노예성과 모방만을 조장하는 시대 분위기는 더욱더 후대의 사람들을 위대한 고대인들의 아류들로 만들었을 뿐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로마가 번영한 원인인 관용이 도리어 쇠퇴의 징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1.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1: 종말의 시작>에 소개되었는데 필자는 아직까지 전체 원문이나 번역문을 찾아내지 못했다. 예를 들어 http://coursesa.matrix.msu.edu/~fisher/hst205/readings/RomanOration.html 에 나온 글도 생략이 있고 시오노와 한국어 역자가 번역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본문으로]
  2. 본래는 로마의 팽창과정에서 라틴인에 대한 특권을 인정하된 완전한 로마시민권 보다는 제한된 권리를 누렸다. 이후로는 이 2등의 시민권이란 의미로 쓰였다. [본문으로]
  3.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법은 시민권의 자격을 부모 모두 아테네 시민이어야 한다고 했다. 외국인과 노예는 당연히 여기서 배제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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