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의 성립: 원수정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의 세번째 장(章) 부터는 본격적인 연대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3장의 경우 연대기의 시작에서 단지 아우구스투스에서 오현제 말기까지의 200년의 기간을 한 장(章)으로 압축해 놓은 데서 생기는 다소 세밀하지 않은 기술도 문제지만, 제정 성립에 대해 요즘의 사가들 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 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면서 중요한 부분은 역시 아우구스투스가 일으킨 제도상의 변화 즉 제정의 성립 과정에 관한 것이다. 흔히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를 꺽은 순간 부터 제정이 시작되었고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형식상)는 정말로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군주)였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역사가 마다의 설명이 제각각이다.

제정 시기 로마인들의 글을 읽다가 보면 아주 늦은 시기 까지도 자신들의 나라를 공화국(Republic)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놀란다. 게다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로도 공화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Consul)이 계속 존재했었으며 로마 제국 시절을 통해서도 아주 혼란한 몇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집정관이 있었다. 집정관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이제 더이상 국가원수로서는 아니지만, 형식상으로나마 로마가 공화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쨌든 아우구스투스 이후 부터 실질적으로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국사가 수행되는 군주정(monarchy)이었다는 점을 뒤집을 수는 없다. 여기서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제스티(Res Gestae Divi Augusti,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에서 단 한 차례도 자신을 후대 로마 군주의 대명사인 황제(imperator)라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6번째(B.C. 28)와 7번째(B.C. 27) 집정관직에서 "나는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국가를 돌려주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 당시 삼두정(triumvirate)이란 과도적 체제를 다시 내란 종료 후엔 원래의 체제인 공화정으로 복귀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에 로마는 분명 형식상으로는 공화정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분명히 실질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 일인이 지배하는 군주제 국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제 즉 임페라토르가 제정로마의 군주에 대한 호칭이 된 것은 분명 그 후대의 일이라 한다. 여기서 그렇다면 도대체 아우구스투스가 무슨 제도적 근거와 권위로 로마의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마치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경우라고나 할까? 과연 아우구스투스는 어떤 속임수를 쓴 것일까 하는 문제가 아우구스투스의 첫 제정 확립과정에서 기번이 주로 다루는 관심사로 생각이 된다. 물론, 그 이후로도 여기에 대한 많은 학자들이 다투어 의견을 내놓아 현재는 이 제정 초기의 정체(政體)를 원수정(元首政, Principate)이라 하여 후대의 더욱 전제화되는 시기와 구별하고 있다.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

 
실제로 아우구스투스의 지위에 관해서 악티움 후 그가 죽을 때까지 여러 차례의 변화가 있어서 과연 정말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였는지도 의심할 만하지만 황제가 되었다면 언제 부터 그러했는지도 확정할 수는 없다. 기번도  아래는 기번이 설명과 미흡한 부분은 내가 보충해서 그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먼저 옥타비아누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가 실제로 패권을 장악한 악티움의 승리는 기원전 31년에 있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멸망시킨 것은 기원전 30년 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 때들을 각기 그가 황제가 된 시점이라고 말하지만, 그간의 일련의 제도적 변화 속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위상을 보면 달리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승리 후에도 그는 한동안 귀국을 미루고 있었으며 이 때 원로원에서 당시 개선장군이란 의미의 임페라토르(Imperator)란 호칭을 그의 첫번째 이름  프라이노멘으로 영구히 사용할 수 있게한다는 결의를 했다. 후에 황제의 의미를 가진 이 칭호의 사용은 이전(공화정 시기 다른 사람)에도 있었고 아직 황제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 후 기원전 29년 8월에 귀국하는데 개선식에서 그의 조카와 양자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나란히 전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런데 기원전 28년에 여러가지 공화국으로서의 다소 비정상적인 관행들 특히 삼두정치 시절의 것들을 폐지하는 일을 하면서 마치 삼두정이 한번 더 갱신이 되어 28년 년말까지 유효한듯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특히 이 해가 27년의 큰 변화에 준비기였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아마 자기 구미에 맞는 순종적인 원로원을 원해서 그랬겠지만 원로원 의원의 명단을 심사해서 그 정원을 줄여버렸다. 이 리스트의 첫번째가 되므로 그는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가 된다. 훗날 그의 원수정에 대한 호칭이라고 불리는 프린켑스 키비타티스(Princeps Civitatis)의 경우는 공식적인 호칭은 아니라고 한다. 27년에는 바로 기번이 말한 교활한 황제가 연출한 코미디가 있었던 해이다. 그 코미디는 이 해에 그가 원로원에서 행한 모든 고대의 권리들을 원로원과 민중에게 회복시킨다는 연설로 시작한다. 그리고 원로원으로 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사흘 뒤에 받는다. 이 때 원로원이 보상차원에서 했던 양보 중에 10년 임기의 프로콘술 권한의 양도가 있는데 이들 속주들이 군사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어 선전포고 강화 등의 권한 등을 독립적으로 가져서 사실상의 왕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황제가 되는 첫걸음을 내딛은 것인 것 같다. 물론 일부의 속주를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원로원에게 돌려주어 황제속주와 원로원속주의 구분이 생긴다. 이 후에도 아우구스투스의 제도적인 지위는 각기 변하고 특히 그의 권한들이 5년 내지 10년 단위로 원로원에서 갱신(이 또한 코미디의 하나지만)되어서 그 때마다 조금씩 체제에 변화가 있었다.  후계자로 생각했던 조카 마르켈루스가 사망한 기원전 23년 역시 또 한번의 큰 조정을 거친다. 여기서 그는 콘술직을 사임하고 호민관 특권을 갖고 통치하게 된다. 그 밖에 레피두스가 죽고는 최고사제의 직위도 물려 받는 등 다소의 위상의 변화가 있지만 대략 이상의 과정을 거쳤다. 이들 시기 중에 과연 언제를 제정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까? 어쨋든 제정의 확립과정은 이런 순서를 통해서 점점 확고하게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기번의 경우 후대에 임페라토르라는 칭호에서 로마의 장군이 가졌던 자기 휘하의 병사들에 대한 전제적 속성의 무제한적 권한을 로마라는 국가에 대해 획득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대개 이런 권한은 군사적인 성격과 민간적인 성격을 함께 결합한 것으로서  이러한 정부형태야 말로 기번이 말하기를 민중에게는 시민적 자유라는 이미지로 한편으로 군대에는 시민정부라는 이미지로 기만하는 아우구스투스의 속임수였다고 말한다.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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