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선생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얘야. 너는 하찮은 인간은 되지 않고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다. 선인건 악인이건 말이다.' 인격 형성을 목표로하는 분야의 공부를 하거나 교양과정을 익히게 될 때 그는 배우기 꺼려하거나 게으름을 피웠다. 비록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믿는 듯 했으나, 지혜의 연마나 실용지식 획득에서 그는 나이에 맞지 않은 열성을 보였다. 이리하여 이런 교양과 매너의 측면에서, 교양있는 사람에게 경시당할 때 그는 다서 거칠게 자신을 방어하여 흔히 뤼라나 하프 따위를 타는 것은 자신의 할일이 아니며 작고 보잘 것 없는 도시를 크고 빛나게 가꾸는 것이 자기 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스템심브로투스(Stesimbrotus)는 그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의 문하에 있었으며 자연철학자 멜리소스(Melissus) 밑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연대기는 불확실하다. 멜리수스가 사모스 포위[각주:1]에서 맞선 자는 페리클레스인데 후자는 테미스토클레스 보다 많이 어린 사람이며 아낙사고라스와 친했다.

한편으로 테미스토클레스가 수사학자도 자연 철할류의 학자도 아닌 프레아리아인(Phrearrhia) 프므네시필루스(Mnesiphilus)의 제자라고도 한다. 그는 다만 ‘소피아(sophia)’ 즉 지혜라는 것을 연마하는 이로 그것은 단지 정치나 실용기술을 공부하는 것으로 솔론(Solon)에서 부터 단절없이 하나의 종파로서 전수되어왔다. 그 후계자들 중에 이에 변론술을 섞었고 공무에서 언어로 그 영역을 넓혀 '소피스트'라 조롱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공직 경력을 시작할 때 의존했던 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에 그는 평범치 않고 불안정했는데, 이성과 훈련에 소홀하면서 충동에 자신을 맞겨 거친 극단을 향해 돌진하곤 했다. 그의 후년 고백에서 그는 다루기 어려운 말도 적절하게만 훈련되면 좋은 말로 된다는 말을 했었다.

호사가들이 덧붙인 것에 아버지가 의절했고 어머니가 아들의 수치에 비탄해 자살했다는 말들은 내 생각엔 거짓이다. 아버지가 공직 즉 정치에 나서는 그를 단념시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서지고 방치된 해변의 낡은 배를 가리키면서 그것이 퇴물이 된 지도자를 민중이 다루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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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를 페르시아의 위협으로 부터 구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나라팔아먹은 매국노 소리를 듣기도 한 테미스토크레스의 어린 시절 그는 다듬어 지지 않은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술과 교양은 뒷전이었지만 실용적 기술을 익히는데는 모든 열정을 바쳤고, 정치적 성공와 민중들 사이의 명성을 열망하였다. 

 

 

  

 

  1. 440 B.C.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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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번 그는 해외 여행을 하려했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였고 한번은 아카이아(Achaia)[각주:1]였다. 전자의 경우 떠나기로 한 당일날 포기해 버렸는데 불길한 징조와 항해의 위험 때문이었다. 베스타 신전에 앉아 사원 둘레를 만들 때, 그가 일어나려는데 옷이 걸려서 눈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볼수가 없었다. 아카이아에 가서는, 이스트무스(Isthmus)를 가르려는 시도를 했고[각주:2] 그래서 자신의 근위병들에게 작업을 맡기는 연설을 했다. 나팔 소리를 신호로 그가 첫 삽을 떠 그의 병사들에게 흙동이를 날라주었다. 카스피해의 산악지대의 통로로의 행군을 준비하며 뒤늦은 이탈리아에서의 신병조집에서 얻은 병력으로 한 신설 군단을 만들었다. 전원 6피트의 키를 가진 이 군단을 그는 알렉산더대왕의 팔랑크스부대(phalanx of Alexander the Great)라고 불렀다. 부분적으로 의외이며 또 매우 칭찬할 만하기도 한 이런 행동들을 나는 그의 그릇된 행동들과 별개로 수집하여 여기에 설명을 해 둔다.

 

 

 

 

  1. 그리스. [본문으로]
  2. 역대 황제들의 야심적 사업이었던 코린트 지협(이스트무스)에 운하를 파는 일이다. (JULIUS Caesar, C. xliv. ; CALIGULA, C. xxi.)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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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국의 국경을 넓히려는 희망은 꿈에라도 품지 않았다. 반대로, 브리타니아에서 군단을 철수시키려는 생각은 있었으나[각주:1] 그의 아버지의 명성을 훼손하려는 것처럼 보일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은 겨우 폰투스(Pontus) 왕국과 알프스 지역을 속주화한 것이었다. 전자는 폴레몬(Polemon)에 의해 그에게 양도된 것이오, 후자는 코티우스(Cottius)의 죽음에 의해[각주:2] 그렇게 된 것이다.

 

 

 

 

  1. 그의 양아버지이자 전임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가 브리타니아 일부를 정복했고, 네로 재위 중에도 그의 장군 파울리누스(Paulinus)는 계속 전쟁을 수행했다. ,철수를 고려했던 것은 브리타니아의 여왕 부디카(Boadicea)가 반란을 일으켜 런던 등을 함락하고 로마병사 7천명을 살해했을 때였을 것이다. (Tacit. Agric. xv. I, xvi. ; and Annal. xiv. 29.) [본문으로]
  2. 이 속주는 로마의 코티우스 알프스 속주(Cottian Alps)로 편입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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