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족의 분노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대체로 로마와 이웃하는 야만부족들은 대개 로마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는 부(富)에 대한 단순한 질투 때문만이 아니라 로마인 특유의 이민족에 대한 "분리해서 통치한다"는 분열정책 때문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라인 동쪽의 게르만족은 자신들의 부족 이름에 "자유"를 뜻하는 프랑크(Frank)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유럽의 역사를 바꿔놓는 프랑크족의 유래이다. 우선 그들의 자유란 로마의 속박에 대한 자유일 것이다. 고트족의 전승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들은 이 국경지대보다 훨씬 먼 스칸디나비아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들이 언제부터 이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들은 그곳으로 부터 흑해연안까지 남하해 왔고 이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들의 하는 행동을 보면 마치 신으로부터 로마를 멸망시키라는 계시를 받고 태어난 듯한 생각마져 들때가 있다. 그들의 섞연찮은 남하동기도 그러하고 남하하자 마자 그곳의 원주민과 어울려 살거나 정착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않고 다짜고짜 로마를 향해 진군해 들어가 갖은 약탈과 만행을 일삼은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속에 로마에 대한 깊은 증오가 있지 않았나 한다. 그들의 로마에 대한 투쟁은 이 248년에서 268년의 시기에서도 놀라운 바가 있다. 아마도 그들의 분노와 복수심은 로마가 망할 때까지는 누구도 억누를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는 고트족의 3차례의 해양원정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보스포로스 진출

필리푸스와 데키우스의 두 단명 황제 때에도 국경을 침입하여 로마를 혼란시키고 그 때마다 로마의 정변을 일으키는데 톡톡히 기여했지만 로마의 견제로 육상으로의 길이 막혔는지 고트족은 이제 다른 방식과 다른 루트로 로마를 약탈할 계획을 세운다. 사실 몽고족 같은 북아시아의 야만인들은 바다에 익숙치 않다고 하는데 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좋은 배를 가졌다고 하니 물을 딱히 두려워할 민족은 아닌 것 같은데다가 흑해로 남하하여 반문명화된 보스포로스(Bosporus) 왕국에 정착하여 해상수단 함대를 소유하게 된 것이 그 동기를 제공했다. 감시와 견제가 심한 일리리아 국경의 트라키아나 매시아를 육로로 공격하기 보다 오랜 평화의 단 꿈에 빠진 소아시아의 비교적 후방지대를 공격하는 것이 더 쉬웠다.

 

고트족 1차해상원정


드디어 이 야만인들은 로마세계를 파괴하기위한 첫 항해를 시작했다. 요르다네스(Jordanes)가 쓴 <고트사>에 의하면 이 때 그들을 지휘한 고트족 지도자의 이름은 레스파(Respa), 베두크(Veduc), 투루아르(Thuruar)라 한다. 이 첫번째 로마세계에 대한 탐험은 흑해를 시계방행으로 도는 것으로 시작하여 코카서스(Caucasus)의 서남측의 소도시 피투스(Pityus)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로마측에서도 수세시아누스(Successianus)라는 장군이 그 곳의 성벽을 상대로 엄격한 방어를 할 때는 그들을 가볍게 패주시켜 로마의 매서운 맛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가 난세에 이 믿음직한 장군을 자신의 궁정아래 두고 싶었는지 그를 소환하였는데 이것이 실의에 빠진 야만인들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었다. 고트족은 다시 함대를 일으켜 이번에는 가차없이 그 도시를 장악하고 모험을 통해 적지 않은 수익을 가져다 줄 다른 먹이감을 찾아 항해를 계속한다. 디아나 신전(the temple of Diana) 등이 있는 유서 깊은 도시 파시스(Phasis)가 겨쳐 드디어 멀리 부유한 트레비존드(Trebizond)로 나아간다. 부유하고 인구많은 도시에는 당시의 훈련에 태만한 게으른 군인들만 있을 뿐 수세시아누스 같은 장군은 없었기 때문에 고트족은 이 도시를 장악하고 수많은 전리품들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대량학살, 사원 등 도시의 훌륭한 건축물을 포함한 도시 파괴 등이 이루어졌다. 

 

고트족 2차해상원정


첫 원정에서 엄청난 재물들을 가져오자 다음에는 더 많은 인근 부족들을 규합해서 충실한 2차 항해를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이전에 데려온 로마의 포로들이 향도로도 쓰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미 약탈된 방향의 경로는 따르지 않고 흑해의 서쪽으로 향해해 흑해에서 지중해로 빠지는 관문이자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잇는 보스포로스(Bosphorus) 해협을 목표로 하였다. 이 곳을 경계로 서쪽 유럽엔 비잔티움(Byzantium) 즉 훗날의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이 있고 동쪽으로 소아시아에는 칼케돈(Chalcedon)이 있다. 고트족은 바로 해협 건너편의 소아시아의 비티니아 속주를 목표로 삼았다. 이 곳의 수비대는 그들을 수적으로 압도했지만 나태에 빠진 그들은 이번에도 성난 야만인들에게 감히 맞서지 못했다. 고트족은 칼케돈을 거쳐서 니코메디아(Nicomedia), 니케아(Nicaea), 프루사(Prusa)를 약탈하고 키지코스(Cyzicus) 로 향하던 중 강물이 불어 두번째 원정을 마치고 귀향하였다.

이 때의 상황을 발레리아누스가 듣고 이를 염려해 군단을 별도로 파견하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별 소득도 없는데다가 이 기회를 틈타 드디어 페르시아의 샤푸르(Sapor)가 로마에 도전해 오게 되고 여기서 발레리아누스가 친정에 나섰다가 황제로서 포로가 되는 로마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전 유럽이 프랑크나 색슨 혹은 알레마니 등의 야만인들의 침입으로 딱히 고트족에게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고트족 3차해상원정


세번째 항해에서는 드디어 해협을 통과해 에게해로 쏟아져 나와 그리스 등지를 휩쓸고 다녔는데 이 때는 이탈리아 자체도 위협을 받는 때이며 제국이 분열을 시작할 때라서 별다른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피레이우스(Piræus) 항에 닻을 내리고 아테네를 노렸다. 클레오다무스(Cleodamus)라는 공학자가 황제의 명에 의해 평화기에 크게 이완된 방어체계를 정비하도록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다만 이들이 방심하여 무절제한 약탈에 빠져있을 때 닥시포스(Daxippus)가 자원병들을 모집하여 정박한 고트족의 배들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배를 잃은 고트족은 더욱 용감해 졌을 뿐이며 그리스 각지를 약탈하고서 에피러스(Epirus)의 해변까지 올라가서 일리리아(Illyria) 전체를 휩쓸고 이탈리아를 바라볼 때까지 되었다. 드디어 황제 갈리에누스(Gallienus)가 놀라 여기에서 나울로바투스(Naulobatus)라는 헤룰리족(the Heruli)의 수령을 회유하여 매시아(Maeia)로 밀어닥치는 이들을 가까스로 막아낸다. 그리고 이 싸움이 계기가 되어 갈레리아누스는 곧 음모에 의해 살해되고 로마는 또다른 군인황제를 맞게 된다. 이러한 일을 기번은 다음 황제의 클라우디우스 고디쿠스의 업적을 이야기하면서도 다루고 있다. 대체로 고트족은 이 황제에 의해 타격을 받고 굴복은 하지만 그 복수심의 불꽃을 완전히 잘라버린 것이 아니라 로마의 힘이 약화되었을 때는 위와 같은 끈기로 로마를 황폐화시킬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었다. 물론 그들은 다시 돌아왔다. 

 

누구도 그의 분노를 막을 순 없다 (사진: 영화 케이프 피어 중에서)



아무튼 마지막 세번째 원정은 남은 기록상으로 침입 과정이나 종족 문제 등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기번은 종족 문제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래 일만오천의 전사단이 어떻게 그와 같은 대담한 모험의 손실과 분파를 지탱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어려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검에 의해 난파에 의해 더운 날씨의 영향으로 점진적으로 버려졌더라도 항구적으로 산적이나 투항자들의 군단으로 갱신되었고 그들은 약탈의 법아래 몰려들었으며 난민노예들의 무리가 게르만이건 사마르티아 계이건 자유와 복수이 영광스런 기회를 열정적으로 장악했다. 이 원정에서 고트 민족은 명예와 위험의 우월한 몫을 주장했으나 고트의 기치아래 싸웠던 부족들은 그 시대의 불완전한 역사속에서 때로는 구별되고 때로는 혼동되었다. 그리고 야만인의 함대가 타나이스 하구를 나오는 것으로 보임에 따라 스키티아인이라는 친순한 명칭이 자주 그 혼합된 다수들에게 붙여졌다.


때로 어떤 사가는 코트족을 스키타이족이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불확실한 문제에 대한 이유는 기번이 10장의 서두 등에서 여러번 밝혔듯 기록의 불완전성에 있으며 이는 아직까지 논쟁적인 문제로 보인다.

 

고트족의 제 삼차 원정 전투 지도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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