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조

 

앞서 말한대로 기번이 자신의 본격적인 연대기가 시작하는 코모두스 즉위 이전의 일들 즉 아우구스투스 사망 후 부터 코모두스 즉위 까지의 일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특히 오현제 이전의 소위 폭정으로 얼룩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나머지 황제들과 플라비안(Flavian:BC69-BC96) 가문의 통치 기와 그 황제들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것이 아깝다며 그들의 성질을 짧게 특징지웠다. 어둡고도 무자비한 티베리우스(Tiberius), 미쳐날뛰는 칼리귤라(Caligula), 유약한 클라우디우스(Claudius), 방탕하면서도 잔인한 네로(Nero) 이것이 성스러운 아우구스투스의 후손들에 대한 기번의 말이다. 플라비안 가문의 도미티아누스(Domitianus)나 그 중간에 잠시 황제였던 비텔리우스(Vitellius) 역시 짐승같은 위험한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이 통치기의 잠깐을 제외하면 아우구스투스 이후 이 불행한 시기의 로마인들은 이 괴물들의 폭정 밑에서 신음해야 했다.

요즘에는 이들 폭군 중에 티베리우스나 도미티우스의 경우는 통치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업적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는 있다. 네로의 경우도 세네카 등의 보좌를 받았던 그의 통치 전기에 대해서는 그 다지 큰 실정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그들 통치기에 보여주었던 그들의 잔인함 때문에 그들이 폭군이란 치욕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불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 특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이런 광기어린 폭정에 제1인자로서 그들의 불안한 위치도 한 몫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제정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공화정이었고 그렇다고 명확한 황제 계승이 확립된 것도 아니었다. 중국의 장자상속처럼 이에 대한 분쟁을 미리 막는 어느정도의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신성한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다음 후계자는 그의 죽은 동생 쪽으로 계승되도록 미리 정해놓고 죽었다. 즉 티베리우스에게는 이미 아들인 드루수스가 있었지만, 동생 드루수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양자로 되어 그의 후계자여야만 했던 것이라 자신의 아들 쪽이 아닌 곳에서 계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고 티베리우스가 보여줬던 잔인함은 이런 불안과 관계되는 것들이었다. 일본의 속담에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참으로 아우구스투스적 평화기의 로마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사실 그 말도 조그만 마을의 일개 영주의 자식에서 거의 맞설자가 없는 패자로 올라서던 시점에서 자신의 측근의 기습을 받고 사망하게 된 오다 노부나가를 빗댄 말이라 한다. 달리 일본을 통일했던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그의 '천하통일'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와 비슷하게 헛되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14-37년]


즉 동료 시민들을 이제 자신의 신민(臣民)으로 부리게 된 로마 황제에게는 외부에선 이제 맞설 수 있는 적이 없어졌을 것 같지만 도리어 자신과 친한 혈족의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가장 큰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대략 다음과 같은 수순을 통해서 적어도 동생의 집안에 다음 계승권을 넘긴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지는 지킨 셈이지만 그 과정이 너무 처참하다. 그 재위시 첫번째 일은 계승권에서 멀어져 있지만 유일한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인 포스트무스를 죽이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게르마니아 전선을 책임지던 후계자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으로 파견했는데 그가 여기서 죽게 되자 속보이게도 자신의 친아들 드루수스를 승진시킨다. 얼마 못가 이 드루수스 역시 사망하고 이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을이 성년의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이 바로 자신의 철천지 원수였던 아내 율리아가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그리피나의 아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물러나 근위대장을 내세워 이들과의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하지만, 그가 자기 가문에 남긴 것은 참혹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은 이들과 싸움을 벌이는 탓에 그는 그의 어머니인 리비아와도 원수처럼 지냈다. 리비아가 죽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 일들을 보면 아그리피나와 그 장자를 유배 생활 속에 죽게 하고 차남은 팔라티노 언덕 황궁 아래 지하실에 유폐시켜 죽게 했다. 물론 반역의 죄를 받았고 이들 파에 대한 숙청이 교묘하고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결국 세째 아들이었던 칼리굴라만이 살아남아 결혼과 관직 등에서 물론 황제의 감시와 견제를 받고서야 황제 사후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티베리우스는 게멜루스(Gemellus)라는 자신의 유일한 친손자를 황위에 올리는 것을 념두해 두고 추진하기도 했지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쨌든 동생의 집안에 후계를 넘겨야 한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지를 지킨 셈이 되었다.

 

칼리귤라 황제 [재위 37-41년]


칼리귤라의 경우 기번이 말한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할 어린 나이에 갑자기 선왕의 죽음으로 용맹하고 현명함을 갖춘 문무백관들의 절을 받게 된 세습군주제 하의 어린 왕들의 경우라고나 할까.[각주:1] 티베리우스의 배려와 감시 속 어느 곳에서도 황제로서의 자질을 단련할 경력을 쌓지 못했던 그는 처음 폭군에 대한 반발로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돌아간다라는 말로 임기를 시작하며 처음에는 신민들에게 인심을 쓴 듯 했지만 자신의 경쟁자가 될 자신의 친족들에 대해서는 티베리우스와 같은 행적을 쫓아갔다. 처음에는 흔쾌히 게멜루스를 후계자로 인정할 듯 하더니 이내 돌연 죽인다. 그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근위대(praetorian band)의 관리들의 음모에 의해 가족이 몰살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재위 41-54년]


이 두 사람 재위시의 학살로 이제 황위 계승권자가 없어졌다. 여기서 기번은 이후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원로원에 의한 공화정으로의 복고 노력을 전하고 있다. 이 때 카피톨에 모여서 카이사르들의 기억을 저주하고 집정관이 공화국의 대표인 듯 행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회의하고 있는 그 시간에 클라우디우스 집안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가 근위대 병영안에서 황제로 선출되고 원로원은 결국 자유를 포기하고 근위대의 무력앞에 굴복해 이를 승인했고 그 후로 원로원은 공화정 복귀를 위해 영구히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라 불리는 이 사람이 광기의 두 황제의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록 티베리우스이 조카이자 칼리쿨라의 삼촌 그리고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드루수스의 아들이었음에도 그들보다 비천한 신분으로 계속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카이사르 집안에 인정되지 않은 단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 재위시에도 많은 로마의 명문 집안 후손들이 쓰러져갔다고 한다. 

 

네로 황제 [재위 54-68]


네로가 즉위할 수 있었던 것도 황실의 후손인 그의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개 재가했기 때문이다. 네로 자신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어린 아들 브리타니쿠스 외엔 별로 자신의 경쟁자들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안전하게 근위대 안에서 그들에게 사례금을 주고 어머니와 함께 즉위했다. 하지만 네로는 어머니를 죽였다. 그냥 조용히 정권에서 배제하면 될일을 굳이 사람을 시켜 암살한 것은 그녀 입에서 새어나가서는 안되는 비밀이 역시 있어서 였을까? 어쨌든 이 네로의 잔인성에 대해서는 기번은 1권의 마지막 장에 다른 폭군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기록해 놓았다. 물론 타키투스를 인용해서이다. 여기서 이 공화파편에 선 역사가가 이 시대의 역사(아우구스투 사후에서 네로 몰락까지)를 쓰게 되었는지의 이유에 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타키투스의 목적은 역시 이들 영원히 치욕으로 기록될 폭군들을 기록하는 것이 후세에 더욱 교훈이 되리라고 보았겠지만 어쨌든 그는 <아그리콜라>와 <게르마니카>를 시범적으로 쓴 후 네로 몰락에서 네르바 즉위까지 중에 고민하다가 이전 시기를 자신의 <연대기>의 주제로 정했다고 한다. 타키투스가 이렇게 자유롭게 역사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도미티아누스란 폭군이 사망하고 오현제 시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대사를 쓰기가 아직 살아있는 유력자들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러한 탓도 그가 좀 더 이른시기를 다룬 역사를 쓴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아무튼 훗날 바티칸이 세워질 이 세계의 수도 앞에서 벌어졌던 살육극 인간도살의 현장에 대한 타키투스의 묘사가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어쨌든 이들의 폭정으로 네로 이후에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은 더 이상 황제를 배출하지 못했다.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갈바를 맞아들였으며 제정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네로 모자를 새긴 동전>

 

 

  1. 마이클 그랜트의 <로마황제들>에서는 그가 웅변에는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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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유언장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후계자에게 죽어가면서 남긴 것 상속한 것은 단순히 제위(帝位)나 재산(財産)만이 아니었다. 디오(Dion Cassius)는 아우구투스가 죽었을 때 벌어진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베스타 처녀들에게 보관됐던 그의 유지(遺旨)를 드루수스(Drusus,티베리우스의 아들)가 그녀들로 부터 받아 원로원(senate)으로 운반했다. 그 문서를 입회한 자들은 봉인을 조사했다. 그리고 원로원에서 청취되었다. 황실의 해방노예인 폴리비오스(Polybius) 그의 유지(遺旨)를 읽었고 그 때에는 그에 관한 어떤 것에 대해 원로원 의원이 논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유산의 3분의 2는 티베리우스에게 나머지는 리비아(Livia,아우구스투스의 부인)에게 남겨준다는 것이 알려졌다. 적어도 이에 대한 한 보고가 아래와 같다.그는 그녀가 그의 재산을 완전히 누리게 하기 위하여  원로원에 법이 허용하는 이상으로 너무 많이 남기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었던 것이다. 이 둘이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또한 많은 돈을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것을 지시했는데 친척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 계급들은 물론 왕들도 있었다. 민중들에게 4천만 세스테르세스(sesterces)를 남녔다.  시민 병사들의 나머지에겐 사람당 300 씩 남겼다. 게다가, 아이들이 아직 어려 아버지가 상속인이 되어야하는 경우도 이자까지 합해 장성한 후 지급되도록 했다. 이것은 사실 살아있을 때도 그의 방식이었다. 그가 자식을 가진 누구의 재산을 상속할 때는 장성하기만 하면 그 후라도 그 사람 아이들에게 모두 돌려주는데 결코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남의 자식들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고도 자기 딸을 유배에서 풀어주지는 않았다. 물론 선물을 받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녀가 그 자신의 무덤에 묻혀서는 안된다고 명했다. 그의 뜻은 이처럼 명확했다. 4권의 책들이 배달되어 드루수스가 읽어나갔다. 첫째에는 그의 장례식에 관한 상세한 지시가 씌어졌다. 둘째엔 그가 수행한 모든 업적을 기록했는데 이것을 청동 기둥에 새겨 그의 신전에 세우라 명했다. 세째에는 군사적 문제, 세수(稅收), 공공 지출, 국고 등의 제국 행정에 관해 명심할 것들이 담겨졌다. 네번째는 티베리우스와 대중들에게 하는 권고와 명령이었다. 그 권고중에 하나는 너무 많은 노예를 풀어주어 도시를 난잡한 자들로 채우지 말것과 또한 너무 많은 수를 시민으로 등록해서 속국민과 그들 자신사이의 뚜렸한 차별을 두라고 했다. 그는 그들에게 공적 사업을 이해와 실행 양쪽에 능력있는 모든이에게 맡길 것과 어떤 한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것을 타일렀다. 이렇게되면 누구도 폭정(tyranny)을 꿈꾸지 않고 한 사람의 실패가 국가를 파멸시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충고하기를 현재의 소유에 만족하고 절대 제국을 더 이상 크게 늘리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말하길 지키기는 힘들고 지금까지 얻은 것도 잃을 위험에 빠진다고 했다. 이 원리는 그 자신이 말 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따랐던 것이다. 아무튼 그는 야만 세계로 부터 많은 것을 얻어냈으나 그리 하길 바랬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의 권고였다.


첫 부분은 그의 유산 처리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뒤의 부분 특히 그의 유언집 중의 제4권은 앞으로의 제국 통치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로마가 창건된 후 7세기 이상을 지속해온 대외 팽창에 대한 문제에 대해 단호히 이것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 후 다른 황제에게도 계승이 되어 이후 팍스 로마나(Pax Roman)의 시대가 2세기간 지속된다.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마련한 이러한 세심한 배려 속에서 평화속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로마 국경: 온건정책?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간에도 그 이후에도 이러한 평화가 거져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그가 유지해야 할 제국의 경계는 자연이 그들에게 영원히 부여한 서쪽의 대서양과 북쪽의 라인-다뉴브 선(線), 동쪽의 유프라테스강과 남쪽의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의 사막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확립한 후로도 비록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확보했지만 이 국경지대 진출과 안정적 지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더 필요했다.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를 사이에 놓고 파르티아와 항상 긴장 상태에 있었다. 한때 안토니우스에게 주권을 빼앗겼던 아르메니아가 다시 내전 중에 떨어져 나갔지만 장성한 티베리우스가 이 일을 훌륭하게 처리한다. 아르메니아의 왕위다툼에 개입해서 로마에서 자란 왕제를 세우고 나아가 제1차 삼두정 때 크라수스의 패배이래 미루어 왔던 파르티아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했다. 그들에게서 크라수스 전쟁 때의 포로들을 돌려받는데 만족했다. 이 후 아르메니아가 다시 파르티아의 영향하에 들어갔는데 후계자로 촉망받던 그의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비슷한 임무로 파견되었다가 결국 로마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연도 있었다.

일리리아(다뉴브) 국경의 확보 문제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처음 이 문제에 대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양팔이라고 할 수 있는 티베리우스-드루수스 형제가 본격적으로 활약을 펼치게 된다. 기원전 15년에 두 형제가 알프스 근처의 라에티아를 평정한다. 그리고 기원전 12년에는 두 형제가 나란히 일리리아와 게르마니아 국경의 추가 확장을 위해 전장으로 떠난다. 로마로 그들의 승전 소식이 날마다 전해져 온통 축제 분위기이나 실제 성과는 그렇게 좋지 만도 않았다. 라인을 넘어 엘베강을 목표로 떠났던 드루수스는 한 때 그곳 까지 진출하였다고 전해지고 귀환하던 중에 낙마 사고로 숨지는데 이 때가 기원전 9년이었다. 그 후에는 게르마니아전선의 책임을 티베리우스와 죽은 드루수의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떠 맡게 되는데 대체로 기원 후 9년에 로마 장군 바루스(Varus) 군단의 궤멸로 라인강으로 후퇴하고 이후 별다른 확장 노력을 중단하게 되나 이곳은 갈리아 방어의 가장 중요한 위치인 만큼 상하의 두개 게르마니아로 나누어 각각 4개 군단을 상주시키게 된다. 다뉴브 선 확보 역시 그리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티베리우스의 원정으로 노리쿰과 판노니아가 복속된 듯했지만 서기 6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켜 다시 굴복시켜서 가까스로 다뉴브-라인 국경이 확보되었고 여기에도 어김없이 수비대를 진주시켰다.

그 밖에 아우구스투스의 장군들 중에서 이른 시기에 아라비아와 에디오피아 정복을 목표로 진군하기도 했었지만 더위와 갈증으로 철수 했다. 대체로 이곳은 인도양으로의 무역로를 확보하는 목적이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곳의 지배자가 로마와 우호를 맺고 이 곳의 통과를 허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아시아와 그 이남의 지역에 대해서는 로마의 영향하에 있지만 아직도 속주화되지 않은 지역들이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를 비우고 오랜 동안 갈리아로 갔을 때는 브리튼을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브리튼 역시 로마의 영역 밖에 남겨졌었다. 이것이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국경 상황이다.

기번이 말하길 이후로는 그의 이 소중한 상속 재산으로서의 온건 정책(moderate system)은 비록 그 후계자들의 무능함과 두려움 때문이지만 대체로 잘 지켜졌다고 한다.[각주:1] 단 두 번의 예외가 있다면 오늘날의 영국인 브리튼과 다키아 속주에 대한 것이다. 브리튼 정복은 비교적 늦게 그것도 천천히 그것도 섬전체가 아닌 일부만의 정복에 그쳤다. 클라디우스 황제 시절에 그 아들이 브리타니쿠스라고 불린 것으로 보듯이 이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도미티아누스 시절에 아그리콜라(Agricola)란 장군이 스코틀랜드 깊숙히 까지 제패했다고 한다. 유명한 역사가 타키투스의 장인이기도 한 이 장군의 소환 후 은퇴와 죽음에 그 후 폭군인 도미티아누스의 질투가 개입된 것으로 생각했다.[각주:2] 당시 황실의 일원이 아니면 개선식을 거행될 수 없을 만큼 추가적 정복사업 및 눈에 띄는 군사활동은 어려웠다.[각주:3] 그후로 제국의 경계는 스코틀랜드를 배제하고 안토니누스 장벽과 그 보다 후퇴한 하드리아누스의 장벽으로 내려온다.


브리튼 정복이 라인-다뉴브 선과는 무관한 어쩌면 당연한 "예외"라면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달성된 다키아 정복과 속주화는 유일하게 아우구스투스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군사적인 명성을 원했던 야심가 였던 이 황제는 파르티아 깊숙히 쳐들어 가 메소포타미아나 아시리아까지 속주화 시켰지만 다음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가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물론 평화시에도 로마인은 전쟁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군단들은 각 속주에 배치되어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부터 제국을 지켰다. 비록 공화정 말기 보다 군단 수를 줄이기는 했지만 그 만큼 이들 군단병들의 봉급과 그들의 은퇴를 위해 새로운 세금들이 로마시민들에게 부과되었다. 이들이 제공하는 평화 안에서 로마는 유래없이 번영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 파편>

 

 

 

 

 

  1. 그러나, 실상 로마의 국경정책을 소극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단순히 영토확장은 로마의 국익과 관련된 일종의 타협일뿐, 로마의 군사행동은 국경 밖 야만인들에 대한 분리 지배를 위한 적극적 행동이었다. [본문으로]
  2.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함. [본문으로]
  3. 장군들은 황실멤버들 아래에서 ornamenta triumphalia 란 영예를 받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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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의 성립: 원수정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의 세번째 장(章) 부터는 본격적인 연대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3장의 경우 연대기의 시작에서 단지 아우구스투스에서 오현제 말기까지의 200년의 기간을 한 장(章)으로 압축해 놓은 데서 생기는 다소 세밀하지 않은 기술도 문제지만, 제정 성립에 대해 요즘의 사가들 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 장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면서 중요한 부분은 역시 아우구스투스가 일으킨 제도상의 변화 즉 제정의 성립 과정에 관한 것이다. 흔히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를 꺽은 순간 부터 제정이 시작되었고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형식상)는 정말로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군주)였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역사가 마다의 설명이 제각각이다.

제정 시기 로마인들의 글을 읽다가 보면 아주 늦은 시기 까지도 자신들의 나라를 공화국(Republic)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놀란다. 게다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로도 공화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Consul)이 계속 존재했었으며 로마 제국 시절을 통해서도 아주 혼란한 몇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집정관이 있었다. 집정관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이제 더이상 국가원수로서는 아니지만, 형식상으로나마 로마가 공화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쨌든 아우구스투스 이후 부터 실질적으로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국사가 수행되는 군주정(monarchy)이었다는 점을 뒤집을 수는 없다. 여기서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제스티(Res Gestae Divi Augusti,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에서 단 한 차례도 자신을 후대 로마 군주의 대명사인 황제(imperator)라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6번째(B.C. 28)와 7번째(B.C. 27) 집정관직에서 "나는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국가를 돌려주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 당시 삼두정(triumvirate)이란 과도적 체제를 다시 내란 종료 후엔 원래의 체제인 공화정으로 복귀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에 로마는 분명 형식상으로는 공화정을 계승하면서도, 또한 분명히 실질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 일인이 지배하는 군주제 국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제 즉 임페라토르가 제정로마의 군주에 대한 호칭이 된 것은 분명 그 후대의 일이라 한다. 여기서 그렇다면 도대체 아우구스투스가 무슨 제도적 근거와 권위로 로마의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마치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경우라고나 할까? 과연 아우구스투스는 어떤 속임수를 쓴 것일까 하는 문제가 아우구스투스의 첫 제정 확립과정에서 기번이 주로 다루는 관심사로 생각이 된다. 물론, 그 이후로도 여기에 대한 많은 학자들이 다투어 의견을 내놓아 현재는 이 제정 초기의 정체(政體)를 원수정(元首政, Principate)이라 하여 후대의 더욱 전제화되는 시기와 구별하고 있다.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

 
실제로 아우구스투스의 지위에 관해서 악티움 후 그가 죽을 때까지 여러 차례의 변화가 있어서 과연 정말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였는지도 의심할 만하지만 황제가 되었다면 언제 부터 그러했는지도 확정할 수는 없다. 기번도  아래는 기번이 설명과 미흡한 부분은 내가 보충해서 그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먼저 옥타비아누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가 실제로 패권을 장악한 악티움의 승리는 기원전 31년에 있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멸망시킨 것은 기원전 30년 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 때들을 각기 그가 황제가 된 시점이라고 말하지만, 그간의 일련의 제도적 변화 속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위상을 보면 달리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승리 후에도 그는 한동안 귀국을 미루고 있었으며 이 때 원로원에서 당시 개선장군이란 의미의 임페라토르(Imperator)란 호칭을 그의 첫번째 이름  프라이노멘으로 영구히 사용할 수 있게한다는 결의를 했다. 후에 황제의 의미를 가진 이 칭호의 사용은 이전(공화정 시기 다른 사람)에도 있었고 아직 황제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 후 기원전 29년 8월에 귀국하는데 개선식에서 그의 조카와 양자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나란히 전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런데 기원전 28년에 여러가지 공화국으로서의 다소 비정상적인 관행들 특히 삼두정치 시절의 것들을 폐지하는 일을 하면서 마치 삼두정이 한번 더 갱신이 되어 28년 년말까지 유효한듯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특히 이 해가 27년의 큰 변화에 준비기였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아마 자기 구미에 맞는 순종적인 원로원을 원해서 그랬겠지만 원로원 의원의 명단을 심사해서 그 정원을 줄여버렸다. 이 리스트의 첫번째가 되므로 그는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가 된다. 훗날 그의 원수정에 대한 호칭이라고 불리는 프린켑스 키비타티스(Princeps Civitatis)의 경우는 공식적인 호칭은 아니라고 한다. 27년에는 바로 기번이 말한 교활한 황제가 연출한 코미디가 있었던 해이다. 그 코미디는 이 해에 그가 원로원에서 행한 모든 고대의 권리들을 원로원과 민중에게 회복시킨다는 연설로 시작한다. 그리고 원로원으로 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사흘 뒤에 받는다. 이 때 원로원이 보상차원에서 했던 양보 중에 10년 임기의 프로콘술 권한의 양도가 있는데 이들 속주들이 군사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어 선전포고 강화 등의 권한 등을 독립적으로 가져서 사실상의 왕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황제가 되는 첫걸음을 내딛은 것인 것 같다. 물론 일부의 속주를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원로원에게 돌려주어 황제속주와 원로원속주의 구분이 생긴다. 이 후에도 아우구스투스의 제도적인 지위는 각기 변하고 특히 그의 권한들이 5년 내지 10년 단위로 원로원에서 갱신(이 또한 코미디의 하나지만)되어서 그 때마다 조금씩 체제에 변화가 있었다.  후계자로 생각했던 조카 마르켈루스가 사망한 기원전 23년 역시 또 한번의 큰 조정을 거친다. 여기서 그는 콘술직을 사임하고 호민관 특권을 갖고 통치하게 된다. 그 밖에 레피두스가 죽고는 최고사제의 직위도 물려 받는 등 다소의 위상의 변화가 있지만 대략 이상의 과정을 거쳤다. 이들 시기 중에 과연 언제를 제정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까? 어쨋든 제정의 확립과정은 이런 순서를 통해서 점점 확고하게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기번의 경우 후대에 임페라토르라는 칭호에서 로마의 장군이 가졌던 자기 휘하의 병사들에 대한 전제적 속성의 무제한적 권한을 로마라는 국가에 대해 획득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대개 이런 권한은 군사적인 성격과 민간적인 성격을 함께 결합한 것으로서  이러한 정부형태야 말로 기번이 말하기를 민중에게는 시민적 자유라는 이미지로 한편으로 군대에는 시민정부라는 이미지로 기만하는 아우구스투스의 속임수였다고 말한다.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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