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집트(Egypt)가 아테네의 원조로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고 헬라스의 삼단노함들이 키프로스(Cyprus)와 실리시아(Cilicia)까지 이르며 키몬(Cimon)이 노련한 해전술을 가지고 등장하자 페르시아 왕은  이에 맞서 헬라스인의 적대심의 성장을 막게 했다. 드디어 병력이 움직이고 장군들이 배치되며 테미스토클레스에게도 왕이 헬라스 문제에 그를 필요로 한다는 서신이 도착했다. 그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미 옛 동료시민들에 대한 분노를 거의 잊고 전쟁으로 얻는 대단한 영광과 권력에도 무디어진 채였는데 아마도 그가 나서도 소용이 없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테네에는 그 때 다른 훌륭한 장군들이 많고 키몬도 엄청난 기세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른 시기에 그가 얻었던 성취와 기념비들의 명성을 생각하여 그는 최상의 길이 자기 생을 마감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신께 제의를 바치고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그들과 악수하고 현재의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황소의 피를 마셨다고 하고 또 다른 말로 재빨리 독약을 들이켜 마그네시아(Magnesia)에서 죽었다고 한다. 나이 65세로 일생을 마감했고 그 대부분은 정치이 바쳤었다. 그의 죽음의 이유와 상황을 설명들은 왕은 전보다 더 그를 존경하여 그의 친구들을 더 우대하였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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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던 테미스토클레스는 동포들의 등쌀에 쫓겨 드디어 페르시아 왕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그의 신하가 된다. 이오니아의 마그네시아에서 관리로 늙어가던 그에게 그리스에 맞서 싸우는데 그를 이용하려는 왕의 명령이 전해지자 풍운아 테미스토클레스는 친구들과 마지막 향연을 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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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테네 시에서 추방되어 아르고스(Argos)에 머무는 동안 파우사니아스(Pausanias)의 죽음의 틈이 아테네의 적대자들에게 구실을 주었다. 그에 대한 반역죄 고발을 한 이는 아그라울레(Agraule) 구 출신의 알크메온(Alcmeon)의 아들 레오보테스(Leobotes)였고 스파르타가 이를 지원했다. 파우사니아스는 반역적 계획에 연루되는 동안 테미스토클레스와 은밀히 연락했었다. 그러나 그가 나라에서 추방되고 극도의 고통을 겪는 것을 보자, (페르시아의) 왕에게서 받은 서신을 보이면서 비천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일 뿐인 헬라스인들에 마서 싸우는 일에 동지가 되어 주기를 대담히 요청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파우사니아스의 요청을 거절하였고 제휴는 철저히 고부했다. 그러나 이는 비밀로 하면서 그런 반역 기도를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파우사니우스가 스스로 이를 포기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그 비이성적 맹목적으로 추구되던 그 계획이 탄로나길 바랬던 것이다. 이제 파우사니아스가 죽음을 당하자, 그의 서신과 서류 중 그 문제에 관한 것이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스파르타인들은 그를 규탄했고 질투심많은 동료시민들도 그를 비난했다. 그는 출석해서 변명하지는 않았지만 서신을 통해 자신을 변호하면서 과거의 그릇되게 고발된 예를 들었다. 한 때 그가 동료시민들 앞에서 고발되어 중상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은 다스릴 생각만 있고 다스림 받을 생각은 없는 이이기에 자기자신을 헬라스와 함께 야만인들에게 팔아넘기는 짓은 않는다고 했었다. 민중은 고발자의 말에 설득되어 사람을 보내 헬라스 회의의 법정에 그를 세우도록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미리 전해 들은 테미스토클레스는 바다 건너 코르키라(Corcyra)로 갔는데 그곳은 그가 이전에 이득을 준 기여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코린트인들과 그들의 분쟁을 중재해 코린트인들에게 20 탤런트의 배상을 하게 하고 레우카스(Leucas)를 공동 식민지로 인정했었다. 그는 다시 에피로스(Epirus)로 달아났지만 여전히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에게 쫓견 채 절망적인 망명과 도망 생활을 하며 몰로시아인들의 왕 아드메투스(Admetus)에게로 갔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23-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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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군을 이끌던 그의 친구 파우사니아스의 몰락과 추방이 있은 후 화는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찾아왔다. 반역죄 수배 중 사망한 이후 그의 모의에 테미스토클레스와 관련된 서신들이 발견되자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합십해서 그들 법정에 세우려고 했다. 두 강대국 모두의 적이 되어버린 그가 이제 그리스에서 발붙일 곳이 없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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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천성적으로 명예를 사랑했는데 기억에 남는 그의 언행으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아테네 시가 그를 제독으로 뽑았을 때 그는 적시에 공사의 업무를 수행하지 않고 한 번에 여러 업무와 만남을 처리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이 위대하고 강력하다고 생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항해시까지 미루어 두었다. 

바다로 떨어진 야만인들의 사체들을 둘러보면서 그는 금팔찌와 금장신구를 차고 있는 것을 보고 지나치면서 따르는 친구에게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번 해보게. 자네는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니니까!"

다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안티파테스(Antiphates)와 그를 업신여기는 자이지만 그가 명성을 얻게되자 대우가 달라졌던 이에게

"젊은이, 사실 늦긴 했지만, 이제 우리. 그러나, 이제 우리가 함께 제대로 정신차리게 되었군."

라고 말했다.

또 아테네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를 진정으로 존경하고 기리지 않고 폭풍칠 때 가지 밑으로 은신처를 삼다가 날이 개면 그 잎을 뽑는 플라타너스 같이 그를 대우한다고 말하곤 했다. 세리피아 사람에게 명성을 얻은 것이 그에게가 아니라 아테네 시에게 더 걸맞을 거라는 말을 듣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사실이오. 하지만 내가 세리피아인이었다면 그런 명성을 얻지 못했겠지만 그대가 아테네인이라도 나와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오." 

또, 아테네를 위해 엄청난 봉사를 했다고 자신을 생각해 주는 동료장군들 중의 한 사람이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도전적이 되어 자신을 그에 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축제일과 더불어 다음날이란 자가 싸우기 시작하면서 '그대는 갖가지 일로 시달리지만, 내가 나타나면 모두가 전에 제공된 여가를 즐기게 된답니다'고 하더랍니다. 축제일은 이에 대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나타나지 않으면 그대는 나타나지도 못하는 주제입니다. 내가 살라미스에서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했다면, 그대와 그대의 동료들이 지금 어디 있을 수 있겠소?"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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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미스토클레스는 자만심과 허영심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이러한 탓으로, 권력과 명예의 정점에서 그는 시민들의 질투와 의심을 사 독재와 권력집중을 막기 위해 제정된 도편추방제의 희생양이 되어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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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인들은 라우레이움(Laureium)의 은광(銀鑛)에서 온 소득을 분배하곤 했는데, 테미스토클레스만이 감히 민중 앞에 이런 분배를 포기하도록 하고 그 돈으로 삼단노전함을 아이기나(Aegina)와의 전쟁을 대비해 건조하도록 하는 제안을 제출하였다. 이것은 헬라스를 고통스럽게 한 가장 격렬한 전쟁으로 그 때까지 (아이기나의) 섬주민들은 선박의 수적 우위를 통해 바다를 지배했다. 

이렇게 그는 다리우스(Darius)나 페르시아인의 가공할 만한 이야기로 시민들을 전율시키는 대신 더 쉽게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페르시아의 위협은 너무나 멀어서 별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아이기나에 대해 가졌던 쓰디쓴 질투심을 이용할 수 있었고 이로 부터 그가 원하는 무장을 쟁취했다. 그 결과 그 돈들로 삼백척의 삼단노전함을 만들어 나중에 크세르크세스(Xerxes)를 상대로 살라미스(Salamis)에서 쓰이게 된다. 이후로는 도시가 점차 바다를 향해 눈을 돌리게 하였다. 그들의 최인근 이웃에게는 맞수가 없는 보병에 더해 선박으로 부터 얻는 힘으로 야만인들을 격퇴함은 물론 헬라스의 지도권을 장악하자고 했다. 그는 꾸준한 '호플리테스(중장보병)' 대신 플라톤이 말한 바다를 누비는 '뱃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며 그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시민들에게 창과 방패를 빼앗아 노나 젖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비난을 잠재웠다. 그는 이렇게 밀티아데스(Miltiades)의 공개적 반대를 물리쳤던 것은 스테심브로토스(Stesimbrotus)가 말한 바와 같다.   

이렇게 그의 이런 행동이 국가의 통합과 순수성에 상처를 입혔는지는 학자들에 조사에 맡기기로 하자. 그러나, 그 때 헬라스를 구원한 것은 바다로 부터 왔다는 것과 아테네의 쓰러진 도시를 재건한 것이 바로 삼단노함대라는 것은 크세르크세스 자신도 본 것이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보병은 그대로인 채로 해전의 패배 후 도주했는데, 해군력의 열세를 생각했기 때문에 마르도니오스(Mardonius)에게 뒤를 맡긴 것이다. 그것은 정복을 위한 것이기 보다 수비차단을 위한 것이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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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미스토클레스는 반대당을 물리치고 그의 해군위주의 정책을 아테네이 새로운 국책으로 세운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와 그리스 세계의 분열은 더 깊어지고, 그 자신도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해 부패와 매수와 정적에 대한 모함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끝내 아테네가 잿더미로 변하는 참화를 겪은 후에 테미스토클레스는 전 그리스 세계의 존경과 칭찬을 한 몸에 받게 되지만 그 역시 그가 정적을 밀어냈던 같은 방법으로 도시로 부터 추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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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생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얘야. 너는 하찮은 인간은 되지 않고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다. 선인건 악인이건 말이다.' 인격 형성을 목표로하는 분야의 공부를 하거나 교양과정을 익히게 될 때 그는 배우기 꺼려하거나 게으름을 피웠다. 비록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믿는 듯 했으나, 지혜의 연마나 실용지식 획득에서 그는 나이에 맞지 않은 열성을 보였다. 이리하여 이런 교양과 매너의 측면에서, 교양있는 사람에게 경시당할 때 그는 다서 거칠게 자신을 방어하여 흔히 뤼라나 하프 따위를 타는 것은 자신의 할일이 아니며 작고 보잘 것 없는 도시를 크고 빛나게 가꾸는 것이 자기 일이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스템심브로투스(Stesimbrotus)는 그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의 문하에 있었으며 자연철학자 멜리소스(Melissus) 밑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연대기는 불확실하다. 멜리수스가 사모스 포위[각주:1]에서 맞선 자는 페리클레스인데 후자는 테미스토클레스 보다 많이 어린 사람이며 아낙사고라스와 친했다.

한편으로 테미스토클레스가 수사학자도 자연 철할류의 학자도 아닌 프레아리아인(Phrearrhia) 프므네시필루스(Mnesiphilus)의 제자라고도 한다. 그는 다만 ‘소피아(sophia)’ 즉 지혜라는 것을 연마하는 이로 그것은 단지 정치나 실용기술을 공부하는 것으로 솔론(Solon)에서 부터 단절없이 하나의 종파로서 전수되어왔다. 그 후계자들 중에 이에 변론술을 섞었고 공무에서 언어로 그 영역을 넓혀 '소피스트'라 조롱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공직 경력을 시작할 때 의존했던 이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젊은 시절에 그는 평범치 않고 불안정했는데, 이성과 훈련에 소홀하면서 충동에 자신을 맞겨 거친 극단을 향해 돌진하곤 했다. 그의 후년 고백에서 그는 다루기 어려운 말도 적절하게만 훈련되면 좋은 말로 된다는 말을 했었다.

호사가들이 덧붙인 것에 아버지가 의절했고 어머니가 아들의 수치에 비탄해 자살했다는 말들은 내 생각엔 거짓이다. 아버지가 공직 즉 정치에 나서는 그를 단념시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서지고 방치된 해변의 낡은 배를 가리키면서 그것이 퇴물이 된 지도자를 민중이 다루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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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를 페르시아의 위협으로 부터 구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나라팔아먹은 매국노 소리를 듣기도 한 테미스토크레스의 어린 시절 그는 다듬어 지지 않은 거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예술과 교양은 뒷전이었지만 실용적 기술을 익히는데는 모든 열정을 바쳤고, 정치적 성공와 민중들 사이의 명성을 열망하였다. 

 

 

  

 

  1. 440 B.C.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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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의 경우, 그의 가계는 자신의 명성에 비해 너무나 불분명하다. 그의 아버지는 네오클레스(Neocles)란 사람으로 아테네에서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레온티스(Leontis) 부족의 프레아리아(Phrearrhia) 구에 살았고 그의 모계로는 외부인인데 그 묘비명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아브로토논(Abrotonon)인 나는 트라키아 여자지만, 그리스의 위대한 빛을
낳았음을 알라! 그가 테미스토클레스니라.

 

그러나, 파니아스(Phanias)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어머니가 트라키아인이 아니라 카리아인이라고 하고 이름도 아브로토논이 아닌 에우테르페(Euterpe)라고 했다. 네안테스(Neanthes)는  그 이름에 카리아의 도시 이름 할리카르나소스(Halicarnassus)라고 덧붙였다. 

그 이유는 이렇다. 외부인들은 키노사르게스(Cynosarges)라는 성문 밖 헤라클레스 체육관 중의 하나를 찾았다. 어머니만 불멸의 신이어서 자격있는 신이 아니라고 헤라클레스가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몇몇 출생 좋은 젊은이들을 키노사르게스로 불러 함께 훈련을 했고, 이런 교활한 계획을 성공시켜 외부인과 합법적 시민의 구분을 제거하려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가 뤼코미다이(Lycomidae) 가문과 관련이 됨은 분명한데, 그 가문에 속한 프뤼아(Phlya)의 사당이 야만인들에게 불타자 자신의 비용으로 재건하고 벽화 등을 덧붙였다고 시모니데스(Simonides)는 진술하고 있다.   

이렇게 출생은 미천하나 모든 면에서 충동적일 정도의 정력과 소년이면서 본성적인 현명함이 있었고 선거로 부터의 공직 생활 즉 정치를 열망하였다. 학습을 마친 후엔 여가로 다른 아이들 처럼  쉬거나 빈둥대지 않고 연설연습 등을 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미스토클레스>,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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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그리스의 쇠퇴와 로마의 흥기의 이유로 배타성과 관용을 든다. 그 한 예로 그리스를 동방전제주의로 부터 구한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천한 신분이 모계로 외국인이었던데 비롯되었던 탓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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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레리우스(Valerius)에 관해 민중들을 불쾌하게 한는 것은 이런 것이다. 민중이 자유의 아버지로 받드는 브루투스는 결코 혼자 다스리는 일 없이 즉시 함께 다스릴 동료 집정관을 뽑으려 했을 것이었다. 민중은 '하지만 이 발레리우스는 권력을 자기 혼자에게 집중시키니, 브루투스의 집정관 체제의 후계자로는 적합하지 않은 타르퀴니우스 식의 참주정의 후계자인가 보다'라고 말하곤 햇다. 또 이런 말도 했다. '그가 부순 왕궁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나온다는 것만 다르지 실제로는 도끼와 몽둥이 든 놈들의 호위로 홀로 포룸에 나오는 타르퀴니우스나  흉내내면서, 왜 말로는 브루투스를 추켜세우는 거지? ’ 실상 발레리우스는 벨리아(Velia)[각주:1]라는 화려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 곳이 포룸에서도 높이 솟아 있어 지나다니는 모든 것을 보며 경사져 다가가기 어려웠고, 그래서 그가 거기서 나오면 그 장관이 대단해 마치 왕이나 하는 것 같은 것이었다.

발레리우스는 권력과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아첨보다는 진실과 솔직함에 귀를 열어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친구들의 가벼운 말로 대중들에게 그에 대한 악평을 듣자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장인들을 모아 자신의 집을 완전히 헐어버렸다. 아침이 되자, 로마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모여들었다. 민중은 그의 도량에 사랑과 존경을 품게 되었지만 집에 대해서는 애석해 했는데 나라에서 빼어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질투심이 파괴를 가져온 이 마당에 이제는 마치 그 집이 사람이라도 되었던 것 처럼 슬퍼햇다. 이제 집없는 거지 처럼 다른 사람들과 집을 공유하는 그륻의 지배자에 화가 났다. 그에게 부지를 마련해 집을 지어 줄 때까지 발레리우스는 그의 친구들 집에 들어가 잤다. 새 집은 전보다는 소규모로 지금 파카 포타(Vica Pota)의 사원이 있는 곳에 있었다. 자신 뿐 아니라 정부조차 대중에 고분고분한 것처럼 보이려고, 그는 릭토르의 몽둥이에서 도끼를 빼버렸고, 회의에 갈 때 이를 비스듬히 낮추어 민주주의의 위엄을 강조햇다. 이 관습을 집정관들은 오늘날까지  준수한다.  민중이 알아채기 전에, 그는 겸손함과 절제를 통해 시기심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실질적 권력은 이런 것을 제거한 만큼 많이 확대했고 민중은 그에게 기거이 복종하면서 멍에를 쓰게 되었다. 그들은 그를 곧 푸블리콜라(Publicola)라고 불렀는데 "민중을 사랑하는 자"란 뜻이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푸블리콜라>,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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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우스 '민중을 사랑하는 자'란 별명으로 사랑받은 푸블리콜라는 처음엔 폭군 타르퀴니우스와 무엇이 다른가하는의심을 받기도 했다.  

 

 

 

 

  1. 팔라틴 언덕에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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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투스(Brutus)가 이 때 공회당을 오래 떠나있자, 실망과 공포와 침묵이 사람들 사이를 지배했다. 하지만 곧 그들은 동료집정관 콜라티누스(Collatinus)의 우유부단이 아퀼리우스(Aquillius) 형제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방어를 위한 시간을 요구하면서 빈디키우스(Vindicius)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노예이며 고발자가 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콜라티누스는 이 요구를 들어주고 싶어서 회의를 해산하려 하였다. 하지만 발레리우스(Valerius)는 인파에 섞인 이 노예의 인도를 할 수도 없었고 민중이 반역자들을 풀어주는 피해를 감수하게 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그는 아퀼리우스 측 인사들을 체포하고 브루투스를 소환하여 이를 보이며 콜라티누스를 책망하여 두 아들마저 죽음에 처한 그의 동료 집정관 브루투스의 행동에 반하여 반역자들과 국가의 적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들을 살려주려 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 집정관이 그에 화를 내어 빈디키우스를 데려가라고 명하자 릭토르 수행자들이 군중을 헤치고 그 자를 체포하고 그를 구하려는 사람을 구타했다. 그러자 발레리우스와 그의 친구들은 그의 인신을 지켰고 민중은 다른 집정관 브루투스를 불렀다. 브루투스가 뒤를 돌아와 침묵이 흐르자 그는 아들들에 대한 판관은 자신이 했지만 다른 반역자들의 운명은 시민들의 투표에 맡겨두어 누구나 민중에게 연설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민중은 어떤 변호 연설도 듣지 않고 만장일치로 사형을 언도하고 모두 목을 베었다. 콜라티누스는 이미 추방된 왕가와의 연계로 의혹을 받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두번째 이름 자체가 타르퀴누스라는 말소리 조차에도 진저리치는 민중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일들을 겪고 불안해하며 사임후 도시를 떠났다. 새로운 선거가 열려 발레리우스가 집정관으로 선언되고 그의 열정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 이런 보상을 그는 빈디키우스와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로마의 첫 해방노예이자 로마 시민의 한사람으로 만드는 법률을 통과 시켰다. 그에게 어떤 쿠리아 선거구에도 그의 선택으로 등록될 수 있게 했다. 다른 해방노예들은 후대 아피우스(Appius)에게 선거권을 얻었다. 이 빈디키우스에게서 완전한 해방에 '빈딕타(vindict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푸블리콜라>,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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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퀴니우스의 오만과 폭정으로 로마에 왕정이 끝나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최고정무관인 집정관은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에게 돌아갔고 푸블리콜라로 알려진 발레리우스는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첫해 추방당한 타르퀴니우스에 동조하는 음모가 명문가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콜라티누스는 그 처리에 미온적이게 된다. 브루투스와 발레리우스가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위기를 수습한다. 이 과정에서 '빈딕타'라는 말의 유래가 보이는데 이 음모의 고발자로 노예에서 자유민이 된 빈딕티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발레리우스는 콜라티누스 대신 집정관이 되어 일찍 죽은 브루투스를 대신해 공화정 로마를 위기에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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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이소스(Croesus)와의 면담에 관해서는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가공임을 연대기로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가 너무나 유명하여 잘 증언되고 솔론의 성격에 잘 맞고 그의 아량과 현명함에 적합하다 싶다면 연대기적 문헌들에 얽매여 그것을 빼버리지는 않으려 한다. 그런 문헌들은 오늘날 까지 수천번 수정을 받으면서도 그 모순점에 대한 일반적 답이란 없기도 하다. 그리하여, 솔론이 크로이소스를 사르디스로 초대받게 되자 내륙에 사는 사람이 바다를 처음 구경한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마주치는 모든 강을 바다로 생각하는 것처럼 솔론도 각 궁전을 지나고 많은 비싼옷을 입고 많은 수행자와 호위병을 거느린 왕의 종사들을 다 진짜 크로이소스를 만나게 될 때까지 크로이소스로 생각했다. 왕은 보석과 염색된 의류와 정교한 금제품으로 치장하고 자신의 위엄과 멋진 모습을 보이려 하였다. 그러나 솔론이 이런 모습에 조금도 놀라워 하지 않고 크로이소스의 기대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실제적으로 그가 이를 저속하고 하찮게 보았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이목에 분명했다. 왕은 그의 보물함을 이 손님을 위해 열어제쳐 자신의 나머지 호화로운 물건들을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 솔론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자료를 준다. 솔론이 모든 것을 보게하고 반복해 보고서,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자신보다 더 행복한 사람을 아느냐 물었다.

솔론은 자신의 동료시민인 텔루스(Tellus)란 남자라고 대답했다. 이어 그는 계속 텔루스가 스스로 정직한 사람임을 증명하였고 명망있는 아들들을 남겼으며 조국을 위해 영광스론 위용을 보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답했다. 크로이소스는 즉시 솔론을 이상하고 천박한 친구라고 판단했는데 금은 재보의 넘침을 행복의 근거로 삼지 않고 평범한 한 사인(私人)의 생사를 권력과 통치권을 보유한 자보다 존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또다시 텔루스 말고 그 다음 자신보다 운좋은 이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클레오비스(Cleobis)와 비토(Bito)라는 이름을 다시 말했는데, 형제애와 어머니에 대한 효의심에 어느 누구도 앞지르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녀가 탄 수레가 황소가 느리게 되자 그 멍에를 짊어지고 헤라 신전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녀의 나랏사람들이 그녀를 행복한 여자라 불렀고 그녀의 마음은 대단히 기뻤다. 제사와 연회를 마친 후 그들은 휴식하려 엎드리고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지만 고통없이 평온한 죽음을 많은 영예들이 그들이 바쳐주는 동안 맞이했다. 

크로이소스는 그 때 화가 나서 이라고 외쳤다.

"뭐라고! 그는 그대는 전혀 행복한 사람들 중에 나를 념두에 두지 않는군!"

솔론은 그에게 아첨하기 싫었고 고"라고 왕의 화를 돋구기도 싫었기에 

"오 뤼디아의 왕이시어! 신들이 우리들 그리스인에게 절제 속에 축복으로 준 것같이 절제란 우리에게 보통사람들에게 맞는 작은 지혜를 주었으나 왕에게 어울리는 화려한 것들은 아닙니다. 인생이 모든 운명의 부침들에 종속된 것이라는 것을 봐온 이 지혜는 우리가 가진 좋은 물건으로 우쭐해지는 것과 한 여전히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동안에 인간의 행복을 평가하는 것을 금하고 있있습니다. 변해가는 미래 속에서 모든 것은 변하고 불확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최후까지 번영을 수여한 때에는 그 인간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를 행복하다하는 것은 그가 살아서 생명의 위험을 받는 동안은 여전히 상을 두고 경쟁하는 동안에 선수에게 승리를 선언하고 시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판결은 불안정하고 승인될 수 없습니다"

고 말했다. 이를 말하자 솔론은 화난 크로이소스를 두고 떠났고 그의 말은 채용되지 않았다.      

우화작가 이솝은 크로이소스에게 초빙되어 존경을 받으며 사르디스에 있었다. 그는 솔론이 친절히 왕과 회견치 않은 것에 화가 나 충고했다.

"솔론! 왕들에게 우리가 할 말이란 적고 대부분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을 말해야죠."

솔론은

"그렇지 않소."

라 답하고 다시

"그들에게 말을 많이 않던가 유용한 말을 해야 하오."

라고 말했다.

이 때 크로이소스는 솔론을 경멸했지만 후에 퀴로스(Cyrus)에게 전투에서 패해 나라를 잃고 사로잡혀 화형을 선고받았다. 페르시아인들과 퀴로스 안전에 장작에 묶여있을 때 그는 모든 힘을 다해 '오! 솔론이여'를 세번 외쳤다.

퀴로스가 놀라 이런 극한에서 외치는 솔론이란 어떤 신이나 또는 인간이냐고 사람을 시켜 물었다.  

그러자, 크로이소스는 숨김없이 답했다.

"그 사람은 그리스의 현자이며 내가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누리는 행복의 증언을 위해 불러들였던 사람입니다. 그 행복과 재산이 지금 내가 잃은 것의 악이 소유했을 때의 선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내것이었을 때 그것으로 부터 온 선은 인간의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지만 나로 부터 떨어질 때는 실제로 엄청난 아픔과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때 그가 본 것으로 미래를 짐작하여 나를 내 인생의 끝을 보게 했고 불완전한 짐작으로 감히 내가 우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보고를 받자, 퀴로스는 크로이소스보다 현명하였고 솔론의 말이 그 앞에서 실현되었으므로, 크로이소스를 석방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게 살아 있는 동안 명예를 부여했다. 이렇게 솔론은 한 왕을 구하고 다른 왕에겐 교훈을 전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솔론>, 27-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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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행복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크로이소스 왕에 대한 솔론의 충고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여기서도 소개된다. 필자 개인에게 조금 찔리는 일이 있다면 필자 자신도 그 동안 너무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잘 소화해 내지 못한 무리한 포스팅을 남발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피로함마저 느끼는 이런 일들에 대해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 수정해 보려하지만 여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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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론(Kylon)의 소동이 끝나고 부패한 사람들이 추방되자 아테네인들은 정부형태에 관한 오랜 분쟁으로 다시 빠져들었고 도시는 그 구획상의 다양함만큼이나 많은 파당들로 나뉘어졌다. 산악지에 사는 이들은 극단적 민주정를 선호하고, 평야에 사는 이들은 극단적 과두정을 선호하였다. 해안사람들은 제3당으로 중간절충적 정부형태를 원하면서 다른 둘과 대립하여 어느 쪽도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했다. 그 때 빈부의 대립과 불화가 고조되어 도시는 다시 위태한 상태였다. 무질서를 잠재우고 소란을 그칠 유일한 길은 참주정을 세우는 일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평민들이 부자들에게 빚을 졌다. 그들에게 땅을 빌리고 6분의1세라는 헥테모이로이(Hectemoiroi)를 내거나 그들의 가족들이 채권자에게 저당잡혀 노예가 도기도 하고 외국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식들을 팔아야 했고 추방당했는데 대금업자들의 가혹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가장 강한 이들이 뭉치기 시작하여 악에 굴복하기를 거부하였고 진실된 인물을 지도자로 뽑았다. 채무자를 해방하고 토지를 재배분하며 정부형태를 완전히 바꿀 인물이 필요했다.

이 때 아테네의 최현인이 솔론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그 시대의 오류에 가장 적게 오염된 인물을 보았다. 그는 불의에 부자들과 교제하지도 않고 빈자의 부족함에 연루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불화를 종식하기를 공간청했다. 레스보스인 파니아스(Phanias)는 솔론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동의로 양당을 속였다고 썻다.빈자들에게는 토지분배를 부자들에게 안전확보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솔론 자신은 공직에 기꺼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전자의 욕심과 후자의 거만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필롬브로토스(Philombrotus) 다음으로 아르콘(archon)이 되어 중재자이자 입법가가 되었다. 부자들은 그가 노련하므로 받아들였고 빈자들도 정직함에 찬성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솔론>, 13-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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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론의 개혁전 아테네의 빈부 등으로 분열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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