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제의 제위 계승법

 

오현제(五賢帝)에 관해서 기번이 가장 주목한 것은 역시 그들의 황제 계승 방식에 대한 것과 황제 개인의 인격 혹은 성격에 관한 것이다. 오현제의 첫번째인 네르바(Nerva)[재위 96-98년]는 거의 죽음을 앞둔 늙은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친척이 아닌 트라야누스(Trajan)[재위 98-117년]를 후계자로 삼았는데 이는 결코 그의 선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로마의 황제는 기본적으로 군대에 대한 영향력이나 그들의 지지를 요한다는 것은 그 이전의 제정사에서 이미 입증되었던 바였으며 네르바의 경우 그 점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각주:1] 만일 그가 유능한 군 지휘관이었던 트라야누스 같은 사람을 후계자로 정해두지 않았다면 그가 죽기 전에도 이에 대한 분쟁으로 제국이 소란해 질 수 있었고 그 화(禍)는 자기 자신에게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Hadrian)[재위 117-138년]의 경우는 트라야누스가 원정 중에 급사한 경우라서 통상적인 후계자가 되는 절차없이 계승했다. 단지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조카뻘의 친척인데다가 그의 조카 딸과 결혼으로 관계가 더 긴밀해 진 것이었으며 황위 계승을 위한 최소한의 절차였던 입양도 조작된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어쨌든 이 하드리아누스에 대해서 그가 정말 현제(good emperor)인지 아님 단순 폭군(tyrant)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될 수 있다. 우선 그의 재위 초기에 네 명의 집정관급의 원로원 의원들을 죽였고 말년에는 병으로인해 잔혹해 졌다고 한다. 말년의 잔혹함은 후계자로 생각되던 자신의 친척을 죽인 것일 것이다. 그의 사후 원로원은 폭군으로 선언해야 할 지 망설였는데 그의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년]가 울며 간청하는 바람에 이를 모면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드리아누스의 변덕은 후계자 선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음 속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러 사람을 올려보고 인정하기도 증오하기도 하면서 흔치않은 미모때문에 안티노우스(Antinous:하드리아누스가 사랑한 미남으로 황제가 아님에도 신격화됨)의 애인에게 추천되었던 게이이면서 관능적인 귀족인 아엘리우스 베루스(Aelius Verus)를 입양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그 자화자찬과 굉장한 기부금으로 동의를 확보해둔 병사들의 박수 중에서 혼자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동안 새로운 카이사르(Caesar)는 때이른 죽음으로 그의 포옹속에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외아들 하나를 남겼다. 하드리아누스는 그 소년을 안토니누스 집안에 추천했다. 피우스(Pius)에 의해 소년이 입양됬다. 그리고 마르쿠스(Marcus)[재위 161-180년]에게 주권에 대한 동등한 지분이 인정됐다. 이 어린 베루스(Verus)는 많은 악덕(惡德)들을 가진 중에도 한가지 덕(德)이 있었는데 그의 더 현명한 동료에 대한 의무적인 존경으로 기꺼이 그를 위해 제국에 대한 저열한 관심을 포기했다. 철학자적인 황제는 그의 어리석음을 해체했고 그의 이른 죽음을 탄식하며 그의 기억 위로 정중히 베일을 던졌다.  
하드리아누스의 격정이 충족되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하는 때마다 그는 가장 고귀한 재능있는 자를 로마의 왕좌에 올림으로써 후손들에게 감사받기로 결심한다. 그의 훌륭한 안목은 공직에서 평생 욕을 먹지 않은 쉰먹은 나이의 원로원 의원과 숙성한 후에는 모든 덕(德)에서 훌륭하게 될 가능성있는 17살 젊은이를 찾아냈다. 이 중 나이먹은 사람이 아들이자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로 선언되었는데 그러나 동시에 더 어린 쪽을 즉시 입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 두 안토니누스(Antoninus)들이 똑같은 현명함과 덕성으로 로마 세계를 42년 다스리게 된다. 비록 피우스(Pius)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각주:2] 가족의 이해보다 로마의 복지를 더 좋아했고 그의 딸 파우스티나(Faustina)를 어린 마르쿠스(Marcus)의 배우자로 주었고, 원로원으로 부터 호민관과 프로콘술(proconsul)의 권력을 얻어주었으며 질시같은 것은 고귀하게 버리거나 혹은 차라리 무시하고 그를 정부의 모든 업무에 친숙하게 했다. 마르쿠스(Marcus)는 한편 그의 후견인의 성격을 존중했고 그를 부모처럼 사랑하고 그의 주권에 복종했고 그가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된 후에는 그 전임자가 남긴 선례와 금언들로 자신의 정부를 규제했다. 그들의 연이은 치세는 사람들의 행복이 정부의 유일한 목표이던 역사상 유일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는 아엘리우스 베루스(Aelius Verus)를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그가 죽었고 별로 검증도 없이 형식상으로 그의 아들을 후계자로 염두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명의 나이차가 나는 참신한 두 인물을 발견했는데 그들이 훗날 각기 피우스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로 불리게 되는 두 안토니누스들이다. 더 어린 쪽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원 이름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Marcus Annius Verus)[재위 161-169년]로 아마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이름이었던 것 같다. 다음 황제로 정해진 피우스 황제는 두 명의 후계자를 입양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루키우스 베루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였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은 공동 황제가 되지만 루키우스는 형식적인데 그쳤다. 그리고 마르쿠스는 루키우스의 누이와 결혼하도록 정해졌었다. 하지만 피우스가 즉위하자마자 파혼하고 자신의 딸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도록 하는데 이 사이에서 훗날 코모두스가 태어난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동양인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중국의 소위 오제(五帝)라는 것과 로마의 오현제(five good emperors)가 썩 비슷하다는 것이 흥미롭다. 중국에도 소위 오제가 있는데 그 중에 잘 알려진 것이 그 중에 으뜸인 황제(黃帝)와 요순(堯舜) 이렇게 세 사람이고 그 중간의 두 임금은 그 다지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소위 선진(先秦) 문헌에도 잘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오현제의 시대를 행복한 시대로서의 향수를 느꼈다면 요순의 시대는 그와 비슷한 어떤 이상적인 시대이기도 했다. 특히 요순의 경우는 유가의 뿐 아니라 제자백가 전체가 그리워 하던 회귀해야 할 이상사회였다. 그리고 요순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능력있는 순(舜)을 골라 사위로 삼아 천자(天子) 자리를 넘겨주었다는 것인데 이런 점이 아주 비슷하다. 또한 5제 중에 실질적으로 요순의 시대가 특히 주목되었던 것처럼 오현제 중에도 하드리아누스나 네르바의 경우는 현제임이 의심스런 경우이며 실질적으로 마지막 두 안토니누스들만이 확실한 현제였다는 것 역시 잘 들어맞는다. 이런 평화로운 황제 계승이 있어서 앞서 있었던 그를 둘러싼 내전과 친족간의 골육상쟁 등을 겪었던 로마인에게 더욱 행복한 시대로 자리매김된 것이었다. 이렇게 사양하면서 능력과 분수에 맞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만 어쩐일인지 마지막 현제의 사후에 로마는 계속 쇠락의 길을 걷고 최고의 자리를 놓코 벌이는 싸움은 갈수록 심해진다.

 

행복의 시대


이 오현제 시대의 행복에 대해 기번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일 세계의 역사상에 한 시대-그 동안의 인류의 상태가 가장 행복하고 번영했던-를 고르라고 한다면 그는 주저없이 도미티아누스(Domitian) 사후 코모두스 재위 전까지를 들 것이다. 로마 제국의 광대한 영역이 덕과 현명함의 인도하에 절대적인 권력의 지배를 받았다.  군대는 4명의 잇달은 황제들의 굳고 온화한 수중에 억제되었으며 그들의 성격과 권위는 의식못할 존경을 받았다. 시민 정부 형태는 네르바(Nerva), 트라야누스(Trajan), 하드리아누스(Hadrian), 안토니누스(Antoninus)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유지되었는데, 그들은 자유의 이미지를 즐겼고 자신들을 법률에 대한 책임있는 장관으로 여김을 기뻐했다. 그 때 로마인들이 이성적인 자유를 누릴 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원수(prince)들은 공화국을 회복했다는 영예를 받을만 한 자격이 있었을 것이다.

 

기번에 의하면 로마의 옛 터는 포도농장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그 행복이란 로마 귀족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로마인이 오늘날 유적으로 보더라도 그 번영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는 있다. 더구나, "행복함"이라 하는 것은 너무 주관적인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을 보더라도 경제적인 성장 면에서 세계 정상급에 있다고 하지만 행복의 지표상으로는 가장 뒤쳐진 나라 중의 하나이다. 기번 자신도 이러한 행복의 한계에 대해 몇가지 주의를 환기했다. 그것은 같은 로마제국내에 시민권자와 속주민 사이의 차별이 존재하며 노예같은 비참한 계층도 여전히 존재하는 단지 평균적이고 "일반적인 행복"이다. 그리고 행복의 근거의 취약함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단지 한 사람 황제의 인품에 달려있고 언제든 폭군이 나타나면 살벌한 다툼과 시민에 대한 박해가 일어날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연구 결과는 더 구체적으로 이런 기번의 평가 조차 의문을 던진다. 버트란트 러셀의 경우 그의 철학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시대에는 노예 제도가 있고 검투사의 쇼가 있어서  대중들은 그런 광적인 스포츠를 구경했고 둔한 칼로 싸우도록 한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법도 곧 소용없이 되었다고 한다. 경제는 더욱 더 엉망이어서 이탈리아는 농경에 불모지처럼 되고 로마인들은 곡물 배급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수의 황제나 그 측근들만 권력을 가지고 누리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좀더 체계적인 연구도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이 그 시대에는 단지 도시지역에만 영향을 줄 수 있었고 대다수의 농촌사회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도시조차도 무산계층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러한 제한된 행복마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망으로 끝나고 로마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죽음으로써 팍스 로마나도 더할 수 없는 행복의 시대도 종말을 고한다. 그래서 그 후의 역사를 주로 기록한 기번의 이 책의 제목이 <로마제국쇠망사>인 것이다. 그래서 이 <로마제국쇠망사>가 어쩌면 우울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기번 역시 자신이 비록 쇠락하는 군주제의 연대기를 쓰기는 하지만 되도록 이전 시기의 순수하고 활기찬 시대를 느껴보기도 하겠다고 한 것도 역시 그런 이유일 것이다.


 

 

  1. 네르바와 트아야누스 간 계승에 있어서 이러한 군사문제에 대한 양자의 대비는 마이클 그랜트(Michael Grant)도 "The Roman Emperors(1985)" 에서 언급하였다. [본문으로]
  2. 이미 어린 나이에 사망해서 제위계승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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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정시대 내내 로마의 국경은 그 다지 변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Trajan) 황제는 유일하게도 오래도록 유지된 온건 정책을 깨고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그가 지난 곳은 새로운 로마의 속주(province)가 되었다. 오현제(五賢帝)의 첫번째였던 네르바(Nerva)와 아무런 혈연관계를 갖지 않았던 그가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네르바에게는 없는 군사적인 능력을 보완하는데 그가 가장 적격이었기 때문임에서 보듯 그의 정복활동은 거침없이 신속하게 행해졌다. 그의 재위 말년에 로마를 떠나 아르메니아, 파르티아로의 진격했고 이 원정 중에 사망했다. 이 중 다키아는 다뉴브를 넘어서 세운 첫번째 로마의 속주가 되어 오랫동안 이름이 유지되었다.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의 경우 일시적인 정복에 그쳤다. 이처럼 파르티아 깊숙히까지 한때나마 위력을 떨쳤던 로마 황제나 군인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간단히 파르티아와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에 대해 다루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선 기번의 8장이 후대에 일어난 페르시아를 다루는데 여기에 간략한 이 지역의 역사가 언급된다. 즉 파르티아가 다스리던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이 멸망시켰던 페르시아였다. 아시리아(Assyria)의 패권을 메디아(Mede)와 바빌론(Babylon)이 양분하다가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고, 그 여세를 몰아 그 군주들이 백만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역으로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후에 그의 제국은 분할되고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조가 로마와 힘을 겨루느라고 힘든 때에는 북방에서 일어난 파르티아인들이 점차 동쪽의 여러 부족들을 흡수해 셀레우코스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이 파르티아에 대해서 기번은 막연히 스키타이(Scyth) 기원의 유목민족이라고 하는데 파르티아의 기마궁수들이 유명했다. 요즘에는 대체로 이란 계통의 페르시아 북쪽에 살던 민족이라고 하는데, 실상 이 파르티아에 대해서는 종족의 기원을 비롯해서 의외로 오늘날까지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멸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다음 정벌했던 곳이 당시 그에 한 지방으로 소속되었던 파르티아와 그 인근의 히르카니아(Hyrcania)였다. 또한 인근 아르메니아도 파르티아와 관계가 깊다고 한다. 다만 굉장히 느슨한 형태의 제국으로 거의 반자치적 독립적인 여러 소왕국들이 그 안에 존재했었다. 기번이 소개한 마케도니아인들이 세운 셀레우키아(Seleucia) 같은 도시는 당시에도 독립적인 공화국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등 헬레니즘적인 전통이 계속 유지되었다. 티그리스 강의 서안에 있는 셀레우키아의 바로 맞은 편에 크테시폰(Ctesiphon)이란 번영하는 도시가 있어 유목적 생활을 즐기는 파르티아의 군주가 자주 머물렀다.

 

파르티아 제국의 최대 영토


파르티아와 로마의 관계는 초기에는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이란 북쪽에서 일어나서 인근 부족들을 통합해 점차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와의 경계까지 진출했을 때 셀레우코스는 마침 로마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말처럼 파르티아는 유대왕국과 함께 로마와 아주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굳혀지면서 대립하게 되었고 삼두의 하나였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 중 치욕적인 패배와 죽음을 당한 것으로 양국간의 적대감이 공고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엔 아르메니아란 완충지대가 있어서 파르티아와 로마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113-117년]


트라야누스의 동방원정은 제정로마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적극적인 대외활동이고 그 신속성을 보면 통쾌한 느낌마저 주지만 남겨진 기록상으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전하는 문헌이 충분치 못하다고 한다. 대략 서기 111년 정도에는 다키아 정복이 끝나고, 그의 총독에 의한 아라비아의 속주화 역시 마무리 되어가는 단계였으며 이러한 여세를 몰아 드디어 113년 가을에 로마를 떠나 114년 초에 시리아의 안티오크(Antioch)에 도착했다. 이는 이 지역에 네로이래의 50년간 평화와 더불어 유지된 관례를 깨고 파르티아 왕이 자신의 동생을 아르메니아 왕으로 세워 이 지역의 영향력을 강화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왕의 사절의 선물 공세와 강화 요청에 대해 말은 필요없고 합당하다고 자기가 몸소 생각하는 일들을 실행할 것이라고 답하고는 아르메니아로 계속 진군했다. 그 지역의 많은 도시와 소국들을 별다른 전투 없이 복속시켰다. 기번이 말했듯 파르티아인들은 그저 도망가기만 했던 것 같은데 마치 스키타이가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을 상대했던 것과 비슷한 전술을 펼친 것인지도 모른다. 엘레게이아(Elegeia)에서 아르메니아왕 역시 맞서는 것을 포기하고 그를 찾아와 무릎꿇고 직접 왕관을 씌워달라고 요청했다. 트라야누스는 이를 거절하고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땅이고 로마의 속주라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원로원은 옵티무스(Optimus)란 가장 탁월하다는 뜻의 칭호를 수여했다. 니시비스(Nisibis)와 바트나에(Batnae) 를 함락하고 아르메니아를 제패하고 조금 성급한 듯 보이지만 파르티쿠스(Parthicus)란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이곳에 수비대를 둔채 114년 겨울 에데사(Edessa)로 물러났고 이듬해(115년) 메소포타미아를 휩쓸고 다시 겨울에 안티오크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정복 등이 역시 116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물론 이미 정복된 지역의 속주화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티그리스 상류를 건너 지금 이라크 북부의 아르빌이 있는 지역이며 고대 앗시리아의 영역인 아디아베네(Adiabene)를 장악했다. 다시 남쪽으로 바빌론에 이르렀지만 파르티아의 내분 때문인지 좀처럼 저항을 볼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이 한해동안 일어났다. 그리고 어려움 없이 크테시폰(Ctesiphon)에 입성해 파르티쿠스란 칭호를 확립했다. 마지막으로 강을 따라 페르시아만의 대양에 도착했는데 이 때가 그의 활동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점령지는 물론 호시탐탐 독립의 기회를 노리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에 곳곳에 장군들을 보내 진압하고 이들이 로마의 새로운 속주임을 분명히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반란으로 그는 더이상의 동방원정의 꿈을 접고 철수해야 했다. 철수 전에는 자신이 몸소 파르티아의 새로운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그는 결국 파르티아에 의해 축출된다. 그리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 117년에 사망하게된다. 이상의 정복활동에 대한 자료는 믿을 만한 것이 많지 않고 실제로 당시의 발행한 동전들은 이들 기록과 부분적으로는 상충되는 가운데 그런대로 기록의 결핍을 보충해 주고 있다. 여기서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등이 로마의 속주로 되어있어 이 황제의 야심을 짐작케 해준다.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의 최대 영토. 정복된 페르시아 영토 등은 곧 반환된다.

 


이 원정의 동기에 대해서는 당시의 많은 로마인들이 트라야누스 개인의 군사적인 야심 때문이라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사후 황제가 되어서 트라야누스의 새로운 점령지들을 포기하고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했고 역시 트라야누스의 공명심을 비난했다. 이렇게 쉽게 점령지를 포기하는 일은 로마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라고 기번은 말한다. 단지 로마의 풍속이나 기강을 바로잡는 감찰관들은 하드리아누스의 이런 행동이 그의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지역은 자연경계가 없어 방어에 불리했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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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왕조[69-96년]와 유대 문제

 

플라비우스 왕조의 경우는 어떻게 보면 유대로 흥하고 또 한편으로 유대로 인해서 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첫번째인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79년]가 무엇보다도 유대전쟁[66~73년] 통에 군권을 장악한 밑천으로 내전에서 승리해 제위에 올랐고 그 아들인 티투스 황제[재위 79-81년] 역시 유대전쟁에 아버지와 함께 참전했다. 그리고 역시 폭군으로 유명한 베스파시아누스의 다른 아들인 도미티아누스[81-96년]는 "기독교 박해자"로 알려져 있다. 기번은 이 시대 유대인 박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짧게 언급한다.


예루살렘 신전(the Temple of Jerusalem)과 로마의 카피톨이 동시에 화염에 소실된 것이 거의 동시라는 것[각주:1]은 다소 놀랍다.전자에 바쳐졌던 공물들이 폭력적인 승리자의 권력으로 후자를 회복하고 화려하게 꾸미도록 전환되었다는 것도 못지 않아 보인다. 황제들은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인 인두세를 거두었다. 그리고 각 개인의 머리에 평가된 액수는 대단치 않을 지라도 계획된 방식이나 거둬들이는 방식은 견딜 수 없는 원성으로 생각되었다.


이것이 바로 네로에서 베스파시아누스 시대 초기까지 로마인들에게 대항한 유대 전쟁 이후에 행해졌던 플라비우스 왕조의 유대 박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는 사실 이 유대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황제가 될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그리고 전쟁에 관한 업적에서 이 유대전쟁의 비중이 큰 편이다.

일단 이 자리를 빌려 유대전쟁을 전후한 유대의 역사를 살펴보겠다. 원래 유대인들이 대부분의 세월동안 나라없는 백성이었고 노예의 후손들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로마의 개입전에 그들은 헬레니즘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에 의해서 이들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그들은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독립의 기간은 짧았고 그들은 분열되어 있었으며 셀레우코스 조 등의 다른 근방의 왕국들이 그랬듯이 이런 크고작은 내부 세력 다툼에 로마의 개입을 이끌었다. 헤롯은 로마의 도움으로 유대를 지배할 수 있었지만 그 사후에 또 다시 왕국은 분열된다. 아우구스투스 재위 중의 어느 때에는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는데 분명치는 않지만 유대의 장관은 시리아 총독의 관할하에 있으며 주로 해안지역인 카이사리아(Caesarea)에 비교적 소규모 병력만을 데리고 와서 세금 등을 거두고 기타 사법과 행정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칼리굴라 황제 때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인해 헤롯(Herod)의 손자인 아그리파(Agrippa) 1세가 3년간(41~44) 왕으로 있었지만 그의 사후에 다시 총독에게 맡겨졌다. 물론 바로 아그리파가 돌아오기 전에 그 유명한 본데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예수를 사형시켰던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때 본데오 빌라도는 카이사리아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이곳을 방문한 예수를 재판했다. (물론 이 아그리파 재위 전의 시대는 유대통치사 중에서  좀 더 불분명한 시대이다. 예수의 죽음에 로마와 유대인 중 누가 더 책임이 큰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로마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기독교들은 껄끄러웠고 실제로 양쪽에서 박해가 이루어졌다.) 이 즈음에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갈등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하면서도 세금이나 자신들의 대우 문제 등이 복잡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유대 총독이 부족한 세금을 보충하러 신전의 공물을 약탈해 갔던 일까지 있었고 로마 지배 후에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한 도시였던 카이사리아에 대하여 그 권리에 대한 자존심 싸움에 로마가 끝내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마침 유대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그리파 2세를 비롯해 많은 유대의 기득권 층은 이 세계제국을 향한 소수민족의 가망없어 보이는 전쟁을 말렸지만, 종교적 열성분자들은 달리 생각했던 것 같다. 디오의 기록을 보면 전쟁을 위해서 이들이 많은 준비를 했던 것 같은데 그것이 그들의 자부심에 불을 짚혔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물이 없어서 고생한 쪽은 오히려 로마군이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땅굴을 곧곧으로 파서 물을 공급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그리고 전쟁전에 많은 유대의 친로마적 지도층이 테러에 의해 숨졌다. 이미 말했듯이 아우구스투스적 평화기에 이곳은 대병력을 주둔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고 유대 총독이 가진 병력이라야 1-2 코르호스(cohort 대대급 부대)정도 였기에 반란에 대처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재위 거의 마지막 해가 임박한 상태였지만 네로는 이 때 더 이상 이 병력으로의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3개 군단(legion)을 거느리게 해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를 파견한다. 그는 다소 반란에 열성적이지 않았던 갈릴리 지역을 먼저 진압하였는데 이 때 장군으로 와 있던 유대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를 사로 잡았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포로의 몸임에도 당당히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자신이 그에게 황제가 되리라는 예언을 주려고 왔다고 하여 이 장래의  황제 가문의 환심을 사게 되었다. 이것이 서기 67년의 일이다. 그리고 네로의 몰락으로 인한 혼란 통의 상황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정복을 잠시 미루고 로마를 향해 진군해 폭군 비텔리우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다. 그리고 서기 69년 전쟁을 재개한다. 책임자는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쓰지만 후대에 티투스 황제라 불리는 그의 장자이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 포위전을 벌인다. 예루살렘에는 신전을 감싸는 마지막 벽까지 3개의 성벽이 있었는데 차례차례 함락되고 성전마저 불탔는데 유대인의 항전은 끝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된다. 또 성전의 경우 기번은 유대인 자신들이 파괴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아마도 티투스의 명령하에 의도적으로 파괴된 것일 것이라 한다. 어쨌든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전체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유대인들은 끝까지 싸우거나 자결하거나 노예로 팔리거나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근의 몇몇 요새들에서 결사항전이 계혹되어 마사다(Masada)의 함락을 끝으로 거의 서기 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에 로마의 통치방식에 변화가 생겨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커져 1개 군단이 예루살렘에 상주하게 되고, 주민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으며 이 와중에 예루살렘 파괴로 주민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오현제 시대에는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 중에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최후까지 항전했던 마사다 요새와 독립 선언 후 발행한 동전>



이렇게 유대인과 좋지 못한 관계를 갖게 된 베스파시아누스 가문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전쟁 중에 그들과 이런 저런 인연을 맺게 되어서 그런지 일부의 유대인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요세푸스가 그 궁정에 머무른 일부터 티투스 황제의 경우 전쟁중 로마편이었던 아그리파 2세의 누나와의 연애는 꽤 유명했다고 한다.

기번에 의하면, 이 전쟁과 관련이 없던 도미티아누스 자신도 말년에 유대 문제로 골치를 썩혔다고 한다. 물론 도미티아누스 역시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은 전형적인 폭군이다. 그의 삼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Flavius Sabinus)의 두 아들들이 그에게는 근심 거리였다. 티베리우스가 그랬듯 그 중 맏이는 반역죄로 죽이고 조금 나약한 듯한 둘째를 내심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클레멘스(Clemens)를 자신의 질녀인 도미틸라(Domitilla)와 결혼시켜서 경력관리상 집정관까지 시켜주었다. 그런데 이들이 나중에 재판을 받고 각각 사형과 유배형에 쳐해지는데 그 죄목이 종교적인 이유 무신론과 유대교를 믿은 탓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들이 초기 기독교와 관계가 되었던지 이것을 네로의 기독교 박해에 이은 2차박해라고 하게 되었다. 어쩌면 못난 클레멘스가 제위를 계승했으면 로마가 훨씬 일찍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지 모를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도미티아누스는 후대 오현제시대를 지난 코모두스가 그랬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궁정에서 살해된다. 이 때까지 도미티아누스 역시 갖가지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사람들을 탄압하고 박해해 왔다. 유달리 많은 간통죄 처벌에 단지 철학을 연구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제 네르바가 즉위하고 로마에 더 할 수 없는 "행복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 카피톨언덕은 비텔리우스와의 내전 중 69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1차유대전쟁 중 70년에 파괴됨.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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