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레디에이터>

 

현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전혀 다른 성향의 아들 코모두스 황제의 이야기는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통해서 유명해 졌다. 이 영화는 알려지다시피 마르쿠스 황제와 같은 대철학자이자 현군(賢君)이 아들 코모두스가 장래 폭군(暴君)이 될 만한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 보지 못할 이유가 없었으며 죽기 전에 로마를 다른 사람 즉 장군 막시무스(Maximus)에게 넘겨주려 했다고 의혹에서 시작해서 막시무스에 의한 코모두스의 제거 과정을 다루고 있다. 물론 잘 알려지다시피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있었던 사실들을 짜깁기해서 등장인물들이나 상황들을 설정했다. 완전히 역사적 기록을 외면한 것은 아니지만, 기록에 충실한 부분은 많지 않으며 단지 사실들은 여러가지 짜집기를 통해서 일종의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과 결합했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코모두스가 후계자가 누구될지 걱정하고 있는 장면 등이 있어 마르쿠스 황제 사망당시 후계자가 미정이었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코모두스는 황제가 죽기 3년전 부터 이미 공동황제였다. 결국, 영화는 새로운 역사적인 의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판타지"를 즉 있었으면 좋았지만 도저히 있었을리 없는 이야기를 영상화하고 있다. 특히 아마도 코모두스의 즉위 후와 그의 사망 까지 그의 어린 조카의 나이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영화 전체가 마르쿠스 황제의 죽음에서 코모두스 재위의 몇년간을 다룬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서기 182년에 있었던 코모두스의 맏누나이자 황후(전 공동황제였던 죽은 루키우스의 부인)였던 루킬라(Lucila)의 음모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


마르쿠스 황제가 게르만 전선에 나가있을 때 전선을 지휘하는 실질적 지휘관은 막시무스 데키무스 메리디우스(Maximus Decimus Meridius)로 그들에 대한 마지막 공세를 취한다. 여기서도 게르만인들은 머리없는 로마인의 시신을 말에 태워 보내 로마군을 격분시키는 야만스럽고 흉포한 존재로 나온다. 장군 막시무스의 꿈은 이 싸움을 마지막으로 은퇴해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농사 지으며 살아 것이다. 막시무스에 의해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에 황제가 애지중지 하는 유일한 혈육들인 코모두스-루킬라 남매가 찾아온다(실제로는 아들은 코모두스가 유일하지만 마르쿠스의 딸들은 꽤 많다). 루킬라의 경우 죽은 전공동황제의 재가하지 않은 과부로 그 사이에 8살 난 아들을 가지고 있다고 영화상 설정되었지만, 실제 루킬라는 코모두스 이후로 살아남았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코모두스의 능력이나 인격에 대해 비관적인 마르쿠스 황제는 죽음을 예감하고 후계에 관해 막시무스에게 넘겨 로마의 영광을 되찾을 모종의 계획을 실현하려 한다. 코모두스가 이 계획을 듣자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고 이를 눈치 챈 장군 막시무스와 그 가족(어린 아들과 아내)들을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여기서 구사일생 살아난 막시무스가 가족을 구하러 고향에 가지만 이미 늦고 그 자신은 노예 검투사(gladiator)가 되어 생존을 위해 동료를 죽여야하는 처지가 된다.그러나 그는 황제가 죽은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대대적인 축제에서 훌륭한 검투 실력을 발휘하여 이 위대한 장군이 검투사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로마의 민중들에게 알린다. 그의 생존 소식에 로마의 민심은 흔들리며 원로원을 무시하는 코모두스의 행동에 대해 반발하는 원로원과 자신과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루킬라와 검투사이지만 아직 군단에 대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막시무스가 힘을 합쳐 음모를 꾸민다. 이 음모는 근위대에 의해 발각되어 사실상 진압되고 관련자는 황제에 의해 구금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코모두스의 헛된 야망에서 나온 그릇된 판단으로 상황이 뒤집히게 된다. 이 부분은 판타지스러운 부분이다. 코모두스가 이렇게 빨리 죽은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구금된 막시무스에게 상처를 입힌채 몸소 그와 검투시합을 해서 그를 죽인다는 것이고 후계자로 생각했던 루킬라의 아들 대신 그가 누나 루킬라와 결혼해서 순수한 혈통의 후계자에게 로마를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이전에 루킬라와 막시무스가 옛 연인사이로도 나온다. 오현제시대의 계승 방식을 따르자면 친아들이 아닌 능력을 인정받은 자가 사위가 되어 후계가 되므로 오히려 루킬라의 남편이 황제계승권을 가졌다고 볼 수 있고, 만일 마르쿠스가 막시무스를 후계자로 바꾸었다면 전부인과 이혼하고 루킬라나 임신이 가능한 자신의 딸들 중 한 명과 결혼시켰을 것이다. 이 시합에서 두 사람 모두 죽게 되고 황후 루킬라는 공화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역시 현실성없는 말을 남긴다.

 

실제 역사 속의 코모두스 황제[단독재위 180-192년]와 루킬라의 음모[182년]


그럼 실제 기록들은 어땠을까?

단지 마르쿠스의 죽을 때의 일들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디오의 경우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코모두스"가 이미 천박하고 잔인한 기질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죽기 이틀 전에 그의 동료들을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런 성격에 대한 우려 이상은 아니었고 후계자를 그의 동료 중의 하나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미숙한 황제를 보좌해서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헤로디안(Herodian) 역시 이 때 마르쿠스가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불러 모아 그의 아들을 사이에 두고 한 유언을 전하고 있다. 거기서 그는 아들이 그릇된 길로 빠져 로마를 위험에 빠뜨릴 것인가를 걱정했고 이를 막기 위해 그들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을 것을 당부했던 것이다. 한편 디오는 이미 그의 아들에게 절망한 나머지 생전에 자주 아들이 일찍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고도 한다. 문제는 그런 그가 왜 오현제식의 양자 입양이라는 방식을 무시하고 끝까지 아들에게 세습을 고수했는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영화상으로는 루킬라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신변에 대한 걱정으로 음모를 꾸몄다고 말하고 있지만 헤로디안은 그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루키우스(Lucius, 전공동황제, 루킬라의 남편)가 죽은 후 루킬라는 그녀의 황실에서 지위(황후)에 따른 특권을 가진 채 아버지에 의해 폼페이아누스(Pompeianus)와 결혼했다. 코모두스 역시 그런 황실의 영예를 가지는 것을 허락했으며 극장에서 황실좌석에 계속 앉았으며 성화(聖火)가 그녀 앞에 놓여졌다. 하지만 코모두스가 크리스피나(Crispina)와 결혼했을 때 관습상 극장의 앞줄은 (새) 황후에게 배당된다. 루킬라는 이것이 견딜수 없었고 황후에게 주어진 영예는 그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남편 폼페이아누스가 코모두스에게 충직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제국 찬탈의 계획에 대해 그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젊고 부유한 귀족인 쿼드라투스(Quadratus)를 시험하려고 그녀와 함께 동침한다는 소문을 냈다.


이렇게 해 쿼드라투스와 그를 통해 원로원의 몇 인사들을 끌어들인 후에 코모두스를 암살할 계획을 짠다. 젊은 원로원 의원인 퀸티아누스(Quintianus)가 검투장에서 비수로 코모두스를 암살하기로 한다. 그러나 찌르기도 전에 "원로원이 이걸 너한테 보냈다"라는 말을 꺼내 근위대에게 붙잡히고 연루자들은 모두 사형당하게 된다. 이것이 루킬라의 음모의 전모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 이후로 코모두스의 성격은 크게 변하고 네로와 도미티아누스같은 폭군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 사건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본다. 영화에서는 코모두스가 짧은 시간안에 막시무스의 등장에 의해서 대중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로마민중들은 적어도 189년까지 현제의 아들인 코모두스까지를 그다지 싫어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민중들은 그의 잘못보다 그를 오도하는 몇몇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집사인 크레안데르(Cleander)를 처형하는 것에 만족했고 그 뒤 3년이나 더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대체적인 영화 내용과 역사기록은 차이가 많지만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은 비슷한 기록이 많이 있다. 코모두스에게 처형된 막시무스란 이름을 가진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퀸틸리우스 집안의 두 형제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들에 대한 기막힌 처형명령에 대해서도 디오가 전하고 있다. 단지 살아남아 도망간 경우는 막시무스가 아닌 그의 아들이었다. 루킬라와 코모두스가 연인관계였다는 암시는 그들의 나이차로 보아 가능성이 없고 그들의 최악의 관계에서도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다만, 실제로 최후에 코모두스가 사망하게 된 것은 그의 변덕스러운 기질을 두려워한 마르키아(Marcia)라는 코모두스의 첩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10여년 뒤의 일이다. 그리고 <황제 역사(Historia Augusta)>는 코모두스의 방탕하고 문란한 사생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검투시합에 대해 말하자면 코모두스는 물론 대중들에게 여러차례의 검투시합의 볼거리를 제공했고 그 자신이 검투시합을 몸소 즐겼다는 기록이 많으며 그 때문에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 아닌 검투사와 사통해서 얻은 아들이란 비아냥을 들었다고 한다. 또,  로마의 코모두스가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영화의 설정도 가능성이 희박하고, 오히려 이런 시도를 했던 것은 훗날의 카라칼라 황제이다.

대개의 동양사가들과 마찬가지로 서양사가들도 권력자 등 역사상 주요인물들에 대한 인격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고 근대사가인 기번역시 이런 코멘트를 황제에는 어김없이 남기고  중요인물일 때 역시 남긴다.  이런 코모두스의 약점과 학정에도 기번은 코모두스에 대해 주로 디오의 말을 받아들인 듯 한데  이런 평가를 내린다.


코모두스는 이 처럼 사람의 피에 대한 미친듯한 갈증을 타고나 그의 어린 시절로 부터 가장 반인간적인 행동을 할 호랑이는 아니었다. 자연이 그에게 사악하기 보단 유약한 그의 기질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의 단순성과 겁많음이 그를 그의 시종들의 노예로 만들었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부패시켰다. 그의 잔인성은 처음 다른 사람의 말에 복종했고 습관으로 고착되어 그의 영혼의 지배적인 격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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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문들

 

오현제 중의 하나인 하드리아누스가 지방관에게 보낸 한 서신에는 자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곧 신성한 트라야누스 파트리쿠스의 아들이자 신성한 네르바의 손자이며 최고제사장

 

네르바와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혈연적 관계가 없고 비록 친척이나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도 친부자간이 아니지만 후계자 지명을 위한 입양을 통해 그들은 이렇게 각기 할아버지, 아버지로 불렀다. 그래서 결국 네르바에서 부터 코모두스까지를 하나의 가문으로 묶을 수 있다. 따라서, 제정초 로마는 왕조별로 서기 68년까지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조(Julian-Claudian Dynasty), 두번재로 베스파시아누스 조(Vespasian Dynasty, 서기 69-96), 세번째로는 오현제(96-180)와 코모두스(Commodus) 까지를 합쳐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조(Nerva-Antonine Dynasty, 96-192)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들 가문의 황제 외에도 네로 사후의 혼란기에 갈바(Galba), 오토(Otto),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세명의 단명황제들이 잠깐 제위에 올랐다.

 

공동황제 마르쿠스와 베루스

 

코모두스의 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잘 알려지다 시피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이다. 그의 이 방면에서의 두드러진 면이 양조부인 하드리아누스에게 눈에 띄어서 차차기 후계자로 차기 후계자인 베루스(Verus)에게 입양되었다. 형식상이지만 마르쿠스와 공동황제로 즉위하는 루키우스(Lucius) 역시 입양이 되는데 원래 마르쿠스의 첫 약혼자는 이 아이의 어린 누이였다. 하지만 베루스가 즉위하자마자 파혼과 함께 자신의 딸인 파우스티나(Faustina)와의 결혼을 권하고 마르쿠스는 이를 받아들이다.

 

피우스 황제가 죽자 다음 계승자는 명백히 그 혼자였지만 오히려 그는 모든 형식상의 권한[각주:1]을 공유하며 루키우스와 공동황제가 된다. 그러니까 루키우스가 죽는 169년까지는 형식상 로마에는 두 황제가 있었던 셈인데 이것은 로마사에서 형식적이지만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공유한 최초의 공동 황제의 사례라 할 만했다.[각주:2] 함께 제위에 오르기 전까지 루키우스의 이름은 루키우스 코모두스였고 이 때 루키우스 베루스로 바꾸고 훗날 마르쿠스의 후계자이자 유일한 아들이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마르쿠스는 그와 11살인 장녀 루킬라(Lucilla)와 약혼시켰다. 바로 그 해 즉 서기 161년에 파우스티나가 쌍둥이 형제를 낳았는데 그 중 나중까지 살아남은 아이가 훗날의 코모두스 황제이다. 그리고 곧 동방이 반란의 기운이 생겨나자 곧 동료황제인 루키우스를 파르티아 전선으로 보내고 2년 후 파우스티나가 13살이 되자 마자 급히 그와 결혼을 시킨다.

 

내외의 시련

 

비록 현제 시기의 절정이라고는 하지만 아우렐리우스 시대는 전쟁이 그칠날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162년에서 166년까지의 파르티아 전쟁은 그다지 큰 문제없이 해결이 되지만 뒤이어 터진 게르만 전쟁은 그의 남은 생애까지 계속되게 된다. 시간상으로도 길었지만 거의 라인-다뉴브 전선의 구석구석에서 많은 게르만이나 사르마티아 계통의 부족들이 로마를 침공해 왔으며 한 때 그리스는 물론 이탈리아 북쪽의 아퀼레이아(Aquileia)까지 약탈하게 된다. 결국 168년 두 황제가 몸소 마르코만니와 콰디족을 정복하러 떠나게 되고 결국 두 사람 모두 이 전쟁 중에 죽게된다. 루키우스는 169년에 마르쿠스는 한참 뒤인 180년에 사망한다. 이러한 사태의 심각성을 잘 이해한 마르쿠스는 야만인들을 상대로 여러차례 승리하여 로마의 위력을 그들에게 보여주는데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이들 부족들의 땅을 속주화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지속적인 공세를 편다.

 

이러한 마르쿠스의 계획에 첫번째의 차질을 빚게 했던 것이 그의 친구였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Avidius Cassius)였다. 기번은 그에 대해 "시리아(Syria)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자발적인 죽음에 의해 적을 친구로 바꾸려는 그의 바램을 좌절시켰다"라고 말했는데 그가 자살을 한 것은 아니다. 기번도 지적했듯이, 이 사람에 대한 처리에서 마르쿠스는 그 특유에 "자신에게만 엄격하고 다른 사람의 불완전성에겐 관대함"의 극단적인 편향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그의 반란 소식을 듣고도 신속한 대응을 하지않고 오히려 지연시켰으며 반란이 종료된 후에도 공모자들에 대한 처벌은 물론 그에 대한 조사조차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대체로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친구에 대한 관대함 때문이다. 디오에 따르면 그가 행한 연설에서 이러한 반란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두 사람 사이의 제국의 운영에 대한 입장차가 우연한 계기로 인해 불행한 사태까지 가게 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고 대화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반란의 계기가 되었던 것 중에는 마르쿠스가 죽었다고 잘못 알려진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고 한다. 사실 시오노 나나미가 번역한 <황제 역사> 중에 카시우스의 편지를 보면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를 칭한 그 역시 당시 로마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로마역사상 최고의 덕성을 가진 황제에 대한 반란은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싱겁게 끝이 난다. 죽었다던 황제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을 안 백인대장이 휘두른 칼에 카시우스의 야망은 덧없이 사라지고 내전을 준비하던 마르쿠스는 다시 야만인들과의 싸움을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바로 그의 아내인 성스런 파우스티나에 대한 것이다. 사실 마르쿠스 역시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특히 말년을 거의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이 전쟁이 전쟁의 첫경험이었다는 것을 보면 파우스티나가 그의 건강에 대해 우려했고 이 때문에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어린 아들 코모두스를 보호하기 위해 카시우스와 공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이 설은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특히 이 반란후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사망하게 되었고 안그래도 그 전후(前後) 처리에 미온적이던 황제가 죽은 그녀를 신성화하면서 카시우스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금지와 그에 대한 서류파기를 요청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아 보인다. 더군다다 황제는 파우스티나의 경우 그의 애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을 높은 관직에 오르도록 배려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어느 경우든 적어도 한 사람에 대해 지나친 관용을 베푼것은 사실이다. 기번은 제4장의 첫머리에서 바로 마르쿠스의 이런 지나친 덕이라는 약점을 지적한다. 기번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뛰어난 이해력은 종종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그의 마음에 의해 기만되었다. 군주들의 기호를 연구하면서 자신은 숨기는 교활한 인간들은  철학적 신성을 가장하고 접근하여 부와 명예를 획득하였다. 형제와 아내 그리고 아들에 대한 그의 과도한 관대함은 사적인 덕의 경계를 넘어 공적 해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관대함은 코모두스의 훗날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오현제 시대의 끝

 

다시 게르만족에 대한 전쟁은 시작되었지만 그의 건강이 보다 빨리 악화되었고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그는 죽음을 맞는다. 177년에 역시 아주 어린 나이로 이미 공동황제가 되어 있던 코모두스가 계승한여 전쟁을 맡게 된다. 죽기 전에 그는 마치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후계자와 시민들에게 그랬듯 코모두스에게 자신이 못다 이룬 게르만 정복을 끝마쳐야 한다는 유언과 함께 많은 그와 함께 활약했던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을 남겨준다. 그리고 기번 역시 디오가 그랬듯 코모두스가 천성적으로 피에 굶주린 호랑이의 성질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듯, 적어도 훌륭한 "고명대신"들이 주변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동안은 로마제국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섣부른 강화를 맺고 세계최고의 대도시 로마의 화려한 생활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훌륭한 충고자들은 그의 주변에서 물러나 하나씩 처형을 당하게 된다.

 

다비드 작(1787)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1. 최고대사제직만 단독으로 보유함. [본문으로]
  2. 아우구스투스 시절 아그리파나 티베리아누스의 사정을 보면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빼면 공동통치자가 그렇게 이례적인 일도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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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초 게르만족

 

기번은 아홉번째 장(章)에서 게르만 민족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이는 주로 제정 초기까지 알려진 그들의 생활방식에 관한 것이다.[각주:1] 사실 후에 로마제국(서로마)을 멸망시킨 것은 게르만족이었지만 이 제정초기의 게르만족의 상태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아직 로마의 힘이 충분히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의 분열은 고도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기번은 주로 게르만을 한 민족으로보고 그들의 기질이나 풍습에 대해 주로 다루었지만 나는 여기서 각 부족들의 분포나 그들이 걸어온 역사를 살펴보고 싶다.

우선 게르마니아의 범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대 게르마니아는 로마의 멍에에 굴복한 라인(Rhine) 동쪽의 속주(province)의 경계를 제하고 유럽의 3분의 1정도 까지 뻗쳐있었다. 거의 현대의 독일(Germany), 덴마크(Denmark), 노르웨이(Norway), 스웨덴(Sweden), 핀란드(Finland), 리보니아(Livonia), 프러시아(Prussia:프로이센), 폴란드(Poland) 대부분이 한 민족(nation)의 여러 부족(tribes)에 의해 거주되었다.그들의 체질, 풍속, 언어는 공통된 기원을 보여주고 분명히 닮은 점이 유지되었다. 서쪽에서 고대 게르마니아는 갈리아로 부터 라인(Rhine)으로 남쪽에서 제국의 일리리아 속주들과 다뉴브(Danube)로 분리된다.



 

 

 제정 초 게르마니아의 민족 분포

 

대체로 라인과 다뉴브의 국경 밖에 게르만족들이 살았으며 그 안에 살던 게르만족들은 결국 로마인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기번은 당시에 게르마니아의 기후가 오늘날보다 훨씬 추었을 것이라는 설득력있는 가설을 이야기했는데 라인강과 도나우의 겨울의 결빙되는 정도가 달랐고 순록같이 극한대에 사는 동물이 카이사르 당시에 존재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이런 점은 고대 게르마니아인들이 지금보다 훨씬 혹독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상태가 후에 극적으로 개선된 것은 당시의 울창한 숲이 제거되었기 때문이고, 늪지에서 물을 빼내자 차츰 농경에도 적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와 분포


어쨌든 이들 분열된 각 부족들과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그 첫 군사적 충돌로 기억되는 것은 킴브리(Cimbri)인들이다. 그것이 기원전 113년 집정관 카르보(Carbo)가 이탈리아 경계에서 그들의 남진을 막았다. 그후로도 이탈리아 국경과 갈리아에서 계속 소란을 피운 이들은 로마의 큰 위협이 되었고 이탈리아 침입까지 계획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마리우스(Marius)가 그의 개혁된 군단을 이끌고서야 그들을 물리쳤는다. 이렇게 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탈리아 까지 위협한 이들은 의외로 원주지가 지금의 덴마크인 유틀란드 반도고 제정초기에도 그곳에 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들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스페인이나 갈리아 등 서유럽 전역을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도 게르만 족의 이동 동기는 인근 부족과의 싸움에서 밀리거나 이런 동기에서 국경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중에도 게르만족과 적잖이 힘을 겨루었다. 이들은 대체로 제정시대의 갈리아의 동쪽에 있던 부족들이다. 벨기카에 속하는 네르비(Nervi)인들도 카이사르를 괴롭힌 부족 중의 하나다. 라인강 바로 우안에 살면서 카이사르를 치러 넘어왔던 부족으로 우시페스(Usipetes)족과 텐테리타이(Tencteri)족이 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재위 때에는 대체로 라인을 넘어 엘베(Elbe) 강까지 로마의 경계를 넓히려는 시도를 했다. 첫번째로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인 드루수스(Drusus)가 기원전 12년부터 9년까지 4년간의 게르마니아 원정에 나섰으며 그의 활동무대는 라인과 엘베 사이에 있고 그 동안 이 지역의 여러 부족과 정벌과 친선의 방법으로 로마의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다. 북쪽 해안의 프리시(Frisi)족과는 우호관계를 맺고 카우키(Chauci)족을 쳤고 궁극적으로 엘베강까지 도달했으며 겨울에는 라인으로 귀환했으나 그 곳에 수비대를 두었다. 대체로 카우키족의 남쪽에는 체루스키(Cherusci)족이 있고 그 남쪽엔 카티(Chatti)족이 있는데 바로 이 체루스키 족의 추장이 게르만족의 영웅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였다. 로마군에서 한때 일했던 그는 서기 9년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후 바루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을 전멸시켜 이 지역의 로마 지배를 포기하게 만들어 다시 국경선을 라인으로 후퇴시겼던 것이다. 후에 게르만족의 자유를 찾아주었던 이 강력한 부족은 차티족의 공격을 받고 약화된다. 잠시 이 지역을 티베리우스가 담당하다 그가 황제가 된 후에는 드루수스의 아들인 게르마티쿠스(Germanicus)가 다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나섰지만 결국 티베리우스에게 소환되고 다시 라인이 국경으로 확정된다. 라인 이동의 게르마니아에는 상·하 2개의 속주가 설치되어 8개 군단이 배치될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그 동쪽 즉 엘베강에는 수에비(Suebi)라는 타키투스가 여러 부족을 거느린 대부족이라고 생각했던 강력한 부족이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중 처음 물리쳤던 게르만 족 왕인 아리오비스투스(Ariovistus)가 이곳 출신이며 이후에 이 수에비족의 압박으로 그 이서의 부족들이 라인을 넘어 로마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 더 동쪽에는 루기(Luggi)라는 대부족이 존재하여 Harii, Helvecones, Manimi, Helisii, Naharvali등이 그 일파였다고 한다. 더 동쪽으로 발트연안에 고토네스(Gotones)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후대 게르만 정복시대에 서유럽을 휩쓴 고트족의 선조라고 한다. 이들은 이 시대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갖 남하한 아주 먼곳에 사는 야만인이었을뿐이다. 그리고 더 멀리에 스웨덴의 옛 이름으로 보이는 수이오네스(Suiones)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이미 강력한 선단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다시 라인국경에서 다뉴브로 들어서면 헤르문두리(Hermunduri)족이 산다고 하는데 타키투스는 이 부족은 로마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 계속해서 그런 관계만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 있는 종족이 마르코마니(Marconmanni)족과 콰디(Quadi)족이다. 바로 이 종족의 침입과 더불어 야만인들이 다뉴브 전선을 넘어 그리스까지 쳐들어오는데 이로써 오현제의 황금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된다. 다뉴브를 더 따라가면 이들과 행동을 함께했던 야지게스(Jazyges)족이 살며 흑해 연안을 따라가면 다키아 족이나 게르만족과는 다르면서 종종 그들과 연합을 이루어 로마를 침공했던 사르마트(Sarmat)인들이 있었다.

적어도 팍스로마나의 시대에는 이들 부족과 충돌도 있었고 여러번 정벌한 기록이 있지만 대체로 이들은 그렇게 강하지도 단결되지도 못했고 상대적으로 로마의 입장에서 이들에 대한 지배는 무난했다고 볼 수 있다. 기번은 그들이 이렇게 약한 입장에 놓이게 된 이유 성격적인 결함을 비롯한 그들의 약점들에 대해 상세히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앞에서 말한 것 이상으로 여러 부족들로 나뉘어졌던 것도 사실은 그렇게 나누어 지배하는 것이 로마의 전략이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게르만족의 이야기를 하면 타키투스의 태도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다. 대체로 타키투스의 태도를 보면 게르만 족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것은 <게르마니아>가 르네상스 시대 발굴된 이래 독일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데 많이 이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오현제시대에 글을 썼지만 그러면서도 동시대의 로마인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 반대되는 기풍을 게르만족이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 그 호의적 태도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의 명언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자유와 가난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는 게르만족은 가난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알듯 모를듯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과 소유가 전제 정치를 허용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잘 이해는 되지 않으나 왠지 이 말을 들으면 플루타르크에 나오는 두가지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하나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이탈리아를 배회하는 들짐승들도 모두 몸을 숨길 동굴이나 은신처가 있지만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은 공기와 햇볕빼고는 아무것도 누릴게 없습니다." 라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카이사르의 부하들이 스페인으로 부임하러 알프스를 넘어 야만인 마을을 보면서 나눈 대화 중에 “이런 동네에서는 최고의 자리를 놓고 싸우고 권력자들처럼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는 일은 없을거야"라고 수근거리는던 것이다. 어쨌든 그가 민주적인 기풍과 자유를 누릴만큼 충분히 용맹하고 명예롭다고 생각하던 게르만족들이 로마의 패권을 빼앗을 것은 염려했지만, 그와 함께 로마가 힘겹게 쟁취한 인류사적인 성취마져 깡그리 파괴해 버릴 줄은 그도 몰랐을 것 같다. 로마는 단지 패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침략아래 유래없는 최악의 폭정을 경험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분열되었던 이들은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 후 한 반세기 후에는 로마의 단순한 이간책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만큼 강해진다. 그들 부족은 프랑크니 고트니 하는 유럽을 뒤흔드는 대규모 연맹체로 통일되니 이것이 로마제국에 최고의 해악이 되었고 인류문명사의 재앙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1. 대체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De origine et situ Germanorum)>를 인용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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