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1000년제

 

페르시아 원정 도중 새 황제가 된 필립푸스(Philip) 그는 아랍인으로 알려졌으며 별볼일 없는 곳에 태어나 천성적으로 비천하면서도 거만했으며 그와 같은 자리를 명예롭지 않은 방법을 써서 올라갔던 것으로 그려지며 로마 사가들은 그가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기록했다. 다시 야만인 출신의 군인 황제가 탄생한 셈이고, 그는 244년에서 249년까지 황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중에 248년이 바로(Varro)가 제시한 후 널리 받아들여진 로마 건국기년으로 부터 1000년이 되는 해였고 이를 기념한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그러면 이 축제가 열린 것은 사태가 발생한 지 4년 후의 일이지만 기번을 비롯하여 많은 사가들이 이에 대해서 그의 범죄에 대한 기억을 없애고 민중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라고 보고 있다. 또 <황제 역사>에서는 전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가 자신이 사망한 페르시아 원정의 개선식을 위해 준비한 여러 보기 어려운 동물들을 필립푸스 자신이 이 축제의 현란한 검투시합과 써커스에 사용했다고 전한다.

 

콜로세움


사실 이 축제의 이름은 백년제(百年祭, secular games)로 라틴어로는 루디 사이쿨라레스(Ludi Saeculares)라 하며 그 기원은 공화정 시적의 루디 타렌티니(Ludi Tarentini)에 있었다고 한다. 루디라는 것은 로마에서 열리는 여러 축제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대개는 신을 위해 거행되었다고 하며, 사이쿨라레스는 곧 수명과 관계가 있어 대개 그 최대치는 어림잡아 100년이나 110년 정도가 된다. 조시무스(Zosimus)가 이 축제의 유래에 대해 자세히 기록[각주:1]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 수명을 가장 길게 잡아 보는 것이 이 축제의 주기가 된다고 한다. 그 기원은 발레리안(Valerian) 가문의 선조인 발레수스 발세이우스(Valesius Valseius)가 신의 분노 때문에 자식들이 병든 후 아이들을 타렌툼(Tarentum)으로 데려가라는 등의 계시를 받아 아이를 치료하였다는 이야기 이다. 물론 타렌툼은 티베르 근처의 타렌툼이다. 또한 이렇게 깨어난 아이들의 꿈에서 영감을 받아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에서 제단을 발견하여 희생제식을 치른 것으로 그래서 처음에 루디 타렌티니(Ludi Tarentini)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의식은 그 후 로마시가 재난이나 전쟁의 압박을 받을 때 이를 구하기 위해 열렸다고 한다. 그 후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다시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에 의해 열렸는데 그 시기가 정해진 시점은 아니었다고 하며, 도미티아누스(Domitian)가 아우구스투스로 부터 날짜를 계산해서 치렀으며, 그리고 세베루스(Severus)가 그 후를 204년에 치렀다고 한다. 이 중 클라우디우스의 경우가 로마 건국 100주년 단위의 백년제로 아마도 서기 47년으로 로마 건국 800주년 기념제였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필리푸스의 백년제는 로마 건국 천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아울러 있었다. 아무튼 조시무스는 이 제식 방법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는데 이것은 그가 인용하는 시빌 경서(the oracle of the Sibyl)에도 자세히 나와 있으며 그 인용은 "이런 (제식의) 법칙을 라티움(Latium)만 아니라 너희 지배가 미칠 이탈리아까지 준수하여라"라는 구절로 끝이 난다.

 

조시무스의 생각


바로 다음에 조시무스는 이 제전의 의미를 로마의 흥망과 관련시키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계사상 가장 흥미로운 주제이고 기번과 같은 대가가 다룬 이래 많은 사람들이 도전했고 여전히 많은 논쟁과 토론이 이루어지는 "로마 제국 쇠망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이런 의식이 때맞춰 그 경서의 지시대로 거행되는 동안에 제국은 안전하고 거의 알려진 모든 세계에 대해 그 주권을 보유한 것과 같았다는 것을 확신시킨다. 그리고 반면 그것들이 무시되었을 때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sian)가 제국의 고귀함을 져버린 때 쯤 쇠퇴에 빠졌고 알게모르게 야만적으로 쇠락해갔다. 내가 말하는 것이 오직 진실 뿐이라는 것을 나는 연대기를 통해 증명할 것이다. 칠로(Chilo)와 리보(Libo)의 집정관 임기(서기 204년임)에 세베루스가 백년제(secular games) 또는 그 제식을 거행했고 그로 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의 아홉번째 막시미아누스(Maximian)의  여덟번째 집정관 임기(서기 304년임)까지 백년 하고 일년이 되었다. 그 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로 부터 사적인 개인이 되었고 막시미아누스(Maximian)는 그의 예를 다랐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와 리키니우스(Licinius)가 그들의 세번째 집정관 임기(서기 313년임)에 있을 때 110년이 채워졌고 축제가 관습대로 지켜져야 했건만 무시되었고 공무는 그들의 현재의 불운한 상태로 쇠퇴하였다.


바로 이러한 엄격히 정해진 고대 제식을 거행하지 않았던 것이 로마 제국 쇠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설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우리나라 고대의 안팍의 적들 안으로 신라와 밖으로 당나라의 협공으로 멸망당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에 관해서도 비슷한 이유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구려 멸망에 대해서는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의 정사(正史)에 그 비슷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신당서(新唐書)220: 고려전>의 고구려 멸망 당시의 기사에 "고려비기(髙麗秘記)에 이르기를 900년을 미치지 못하여 팔십대장(八十大將)이 이를 멸망시킬 것인데 지금 고(高) 씨가 한(漢)나라 이래 지금 구백년이고 당나라 사령관 이적(李勣)의 나이가 80이였다."란 말이 전하며 역시 <삼국사기>에도 이 말이 실려 있고 <일본서기(日本書記)>는 좀더 자세히 고구려 시조인 중모왕(仲牟王) 즉 주몽이 건구할 때 1000년을 통치하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잘 다스리려면 어려운 일이다. 오직 700년이라여 마땅하다"라고 하여 과연 700년 만에 망했다고 전한다. 백제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귀신 하나가 궁궐에 들어와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지하로 들어가서 그 땅을 파니 등에 글이 새겨진 거북이 가 있어 읽어보니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새달과 같다"고 했다고 한다. 무당을 불렀는데 이를 "둥근 달은 찼으니 기울 것이고 새달은 아직 차지 않았으니 점차 찰 것이다"라고 답하자 이 말을 듣고 왕이 그를 살해하였고 하고 혹은 "둥근 달은 성한 것을 말하고 달이 새로우면 작으니 쇠하는 것이라"고 답해 왕이 기뻐했다고 한다.

미신에 가까운 이야기이지만 합리적 이유를 떠나 어떤 나라가 1000년이나 되었을 때 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기에 이런 이야기들도 나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조시무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를 변명하자면 이렇게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기독교가 로마쇠망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어 왔고 콘스탄티누스가 처음 기독교 왕조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래서 이교도의 다신교 신앙이나 제식이 억압되기 시작했다는 면에서 그렇게 틀릴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매우 편한 발상이면서도 스스로 "나는 연대기를 통해 증명할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의 선구적인 책이 아닐까 한다.

 

로마 창건


사실 과연 로마 건국 기원 흔히 바로가 제시했다는 것에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고 그 중간의 로마 기록이 빈약하였기 때문에 기원전 754년에 대해서는 의심이 많았었다. 기번 자신도 이 기년의 뒷받침이 될 연대기가 결핍되었다고 하고 한 술 더 떠 과학자 아이작 뉴턴의 기원전 627년이 기원이라는 의견마저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우연치 않게 이 때가 고고학적으로도 로마의 언덕에서 정착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때와 일치한다고 한다. 실제로는 754년이라는 것은 로마에게는 이와 같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즈음 건국 1000년 기념제를 맞이 하는 로마인들의 심정이 어땠을까를 한 번 생각해 복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든다. 우선 축제가 열렸으니 즐거웠을 것이다. 비록 기번이 말하기를 이 축제에 노예와 외국인 등 천한 사람들은 배제되었지만 엄격한 제식 절차에 따른 송가를 부르고 희생제를 치르며 음악과 무도회가 뒤따르며 성화가 로마 시내를 환히 밝혔다고 한다. 그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피를 말리는 검투시합과 손에 땀을 쥐는 전차 경기도 열렸을 것이다. 그 열광과 함성 속에서 이 날들 만큼은 코모두스 이래의 잘못된 정치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로마인들은 잠시 한숨을 돌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아는 이들에게는 몰락하는 단계 점차 사멸해 가는 나라 사람들이 로물루스 이래의 찬란한 과거를 생각해 보는 것도 다소 나마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쯤에서 한번 기번을 따라 로마건국 후의 역사를 짧게 요약해 볼까 한다.

늑대의 젖을 먹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대개 초기 정착민을 목동들과 범법도피자들의 작은 무리들로 보는데 이것은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사실 본격적 정착이전에는 떠도는 인간들이 이 일곱언덕의 도시를 이따금 지나가곤 했을 것이다. 초기 정체는 선출적 왕, 귀족 의회, 민회의 세가지 로 구성되며, 전쟁과 종교가 최고 정무관인 왕에 의해 수행되고, 왕만이 원로원이 토론한 법률할 제안하고 30 쿠리에(curie)에서 이를 투표로 비준했다고 평한다. 그리고 로물루스(Romulus), 누마(Numa),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의 세 명을 가장 고대의 입법가로 각기 자신의 세가지 법 분야를 대표한다고 보았고, 타르퀴니우스(Tarquin)의 무법적인 전제를 만나 왕정이 붕괴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고 한다. 공화정 이전의 왕정의 존재는 고대 로마 문자로 렉스(REX) 즉 왕을 의미하는 금석문이 나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존재를 시사한다고 한다. 특히 초기의 역사에서 에트루리아계 왕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영향들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된다고 한다. 이들 발굴 중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1857년의 불치(Vulci)에 있는프랑소아 묘(Francois Tomb)의 벽화 하나인데 Cneve Tarchunies Rumach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이 Marce Camitlnas에게 공격을 받고 있고 Macstrna라는 전사는 사슬에서 Caile Vispins 라는 사람을 풀어주고 있다고 하는데 각기 그나이우스 타르퀴니우스 로마누스(Gnaeus Targuinius Romanus), 마르쿠스 카밀루스(Marcus Camillus), 마스타르나(Mastarna), 카엘리우스 비벤나(Caelius Vibenna)로 읽힐 수 있다고 한다(Holloway, The archaeology of early Rome and Latium, 1994). 여기서 마스타르나(Mastarna)를 에트루리아사 학자였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와 동일인물이라고 했다고 한다. 정확히 그림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건국 초기사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그림 상에 표시되는 결핍된 기록의 시대를 메꿔줄 힌트를 막연히나마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대체로 이들 즉 에트루리아인 세력의 몰락은 년대기 보다 더 늦은 시기까지 계속되었다고 말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이 처음의 400년간을 기번은 가난이라는 힘겨운 학교에서 행운의 여신의 도움과 함께 그들의 덕성을 활기차게 발현했던 시대였다고 기번은 평한다. 비록 그들의 끊임없이 기록된 전투들이 로마의 성벽이나 그 주위에서 일어난 일이었을 지라도 말이다. 그 후 300년간은 드디어 팽창의 시기로 이 시기를 거쳐 이탈리아는 물론  지중해를 지해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세계제국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제정이 성립하고나서의 마지막 300년간은 표면적인 번영과 내부적인 쇠퇴로 평가하는 것이다. 기번은 이 시대의 팽창의 포기에 대한 로마의 전설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카피톨(Capitol)이 세워질 때 트르미누스(Terminus)라는 경계를 주관하는 신이 홀로 유피테르(Jupiter)에게 그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 고집이 로마인은 결코 영토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후대에 이해되었다고 한다. 이런 관례를 처음 깬 것이 하드리아누스(Hadrian)로 그는 전임 트라야누스(Trajan)가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었다. 이것은 오현제 시대의 일로 그 시대를 지나면서 병사와 정무관과 입법가들의 민족 로마의 35개의 부족(tribus)은 이게 로마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속주민의 무리와 섞여 와해되어 각지에서 야만인 용병이 모집되고 그런 오합지졸 군대의 선출로 시리아인(Syrian), 코트인(Goth), 아랍인(Arab)이 차례로 이 위대한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기번은 한탄했다. 아울러 7번째 장을 바로 1000주년이 있었던 248년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내고 있다.


로마의 경계는 아직 서쪽 바다에서 티그리스까지 아틀라스 산에서 라인과 다뉴브까지 뻗었다. 속인들의 분별없는 눈에는 필리푸스가 하드리아누스나 아우구스투스가 그랬던 것 보다 못할 것 없는 군주로 보였다. 형식상은 여전히 같았지만 숨쉬는 건강과 활력이 달아나 버렸다. 민중의 근면성은 일련의 억압으로 낙심되고 소진되었다. 레기온의 훈련은 그 만은 다른 모든 덕들의 소멸후에도 국가의 위대성을 떠받쳤으나 야만주위로 썩어들어가거나 황제의 허약성에 의해 이완되었다. 국경의 힘은 언제나 무기와 요새화에 달린 것인데 알게 모르게 약화되었고 가장 훌륭한 속주들이 야만인의 탐욕이나 야망에 노출된 채 남겨졌던 것이며 그들은 곧 로마 제국의 쇠퇴를 발견했던 것이다.

 

 

 


 

  1. Zosimus, Historia Nova, 2.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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