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티아

 

제정시대 내내 로마의 국경은 그 다지 변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Trajan) 황제는 유일하게도 오래도록 유지된 온건 정책을 깨고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가 지난 곳은 새로운 로마의 속주(province)가 되었다. 오현제(五賢帝)의 첫번째였던 네르바(Nerva)와 아무런 혈연관계를 갖지 않았던 그가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네르바에게는 없는 군사적인 능력을 보완하는데 그가 가장 적격이었기 때문임에서 보듯 그의 정복활동은 거침없이 신속하게 행해졌다. 그의 재위 말년에 로마를 떠나 아르메니아, 파르티아로의 진격했고 이 원정 중에 사망했다. 이 중 다키아는 다뉴브를 넘어서 세운 첫번째 로마의 속주가 되어 오랫동안 이름이 유지되었다.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의 경우 일시적인 정복에 그쳤다. 이처럼 파르티아 깊숙히까지 한때나마 위력을 떨쳤던 로마 황제나 군인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간단히 파르티아와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에 대해 다루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선 기번의 8장이 후대에 일어난 페르시아를 다루는데 여기에 간략한 이 지역의 역사가 언급된다. 즉 파르티아가 다스리던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이 멸망시켰던 페르시아였다. 아시리아(Assyria)의 패권을 메디아(Mede)와 바빌론(Babylon)이 양분하다가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고, 그 여세를 몰아 그 군주들이 백만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역으로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후에 그의 제국은 분할되고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조가 로마와 힘을 겨루느라고 힘든 때에는 북방에서 일어난 파르티아인들이 점차 동쪽의 여러 부족들을 흡수해 셀레우코스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이 파르티아에 대해서 기번은 막연히 스키타이(Scyth) 기원의 유목민족이라고 하는데 파르티아의 기마궁수들이 유명했다. 요즘에는 대체로 이란 계통의 페르시아 북쪽에 살던 민족이라고 하는데, 실상 이 파르티아에 대해서는 종족의 기원을 비롯해서 의외로 오늘날까지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멸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다음 정벌했던 곳이 당시 그에 한 지방으로 소속되었던 파르티아와 그 인근의 히르카니아(Hyrcania)였다. 또한 인근 아르메니아도 파르티아와 관계가 깊다고 한다. 다만 굉장히 느슨한 형태의 제국으로 거의 반자치적 독립적인 여러 소왕국들이 그 안에 존재했었다. 기번이 소개한 마케도니아인들이 세운 셀레우키아(Seleucia) 같은 도시는 당시에도 독립적인 공화국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등 헬레니즘적인 전통이 계속 유지되었다. 티그리스 강의 서안에 있는 셀레우키아의 바로 맞은 편에 크테시폰(Ctesiphon)이란 번영하는 도시가 있어 유목적 생활을 즐기는 파르티아의 군주가 자주 머물렀다.

 

파르티아 제국의 최대 영토


파르티아와 로마의 관계는 초기에는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란 북쪽에서 일어나서 인근 부족들을 통합해 점차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와의 경계까지 진출했을 때 셀레우코스는 마침 로마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말처럼 파르티아는 유대왕국과 함께 로마와 아주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굳혀지면서 대립하게 되었고 삼두의 하나였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 중 치욕적인 패배와 죽음을 당한 것으로 양국간의 적대감이 공고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엔 아르메니아란 완충지대가 있어서 파르티아와 로마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113-117년]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은 제정로마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적극적인 대외활동이고 그 신속성을 보면 통쾌한 느낌마저 주지만 남겨진 기록상으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전하는 문헌이 충분치 못하다고 한다. 대략 서기 111년 정도에는 다키아 정복이 끝나고, 그의 총독에 의한 아라비아의 속주화 역시 마무리 되어가는 단계였으며 이러한 여세를 몰아 드디어 113년 가을에 로마를 떠나 114년 초에 시리아의 안티오크(Antioch)에 도착했다. 이는 이 지역에 네로이래의 50년간 평화와 더불어 유지된 관례를 깨고 파르티아 왕이 자신의 동생을 아르메니아 왕으로 세워 이 지역의 영향력을 강화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왕의 사절의 선물 공세와 강화 요청에 대해 말은 필요없고 합당하다고 자기가 몸소 생각하는 일들을 실행할 것이라고 답하고는 아르메니아로 계속 진군했다. 그 지역의 많은 도시와 소국들을 별다른 전투 없이 복속시켰다. 기번이 말했듯 파르티아인들은 그저 도망가기만 했던 것 같은데 마치 스키타이가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을 상대했던 것과 비슷한 전술을 펼친 것인지도 모른다. 엘레게이아(Elegeia)에서 아르메니아왕 역시 맞서는 것을 포기하고 그를 찾아와 무릎꿇고 직접 왕관을 씌워달라고 요청했다. 트라야누스는 이를 거절하고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땅이고 로마의 속주라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원로원은 옵티무스(Optimus)란 가장 탁월하다는 뜻의 칭호를 수여했다. 니시비스(Nisibis)와 바트나에(Batnae) 를 함락하고 아르메니아를 제패하고 조금 성급한 듯 보이지만 파르티쿠스(Parthicus)란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이곳에 수비대를 둔채 114년 겨울 에데사(Edessa)로 물러났고 이듬해(115년)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다시 겨울에 안티오크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정복 등이 역시 116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물론 이미 정복된 지역의 속주화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티그리스 상류를 건너 지금 이라크 북부의 아르빌이 있는 지역이며 고대 앗시리아의 영역인 아디아베네(Adiabene)를 장악했다. 다시 남쪽으로 바빌론에 이르렀지만 파르티아의 내분 때문인지 좀처럼 저항을 볼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이 한해동안 일어났다. 그리고 어려움 없이 크테시폰(Ctesiphon)에 입성해 파르티쿠스란 칭호를 확립했다. 마지막으로 강을 따라 페르시아만의 대양에 도착했는데 이 때가 그의 활동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점령지는 물론 호시탐탐 독립의 기회를 노리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에 곳곳에 장군들을 보내 진압하고 이들이 로마의 새로운 속주임을 분명히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반란으로 그는 더이상의 동방원정의 꿈을 접고 철수해야 했다. 철수 전에는 자신이 몸소 파르티아의 새로운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그는 결국 파르티아에 의해 축출된다. 그리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 117년에 사망하게된다. 이상의 정복활동에 대한 자료는 믿을 만한 것이 많지 않고 실제로 당시의 발행한 동전들은 이들 기록과 부분적으로는 상충되는 가운데 그런대로 기록의 결핍을 보충해 주고 있다. 여기서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등이 로마의 속주로 되어있어 이 황제의 야심을 짐작케 해준다.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의 최대 영토. 정복된 페르시아 영토 등은 곧 반환된다.

 


이 원정의 동기에 대해서는 당시의 많은 로마인들이 트라야누스 개인의 군사적인 야심 때문이라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사후 황제가 되어서 트라야누스의 새로운 점령지들을 포기하고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했고 역시 트라야누스의 공명심을 비난했다. 이렇게 쉽게 점령지를 포기하는 일은 로마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라고 기번은 말한다. 단지 로마의 풍속이나 기강을 바로잡는 감찰관들은 하드리아누스의 이런 행동이 그의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지역은 자연경계가 없어 방어에 불리했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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