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조

 

앞서 말한대로 기번이 자신의 본격적인 연대기가 시작하는 코모두스 즉위 이전의 일들 즉 아우구스투스 사망 후 부터 코모두스 즉위 까지의 일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특히 오현제 이전의 소위 폭정으로 얼룩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나머지 황제들과 플라비안(Flavian:BC69-BC96) 가문의 통치 기와 그 황제들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것이 아깝다며 그들의 성질을 짧게 특징지웠다. 어둡고도 무자비한 티베리우스(Tiberius), 미쳐날뛰는 칼리귤라(Caligula), 유약한 클라우디우스(Claudius), 방탕하면서도 잔인한 네로(Nero) 이것이 성스러운 아우구스투스의 후손들에 대한 기번의 말이다. 플라비안 가문의 도미티아누스(Domitianus)나 그 중간에 잠시 황제였던 비텔리우스(Vitellius) 역시 짐승같은 위험한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이 통치기의 잠깐을 제외하면 아우구스투스 이후 이 불행한 시기의 로마인들은 이 괴물들의 폭정 밑에서 신음해야 했다.

요즘에는 이들 폭군 중에 티베리우스나 도미티우스의 경우는 통치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업적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는 있다. 네로의 경우도 세네카 등의 보좌를 받았던 그의 통치 전기에 대해서는 그 다지 큰 실정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그들 통치기에 보여주었던 그들의 잔인함 때문에 그들이 폭군이란 치욕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불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 특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이런 광기어린 폭정에 제1인자로서 그들의 불안한 위치도 한 몫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제정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공화정이었고 그렇다고 명확한 황제 계승이 확립된 것도 아니었다. 중국의 장자상속처럼 이에 대한 분쟁을 미리 막는 어느정도의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신성한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다음 후계자는 그의 죽은 동생 쪽으로 계승되도록 미리 정해놓고 죽었다. 즉 티베리우스에게는 이미 아들인 드루수스가 있었지만, 동생 드루수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양자로 되어 그의 후계자여야만 했던 것이라 자신의 아들 쪽이 아닌 곳에서 계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고 티베리우스가 보여줬던 잔인함은 이런 불안과 관계되는 것들이었다. 일본의 속담에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참으로 아우구스투스적 평화기의 로마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사실 그 말도 조그만 마을의 일개 영주의 자식에서 거의 맞설자가 없는 패자로 올라서던 시점에서 자신의 측근의 기습을 받고 사망하게 된 오다 노부나가를 빗댄 말이라 한다. 달리 일본을 통일했던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그의 '천하통일'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와 비슷하게 헛되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14-37년]


즉 동료 시민들을 이제 자신의 신민(臣民)으로 부리게 된 로마 황제에게는 외부에선 이제 맞설 수 있는 적이 없어졌을 것 같지만 도리어 자신과 친한 혈족의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가장 큰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대략 다음과 같은 수순을 통해서 적어도 동생의 집안에 다음 계승권을 넘긴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지는 지킨 셈이지만 그 과정이 너무 처참하다. 그 재위시 첫번째 일은 계승권에서 멀어져 있지만 유일한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인 포스트무스를 죽이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게르마니아 전선을 책임지던 후계자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으로 파견했는데 그가 여기서 죽게 되자 속보이게도 자신의 친아들 드루수스를 승진시킨다. 얼마 못가 이 드루수스 역시 사망하고 이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을이 성년의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이 바로 자신의 철천지 원수였던 아내 율리아가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그리피나의 아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물러나 근위대장을 내세워 이들과의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하지만, 그가 자기 가문에 남긴 것은 참혹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은 이들과 싸움을 벌이는 탓에 그는 그의 어머니인 리비아와도 원수처럼 지냈다. 리비아가 죽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 일들을 보면 아그리피나와 그 장자를 유배 생활 속에 죽게 하고 차남은 팔라티노 언덕 황궁 아래 지하실에 유폐시켜 죽게 했다. 물론 반역의 죄를 받았고 이들 파에 대한 숙청이 교묘하고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결국 세째 아들이었던 칼리굴라만이 살아남아 결혼과 관직 등에서 물론 황제의 감시와 견제를 받고서야 황제 사후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티베리우스는 게멜루스(Gemellus)라는 자신의 유일한 친손자를 황위에 올리는 것을 념두해 두고 추진하기도 했지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쨌든 동생의 집안에 후계를 넘겨야 한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지를 지킨 셈이 되었다.

 

칼리귤라 황제 [재위 37-41년]


칼리귤라의 경우 기번이 말한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할 어린 나이에 갑자기 선왕의 죽음으로 용맹하고 현명함을 갖춘 문무백관들의 절을 받게 된 세습군주제 하의 어린 왕들의 경우라고나 할까.[각주:1] 티베리우스의 배려와 감시 속 어느 곳에서도 황제로서의 자질을 단련할 경력을 쌓지 못했던 그는 처음 폭군에 대한 반발로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돌아간다라는 말로 임기를 시작하며 처음에는 신민들에게 인심을 쓴 듯 했지만 자신의 경쟁자가 될 자신의 친족들에 대해서는 티베리우스와 같은 행적을 쫓아갔다. 처음에는 흔쾌히 게멜루스를 후계자로 인정할 듯 하더니 이내 돌연 죽인다. 그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근위대(praetorian band)의 관리들의 음모에 의해 가족이 몰살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 41-54년]


이 두 사람 재위시의 학살로 이제 황위 계승권자가 없어졌다. 여기서 기번은 이후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원로원에 의한 공화정으로의 복고 노력을 전하고 있다. 이 때 카피톨에 모여서 카이사르들의 기억을 저주하고 집정관이 공화국의 대표인 듯 행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회의하고 있는 그 시간에 클라우디우스 집안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가 근위대 병영안에서 황제로 선출되고 원로원은 결국 자유를 포기하고 근위대의 무력앞에 굴복해 이를 승인했고 그 후로 원로원은 공화정 복귀를 위해 영구히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라 불리는 이 사람이 광기의 두 황제의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록 티베리우스이 조카이자 칼리쿨라의 삼촌 그리고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드루수스의 아들이었음에도 그들보다 비천한 신분으로 계속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카이사르 집안에 인정되지 않은 단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 재위시에도 많은 로마의 명문 집안 후손들이 쓰러져갔다고 한다. 

 

네로 황제 [재위 54-68]


네로가 즉위할 수 있었던 것도 황실의 후손인 그의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개 재가했기 때문이다. 네로 자신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어린 아들 브리타니쿠스 외엔 별로 자신의 경쟁자들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안전하게 근위대 안에서 그들에게 사례금을 주고 어머니와 함께 즉위했다. 하지만 네로는 어머니를 죽였다. 그냥 조용히 정권에서 배제하면 될일을 굳이 사람을 시켜 암살한 것은 그녀 입에서 새어나가서는 안되는 비밀이 역시 있어서 였을까? 어쨌든 이 네로의 잔인성에 대해서는 기번은 1권의 마지막 장에 다른 폭군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기록해 놓았다. 물론 타키투스를 인용해서이다. 여기서 이 공화파편에 선 역사가가 이 시대의 역사(아우구스투 사후에서 네로 몰락까지)를 쓰게 되었는지의 이유에 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타키투스의 목적은 역시 이들 영원히 치욕으로 기록될 폭군들을 기록하는 것이 후세에 더욱 교훈이 되리라고 보았겠지만 어쨌든 그는 <아그리콜라>와 <게르마니카>를 시범적으로 쓴 후 네로 몰락에서 네르바 즉위까지 중에 고민하다가 이전 시기를 자신의 <연대기>의 주제로 정했다고 한다. 타키투스가 이렇게 자유롭게 역사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도미티아누스란 폭군이 사망하고 오현제 시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대사를 쓰기가 아직 살아있는 유력자들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러한 탓도 그가 좀 더 이른시기를 다룬 역사를 쓴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아무튼 훗날 바티칸이 세워질 이 세계의 수도 앞에서 벌어졌던 살육극 인간도살의 현장에 대한 타키투스의 묘사가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어쨌든 이들의 폭정으로 네로 이후에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은 더 이상 황제를 배출하지 못했다.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갈바를 맞아들였으며 제정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네로 모자를 새긴 동전>

 

 

  1. 마이클 그랜트의 <로마황제들>에서는 그가 웅변에는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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