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유언장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후계자에게 죽어가면서 남긴 것 상속한 것은 단순히 제위(帝位)나 재산(財産)만이 아니었다. 디오(Dion Cassius)는 아우구투스가 죽었을 때 벌어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베스타 처녀들에게 보관됐던 그의 유지(遺旨)를 드루수스(Drusus,티베리우스의 아들)가 그녀들로 부터 받아 원로원(senate)으로 운반했다. 그 문서를 입회한 자들은 봉인을 조사했다. 그리고 원로원에서 청취되었다. 황실의 해방노예인 폴리비오스(Polybius) 그의 유지(遺旨)를 읽었고 그 때에는 그에 관한 어떤 것에 대해 원로원 의원이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유산의 3분의 2는 티베리우스에게 나머지는 리비아(Livia,아우구스투스의 부인)에게 남겨준다는 것이 알려졌다. 적어도 이에 대한 한 보고가 아래와 같다.그는 그녀가 그의 재산을 완전히 누리게 하기 위하여  원로원에 법이 허용하는 이상으로 너무 많이 남기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었던 것이다. 이 둘이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또한 많은 돈을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것을 지시했는데 친척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 계급들은 물론 왕들도 있었다. 민중들에게 4천만 세스테르세스(sesterces)를 남녔다.  시민 병사들의 나머지에겐 사람당 300 씩 남겼다. 게다가, 아이들이 아직 어려 아버지가 상속인이 되어야하는 경우도 이자까지 합해 장성한 후 지급되도록 했다. 이것은 사실 살아있을 때도 그의 방식이었다. 그가 자식을 가진 누구의 재산을 상속할 때는 장성하기만 하면 그 후라도 그 사람 아이들에게 모두 돌려주는데 결코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남의 자식들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고도 자기 딸을 유배에서 풀어주지는 않았다. 물론 선물을 받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녀가 그 자신의 무덤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명했다. 그의 뜻은 이처럼 명확했다. 4권의 책들이 배달되어 드루수스가 읽어나갔다. 첫째에는 그의 장례식에 관한 상세한 지시가 씌어졌다. 둘째엔 그가 수행한 모든 업적을 기록했는데 이것을 청동 기둥에 새겨 그의 신전에 세우라 명했다. 세째에는 군사적 문제, 세수(稅收), 공공 지출, 국고 등의 제국 행정에 관해 명심할 것들이 담겨졌다. 네번째는 티베리우스와 대중들에게 하는 권고와 명령이었다. 그 권고중에 하나는 너무 많은 노예를 풀어주어 도시를 난잡한 자들로 채우지 말것과 또한 너무 많은 수를 시민으로 등록해서 속국민과 그들 자신사이의 뚜렸한 차별을 두라고 했다. 그는 그들에게 공적 사업을 이해와 실행 양쪽에 능력있는 모든이에게 맡길 것과 어떤 한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것을 타일렀다. 이렇게되면 누구도 폭정(tyranny)을 꿈꾸지 않고 한 사람의 실패가 국가를 파멸시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충고하기를 현재의 소유에 만족하고 절대 제국을 더 이상 크게 늘리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말하길 지키기는 힘들고 지금까지 얻은 것도 잃을 위험에 빠진다고 했다. 이 원리는 그 자신이 말 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따랐던 것이다. 아무튼 그는 야만 세계로 부터 많은 것을 얻어냈으나 그리 하길 바랬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의 권고였다.


첫 부분은 그의 유산 처리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뒤의 부분 특히 그의 유언집 중의 제4권은 앞으로의 제국 통치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로마가 창건된 후 7세기 이상을 지속해온 대외 팽창에 대한 문제에 대해 단호히 이것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 후 다른 황제에게도 계승이 되어 이후 팍스 로마나(Pax Roman)의 시대가 2세기간 지속된다.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마련한 이러한 세심한 배려 속에서 평화속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로마 국경: 온건정책?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간에도 그 이후에도 이러한 평화가 거져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그가 유지해야 할 제국의 경계는 자연이 그들에게 영원히 부여한 서쪽의 대서양과 북쪽의 라인-다뉴브 선(線), 동쪽의 유프라테스강과 남쪽의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의 사막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확립한 후로도 비록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확보했지만 이 국경지대 진출과 안정적 지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더 필요했다.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를 사이에 놓고 파르티아와 항상 긴장 상태에 있었다. 한때 안토니우스에게 주권을 빼앗겼던 아르메니아가 다시 내전 중에 떨어져 나갔지만 장성한 티베리우스가 이 일을 훌륭하게 처리한다. 아르메니아의 왕위다툼에 개입해서 로마에서 자란 왕제를 세우고 나아가 제1차 삼두정 때 크라수스의 패배이래 미루어 왔던 파르티아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했다. 그들에게서 크라수스 전쟁 때의 포로들을 돌려받는데 만족했다. 이 후 아르메니아가 다시 파르티아의 영향하에 들어갔는데 후계자로 촉망받던 그의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비슷한 임무로 파견되었다가 결국 로마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연도 있었다.

일리리아(다뉴브) 국경의 확보 문제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처음 이 문제에 대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양팔이라고 할 수 있는 티베리우스-드루수스 형제가 본격적으로 활약을 펼치게 된다. 기원전 15년에 두 형제가 알프스 근처의 라에티아를 평정한다. 그리고 기원전 12년에는 두 형제가 나란히 일리리아와 게르마니아 국경의 추가 확장을 위해 전장으로 떠난다. 로마로 그들의 승전 소식이 날마다 전해져 온통 축제 분위기이나 실제 성과는 그렇게 좋지 만도 않았다. 라인을 넘어 엘베강을 목표로 떠났던 드루수스는 한 때 그곳 까지 진출하였다고 전해지고 귀환하던 중에 낙마 사고로 숨지는데 이 때가 기원전 9년이었다. 그 후에는 게르마니아전선의 책임을 티베리우스와 죽은 드루수의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떠 맡게 되는데 대체로 기원 후 9년에 로마 장군 바루스(Varus) 군단의 궤멸로 라인강으로 후퇴하고 이후 별다른 확장 노력을 중단하게 되나 이곳은 갈리아 방어의 가장 중요한 위치인 만큼 상하의 두개 게르마니아로 나누어 각각 4개 군단을 상주시키게 된다. 다뉴브 선 확보 역시 그리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티베리우스의 원정으로 노리쿰과 판노니아가 복속된 듯했지만 서기 6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켜 다시 굴복시켜서 가까스로 다뉴브-라인 국경이 확보되었고 여기에도 어김없이 수비대를 진주시켰다.

그 밖에 아우구스투스의 장군들 중에서 이른 시기에 아라비아와 에디오피아 정복을 목표로 진군하기도 했었지만 더위와 갈증으로 철수 했다. 대체로 이곳은 인도양으로의 무역로를 확보하는 목적이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곳의 지배자가 로마와 우호를 맺고 이 곳의 통과를 허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아시아와 그 이남의 지역에 대해서는 로마의 영향하에 있지만 아직도 속주화되지 않은 지역들이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비우고 오랜 동안 갈리아로 갔을 때는 브리튼을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브리튼 역시 로마의 영역 밖에 남겨졌었다. 이것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국경 상황이다.

기번이 말하길 이후로는 그의 이 소중한 상속 재산으로서의 온건 정책(moderate system)은 비록 그 후계자들의 무능함과 두려움 때문이지만 대체로 잘 지켜졌다고 한다.[각주:1] 단 두 번의 예외가 있다면 오늘날의 영국인 브리튼과 다키아 속주에 대한 것이다. 브리튼 정복은 비교적 늦게 그것도 천천히 그것도 섬전체가 아닌 일부만의 정복에 그쳤다. 클라디우스 황제 시절에 그 아들이 브리타니쿠스라고 불린 것으로 보듯이 이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도미티아누스 시절에 아그리콜라(Agricola)란 장군이 스코틀랜드 깊숙히 까지 제패했다고 한다. 유명한 역사가 타키투스의 장인이기도 한 이 장군의 소환 후 은퇴와 죽음에 그 후 폭군인 도미티아누스의 질투가 개입된 것으로 생각했다.[각주:2] 당시 황실의 일원이 아니면 개선식을 거행될 수 없을 만큼 추가적 정복사업 및 눈에 띄는 군사활동은 어려웠다.[각주:3] 그후로 제국의 경계는 스코틀랜드를 배제하고 안토니누스 장벽과 그 보다 후퇴한 하드리아누스의 장벽으로 내려온다.


브리튼 정복이 라인-다뉴브 선과는 무관한 어쩌면 당연한 "예외"라면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달성된 다키아 정복과 속주화는 유일하게 아우구스투스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군사적인 명성을 원했던 야심가 였던 이 황제는 파르티아 깊숙히 쳐들어 가 메소포타미아나 아시리아까지 속주화 시켰지만 다음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가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물론 평화시에도 로마인은 전쟁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군단들은 각 속주에 배치되어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부터 제국을 지켰다. 비록 공화정 말기 보다 군단 수를 줄이기는 했지만 그 만큼 이들 군단병들의 봉급과 그들의 은퇴를 위해 새로운 세금들이 로마시민들에게 부과되었다. 이들이 제공하는 평화 안에서 로마는 유래없이 번영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 파편>

 

 

 

 

 

  1. 그러나, 실상 로마의 국경정책을 소극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단순히 영토확장은 로마의 국익과 관련된 일종의 타협일뿐, 로마의 군사행동은 국경 밖 야만인들에 대한 분리 지배를 위한 적극적 행동이었다. [본문으로]
  2.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함. [본문으로]
  3. 장군들은 황실멤버들 아래에서 ornamenta triumphalia 란 영예를 받았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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