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도, 자기 노래에 대한 자부심을 감출 수 없었던 그는 네로제(Neronia)라는 축제가 그들의 귀환 전에 기념되도록 명했다. '그의 천상의 목소리'를 듣기를 애원하게 되자, "원하는 사람은 정원에서 내가 답하겠노라"고 알렸다. 그러나, 근위대의 병사들이 민중의 목소리에 맞장구치자 즉시 요구를 들어줄 것을 진심으로 약속하였다. 그는 즉시 그의 이름이 경연에 참가하는 음악가들 명단에 들어가게 명하고, 단지에 그의 제비를 던저 자기 순서에 하프를 든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의 장관들과 천부장들 그리고 여러 친구들의 수행을 받으며 나아갔다. 그의 자리에서 통상의 사전연설을 한 후, 집정관급의 인사인 클루비우스 루푸스(Cluvius Rufus)를 통해 "니오베(Niobe)의 이야기"라는 곡을 부르겠다고 알렸다. 이것을 오후 넘겨 오랫동안 계속되게 하고 그가 더 잦은 공연을 하도록 남은 경연들은 다음해로 미루게 했다. 그러나, 너무 길어지자 그 사이에 공공 경연자로 나서고 싶은 것도 억누르지 못했다. 민중을 위해 연 황제주최가 아닌 사설 대무대들에서는데 꺼리낌이 없었고 법무관 한 사람은 이런 봉사로 백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가면을 쓰고 비가를 불렀다. 영웅들과 신들의 가면은 여신들과 여자영웅들의 것과 더불어 그와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을 닮게만들어졌다. 나머지로, "시련 중의 카나케(Canace in Labour)", "존속살해자 오레스테스(Orestes the Murderer of his Mother)," "눈먼 오이디푸스(Oedipus Blinded)",  "미친 헤라클레스(Hercules Mad)"를 불렀다. 마지막 비극에서 무대 입구의 젊은 보초병이 대본대로 죄수복에 족쇄를 찬 그를 보고 구하러 달려가기도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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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Cornelius Scipio)가 스페인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많은 전투를 통해 카르타고군을 무찔러 몰아냈을 뿐 아니라 그곳의 여러 민족들에게도 승리해 화려한 전리품을 위대한 도시들에서 취했다. 따라서, 로마로의 귀환에서 그는 유래없는 인기와 명성을 누리며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 민중이 자기에게 위대한 성취를 요구하고 바란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한니발과 이탈리아에서 손수 싸운다는 것을 시대착오적 잘못된 정책으로 생각하고는 아프리카와 카르타고 영토로 로마군을 싣고가서 약탈하고 그를 유인할 제안했다. 그는 온 정성으로 민중에게 이 생각을 설명했다. 그러나, 여기서 파비우스(Fabius)는 이 계획에 대해 시민들사이에 두려움을 심어주려 했다. 그의 말로는 시민들이 바보청년의 인도에 최고의 위험으로 돌진하고 있었으며 그런데도 자신은 이 계획을 단념시킬 말이나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다. 원로원에 자기 생각을 제출하였지만 민중들은 그의 성공을 질투하는 것이라 일축했다. 그들은 스키피오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전쟁을 끝내고 그들을 이탈리아에서 일소하면 자신이 전쟁을 끝내지 못했던 점으로 인해 겁장이면서 꾸물거려 전쟁을 망친 평가를 받을까 두려워 한다는 것이었다.

위험에 대한 우려에서 최대한 주의함에서 반대를 시작했을 법하지만 그는 점점 무분별했고 경쟁심과 야망에 눈이 멀어졌다. 스키피오의 떠오르는 영향력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스키피오의 동료집정관 크라수스(Crassus)를 설득해 제안이 받아들여지더라도 군대지휘권을 양보치 말고 직접 카르타고로 가라고 까지 했다. 전비승인까지도 그는 방해했다. 따라서 돈문제에 관해 에트루리아의 도시에서 스키피오는 사비로 지지자들에게서 모았다. 크라수스는 스키피오와 경쟁하고 싶은 천성은 아니었고 최고대사제(pontifex maximus) 역을 위해 이탈리아에 남았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파비우스>,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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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을 상대로 방어를 최선의 전술로 지구전을 벌여 로마와 동맹을 지켰던 일로 훗날 '페이비언주의'라는 말까지 만들어내게 했던 파비우스 막시무스, 그는 전쟁에서 그를 겁장이라고 비난하는 경솔한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목숨을 여러차례 구했고 마침내 그의 정책은 서서히 효과를 나타냈고 로마인들로부터 감사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런 그도 정작 스키피오란 새로운 영웅의 등장 앞에서는 현명한 예지력을 보이지도 어려울 때 화합단결하는 로마인의 미덕도 보여주지 못한 채 한니발의 패배를 지켜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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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치적 차이들이 완전히 축출되고 아테네시는 평온해져 통일된 것을 보자,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와 아테네인에게 관한한 모든 문제들-각국의 공헌금, 육군, 군함, 도서문제, 해양, 헬라스에서 모은 강력한 힘, 종속국들에 대한 패권, 왕가들과의 친교 및 동맹-를 자신의 손에 넣었다. 

이제는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민중의 말에 굴종적이거나 키잡이가 바람에 대해 그러는 것처럼 그들의 욕망을 받아주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전까지의 민주주의와 민중을 부드럽게 설득하듯 다루는 것을 버리고, 귀족정이나 군주정을 채용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모두에게 최고의 이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민중을 대부분 설득과 지시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을 때 그는 고삐를 조이며 강제로 그들을 이끌었다. 현명한 의사가 오래고 복잡한 질병을 다루면서 자기의 환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맘대로 하게 하지만 때로는 쓰디쓴 처방을 병행하는 것과 같다.  

온갖 병리들이 이렇게 광대한 제국을 이룬 난봉꾼들 사이에 만연하는 동안에도, 그 혼자만이 선천적 재능을 부여받아 각 업무를 적당하게 처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민중의 희망과 두려움을 이용해 그들이 자만할 때는 이를 제어하고 절망할 때는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수사학 연설술이 플라톤식으로 '영혼의 마법'임과 그의 주요 업무가 사랑과 열정에 대한 주의깊은 연구임을 증명하였다. 이는 마치 영혼이란 현의 울림과 같아 현명하고 기교있는 연주술을 요하는 것이다. 그가 성공한 이유는 단순히 연설가로서의 능력만이 아니라 투퀴디데스(Thucydides)의 말대로 삶과 신뢰에서의 명망이 뇌물과 부정에 무심한 사람임을 확고히 증명하였다는데 있어서다. 그는 아테네시를 위대하게 만들어 모든 도시들 중 최고로 만들었다. 그는 왕들이나 참주들보다 힘에서 우월한 정도로 성장해서, 그들 중 몇몇은 자기 아들의 후견인으로 삼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드라크마도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 이상으로 늘리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페리클레스>,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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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2년 페리클레스는 반대당과 지도자 투퀴디데스를 추방하고 구축했다. 이 이후 그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사실상의 일인통치를 굳혔고 민중에 대한 태도도 이제는 바뀌기 시켰다. 그가 이끄는 아테네제국의 번영과 성공적인 전쟁 수행이 민주주의의 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페리클레스의 역량은 민중을 추종하는데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분열되고 맹목적인 민중을 그의 현명한 심모원력의 정책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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