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고 수집할 가치가 있는 것에 한한 이들 두 사람의 행동들을 살펴본 지금, 군사적 경력에서는 어느 쪽도 지지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둘다 지휘관으로서의 기술과 예지력은 물론 군인으로서 용기와 대담성을 입증하였다. 단 누군가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우위를 줄 수 있는데 육상은 물론 바다에서도 승리를 쟁취하였으므로 더 완벽한 장군으로 보기도 할 것이다. 또한 각자가 조국을 위해서 지휘권을 잡았을 때 확실히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고 적으로 넘어가서는 더 확실한 상처를 입힌 것도 분명한 일이다.  

정치가로서는, 알키비아데스의 극도의 무절제함과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는 모든 노력은 냉정한 시민들의 혐오를 샀다면 마르키우스의 과한 무례함은 소수귀족적 자만과 태도와 함께 로마 민중의 미움을 샀다. 어느 쪽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민중에게 호의적으로 보여 지지를 얻으려는 사람은 그렇게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민중에게 쓰디 쓴 말과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권세를 위해 민중에게 아첨하는 것은 치욕이지만, 공포와 폭력과 억압으로 권력을 얻는 것은 치욕일 뿐 아니라 불의이기도 한 탓이다. 

마르키우스가 흔히 타고나기를 단순하고 직선적이었다고 생각되며 알키비아데스가 공적 행동에서 부도덕하고 잘못이 많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알키비아데스는 특히 투퀴디데스(Thucydides)의 전언대로 그가 스파르타 사절들을 속이고 평화를 끝장낸 사악한 수단으로 비난받는다. 그러나, 그의 이 정책은 도시를 전화로 몰아넣었으나 알키비아데스가 수호한 만티네아(Mantinea)와 아르고스(Argos)와의 동맹으로 도시를 강화하게도 했다. 그러나 마르키우스 자신도 로마인과 볼스키인 사이에 전쟁을 불붙이려 속임수를 썼다. 디오뉘시오스(Dionysius)가 전하는 대로 축제에 방문객에 대해 그릇된 고발을 했고 그 행위의 동기는 더 나쁜 것이었다. 그는 알키비아데스 처럼 야망이나 정치 투쟁의 경쟁에 영향받는 아니지만 단순히 분노에 몸을 맡기는 이였다. 디온(Dion)의 말대로 분노에서 온 격정이란 '누구도 좋은 댓가를 돌려받을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탈리아의 많은 지구들을 혼란으로 몰아넣고 두말할 것도 없이 무고한 도시들을 그의 조국에 분노하게 했다. 알키비아데스 역시 그의 분노로 조국에 곤경을 가져오게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마음을 돌리고 후회하는 것을 보이자 마자 곧 선의를 보였고, 두번째로 쫓겨난 후에도 조국 장군들의 실수에 기뻐하지도 위험하고 나쁜 계획을 무관심하게 보지 않았고 아리스티데스(Aristides)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에게 한 것으로 최고의 칭찬을 받는 그 일을 정확히 했다. 그는 당시 지휘하는 사람에게 가서 아군으로 여기지 않았음에도 해야 할 바를 가르쳐 주었다. 마르키우스는 우선 도시 전체 사람들이 그를 해치지 않았음에도 전체 도시에 해를 가했는데 도시의 강력한 자들은 그의 잘못과 아픔을 공유했었다. 둘째로, 그의 어리석음을 치유하려는 조국인이 보낸 대사들을 거부하면서 조국을 타도 전복하려는 전쟁을 수행하려 했음이 분명하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알키비아데스와 코리올라누스의 비교>,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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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조국을 위해 그리고 그에 맞서서 격력한 싸움을 벌였던 두 인물에 대한 플루타르코스의 비교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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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들이 군역을 철저히 거부한 이 때, 마르키우스(Marcius)는 자신의 종자(피호민)들을과 자신이 설득할 수 있ㄴ는 자들을 거느리고 안티움(Antium)에 독자적으로 쳐들어갔다. 거기서 많은 곡물을 찾아냈고 가축들과 포로들을 대량 노획하였는데 자신은 전혀 취하지 않은채 따라온 자들에게 주어 갖가지 전리품을 로마로 실어보낸 것이다. 남은 시민들은 후회하면서 이런 부유한 동료들을 질시하면서 마르키우스에 대한 원한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커가는 그의 명성과 힘에 대해 못견뎌했으며 민중에 대한 해악으로 보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마르키우스가 집정관이 되려 나섰을 때 대중의 마음은 누그러지고 이렇게 많은 위대한 일을 한 태생이나 용기에서 최상의 인물을 경시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민중들은 느꼈다. 이제는 관직을 지망하여 동료시민들에게 인사하고 표를 구하는 자로서 포룸에 튜닉을 아래 입지 않고 토가만을 걸치고 나오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그것은 민중들이 표를 구하는 호의를 위해 복장에서 겸손을 취하기를 바라기 때문이거나 전쟁에서 상처를 입었을 경우 용감함의 증거를 보일 수 있거나 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표를 구하는 후보자가 튜닉없이 띠도 풀고 대중앞에 나설 것을 요구받는 것은 뇌물쓰는 의혹 때문은 아니었다. 이 이후로는 곧 표의 매매는 선거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후에는 이런 부정과 뇌물이 병영이나 법정 구석구석으로 영향을 미치어 도시 로마를 군주제로 바꾸게 했다. 군대가 철저한 돈의 노예가 되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처음으로 뇌물을 쓴 사람이야 말로 민중 권력 체제를 전복시킨 자라하는 말이 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그런 잘못이 조금씩 꾸준히 자라나 즉시 눈치 챌 수 없었다. 우리는 민중과 법정에서 뇌물을 쓴 첫 인사가 누군지 모른다. 반면, 아테네에서는 안테미온(Anthemion)의 아들 아뉘투스(Anytus)가 배심원들에 돈을 준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끝무렵에 퓔로스(Pylos)를 구하는 데 실패한 배신적 행위에 대한 법정에 섰을 때 일인데 로마의 포룸에서는 황금시대의 순수한 종족이 아직 살던 때였다.  

용감한 군인으로 17년간을 있었던 마르키우스가 많은 전장에서 얻은 흉터들을 보였을 때 민중들은 그의 용기에 안색을 잃었고 그를 뽑는데 서로 동의해 주었다. 그러나 투표날이 되어 마르키우스가 뽐내며 원로원의 호위로 포룸에 들어오면서 주변에 모든 파트리키우스 귀족들이 전에 없이 굽신거리는 것을 보자, 민중들의 생각은 그에 대한 호의를 접는 것으로 전의 질투와 분노로 기울게 되었다. 이런 감정은 파트리키우스들을 중시하는 귀족이 정부 최고권력을 장악하면 민중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갈것이란 두려움에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그들은 마르키우스를 거부하고 다른 이들을 선출되게 했다. 원로원의원들은 이것이 마르키우스 보다 자신들에게 이 모든 것이 향해있다며 분개했다. 마르키우스 자신은 이 상황을 절제와 관용으로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본성적으로 격정적이고 호전적인 면에 탐닉되어 그런 것을 위대시하고 이성과 훈련으로 닦아야 할 정치인의 주요 덕목인 신중함과 온건성에는 익숙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Nor did he k공무를 수행하는 자라면 무엇보다 플라톤이 '고독의 동반자'라 말한 고집을 피해야 하고, 이 사람들 속에 융화되어야 하며, 어떤 사람들이 잘못들에는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햇다. 그러나, 직선적이고 고집스러웠으며 모든 것에 대한 정복이 동시에 여성적 유약함 보다는 용감함의 특권이라 반대자를 누르지 못하는 것은 약함이라고 믿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언제나 민중에 대한 불만과 증오를 품고 있었다.

고귀한 태생을 젊은 귀족들은 열심히 뽐내는 분자들인 젊은 파트리키우스들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그에게 헌신하며 지지했는데, 이런 것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심정적 위로와 공감을 표하며 그의 화를 부채질했다. 전쟁에서 지도자이며 교사였고 승리에 대한 고무자였기 때문인데 거기에서는 상호 질투란 없었다. 

마침 이 때 로마로 곡물선이 왔다. 대부분은 이탈리아에서 온 것이었는데 비슷한 량이 쉬라쿠사(Syracuse)에서 참주 겔로(Gelo)로 부터 선물로 보내졌다. 민중들은 대부분 큰 희망을 품고 도시가 품귀와 불화에서 구원될 것을 기대했다. 원로원이 이에 소집되었고, 의사당을 에워싼 민중들은 토론 결과를 기다렸다. 곡물가가 조절될 것을 기대했고 선물분은 무료 분배될 것을 기대했다. 원로원에도 이를 권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키우스는 자리에 일어나 격렬하게 민중 편에 선 자들을 규탄하며 그들을 데마고그나 귀족들의 배신자라고 불렀다. 폭도들 사이에 뱃짱과 무례라는 악의 씨를, 발아단계에서 짓이겨 놓아야 하며 호민관직 같은 것의 권력도 크지 못하게 해 두어야 할 텐데도, 자해적으로 품고 있는 자들이라 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코리올라누스>, 13-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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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우스 마르키우스. 로마 초창기 인근 제족들과 영역다툼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고 그가 정복한 한 도시 중 하나인 코리올리의 이름을 딴 코리올라누스(Coriolanus)라는 칭호가 그에게 붙여졌다. 이렇게 많은 전공을 로마를 위해서 세우고도 그는 정계에서 실패했고 집정관의 영예로운 직을 맡지 못했다. 민중에 대해 이렇게 독설을 퍼붓던 그는 도리어 나라에서 쫓겨나 전의 주적이었던 볼스키군을 이끌고 로마를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망명 중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물론 로마 역시 그렇게 훌륭한 장군을 잃은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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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키비아데스(Alcibiades)에 대한 이런 엄청난 유죄판결과 단죄가 통과되자 아르고스(Argos)에 있던 그는 곧 투리이(Thurii)로 부터 달아나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로 넘어갔다. 그곳의 자기 적들을 두려워 해 조국을 비방하는 동시에 스파르타인들에게 면죄와 신임을 요구하면서 전에 적으로 손실을 끼친 이상의 보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스파르타가 이 요구를 인정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가자 마자 그는 한가지 일을 해냈다. 쉬라쿠사(Syracusa)인들의 원조 요청을 미루고 있는 펠로폰네소스인들이 귈리포스(Gylippus)를 지휘관으로 보내 그곳에 온 아테네 군을 물리치도록 한 것이다. 그가 한 두번째는 아테네 본국에 대한 전쟁을 하게 한 것이요, 세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데셀레이아(Deceleia)를 요새화한 것이다. 마지막 것이 무엇보다도 그의 조국의 파멸에 기여했다. 

스파르타에서 그는 공적으로 큰 명성을 가지게 되었고 사적으로는 존경을 얻었다. 대중들이 그의 영향 아래로 몰려들었고 그의 스파르타식 태도가 그들을 매혹했다.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과 냉수욕을 하면서 스파르타식의 거친 빵에 익숙하고 검은 수프를 먹는 그를 보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눈을 의심하였고 그런 이가 자기 집에 요리사를 두면서 향수를 찾고 밀세시아산 양모를 견디는 이였다는 것을 못믿어했다.    

그는 사람들 말로 다른 모든 이들을 초월여 다른 사람을 끄는 힘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다른 사람의 바램과 생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적응시키는 것이었고 이에 있어 카멜레온 보다 더 격하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 짐승은 흔히 한가지 색만 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선과 악 모두와 친할해질 수 있었고 그가 흉내내거나 익히지 못할 것은 없었다. 스파르타에서 그는 신체훈련에 전심을 쏟았으며 단조로운 생과 엄격한 외모를 했다. 이오니아에서는 사치스러운 취향을 가졌고, 트라키아에서는 과음을 했으며, 테살리아에서는 거칠게 말을 몰았다. 페르시아 태수 티사페르네스(Tissaphernes)에게로 가서는 그의 외양과 낭비가 페르시아인들을 능가하였다. 생활방식을 쉽게 바꾸고 본래의 성격마저 매경우 바꾸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자연적인 성격이나 방식이 동료들에게 불편한 인상을 준다고 생각할 때는 매경우 그들에게 알맞는 거짓 성격을 그렇게도 빠르게 꾸며내고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스파르타에서 모든 일에 대해 그 외양에 대해 그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리쿠르고스가 훈련시킨 그 사람

"아킬레스의 아이가 아니라 아킬레스 자신이다."  

그가 느끼고 행한 것으로 판다하면 누구나 시인(오레스테스의 에우리피데스) 처럼

"이 여자가 예전에 그녀야!"

라 울부짖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알키비아데스>,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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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아스와 함께 시칠리아의 정복을 위해 원정에 나섰던 알키비아데스는 궐석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망명자의 신세가 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니키아스의 불행을 자신이 모면했다는 것이다. 후에는 조국 아테네와 화해하고 다시 아테네를 승리와 영광으로 이끌었지만 또다시 신망을 잃고 망명 유랑해야 했다. 조국에서 용납되었을 때는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열정적으로 적에 맞서 싸웠지만 적이 되었을 때는 아테네 멸망의 화근이 될 정도로 조국의 약화에 기여하였다. 이 시기를 보면 그가 민중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것인지 아니면 무능하고 통찰력없는 민중이 중요한 순간마다 한 선지자를 박해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 이야기는 알키비데스의 뛰어난 환경에 대한 적응성에 대해 말해 준다. 그는 적어도 전쟁에 능하였던 만큼이나 세계 여러 나라의 각 풍습에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주었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가 스파르타에 가면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스파르타인이 되었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클레오파트라나 그리스의 향락에 푹 빠져 다른 국사는 뒷전으로 미루는 안토니우스가 일단 로마에서 쫓겨나자 썩은 물을 마시고 나무껍질로 허기를 채우던 것과 비길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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