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관용

 

쇠망사의 1-2장의 경우, 로마의 경제 상황이나 사회  문화 등을 기번이 주로 다루는 정치사 이외의 주제들을 조금씩 모아서 한 장으로 엮었고, 2장에서 로마의 경제나 인프라 같은 이 장의 몇몇 하위의 소주제들 이외에 기번이 강조하고 싶었던 본주제를 찾자면 역시 로마가 가졌던 관용의 정신(spirit of toleration)과 로마의 번영 속에 잠재된 쇠락의 조짐이라고 보여진다. 

물론 이 관용에는 여러 민족들에 대한 종교적인 관용도 들어가며, 가장 대표적인 성취는 초기에 로마인들만 배타적으로 누리던 권리들이 차츰 로마제국내의 모든 주민들에게로 확대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 관용에 관해서라면, 시오노 나나미가 인용한 오현제 시대 대표적 웅변가 아리스티데스의  <로마에 바치는 송가(To Rome)>[각주:1]란 연설이 당시 로마인이 가졌던 "관용의 정신"을 기번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가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시대" 였던 오현제 시대에 행했다는 연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제는 나 같은 그리스인도, 아니 다른 어느 민족도,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시민권 소유자라는 것만으로 충분해졌다. 아니, 구태여 로마 시민일 필요도 없다. 로마의 패권 아래서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자유와 안전이 보장된다...당신들 로마인은 ...제국 전역의 안전을 위한 방위체제를 확립하고, 인종과 민족이 달라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법률을 정비했다. 이런 모든 일을 통하여 당신들 로마인은 로마 시민이 아닌 자에게도 질서 있고 안정된 사회에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로마 세계는 마침내 광대한 지역에서 민주적인 통치체제를 실현했다. 그것은 과거의 그리스 도시국가를 확대한 것이라 해도 좋다...그들의 출신지는 모든 속주에 골고루 퍼져 있기 때문에, 제국 전역에서 모인 인재들이 제국 전역을 통치하는 셈이다

그들은 모두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태어났거나 나중에 시민권을 부여 받은 사람들인데, 광대한 로마 제국이 순조롭게 통치된 것은 그들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났고, 행정과 군사가 완전히 조직화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제국을 대표하는 인물과 조직이 서로 원할 하게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제국 통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로마는 만인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래서 다민족·다문화·다종교가 공생하는 로마 세계는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각 분야에서 제각기 맡은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공통된 축제일에는 황제가 주최하는 제의가 거행되지만, 민족이나 종교에 따라 제각기 고유한 제의도 거행되고 있었다. 이는 각자가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엄성과 정의를 유지하고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로마는 누구한테나 통하는 법률을 마련하여, 인종과 민족이 다르고 문화와 종교를 공유하지 않아도 법을 중심으로 공존공영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생활방식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익이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의 패배자한테도 많은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이 로마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집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로마 제국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임을 날마다 깨우쳐주는 하나의 커다란 집이다.


이 연설이 당시 로마가 추구하던 이상이 무엇이었는지는 보여주는 것 같다. 로마제국에 노예라는 최후까지도 평등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계층이 있었다는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 실제는 이상과 괴리가 많았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시민권 확대

시민권 확대 즉 로마제국내 주민들의 평등의 실현에 대해 기번은 간략히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로마 제국의 초기 상태 즉 "행복한 시대"에 까지도 이탈리아인(Italian)과 속주민(provincial) 사이의 차별이 존재했다. 이탈리아인 만이 태생적으로 로마 시민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세금 등에서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의 차별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황제나 원로원의 자격으로 이탈리아의 태생이나 적어도 거주를 요구했다. 물론 이 이탈리아의 이런 권리 역시 공화국 시기 동맹시 전쟁을 거치면서 쟁취된 것이다. 이탈리아 이외의 지역이라고 해서 모두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로마에 뚜렷한 공헌을 한 사람(예를 들어 로마 군단에 종군했던 사람)은 그가 누구라도 당연히 로마 시민의 권리를 누린다. 마찬가지로 로마의 확장과정에서 이탈리아 밖에 설치되었던 식민지(colony)의 주민-이들은 대부분 모국에서 이주된 것이지만은 역시 로마인과 동등한 권리와 영예를 누렸다. 로마가 설치한 식민지는 아니더라도 로마의 발전 성장 과정에서 일정한 기여를 한 도시는 자치 도시(municipal city)가 되어 이 보다는 약간 온전하지 않은 소위 라티움(Latium)의 권리 혹은 라틴시민권[각주:2]이라는 제한된 권리를 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치 도시역시 식민지의 지위를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나중에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자치 도시와 식민 도시 중의 더 유리한 쪽이 어디인지에 대한 논쟁마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로마 제국내의 모든 자유인이 로마 시민이 되었던 것은 카라칼라(Caracalla) 황제 때였는데 이것은 세금의 인상으로 인해 황제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고 폄하되기도 한다. 황제 재위시에는 유명무실한 시민 자격 획득이었으니 분명 황제의 업적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황제 몰락 후에 시민권은 계속 유지되고 인상된 세율 등은 다시 회복되었다. 이런 관용의 확대 과정에서도 여전히 비참한 상태로 남았던 사람들은 노예들이었다고 한다. 물론 로마는 초기 부터 이들이 대부분  주인에 의해 해방되는 예가 많았지만 노예제도 자체는 유지되었다. 그들에 대해서도 역시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시대의 칙령에 의해 주인 임의의 생사여탈을 금지하는 등 일정한 진전이 있었다. 불행히도 기번은 이들의 수가 전체 로마 경내 인구의 반 자유민과 같은 수나 된다고 추측하고 있지만, 요즘의 연구는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기번은 이러한 관용의 확대가 로마에 한 기여를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그는 동시대의 그리스 도시 국가 쇠퇴[각주:3]와 도시 국가 로마의 발전 및 팽창은 이러한 관용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관용이 없었다면 일곱 언덕의 작은 도시는 카토 같은 애국자, 마리우스나 키케로 같은 인물들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쇠퇴

기번은 마지막으로 같은 시대의 쇠퇴의 징후도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용기와 천재성의 쇠퇴를 이 시대의 경향이라고 한다. 특히 용기의 쇠퇴는 문자의 보급과도 관계가 되는데 라인이나 다뉴브의 국경까지 문자와 문학을 애호하는 주민들이 생겨났으며 이런 용기의 감소는 자연히 그가 제 1장에서 그렇게도 찬양한 로마의 군사적인 정신을 약화시켜 로마의 방위를 시민 자신들이 아닌 용병이나 야만인들에게 맡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지성화 로마화가 문화의 수준을 높여주지 않았다. 속주민들은 자신의 말로 자신들의 사상을 과감하게 표현하던 사람들과 제대로 경쟁하지 못하고 노예성과 모방만을 조장하는 시대 분위기는 더욱더 후대의 사람들을 위대한 고대인들의 아류들로 만들었을 뿐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로마가 번영한 원인인 관용이 도리어 쇠퇴의 징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1.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1: 종말의 시작>에 소개되었는데 필자는 아직까지 전체 원문이나 번역문을 찾아내지 못했다. 예를 들어 http://coursesa.matrix.msu.edu/~fisher/hst205/readings/RomanOration.html 에 나온 글도 생략이 있고 시오노와 한국어 역자가 번역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본문으로]
  2. 본래는 로마의 팽창과정에서 라틴인에 대한 특권을 인정하된 완전한 로마시민권 보다는 제한된 권리를 누렸다. 이후로는 이 2등의 시민권이란 의미로 쓰였다. [본문으로]
  3.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법은 시민권의 자격을 부모 모두 아테네 시민이어야 한다고 했다. 외국인과 노예는 당연히 여기서 배제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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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쇠망사>의 구성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전체 6권으로 되어 있으며 앞의 세권은 대체로 서로마제국멸망까지 제정로마의 역사를, 뒤의 세권은 그 이후 동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앞의 세권 중에 첫 세개의 장(chapter)들에 그가 쇠락(decline)이 시작되는 때라고 보았던 코모두스(Commodus) 황제 재위전 시기 역사를 압축시켜 놓았다. 첫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이래 오현제의 마지막인 마르쿠스(Marcus)까지 200년간을 고작 앞의 세장에 압축시켰고 그 300년 뒤의 서로마 멸망은 제36장에서 다루어 진다. 계속해서 로마제국 영토의 많은 부분을 회복하게 되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세까지는 비슷한 속도로 서술하고 있으나, 그 이후로는 거의 동로마 멸망까지 천년간을 다루기 때문에 상세함에 있어서 역시 그보다 못하며 또한 로마사라기 보다는 세계사(general history)에 더 가까워 보인다.[각주:1] 기독교는 기번의 관심을 특별히 끈 주제로 각 시대 마다의 동향과 성격 및 주요 사건들에 대해 수개의 장을 할애한 데서 그 특별한 주의가 엿보인다. 제정사의 이해에 있어서 공화정 시기도 중요하지 않다 할 수 없지만 그 이전 제정의 황금기인 팍스 로마나 시대에 대한 기번의 서술이 3장에 불과한 것은 여러 모로 아쉽다. 분량의 적음도 그렇지만,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의 결정적인 판(版)을 편집한 베리(J. B. Bury)의 서문에 의하면 그가 알 수 없었던 제정시대 동전들이나 원수정(Principate)과 속주(Province)에 대한 몸젠학파의 작업에 의해서 이 첫 장들은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기번의 쇠망사를 주교재로 로마사를 공부하기 위해서 였으므로 이것은 필자의 공부 노트이기도 하며, 여기서는 기번 외에 원사료나 다른 책들을 참고해 글을 썼다. 그리고 좀 아쉬운 3장까지 해당하는 팍스로마나 시대를 비교적 여기서 길게 다루어 보고자 한는데, 물론 나의 관심은 기번에 의해 간추려진 이 시대 역사의 균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바보다는 제위계승에 대한 것에 한정된 편이다.

 

제국의 번영


기번은 첫 세 장에서 앞의 두 장은 제국의 번영된 상태를 보여주면서도 그와 병존했던 제국 쇠망의 중요한 환경들을 이끌어 내는 것이 그 내용이다. 제 3장의 경우 제정 초기의 정치체제에 대해 주로 다루고 아울러 코모두스 이전의 황제들과 그 치세에 대해 아주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서기 2세기 즈음에 로마는 당시로 봐서 인류의 가장 문명화 된 지역이자 가장 비옥하고 잘 개간된 농경지대를 점령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민권자만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에 7천만 명에 다달았고, 로마는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였으며, 제국 내 다른 대도시들 안티오크, 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도 그에 못지 않은 인구와 번영을 누렸다. 각 도시에는 원형경기장 및 전차경주장의 오락시설과 목욕탕 그리고 수많은 부자들의 대저택들과 화려하게 장식된 공공건물과 건축물들이 있었다. 60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의 재산기준은 오늘날로 보아도 적지 않은데 대개 정무관직으로 나가게 되는 이들은 그에 대한 댓가로 민중들에게 검투시합과 같은 대형 오락거리를 제공하여야 했다. 호사스런 생활과 사치를 누리는 이들 원로원 의원과 황제들 덕으로 로마 민중들은 거의 일하지 않으면서도 빵과 서커스입장권을 배급받았다.

 

따라서 이러한 발전과 부를 지키기 위해서 아우구스투스는 대외적으로 소위 "온건 정책(moderate system)"을 확립하고 그의 후계자들은 이 정책을 계승한다다. 물론 기번은 이러한 정책이 황제들의 나약함으로 유지된 것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로마의 평화를 지킨 제정초기의 군사 시스템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  병사들의 훈련이나 규율에 이르기까지 이를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각주:2] 내전이 끝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감축된 병력으로도 약 25개 군단(legion)과 그밖에 비시민권자인 야만인 기병으로 구성된 250개의 보조부대로 25만의 직업군대를 보유했고 이 숫자는 후대 더욱 증가한다.

 

로마의 속주들


1장의 끝 부분에서 기번이 로마의 광대한 지역을 간략히 속주(Province) 단위로 설명을 하고 그 지역의 역사가 오리엔트나 그리스 처럼 유래가 깊으면 그 유래부터 설명을 하며 이해를 돕기 위해서 기번 자신의 당대의 지리 개념이나 국가로 설명을 하고 있다. 기번 당대의 국경과 있었던 국가들과는 생각외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종종 생소한 국명 지명이 나와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어쨌든, 기번은 스페인에서 시작해서 지중해를 한바퀴 돌아서 다시 지브롤터 맞은편의 아프리카 북서부에서 지리 설명을 끝낸다. 대체로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서유럽의 경우는 기번 당시의 개념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고 기번도 속주 단위로 아주 명쾌하게 설명하는데 비해 그 나머지 지역은 기번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생소한 지명이 많아서 그런지 꼭 속주 단위는 아니다. 원래 이곳이 로마때에도 여러 국경의 변천이 있고 속주의 통폐합 등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스페인(정확히는 이베리아 반도)은  제정 초 이 곳에 루시타니아(Lusitania), 배티카(Baetica), 타라코넨시스(Tarraconensis) 세개의 속주가 있었는데 루시타니아는 지금 포루투갈과 같지만 지금보다 북쪽으로 후퇴해 있고 대신 동쪽으로 약간 더 넓었다. 스페인 남쪽의 일부인 배티카를 제외하고는 모두 타라고넨시스라고 하는데 그 주도(州都)인 타라고나(Tarragona)의 지배를 받는 속주란 의미다. 훗날 이 곳을 중심으로 흥했던 아라곤(Aragon)은 그 이름과 관계가 있다. 또한, 배티카는 훗날 이슬람을 최후로 몰아낸 그라나다(Grenada)와 안달루시아(Andalusia) 지역이다. 스페인은 한니발전쟁 이후 시칠리아와 함께 로마의 초창기 속주들 중의 하나다.


갈리아(Gaul) 지역은 이베리아 반도와 프랑스를 나누는 피레네 산맥(Pyrenees)을 경계로 하는데 오늘날의 프랑스 보다 좀 더 넓다. 물론 기번 당시의 프랑스도 넓긴 했지만, 대체로 갈리아 속주들은 6개로 프랑스 북쪽의 벨기에나 라인 국경지대의 게르만 속주까지도 포함한다. 현재의 지중해 쪽으로는 나르보넨시스(Narbonnensis)가 있으며 대서양쪽으로 세 개의 강이 중요한데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각기 루아르(Loire), 센(Seine), 라인(Rhine)이다. 피레네와 루아르 사이에 아퀴타니아(Aquitania), 루아르와 센 사이의 루그넨시스(Lugnensis), 프랑스 밖에 벨기카(Belgica)와 게르마니아(Germania)의 두 개의 속주가 있는데, 라인은 로마 국경으로 여기를 지나면 대(大) 게르마니아로 불리는 지역이다. 로마 국경 안인 게르마니아 속주들의 경우는 소(小) 게르마니아로도 불리는데, 이 갈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중요했고 초기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국, 당시 브리타니아(Britannia)의 경우는 카이사르의 원정군의 발길이 닿기는 했으나 후대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서야 로마에 편입된 편으로 여러가지 크고 작은 소동이 정복 전후로 있었지만 대체로 안토니누스의 장성이나 하드리아누스의 장성을 경계로 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로마인들은 장성 너머의 스코틀랜드 지역을 칼레도니아(Caledonia)로 그 야만인들을 칼레도니아인으로 불렀다.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Italy)를 11개 지역(Regio)으로 나누었는다. 수백년 전에는 이탈리아는 로마가 아닌 서로 다른 부족과 나라들이었는데, 11개 지역의 이름에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해 지중해를 건너기 전까지 로마와 투쟁한 부족과 나라 이름이 삼니움, 에트루리아, 움브리아와 같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Lombardy)가 원래는 갈리아의 영토였고 이스트리아(Istria)라는 베네치아 부근의 좁은 지역도 이탈리아에 비교적 늦게 이탈리아에 편입되었다. 더군다나 베네치아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그 유명한 도시(Venice) 자체는 아직 탄생 전이었다.


이들이 오늘날도 유럽의 중심을 이루는 서유럽 지역이라면 나머지는 변경에 가깝다. 그 당시에도 그 동쪽을 일리리아(Illyria) 국경 혹은 일리리아 주(州)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체로 오늘날의 동유럽으로 속주로만 따지면 알프스의 정상을 낀 라에티아(Rhaetia), 노리쿰(Noricum), 판노니아(Pannonia), 달마티아(Dalmatia), 다키아(Dacia), 모이시아(Maesia), 트라키아(Thrace), 마케도니아(Macedonia), 그리스(Greece) 혹은 아카이아(Achaia)이다. 판노니아는 다뉴브(Danube)와 사베(Save)와 인(Inn)의 세 강으로 둘러싸였다. 이 지역들은 기번 당시까지는 대체로 독일 오스트리아나 헝가리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것 같다. 특히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 발칸 반도는 오스만제국의 루멜리아(Roumelia)가 되어 있었다. 원래 일리리아는 아드리아 해 인근의 좁은 지역인데 이 곳은 후에 사베강 아래의 달마티아 속주가 되었다. 여기에 지금 마케도니아나 보스니아 같은 나라가 있다고 한다. 노리쿰과 이 곳으로부터 국경이 다뉴브로 이동하면서 일리리아가 다뉴부 강 이하의 모든 지역을 가리키게 되었다고 한다. 다뉴브는 동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즉 그리스인들에게 이스터(Ister)로 불리운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지역은 여러 소국과 지역들로 나뉘어 구분하기가 어렵다. 한편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는  콘스타니노플은 탄생 전으로 비잔티움(Byzantium)이란 도시였다. 다키아의 경우는 아우구스트의 온건정책의 예외중 대표 케이스로 유일하게 다뉴브 건너편에 있었던 속주로서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뉴브를 건너 다키아 왕국을 정복하고 다뉴브 위에 설치했다. 

아시아로 건너가면 소아시아(Asia Minor)와 시리아(Syria) 등이 있다. 아시아(Asia)는 소아시아 서쪽 일부의 속주명이 되었는데 로마인의 관점에서 이집트, 아프리카, 그리스 등화 함께 특별한 영예를 가졌다.[각주:3] 소아시아의 북쪽엔 비티니아와 폰투스가 독립된 왕국에서 속주로 바뀌었고 남쪽엔 킬리키아(Cilicia)가 동쪽의 아르메니아를 향해 카파도키아(Cappadocia)가 있다. 소아시아의 남쪽으로는 헬레니즘 계통의 셀레우코스 조가 지배하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나 유대 아라비아 등이 있어 그 밖에 사막이 자연 경계이며 파르티아 쪽으로는 대체로 유프라테스 강을 경계로 했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부터 이집트, 키레나이카(Cyrenaica), 아프리카(Africa), 누미디아(Numidia), 마우렌타니아(Mauretania) 등의 속주가 있다. 이집트는 로마에 곡물을 바칠 특권이 있는 도시로 황제 직속에 속하였다. 속주 아프리카는 과거의 카르타고이며 제정 이후 계속해서 번영했었다. 여기서 분리된 누미디아 속주는 지금의 알제리다. 무어인의 영역인 마우렌타니아 역시 과거 카르타고인의 발길이 닿았던 지역으로 오늘날의 모리타니의 북쪽 해안에 있다. 반면 키레나이카는 그리스인의 식민지였다.


마지막으로 지중해의 섬들 코르시카나 사르데냐가 로마의 영토였고 그 밖에 이 로마 국경 판도 안에는 없더라도 로마의 주권을 인정하거나 로마가 왕의 임명 등에 일부 제약을 가하는 나라들이 있었는데 아시아 쪽의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가 그런 경우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의 로마 속주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 5-6권의 계획과 내용 할당에 대해서는 5권 첫장인 48장에 밝혔다. [본문으로]
  2. 로마의 군단(legion)의 구성에 대해서 기번은 약간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이 부분은 기번의 단순한 실수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제정시대에도 상황에 따라서 또는 시기에 따라 로마의군단 구성은 달라지고, 기번자신도 분명이 그 점을 언급하고 있으면서도 예외적인 경우를 일반적인 경우로 보는 듯 싶다. 로마는 maniple 단위의 시스템을 대략 마리우스 이후부터 cohort 단위로 바꾸었는데, 기번이 말한 바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제정시기 1개 군단(legion)이 10개의 cohort로 구성되고 cohor는 6개의 백인대(century)로 백인대는 80 명의 병사들로 되어 한 cohort는 480명된다고 말해진다. 물론 이 군단에는 보병이외에 기병대와 이민족 출신의 보조병들이 딸려있다. [본문으로]
  3. 기번에 의하면 로마인의 아시아 관념은 번영했던 타르소스 산맥 이서 지역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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