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왕조[69-96년]와 유대 문제

 

플라비우스 왕조의 경우는 어떻게 보면 유대로 흥하고 또 한편으로 유대로 인해서 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첫번째인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년]가 무엇보다도 유대전쟁[66~73년] 통에 군권을 장악한 밑천으로 내전에서 승리해 제위에 올랐고 그 아들인 티투스 황제[재위 79-81년] 역시 유대전쟁에 아버지와 함께 참전했다. 그리고 역시 폭군으로 유명한 베스파시아누스의 다른 아들인 도미티아누스[81-96년]는 "기독교 박해자"로 알려져 있다. 기번은 이 시대 유대인 박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짧게 언급한다.


예루살렘 신전(the Temple of Jerusalem)과 로마의 카피톨이 동시에 화염에 소실된 것이 거의 동시라는 것[각주:1]은 다소 놀랍다.전자에 바쳐졌던 공물들이 폭력적인 승리자의 권력으로 후자를 회복하고 화려하게 꾸미도록 전환되었다는 것도 못지 않아 보인다. 황제들은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인 인두세를 거두었다. 그리고 각 개인의 머리에 평가된 액수는 대단치 않을 지라도 계획된 방식이나 거둬들이는 방식은 견딜 수 없는 원성으로 생각되었다.


이것이 바로 네로에서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초기까지 로마인들에게 대항한 유대 전쟁 이후에 행해졌던 플라비우스 왕조의 유대 박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는 사실 이 유대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황제가 될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그리고 전쟁에 관한 업적에서 이 유대전쟁의 비중이 큰 편이다.

일단 이 자리를 빌려 유대전쟁을 전후한 유대의 역사를 살펴보겠다. 원래 유대인들이 대부분의 세월동안 나라없는 백성이었고 노예의 후손들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로마의 개입전에 그들은 헬레니즘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에 의해서 이들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그들은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독립의 기간은 짧았고 그들은 분열되어 있었으며 셀레우코스 조 등의 다른 근방의 왕국들이 그랬듯이 이런 크고작은 내부 세력 다툼에 로마의 개입을 이끌었다. 헤롯은 로마의 도움으로 유대를 지배할 수 있었지만 그 사후에 또 다시 왕국은 분열된다. 아우구스투스 재위 중의 어느 때에는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는데 분명치는 않지만 유대의 장관은 시리아 총독의 관할하에 있으며 주로 해안지역인 카이사리아(Caesarea)에 비교적 소규모 병력만을 데리고 와서 세금 등을 거두고 기타 사법과 행정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칼리굴라 황제 때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인해 헤롯(Herod)의 손자인 아그리파(Agrippa) 1세가 3년간(41~44) 왕으로 있었지만 그의 사후에 다시 총독에게 맡겨졌다. 물론 바로 아그리파가 돌아오기 전에 그 유명한 본데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예수를 사형시켰던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때 본데오 빌라도는 카이사리아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이곳을 방문한 예수를 재판했다. (물론 이 아그리파 재위 전의 시대는 유대통치사 중에서  좀 더 불분명한 시대이다. 예수의 죽음에 로마와 유대인 중 누가 더 책임이 큰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기독교들은 껄끄러웠고 실제로 양쪽에서 박해가 이루어졌다.) 이 즈음에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갈등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면서도 세금이나 자신들의 대우 문제 등이 복잡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유대 총독이 부족한 세금을 보충하러 신전의 공물을 약탈해 갔던 일까지 있었고 로마 지배 후에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한 도시였던 카이사리아에 대하여 그 권리에 대한 자존심 싸움에 로마가 끝내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마침 유대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그리파 2세를 비롯해 많은 유대의 기득권 층은 이 세계제국을 향한 소수민족의 가망없어 보이는 전쟁을 말렸지만, 종교적 열성분자들은 달리 생각했던 것 같다. 디오의 기록을 보면 전쟁을 위해서 이들이 많은 준비를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이 그들의 자부심에 불을 짚혔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물이 없어서 고생한 쪽은 오히려 로마군이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땅굴을 곧곧으로 파서 물을 공급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그리고 전쟁전에 많은 유대의 친로마적 지도층이 테러에 의해 숨졌다. 이미 말했듯이 아우구스투스적 평화기에 이곳은 대병력을 주둔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고 유대 총독이 가진 병력이라야 1-2 코르호스(cohort 대대급 부대)정도 였기에 반란에 대처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재위 거의 마지막 해가 임박한 상태였지만 네로는 이 때 더 이상 이 병력으로의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3개 군단(legion)을 거느리게 해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를 파견한다. 그는 다소 반란에 열성적이지 않았던 갈릴리 지역을 먼저 진압하였는데 이 때 장군으로 와 있던 유대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를 사로 잡았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포로의 몸임에도 당당히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자신이 그에게 황제가 되리라는 예언을 주려고 왔다고 하여 이 장래의  황제 가문의 환심을 사게 되었다. 이것이 서기 67년의 일이다. 그리고 네로의 몰락으로 인한 혼란 통의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정복을 잠시 미루고 로마를 향해 진군해 폭군 비텔리우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다. 그리고 서기 69년 전쟁을 재개한다. 책임자는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쓰지만 후대에 티투스 황제라 불리는 그의 장자이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 포위전을 벌인다. 예루살렘에는 신전을 감싸는 마지막 벽까지 3개의 성벽이 있었는데 차례차례 함락되고 성전마저 불탔는데 유대인의 항전은 끝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된다. 또 성전의 경우 기번은 유대인 자신들이 파괴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아마도 티투스의 명령하에 의도적으로 파괴된 것일 것이라 한다. 어쨌든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전체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유대인들은 끝까지 싸우거나 자결하거나 노예로 팔리거나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근의 몇몇 요새들에서 결사항전이 계혹되어 마사다(Masada)의 함락을 끝으로 거의 서기 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에 로마의 통치방식에 변화가 생겨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커져 1개 군단이 예루살렘에 상주하게 되고, 주민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으며 이 와중에 예루살렘 파괴로 주민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오현제 시대에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중에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최후까지 항전했던 마사다 요새와 독립 선언 후 발행한 동전>



이렇게 유대인과 좋지 못한 관계를 갖게 된 베스파시아누스 가문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전쟁 중에 그들과 이런 저런 인연을 맺게 되어서 그런지 일부의 유대인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요세푸스가 그 궁정에 머무른 일부터 티투스 황제의 경우 전쟁중 로마편이었던 아그리파 2세의 누나와의 연애는 꽤 유명했다고 한다.

기번에 의하면, 이 전쟁과 관련이 없던 도미티아누스 자신도 말년에 유대 문제로 골치를 썩혔다고 한다. 물론 도미티아누스 역시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 전형적인 폭군이다. 그의 삼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Flavius Sabinus)의 두 아들들이 그에게는 근심 거리였다. 티베리우스가 그랬듯 그 중 맏이는 반역죄로 죽이고 조금 나약한 듯한 둘째를 내심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클레멘스(Clemens)를 자신의 질녀인 도미틸라(Domitilla)와 결혼시켜서 경력관리상 집정관까지 시켜주었다. 그런데 이들이 나중에 재판을 받고 각각 사형과 유배형에 쳐해지는데 그 죄목이 종교적인 이유 무신론과 유대교를 믿은 탓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들이 초기 기독교와 관계가 되었던지 이것을 네로의 기독교 박해에 이은 2차박해라고 하게 되었다. 어쩌면 못난 클레멘스가 제위를 계승했으면 로마가 훨씬 일찍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지 모를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도미티아누스는 후대 오현제시대를 지난 코모두스가 그랬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궁정에서 살해된다. 이 때까지 도미티아누스 역시 갖가지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사람들을 탄압하고 박해해 왔다. 유달리 많은 간통죄 처벌에 단지 철학을 연구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제 네르바가 즉위하고 로마에 더 할 수 없는 "행복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 카피톨언덕은 비텔리우스와의 내전 중 69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1차유대전쟁 중 70년에 파괴됨.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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