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르쿠스 레비두스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반대파 술라(Sulla)가 이듬해 676[BC78]년 죽었을 때 그가 회생시킨 과두제(寡頭制)는 로마국가 상에 무제한 군림하였으나, 이는 강제로 확립된 만큼 그에 맞선 수많은 공개 비공개 적들에 맞서 유지되기 위해 또 다른 강제를 요하였다. 이는 인정된 지도자 아래 움직이는 분명한 목표를 가진 단일 당파의 반대이 아니라, 통상 민중파란 이름 아래 뭉쳐 실상 술라가 조직한 공화국조직 여러 이유와 계획으로 반대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단체들의 반대를 부른 것이었다. 법학자들 시민의 삶과 재산을 다루는 임의적인 술라식 정치에 가담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실정법주의 인물들이 있었다. 심지어 모든 반대자들이 침묵한 술라 생시에도 엄격한 법률가들이 이 섭정에 저항했다. 코르넬리우스 법(Cornelian laws)을 예로 들자면 이는 이탈리아 공동체들에게서 로마 시민권을 박탈해 가는 것이나 사법결정으로 무효화되었으며, 이제는 같은 방식으로 법정에서는 시민이 혁명기에 전쟁포로로 노예로 팔릴 때 그의 시민권이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평결했다. 개혁지향귀족파 더우기, 원로원 내에는 전시기 개혁당과 이탈리아인의 협력을 위해 노력한 소수의 옛 진보주의의 여당들이 있어 이제는 같은 이유로 포퓰라레스(Populares) 당임을 선언하면서 술라의 엄한 과두체제를 다소 완화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민주파 또, 본래 포퓰라레스라 부르던 이들도 있는데 솔직하고 순수하며 협소한 마음의 급진자들로 정강에 따른 슬로건을 위해 재산과 생명을 저당잡힐 이들이며 승리 후에는 힘겨운 충격 속에서 자신들이 실제가 아닌 프레이즈를 위해 투쟁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특별한 목적이라면 없앤 것은 아니나 그 본질적 특권을 가져가 버린 호민관 권한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중에게 신비스런 매력을 행사하였으니 분명한 실제 쓰임보다는 헛된 환영에 불과한 탓이었다-민중의 호민관이라는 이 허명은 한 개의 일천년기 이상 후에 로마를 혁명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술라복고기에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던 수많은 중요 계급이 있었는데 그들의 정치적 사적 이익이 그에 손상을 당했었다. 포강북주민들 이런 이유로 반대당에 속했던 이들 중에 포강에서 알프스산맥에 이르는 지역의 조밀하고 많은 인구들이 있었다. 이들은 665년[BC89]의 라틴권리 부여[각주:1]를 완전로마시민권에 대한 단순한 할부로 생각하여 미래 소유의 토양을 제공했던 것이다. 해방노예층 이 범주에 해방노예들 또한 속하였는데 수적으로나 부에 있어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나 수도내의 그들의 결집은 위험했다. 이들은 보다 이른 시기의 실질적으로 무용한 참정권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본가들 같은 위치에 서있는 자들로는 나아가 거대 자본가들이 있었는데 조심스런 침묵 속에서 끈질긴 분노와 동등한 강도의 끈질긴 힘을 전처럼 유지하였다. 도시무산자들 수도의 민중들은 무료 빵과 곡물들에서 진정한 자유를 인식한 만큼, 불만족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재산피탈자 더 깊은 분노는 술라식 몰수형에 영향받은 시민들 사이에 횡행하였다. 그들이 폼페이우스 가문들 처럼 술라식민자들에게 축소된 영지를 후자와의 영구적으로 충돌한 채로 같은 구역 안에서 누리고 살았던지, 아니면 아레티움인들(Arretines)과 보라테라이인들(Volaterrans)처럼 실질적인 영토를 보유하였으나 로마민중이 그들 목에 들이대는 몰수형이라는 다모클레스의 검(Damocles' sword )의 위협을 받던지, 혹은 특히 에트루리아(Etruria)에서 그랬던 것 처럼 전거주지에서 거지나 숲속의 도둑처럼 전락되었거나 마찬가지다. 금지자와 그 지지자들 최후로 소요는 이 복고의 결과 생명을 잃은 민주파 수장들의 친인척이나 해방노예들에게 까지 퍼졌는데 마우레타니아의 해변을 방랑하거나 비참히 떠도는 망명객으로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의 궁정이나 군대에서 체류하였다.  이 시기 정치적 감정을 지배하는 엄격한 가족관계에 따르면 남겨진 자들이 추방된 친척이 고향으로 올 수 있는 특권을 마련해 주거나 사망 경우에도 그들의 기억과 자녀들에게 따르는 낙인을 해소하고 부치의 영지[각주:2]를 찾아주는 것이 영예로 생각되었다. 보다 특별한 것으로, 그 섭정이 법률로 정치적 천민으로 만든 금지된 자들[각주:3]의 자녀들이 그 법으로 부터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하게 하는 초대을 받아들이게 했다.  

 

경제적 몰락자 이 모든 반대파에 더해 재산들이 파멸된 군상들이 있었다. 고상하건 비천하건 간에 세련되면서도 저속한 잔치나 벌이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빚을 빼면 더이상 고귀함의 자질을 보일 수 없는 귀족 출신들이 그들이었다. 자신의 섭정이 토지소유자로는 만들어 주었으나 농부로는 만들지 못한 술라 군단병들 금지된 자들 금지된 자들의 첫 상속분을 받아 낭비해 버리고 두번째 분을 찾아헤매는 자들 등 이 모든 이들이 기존 질서를 뒤엎기 위해 싸우러 불러들이는 기치 밑이라면 무엇이 쓰여 있는지 상관없이 모여들 준비가 되어 있다. 야심가들 비슷한 필요로 부터 재능을 갖춘 야심가들은 인기를 찾아 스스로를 이 야당에 밀착했다. 이들 중엔 극히 폐쇄적인 옵티마테스(Optimates)에서 입당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승진 기회를 거부해서 무력으로 그 팔랑크스(phalanx)를 뚫고 민중적 지지로 과두제적 배타성과 서열을 가진 법률을 박살내려 하는 자들 뿐 아니라 야심상으로 공모의 반경에 세계의 운명마저 결정짓는 이상에 뜻을 둔 더 위험한 자들까지 있었다. 특별히 변호인 석—술라가 개방해 둔 유일한 합법적 반대의 터전—에서는 그 섭정의 생시에도 이런 야심가들이 법학의 공인된 무기와 전투적 언변으로 이 복고체제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예를 들어, 아르피눔(Arpinum)의 지주의 아들인 노련한 연설 마르쿠가스 툴리우스 키게로(648년[BC106] 1월 3일 출생)가 이 독재관에 대한 반대에서 대담함과 신중함을 섞어 자기 이름을 급속히 알렸다. 그 맞수가 고관 의자를 마련해 남은 여생을 만족스럽게 앉아 지내는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런 노력들은 대단한 중요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좌석이 대중적 인물을 주인으로 찾지 못하고 가이우스 크라쿠스(Gaius Gracchus )가 후계자를 찾게 되면 생사의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허나 그런 이름은 그 주인이 이런 대단한 목적을 제안할 수 있는 이름의 소지자는 적어도 언급되지는 않았다.

 

반대당의 실력 술라가 조직한 과두정부가 힘겨루기하는 반대당은 이런 류로 되어서, 아마 술라 자신이 예상한 것 보다 이른 이 때 그의 죽음에 의해 지시되었다. 그 작업은 전혀 쉬운 것이 아니며 이 시기 다른 정치사회적 악들로 더 어렵게 되었다—특히나 민간분야 최고정무관에 속한 속주들에 군사적 수장들을 유지해야 한는 것과 군단 없이 수도에 몰려든 이탈리아와 이탈리아외부 인구 그리고 사실상 거기서 엄청난 자유상태로 살아가는 노예들를 다루어야 한다는 지독한 이중의 곤란이 컸다. 원로원은 마치 사면에서 위협에 노출된 요새에 위치한 것 같았으나 심각한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술라에 의해 조직된 저항수단은 상당하고 지속가능한 것이었으며, 술라가 세운 정부에 대다수 국민이 분명히 취향을 달리하면서 적대감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정부는 오랜 기간 그 목적 혹은 수단에 동의하지 않는 반대파의 지도부 없이 수십조각 나 있는 혼란스런 오합지졸 무리에 대해 견고한 성벽을 이루었다. 오직 자리를 지키며 그런 그 요새를 건설했던 정력의 불꽃 정도만 그 방어에 붙여주는 정도만 필요했다. 스스스로를 방어하지 않는 수비대들의 경우에는 공들여 지은 요새성벽과 해자도 헛되기 때문이다.

 

지도자 부재 양 진영에서 모든 것이 지도적 인사들에게 궁극적으로 더 의존할 수록 양쪽 다 지도자가 없을 때는 더 불행해진다. 동아리체제 이 기간의 정치란 철저하게 더 타락된 형태의 동아리정치 영향하에 있었다. 이는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가문과 동아리들의 닫힌 연합들이 국가에 대한 귀족적 조직화와 불가분했고 수세기간 로마에서 성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들어서야 그들이 전권적이게 되었는데 지금(690년[BC64] 처음)에야 그들의 영향이 억압의 법적 수단에 의해 견제되기 보다는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질있는 모든 인사들 과두적 자산보다는 대중적 지지를 가진 자들이 헤테이리아이(Hetaeriae)에서 회합했다. 마찬가지로 시민들도 할 수 있다면 무리지어 군사조직과 밀접히 연계된 자기 선거구에서 있는 정치적 행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선거구에는 "부족분배자(divisores tribuum)"라 불리는 그 구를 대표하는 자연적 수장이나 대리인들이 있었다. 이런 정치적 동아리들을 통해 모든 것이 사고 팔렸다. 유권자의 표가 특히 그랬으나 원로원 의원이나 재판관들의표도 마찬가지며 거리소요를 만들어내는 주먹들과 그를 감독하는 두목들도 그랬다. 상하계급의 모임은 요금으로만 구별되었던 것이다. 헤테이라이가 선거를 결정했고, 헤테이라이가 탄핵을 의결했고, 헤타이라이가 그 방어를 수행했다. 이들이 빼어난 변호사를 확보했고 비상한 때에 판관투표권이라는 수익성 좋은 거래를 대규모로 쫓는 투자들 중 하나와 무죄거래를 했다. 헤타이리아이는 효과적 소규모 부대로 수도의 거리를 호령했고, 이 수도와 함께 더무 자주 국가를 호령했다. 이 모든 일들은 특정 규칙에 따라 소위 공개적으로 행해졌다. 헤테이라이 체계는 국가행정의 어떤 부서보다 잘 조직운영되었다. 문명으로 포장된 사기꾼들 중에 흔히 그렇듯 부정한 절차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어야 한다는 묵계는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비밀로 하지 않았고 뛰어난 변호사들은 고객의 헤테이라이와의 관계에 대해 드러내놓고 암시함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이런 일로부터 초연하고도 공직에 나감을 주저하지 않는 한 개인이 있다면 그는 정치적 돈키호테 마르쿠스 카토(Marcus Cato)이다. 당파와 당파싸움은 이 동아리와 그 경쟁자들로 대체되었고 정부는 이들의 공모로 대체되었다. 푸블리우스 케테구스(Publius Cethegus)라는 더 애매한 인물로 전에는 최고의 열심 마리우스파 중 한사람이자 후에는 술라에게 환영된 투항자가 있었는데[각주:4], 이 기간 중의 정치적 행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역할을 했다—교활한 고자질장이이며 원로원정파간 중재자로서 그리고 모든 도당들의 비밀에 정치가다운 투시안을 가진 데 있어 비길데가 없는 자였다. 때로 가장 중요한 명령권직에 대한 지명은 그의 정부인 프라이키아(Praecia)의 말로 결정되었다. 이런 맹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평범을 넘지 못할 때 있는 것이다. 보통 이상의 재능의 어떤 사람도 거미줄 같은 당파체계를 쓸어내지 못했지만, 실상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능력있는 이들에 대한 비참할 정도의 부족함이 뒤에 있었다.

 

 

 

 

 

 

  1. IV. VII. Bestowal of Latin Rights on the Italian Celts, 527년. [본문으로]
  2. 뛰어난 문학교사로 해방노예인스타베리우스 에로스(Staberius Eros)가 금지된 자들의 자녀들에게 무료로 강의를 듣게 하였다는 것에 중요한 특징이 볼 수 있다. [본문으로]
  3. IV. X. Proscription-Lists [본문으로]
  4. IV. IX. Pompeiu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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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제나 자기 노예들이 부화와 갈등 속에 있게 하였다. 그들 사이의 화합은 그에게 의혹과 두려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사형죄의 혐의자를 심리할 때 전 동료노예들 앞에서 행했으며 유죄가 확정되면 죽였다. 그러나, 그가 돈벌이에 재미를 붙이자 농업은 수지맞는 일보다는 여흥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재산을 안전하고 확실한 사업에 투자하였다. 연못 주변 습지, 온천, 의류업지구, 목축지나 숲 등 큰 이익이 있는 곳이면 무엇이든 투자했고, 그의 말마따나 '유피테르(Jupite)에게 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명예스럽지 못한 곳에도 많이 돈을 대부해 주었는데 선박업 같은 것들이다. 대개 이러했다. 대출자들을 모아 큰 단체를 꾸린 후 50명 정도가 되어야 안심하고 끼어들어서 퀸티오(Quintio)라는 그의 해방노예가 다른 자신의 피후견자를 모아 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위험은 크게 줄인 채 수익을 크게 했다. 돈을 원하는 노예에겐 돈을 빌려주었는데 노예들은 그래서 아들을 팔았다. 자비로 일 년간 그들을 가르친 후에는 다시 팔았다. 그 중 다수를 자신이 보유하려 했고 그 경우 아이에게 입찰된 최고가를 빚으로 매겼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도 이런 경제에 신경쓰게 했다. 그래서 가산을 축내는 것은 과부나 할 일이지 남자가 할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카토의 연설 중 격렬했던 중 심했던 것에 자기 마지막 재산이 상속분 보다 증가했을 때 만큼 신에 견줄 만큼 존경받을 수 있고 영예로운 것이 없다는 내용이 있다.

그가 이렇게 잘 살고 있을 때 아테네에서 로마로 사절단이 왔는데 아카데미파의 카르네아데스(Carneades)와 스토아파의 디오게네스(Diogenes)라는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아테네인들을 위해 500 탤런트를 벌금으로 부과한 어떤 결정을 바꾸려하고 청원하려 했다. 오로포스(Oropus) 사람들이 그 고소를 제기했고 아테네인들은 궐석한 상태로 시퀴온인들이 그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이들 철학자들이 도착하자, 시내 젊은이들 중 가장 학구적인 이들이 다투어 맞으러 나가 열성 청중이 되었다. 무한한 힘을 지닌 카르네데스의 매력은과 그에 못지 않은 힘은 동정적인 거대 인파를 모아 도시를 가득 채웠으며 찬양하는 소리가 강한 바람처럼 휘날렸다. 놀랄 재능을 가진 한 그리스인이 마술적 달변으로 모든 반대를 무장해제하며 시내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열정을 불어넣어 그 결과 다른 여흥을 단념하고 철학에만 '열중'한다는 보고가 멀리 퍼졌다. 다른 로마인들은 이에 기뻐하여 젊은이들이 그리스 문화를 익히고 이런 살마과 함께 하는 것을 반겼다.

그러나, 카토는 토론열이 도시를 덮치는 바로 이 때 젊은이들이 그들의 야망의 방향을 용맹스런 행동이 아니라 말로 하는 명성에 쏟을까 두려워했다. 방문철학자들의 명성이 시내에서 높아지고 원로원 앞에서 그들의 연설이 가이우스 아킬리우스(Gaius Acilius) 같은 저명한 사람에 의해 통역되는 것을 보고 카토는 핑계를 대어 이들 모두를 도시에서 쫓아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원로원으로 가서 원하는 것을 용이케 확보 못하는 이들로 된 사절단을 오래 머무르게 하는 것을 두고 정무관들을 책망하였다. 카토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튼 저튼 빨리 결정을 해서 그들의 제안을 표결에 부쳐서 그들의 학원과 강의를 그리스의 자식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로마의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법과 정무관에 귀기울여야 하니까요."

이런 일은 순전히 카르네아데스 개인에 대한 혐오 때문이지 철학 자체나 그리스풍의 문화나 학습에 대한 것 일반을 미워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소크라테스(Socrates)를 관습을 파괴하고 시민들을 꾀어 법에 반하도록 하여 자기 나라의 참주가 되려고 획책한 수다쟁이라고 했다. 그는 하데스 지옥의 미노스 앞에서 예술을 연마하는 것 처럼 늙어줄을 때까지 배울 자들이라며 이소크라테스(Isocrates) 학파를 조롱했다. 아들에겐 그리스문화에 대해 편견을 심어주면서 그리스 학식에 감염될 때 로마의 패권이 깨질 것이라며 예언자라도 된 듯 말하였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마르쿠스 카토>, 21-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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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를 탄압하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3차 포에니전쟁을 일어나게 했던, 바야흐로 로마가 제국으로 발달하던 시절을 문필가, 정치인, 군인으로 살았던 보수주의의 화신 마르쿠스 카토는 문화적으로는 그리스풍의 침투를 안간힘을 써서 막으려는 국수주의자였다. 전쟁에서 한니발을 물리친 친그리스파 스키피오를 탄핵해 울분 속에 죽게했던 카토는 한편으로 이렇게 돈버는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출세 후에도 가난한 농민으로서의 생활습성은 버리지 못했다. 일견 그의 탐욕은 한국의 보수와도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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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진 모든 덕들 중에 대중에게 가장 큰 인상을 준 것은 정의로움이었는데, 그것은 가장 지속적이면서 널리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가난했고 민중의 한 사람일 뿐이지만, '의인(義人)'이란 군주적이며 신적인 별명을 획득했다. 이 덕은 결코 왕이나 참주들이 열망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의 함락자'나 '벼락' 혹은 '정복자' 또는 '독수리' 혹은 '매'로 부리길 원하며 덕보다는 폭력과 권력에 의지한 명성을 닦으려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얻으려고 하는 신성(神性)이란 세가지 인간에 대한 우월한 것이다. 바로 불멸성, 힘, 덕 세가지인데 가장 존중되는 것인 동시에 가장 신성한 것이 바로 덕이다. 단순한 진공이나 궁극적 요소들도 불멸성을 가지며, 커다란 힘은 지진과 천둥 그리고 소용돌이나 홍수로 시현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정의로움은 이성적인 힘의 수련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신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품는 세가지 감정인 질투, 경외, 존경을 생각한다면 인간은 불멸성과 영원성에 관해 신들을 부러워하고 주권과 권력으로 인해 두려움을 품고 정의로움에 대해 존경을 갖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이 바라는 것은 인간 본성으로 닿을 수 없는 불멸성과 운명의 손에 있는 힘인 반면, 정작 우리의 능력내에 있는 유일한 신성함인 덕에 관해서는 그 중 가장 아래의 것으로 취급한다. 권력과 재산을 쥔 인간이 신성해지기 위해서는 정의로와야 하며 그런 인간이 불의하면 짐승과 같아 진다.

이제, 이런 별명으로 인해 처음에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인기를 얻게 되었지만, 후에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가 대중들에게 사적으로 모든 일을 가려 법정의 일을 처리하며 아무도 몰래 자신을 위해 사실상 군주제를 획책하며 무장 경호대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퍼뜨리자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민중은 이 때 그들의 승리에 크게 우쭐해 있어서 자신들을 넘어서는 명성에 대해서 싫어하였다. 그래서 방방곡곡에서 그들이 시내에 모여 아리스티데스의 명성을 싫어하여 참주제에 대한 우려라는 이유로 그를 도편추방했다.

도편추방 판결은 부정에 대한 징법이 아니라 억압적 권력에 대한 제한이었다. 그러나, 이는 질투많은 영혼의 자비로운 쫓아내기 굿으로 심각한 상처를 주기 보다는 10년간의 추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시될 만한 이가 이 형벌을 받받을 때 이가 중단되었는데 휘페르볼로스(Hyperbolus)가 그 마지막이 되었던 것이다. 알키비아데스(Alcibiades)와 니키아스(Nicias)가 권력을 잡고 싸웠을 때 민중이 이 투표를 행하자 이 두 사람은 도리어 자신들의 반대당에 대해 연합해 휘페르볼로스가 걸리도록 했다. 민중은 이 형벌이 잘못 오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화를 내어 이를 폐지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아리스티데스>, 6-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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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함이라는 당시 정치인이 좀처럼 가지기 어려운 미덕을 가졌던 아테네의 의인 아리스티데스는 페르시아군의 침입 때에는 테미스토클레스와 힘을 합쳐 그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 불과 수년 전만 해도 그와 반대되는 성향의 또 다른 정치인인 테미스토클레스의 교활한 정치공작에 걸려 도편추방되는 신세였다. 당시 아테네는 인기있고 권력이 있는 정치인들은 선동가들과 질투와 분노를 품은 민중에게 번갈아가면서 추방되기를 계속했었다. 그러나 최후 만큼은 그는 적어도 테미스토클레스 만큼 불행하지는 않았다.

 

 

아리스티데스에게 투표된 도편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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