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3세기 문턱에서

 

세베루스 왕조 이후 로마에 대해 기번은 이렇게 말한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재위시에서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시기까지 로마의 적들은 자기 가슴 안에 있었다. 즉 폭군과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번영은 라인(Rhine)과 유프라테스(Euphrates) 상에 일어날 수 있는 혁명들에는 아주 우원하고 미미한 이해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군사적인 질서가 험한 무정부상태속에서 군주의 권력과 원로원의 법률과 부대내의 기율마저 무너뜨렸을 때 북쪽과 동쪽의 야만인이 국경을 맴돌다 대담하게 쇠퇴하는 군주국의 속주들을 공격했다.

 

이제 그 나마 로마 내부에서 목격했던 눈쌀 찌푸리는 사태들은 행복한 시대로 향수할 만했다. 이제는 군사적인 힘에서도 로마는 외부의 도전을 받아야 했다. 물론 그 적은 북쪽과 동쪽에서의 혁명적 사태에 의해 발단되었다. 그 첫번째는 동방에서 파르티아(Partia)를 대치한 사산조 페르시아(Sassanid Persia)의 흥기였다. 두번째는 게르만족의 재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쇠락하는 왕조를 끊임없이 위협하면서 로마멸망의 주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미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시절에 그들과 어쩔 수 없는 숙명의 대결을 시작한다. 우선 페르시아가 그의 재위시에 탄생한다.

 

사산조 창업

 

기번이 말하는 창업과정은 이러하다. 이 왕조의 창시자는 아르다시드(Ardashir) 또는 라틴어화된 말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ares)로 파르티아의 마지막 군주인 아르타반의 군대에서 명성을 쌓은 것이 왕의 질투를 받아 추방되었다가 파르티아로 부터 페르시아를 해방시킬 군대를 이끌고 아르타반과 세번의 전투를 치른 끝에 그 마지막 전투에서 그를 죽이고 그리고 아르사케스 왕가와 파르티아를 복속시키고 왕중왕(King of King) 즉 샤안샤(Shahan Shah)의 칭호를 거머쥔 후 고대 페르시아의 영광을 재현할 정복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따라서 재위말년의 알렉산더 세베루스와 외교와 전쟁 양면에서 격돌하게 된다.

 

아르다시드는 비문에서 확인되는데 그의 아버지는 파팍(Papak)이라고 하며 사산가문에서 기원한 것은 맞지만 그의 출자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바가 많아 그의 부모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고[각주:1], 특히 서양측에 전해지고 기번이 썼던 것 처럼 그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Achaemenes Persia)의 후손이며 그 고토를 회복하고 파르티아로부터 페르시아를 해방하려 했다는 것은 이란 쪽이나 그 자신의 전승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라 한다. 하지만 페르시아적인 전통이 부활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왕조의 특징은 전의 파르티아의 느슨한 봉건제적 국가를 보다 중앙집권화 한 것이다. 기번이 서술한 아르다시드의 조로아스터교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기번에 따르면 다소 과장된 말이겠으나 그는 모든 제국 관할 속주들을 강한 군대와 함께 방문하고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서는 왕의 칭호를 빼앗고 민중과 자신사이의 모든 중간 세력들을 제거했다고 한다.[각주:2]

 

그리고 외부세계에 새롭게 일어난 자신의 힘을 알리는데도 성공했다. 주변 세력중 인도와 스키티아에 대해서는 쉬운 승리를 거두었는데 남은 것은 로마였다. 여기서 잠깐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 이후의 로마와 파르티아 관계를 살펴보면, 그 후 처음 40년간은 평화가 계속되었다. 마르쿠스 황제 때 165년 크테시폰과 셀레우키아의 중요한 도시를 함락하고 나아가 셀레우키아를 완전히 파괴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파르티아가 멸망하기전에 216년 오스로에네(Osroene)를 빼앗아 속주화시킨다. 헤로디안에 의하면 새 왕중왕이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지배영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로마에 도전했고 이에 대해 외교적으로 알렉산더가 주의를 주었으나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고 한다.


 

 

 

 

새롭게 로마에 병합된 오스로에네 속주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동방원정

 

그후,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동방 원정에 나서는데 그 기록이 엇갈린다. 표면적으로 알렉산더는 전쟁을 마치고 귀환한 후 메소포타미아 정복에 대한 성대한 개선식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선식은 이런 점들을 은폐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선 가는 곳마다 적지 않은 군대의 반란이 있었다는 점이 그 하나였고 이런 불복종에는 마마보이라는 비난을 받게 하는 그의 모든 덕성에서 오는 신뢰감을 빼앗는 그의 유약함에 도 일정한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3방향에서 페르시아를 침략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첫 군단들은 아르메니아를 뚫게하고 두번째는 적의 동쪽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의 늪지로 마지막은 자신이 지휘하여 중앙으로 뚫고 가려고 했다. 계획자체는 그의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훌륭한 것이었지만 운이 좋지 않아 동쪽 군단이 너무 빠르게 진군하다가 수적 우위에 있는 페르시아군에게 완전히 궤멸되었고 이것은 가장 강한 군대를 이끌고도 어머니의 간섭때문에 우물쭈물하여 진격이 늦은 알렉산더의 우유부단때문이라고도 한다. 알렉산더는 동방의 수도인 안티오크로 철수했고 그곳에서 다시 원정을 재개하려다 게르만 족이 소동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돌아온다. 어쨌든 더이상의 페르시아왕의 영토확장 야망을 꺾었던 것으로 보아서 원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 무승부였었다. 훗날 아르다시드의 후계자인 샤푸르에게 로마와 발레리아누스 황제 등이 겪게 되는 치욕에 비한다면 차라리 알렉산더의 일은 "선방(善防)"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캠브리지 고대사 [본문으로]
  2. <캠브리지 이란사>에 의하면 사산가문의 (지방) 통치자들과 왕들은 필요와 정책에 따라 영지를 바꾸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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