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에누스의 흉상


포스트무스[재위 260-269년]와 갈리아제국[260-274년]

 

사실 253년 비운의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가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는 260년까지 그의 나라는 사실상 세명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이미 즉위 초 발레리아누스는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를 공동황제로 만들어서 자신은 동방으로 나아가면서 서방의 일은 그에게 맡긴다. 후에 258년 쯤 갈리에누스는 라인 전선을 그의 어린 아들인 살로니우스(Saloninus)를 명목상으로 남겨두어 다른 장군들이 책임지게 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될 무렵부터 야만인의 계속된 침략과 갈리에누스에 대한 불만때문에 각지의 군단들이 제 각기 황제를 선언하게 된다. 갈리아의 경우 살로니우스는 살해되고 그를 보살피도록 의무가 있는 포스트무스(Postumus)가 도리어 황제가 되어 로마에서 독립된 갈리아 제국을 출범시키어 나중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합쳐질 때까지 계속 그 상태로 남게 된다. 발레리아누스는 제국을 삼분했지만 실제로는 포스트무스 외에도 30명의 폭군들의 배신과 음모로 더욱 조각조갖 나뉘어지게 되고 그 마지막 단계에서 다시 로마와 갈리아와 팔미라의 셋으로 수렴된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발레리아누스가 관련된 동방의 일들을 이야기 했다면 이제는 갈리에누스의 서방의 일을 다뤄볼까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그렇게 연대기를 자신있게 구성하기란 석학들에게도 어려운 바이거니와 나에게는 더욱 더 그러하여 대체로 몇가지 그 시기에 있었던 로마를 혼란시켰던 야만인들의 침략과 여러가지 재난들에 대해 언급해 두도록 하겠다.

 

이민족들의 침입

사실 전에 언급했던 크림 반도로 이동해왔던 고트족(the Goths)의 경우 혜성처럼 떠오른 새로운 신진 세력이라면 갈리에누스를 괴롭혔을 라인과 다뉴브 동쪽의 로마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게르만족은 로마인들과 너무도 오래 접촉하고 항쟁해 와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로마의 이러한 혼란을 이들이 노칠리가 없었으며 이들의 침입이 결국 갈리에누스로 부터 이곳의 민심을 돌려놓아 결국 갈리아제국의 분리를 허용하게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며 기타의 다뉴브 등지의 군대의 반란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이 시기 로마와 이들의 관계의 새로운 특징 중 하나는 보면 로마가 야만인들에게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것에 너무나 일상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원정 중 필리푸스 아라부스(Philip the Arab)가 그러하기로 약속한 것은 잘 알려졌고 조지무스(Zosimus)의 경우 갈루스 역시 년공(年貢)을 바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시기 정통 황제라 할 수 있는 갈리에누스 역시 내외의 적을 상대로 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야만인과 평화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즉 야만인들은 로마가 그들에게 약속한 년공을 바치지 않으면 언제라도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흉노 선우: 중행(中行)은 한(漢)의 사신에게 공물이 좋으면 그만일 뿐이고 말은 필요없다고 답한다


프랑크족의 침입

 

프랑크족(the Frank)의 침입에 대해서 일단 기번의 말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로마인들은 오래동안 저지게르마니아(Lower Germany) 사람들의 대담한 용기를 경험해왔다. 그들의 힘의 통일은 더 가공할 침입으로 갈리아를 위협하고 황제 세력의 상속자이자 동료인 갈리에누스의 존재를 요하였다. 그 군주와 그의 어린 아들 살라니우스가 트레베스(Treves-트리에, 갈리아 벨기카의 수도)의 궁정에서 제국의 위엄을 보인 동안 그의 군대는 그들의 장군 포스투무스(Posthumus)에게 지휘되었는데 그는 후에 발레리아누스 가문을 배신하였지만 그 군주국의 큰 이해에 대해서는 충실했다. 기만적인 칭찬의 말과 메달들이 긴 일련의 승리들에 대해 어둡게 이야기 해준다. 트로피와 칭호들은 (이런 증거가 증명력이 있다면) 포스투무스의 명성을 증명하는데 그는 반복적으로 게르만족의 정복자(The Conqueror of the Germans)와 갈리아의 구원자(the saviour of Gaul)로 그려진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 즉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진 특징적 지식 어느 것 중의 단지 하나가 넓은 기준에서 허영과 자찬의 이런 기념물들을 지워버린다. 라인은 속주들의 보호자(Safeguard of the provinces)라는 칭호로 신성화되었지만 프랑크가 활성화된 대담한 정신의 사업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방벽이었다. 그들의 신속한 파괴가 그 강에서 피레네(the Pyrenees)까지 뻗었다. 이 산들에서 멈춘 것도 아니다. 스페인은 게르만인들을 두려워 한 적 조차 없었는데 그들의 침임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십년간 갈리에누스의 재위 중의 대부분 그 풍족한 나라는 감당할 수 없는 파괴적 적대감의 무대였다. 그 평화로운 속주의 번영하는 수도 타라고나(Tarragona)가 약탈되고 거의 파괴되었고, 오로시우스(Orosius)라는 5세기에 그 대 도시들의 폐허 중에 흩어진 형편없는 집들을 쓴 사람의 늦은 시대에도 야만인들의 격분을 아직 기록했고, 아프리카로 지나쳤다. 그 쇠잔한 나라에가 더 이상 다양한 약탈품을 공급할 수 없을 때 프랑크족은 스페인 항구에서 함선들을 장악하여 마우리타니아(Mauritania)로 스스로를 수송하였다. 그 먼 속주가 이들 야맘인의 성화에 놀랐는데 그들은 새로운 세계에서 떨어진 것 처럼 그들의 이름과 행동과 안색이 아프리카 해안에는 마찬가지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사실 이들 라인 이동의 게르만인들은 로마에 대한 분노라면 신흥의 고트족 못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역시 그 제국 방어가 이완되었던 틈으로 갈리아는 물론 배를 타고 아프리카 까지 약탈대를 보냈던 것이다. 로마가 포스트무스 같은 경험있고 노련한 장군이 이들을 잘 달래지 않았다면 이들이 입히던 피해도 고트족 못지 않았을 것이다.

 

알레마니와 마르코마니


이는 대체로 라인방면의 침입이라면 사실 갈리에누스가 후대에 책임을 져야 했던 것은 중부 다뉴브나 알프스를 너머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침략에 대한 것이다. 알레마니(the Alemanni) 역시 알프스를 넘어와 이탈리아를 위협했다. 그 중에 254년에 마르코마니가 라벤나까지 알레마니가 258년에 밀라노까지 쳐들어 왔다고 전하며(로마사, 하이켈하임), 이런 경우는 전선에 나가 있던 황제를 이탈리아로 소환하게 했을 것이며 전선에서의 지휘공백으로 다뉴브에서 잦은 군단의 지지를 받는 가짜 황제들이 난립하는 악순환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들의 이탈리아 침략에 대해서 기번은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또다른 더 가공할 만한 관점측면에서의 더 영광스런 사건인 알레마니의 침입은 더 아래 제국의 작가 하나에 언급된다. 삼십만의 호전적 사람들이 밀라노(Milan) 근처의 전투에서 겨우 만명의 로마인의 우두머리인 갈레리아누스에 의해 몸소 격파되었다고 이야기 된다. 우리는 그러나 커다란 가능성으로 이 믿기지 않은 승리를 역사가의 신뢰성이나 황제의 부하의 과장 어느 쪽이든지 돌릴 수 잇다. 갈리에누스가 이탈리아를 게르만족의 성화로 부터 보호하려 한 것은 아주 다른 성질의 무기에 의해서다. 그는 전쟁과 정복에서 수에비(Suevi) 부족 알레마니와 종종 헷갈렸던 마르코만니(the Marcomanni) 왕의 딸 피파(Pipa)와 약혼하였다. 그 아버지에게는 그의 동매의 군주로서 판노니아(Pannonia)의 정착을 넉넉히 인정했다. 꾸미지 않은 미인의 토착적 매력은 충실하지 못한 황제의 사랑 속에서 그 딸을 붙잡아 두었고 정책이 이런 사랑에 더욱 확고히 연결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오만한 편견은 결혼이란 이름을 거부하고 아직 한 시민과 한 야만인의 불경한 야합으로 폄하하였고 게르만 공주를 갈리에누스의 상스러운 첩이라고 낙인찍었다.



 

 

<어느 결혼식>

어쨌든 이에 크게 힘입어 일단은 알레마니족을 몰아낼 수 있었으므로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나 적을 다시 국경안으로 끌어들였고 결국 다뉴브 군단이 그에게 계속해서 반기를 들게 하고 계속 일리리아와 로마 사이를 왔다갔다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황제역사>의 경우도 갈레리아누스가 잘 한 일은 그의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해 준 오다이나이에게 그곳의 통치권을 인정해 준 일 밖에는 없다고 할 뿐 이 부분에 대한 그 업적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대체로 갈리에누스에 대한 평가는 당대 사가의 경우 좋지가 않다. <황제역사>에서는 그에 대해 여러번 조롱하고 있다. 그는 통치력은 별도로 하더라도 부친의 상중임에도 여러가지 사치와 오락을 즐기는 등의 품행에서도 좋지 못했고 또한 잔인한 면모까지 보여주었다. 내우외환속에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지극히 불운한 인간중 하나였던 그가 그런 충격적인 소식들을 듣고 대구한 이야기는 겨우 그들이 "모탈(mortal)"일 뿐이라고 한 것이었다. 

이러한 야만인의 전방위 침략과 잦은 내란외에도 이 시기의 로마를 괴롭히는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자연재해와 기근 등이었다. 갈레리아누스 재위 중에 지진 등이 많아서 시빌 경서에 다시 사람들이 신탁을 묻는 일이 많았다고 <황제역사>는 전한다.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하루에 5000명의 사람이 질병으로 죽어갔으며, 이집트는 내전 중에 그 지배자가 수시로 바뀌었으며 이 시기 알렉산드리아의 인구는 2/3가 사라졌다 한다.[각주:1]

 

 

  1. 하이켈하임, 로마사.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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