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과 독재와 시대적 타락과 자유'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5.02.17 누마 시대의 평화
  2. 2015.02.17 그리스에서 스파르타의 위치
  3. 2015.02.15 테세우스와 로물루스의 공통점
  4. 2015.02.10 로마라는 이름
  5. 2015.02.10 테세우스의 최후
  6. 2015.02.10 아테네 민주공화국
  7. 2015.02.10 헤라클레스를 모범으로
  8. 2015.02.10 테세우스와 로물루스

 

그는 또한 로마에 이중의 문을 가진 신전을 세웠는데 그 두 문을 전쟁의 문이라 불렀다. 전시에 사원은 개방되었지만 평화시엔 닫혔던 것이다. 후자의 유지는 어려운 문제로 나라가 확장에 따라 야만적인 나라들과 접경함에 따라 충돌하여 전쟁으로 지새던 시기에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안토니우스가 타도되자 닫히게 되었다. 그전에 마르쿠스 아틸루스(Marcus Atilius)와 티투스 만리우스(Titus Manlius)가 집정관인 때 잠깐 닫혔을 뿐이다. 그 후 곧 전쟁이 다시 일어났고 열리게 되었다. 누마왕 당대에는 하루조차 열린 적이 없어 43년 재위간 닫혔을 만큼 비전쟁이 완전한 것이었다.

로마 민중은 이 왕의 의로움과 온유함으로 유화되고 매력을 갖게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이웃도시들 조차 시원하고 맑은 바람을 로마에서 맞기라도 한 것처럼 평화에 대한 깊은 바램을 갖게 되고 땅을 경작하고 아이들을 평화속에 기르고 신을 숭상하게 되었다. 축제와 향연, 차별없이나 두려움 없이 서로를 방문하는 이들간의 후대와 친선교류가 이탈리아 구석구석 성행하였다. 영광과 정의가 누마의 지혜로 부터 모든 이의 가슴에 분수처럼 흘러넘쳤다. 그의 정신의 잔잔한 엄숙성은 세계로 퍼져갔다. 이리하여 시인들의 과장은 이 시대의 인간상태를 그리는데 부족하였다.  

 

철테의 방패손잡이엔 거미줄이 있고

곰팡이가 이제 날카로운 창과 양날 검을 잠식한다.

이제 더이상 시끄러운 나팔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꺼풀이 달콤한 잠을 빼앗는 일도 없다. 

 

전쟁이나 분열 정치적 혁명에 대한 기록이 로마 왕대에는 없다. 그 인물됨에 대해 미움이나 질시가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야심이 그의 왕좌에 대한 음모를 빚게 하는 일도 없었다. 반대로, 그를 틀별히 보살핀 신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의 덕에 대한 존경 혹은 놀아울 정도의 행독은 그의 나달들에 삶을 모든 악에서 떨어지게 하고 순수함을 유지케 하여 그를 플라톤이 여러 세대 후에 감히 정부에 관해 단언했던 다음의 말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요 확증이되었다. 

 

인간의 병은 어떤 신성한 복에 의해 왕의 권력이 철학자적 안목을 갖춘 한 사람에 의해 통일될 때 그치고 사라진다. 거기서 절제 속에 덕을 세우고 악을 지배하게 된는 것이다. 이런 현자야 말로 축복된 인물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는 자들도 축복된 사람들이다.   

 

대중을 다루는데 있어 강제와 위협은 아마 조금도 필요 없다. 그러나 지배자의 생애에서 뚜렷하게 빛나는 예를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볼 때는 기꺼이 현명한 이의 발자국을 따르고 한편으로 정의와 절제가 있는 친선과 일치가 있는 흠잡을 데 없는 축복된 삶을 따라간다. 이런 인생은 모든 정부의 가장 고귀한 목적이며 그는 그의 신민들에게 이와 같은 인생과 생각을 심어줄 왕이었다. 이는 누마에게 두드러진 것이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누마>,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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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젖을 먹고 큰 로물루스에 의해 건국된 로마 역사는 전쟁과 투쟁으로 점철된 것이었으나, 예외적으로 2대왕 누마는 로마인을 이런 거친 면을 다듬어 평화를 가져오고 평화롭고 온유한 행복으로 인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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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스(Agis)의 재위 중에 금화와 은화가 처음 스파르타(Sparta)로 밀려들고 이 돈들과 함께 부에 대한 욕심과 바램들이 뤼산데르(Lysander)의 대리자들을 통해 성행하였다. 그 자신은 부패하지 않았지만 자기 조국을 부와 사치에 대한 동경으로 채웠고 전승으로 금은이 조국에 유입되면서 뤼쿠르코스(Lycurgus)의 법들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 법들이 아직 유효할 때 스파르타는 한 헌법체제로 운영되는 도시가 아닌 충만된 지혜와 훈련된 전사에 인도되는 도시였다. 시인들의 헤라클레스의 무용담에서 망방이와 사자가죽으로 세계 곳곳을 가로지르며 무법적이고 야만적인 폭군들을 혼내주는 것처럼 우리는 스파르타 역시 망토를 두른 사절단으로 헬라스의 자발적인 복종을 받았으며 때론 방패한 번 휘두루지 않고 한 명의 사절을 보내는 것으로 만 다른 나라들의 불법적 과두정과 참주정을 타도하였고 전쟁에 중재를했고 소요는 끝냈으며, 그 사절의 명령은 각 나라들의 지도자들이 나타나자 마자 지켜졌다. 좋은 통치와 정의를 이로써 도시들은 충만히 누렸다. 

나는 이 스파르타인들이 복종은 알지만 지휘하는 법을 이해하진 못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 놀라 스파르타 왕들이 지휘할 줄을 알기에 나라가 안전이 확보된다는 말을 듣고 '그것 보다는 시민들이 복종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라고 답한 테오폼포스(Theopompus) 왕의 말을 인용해 준다. 인간은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에게 복종을 기꺼이 바치려하지 않지만, 복종은 한 지휘관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수업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지도자는 좋은 추종자들을 만들고, 기마술의 최종 목적이 말을 다루기 좋게 길들이는 것인 것 처럼사람에게 복종심을 심어주는 것이 통치의 기교인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은 다른 헬라스인들에 자발적 복종심뿐 아니라 그들의 추종자와 신민들이 되고픈 바램까지 심어주었다.   

사람들이 배나 돈 혹은 중장보병을 그들에게 요구하지 않고 단 한 사람의 스파르타 지휘관 만을 요구했다. 그를 얻어쓸 때는 그들이 그에게 영예와 존경을 바쳤다. 이는 시칠리아인들이 길리포스(Gylippus)에게, 할키스인(Chalcidian)들은 브라시다스(Brasidas)에게 아시아(Asia)에 사는 전 그리스 거주민이 뤼산데르(Lysander)와 칼리크라티다스(Callicratidas)와 아게실라오스(Agesilaüs)에게 그러했던 것과 같다. 이들이 민중과 관리의 조정자와 징벌자로 수식되었고 그들의 출신인 스파르타 시는 잘 질서지어진 사적인 삶과 잘 확립된 시민행정의 교사로 간주되었다. 

스파르타의 이런 위치에 대해 비유로 스트라토니코스(Stratonicus)는 그가 아테네인들에게 은밀한 비교의식에 대한 법을 엘레아인들에게는 축제 주관을 그들의 특별한 그 분야 재능 때문에 맡기고 스파르타인에게는 다른 이들이 잘못할 때 곤봉을 들게 한다는 법을 제안하겠다고 농담을 했었다. 이는 농담이나 소크라테스 학파의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는 레우크트라(Leuctra) 전투 후 테베인에게서 드높은 사기를 발견하고 진지하게도 스승을 혼내주는 학생 같았다고 말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뤼쿠르고스>, 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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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는 뤼쿠르고스 전에서 주로 스파르타의 제도와 풍속을 소개하고 비평한다. 스파르타의 다른 그리스 사회와 다른 엄격성을 처음 도입한 입법가로 뤼쿠르고스를 들고 있지만 실존인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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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테세우스와 로물루스가 타고난 정치가였으나, 왕으로서 그 자질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전자는 민주주의로 후자는 참주정(폭정)를 지향하였으며 결국 서로 반대이지만 같은 잘못을 범하였다. 통치자는 우선 지배권을 유지하여야만 하며, 그것은 부적절한 것을 삼가하고 적절한 것은 힘써 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의 권위를 회피하는 자는 더이상 왕도 지배자도 아니다. 그런 사람은 선동가나 전제자 중 하나가 되고, 피통치민들 사이에 경멸과 미움을 심어주게 된다. 그 첫 오류는 호의와 자비에서 두번째는 이기심과 가혹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세우스와 로물루스의 비교>,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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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와 로물루스가 각기 지배층과 불화로 권력을 잃거나 암살당했다면서 통치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능한 선동자들이나 통치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나라를 넘겨주게 된 것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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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해서 인류들 중에 그렇게도 명성높은 로마(Rome)라는 위대한 이름이 지어졌는지에 대해 여러 저자들은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펠라스기족(Pelasgian)이 거주가능한 지역을 전부 돌아다니며 대부분의 인류를 정복하고 나서 그 지역에 정착했다고 하여 그들의 전쟁을 하는 '힘'을 가리켜 로마라 불렀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트로이 몰후 달아난 사람들이 함선을 타고 폭풍우를 해치고 투스카니(Tuscany) 해안에 닿아 티베르 강에 정박하게 된 이야기를 한다. 이에 따르면 그 때 배멀미를 여자들이 느끼자 그들 중 태생상 고귀하고 최고의 지성을 갖춘 로마(Roma)라는 여인이 배를 불태우자고 했다는 것이다. 배를 태우자 남자들이 화를 냈지만 팔라틴누스(Palatine) 언덕에 정착하여 기대보다 상황이 좋고 이웃들이 환영하자 그들은 로마 여인에게 큰 존경을 바치고 그녀에게서 도시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로물루스>,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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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역사를 창출한 로마. 그러나, 그 이름의 유래는 불명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의 건국 초기 전설과 신화의 여러 버전을 소개하고 있는데 우선 아이네이아스의 고사를 소개하면서 로마란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므로써 로마사의 처음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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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자기 방식을 강요하려 했으나 이미 그는 선동가들과 파벌정치인들에게 압도되어 절망 끝에 자식들을 몰래 에우보이아(Euboea)의 칼코돈의 아들 엘레펜노르에게 보냈다. 그 자신도 지금 아라테리온(Araterion)이라 부르는 가르게투스(Gargettus)에서 아테네인들을 저주하고 선조의 영지와 자기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는 스퀴로스(Scyros) 섬으로 같다. 이 때 뤼코메데스(Lycomedes)가 왕으로 있었다. 테세우스는 땅을 돌려받을 요구를 거주 이후로 했는데 어떤 이들은 아테네인들과 싸움에 원조를 구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뤼코메데스는 이런 명성을 가진 사람을 두려워했으며 정적인 메네스테우스에게 호의를 품었기에 테세우스를 섬의 전망을 보여주겠다며 높은 지대로 데려가 절볕밑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어떤 이들은 테세우스의 평소 습관 때문에 미끄러져 넘어진 것이라고도 한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세우스>, 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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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아테네인들에게 민주주의를 선물한 테세우스는 선동가들에게 나중에 배척받고 권력을 잃은 반유배상태에서 누구들의 바램과 말대로 '운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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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게우스 왕 사후, 테세우스는 놀라운 계획을 품고 아티카(Attica)의 모든 주민들을 한 도시에 모아 그 때까지는 산재된 채 살아 한데 모여 공공선이나 전체이익을 도모하기 어려웠으며 실질적으로는 자주 서로 다투던 사람을 한 도시민으로 만들었다. 그는 집집마다 방문하여 마을과 마을 부족과 부족에 그의 계획추진에 동의를 얻었다. 평민족과 빈민족은 재빠르게 그의 호출에 응했다. 강자들에게 그는 왕이 없는 정부와 자신은 전쟁사령관과 법의 수호자일 뿐인 민주정체를 공약했다. 반면 그 외에 모든 이들은 평등한 체제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설득되어쓰나 이미 강력해진 그의 권력과 담대한 용기를 무서워하는 자들은 강압으로 마지못해 동의할 것을 피해 설득되어준 것이다. 따라서, 각 소공동체에서 시의 청사와 의사당과 정무관직을 없애고 현재의 공동 시청사와 의사당을 현재 상도(아고라)가 있는 곳에 지은 후 이 도시에 아테네(Athens)라는 이름을 붙이고 범아테네 축제를 제정하였다. 

그는 메토이키아(Metoecia) 혹은 창건제를 헤카톰바이온(Hecatombaeon) 달의 16일로 제정하였는데 지금도 기려진다. 그 후, 왕권을 버린 그는 정부를 조직하여 신의 허가를 구하였다. 델피(Delphi)에서 도착한 신탁은 이 도시에 대한 그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테세우스! 피테우스의 외손. 아이게우스의 아들,
내 아버지가 그대의 요새울타리 내에
경계와 운명을 주었다.
고로 당황하지 말고 확고한 기개를 가지라. 

이렇게 신탁한다. 고무주머니는 바다와 물결을 가로지른다.

 

이 신탁은 시빌경서에서 후에 이 도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복된다.

‘고무주머니는 물에 잠겨도 가라앉지는 않는다.’

 

도시를 확장하려는 마음에 그는 평등한 조건으로 모든 이들을 초대하여 '모든 이들이여 여기로 오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갖가지의 인민들을 정착시켰다. 하지만, 그 자신의 민주주의가 몰려든 무분멸한 대중들에 무질서화되고 혼란을 겪는 것을 감내하지는 않았다. 민중을 귀족, 농민, 장인으로 구분하였다. 귀족에게 그는 종교의식과 정무관후보자, 법률의 교수, 신의 뜻에 대한 이해에 대한 임무를 맡겼고, 나머지 시민들에게는 특권상의 균형을 확립하여 귀족은 우월한 존어을 갖고 농민은 실용에서 장인은 수에서 우세하게 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세우스>, 24-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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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까지 괴물과 도적 퇴치, 팔라스 족과의 내전 승리, 크레타의 미노타우로스 퇴치 등을 이룬 후,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죽자 테세우스는 왕위를 거부하고 아테네민주공화국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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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테세우스는 육체의 왕성함과 지적 능력와 현명함이 확고히 결합된 정신을 보여주어 어머니 아이트라(Aethra)가 그를 (아버지가 이야기 해주었던) 바위로 데려가 그 탄생에 관한 진실을 알려주고 거기에 있는 아버지의 신표를 찾아내 바다를 건너 아테네로 가라고 명했다. 테세우스는 그의 어깨로 바위를 쉽게 들어렸지만 바다를 통해 가라는 것은 거부했다. 안전성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에게 간청한 것이었다. 당시 육상으로 아테네로 여행하는 것은 들끊는 도적들과 무법자로 위험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손발이나 신체에 관해 뛰어나고 강인한 사람들을 만들어낸 시대였지만, 그들의 힘은 적절하고 유용한 곳이 아닌 곳에 쓰였다. 그들은 괴물적 거만함을 뽐냈고 그들의 힘으로 잔인함이란 수확을 거두었고 길목을 지나는 모든 것들을 정복하고 강제하고 파괴하였다. 경건성과 올바름, 정의와 인류애에 관해서라면 잘못을 범할 용기가 없어서라거나 잘못을 오히려 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탓이라고 여겨 주도권을 쥘 만큼 강한 자가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들 중의 몇몇은 헤라클레스(Heracles)가 가서 없애버렸지만, 몇몇은 이 때 납작 웅크리면서 비겁하게 그의 시선에서 피해 목숨을 건졌다. 헤라클레스는 재앙을 만나 이피투스(Iphitus)를 죽인 후 뤼디아(Lydia)로 가서 오랫동안 옴팔레(Omphale)의 집에서 친구를 죽인데 대한 속죄로 노예의 봉사를 바쳤고, 이 때 뤼디아는 평화와 안전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희랍 지역에 오랜 악행들이 다시 터져나오자 이를 제지할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펠레폰네소스(Peloponnesus)에서 아테네(Athens)로 가는 육상여행은 위험한 것이었고 피테우스(Pittheus)는 그런 위험요소들을 어떤 괴물인지 일일히 설명해주면서 해상 여행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헤라클레스의 무용담에 은근히 가슴을 불태웠고 그 영웅만을 생각해와서 그에 대해 보고듣고 그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러 다녔었다.  또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가 수 세대 후에 경험한 일 즉 밀티아데스(Miltiades)의 승전보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그 역시 경험하였다. 마찬가지로 테세우스 역시 헤라클래스의 용맹을 숭상하여 밤이면 그 영웅의 성취를 꿈꾸고 낮이면 그  그 비슷한 것을 성취할 것을 고무했다. 

더구나, 그들 사이는 친척으로 재종형제였다. 아이트라는 피테우스의 딸이고, 알크메네(Alcmene)는 뤼시디케(Lysidice)의 딸이며, 뤼시디케와 피테우스는 동기간으로 모두 히포다메이아(Hippodameia)와 펠롭스(Pelops)의 자식들이었다. 따라서, 그의 명성높은 형제가 악당들을 여기저기서 물리치고 수륙에서 그들을 일소하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은 그러지 못하는 것을 끔찍하고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세우스>,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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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를 물리친 밀티아데스의 이야기를 듣고 부러운 공명심에 잠을 설치던 테세우스는 드디어 진짜 아버지를 알게되고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헤라클레스가 한 것과 같은 그리스에서 도둑들을 일소하고 정의를 찾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그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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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우스 세네키오(Socius Senecio)여! 지리학자들은 자기들의 지도 바깥 구석으로 자기들의 지식 밖에 있는 지구 상의 지역을 몰아넣으며 '여기를 넘어가면 물도 풀도 없이 사나운 맹수들만 들끊는 모래사막이'라거나 '알지 못하는 늪지대' 또는 '스키티아 같은 한대 지역', '얼어붙은 바다'라고 주석을 달아놓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비교열전>을 쓰는 데 있어, 보통의 이성으로 추적할 수 있는 시대와 사실을 다룰 수 있는 역사에 대한 기초를 제공할 시대로 곧장 직행하는 지금, 나는 이보다 이른 시대란 '그것을 넘어가면 신비와 비현실성으로 가득찬 시인과 동화작가들의 땅이자 의심스럽고 불분명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법자 뤼쿠르고스(Lycurgus)와 누마 왕에 대한 설명들을 출판한 후로 나는 무리하지는 않고 더 시간을 거슬러 로물루스(Romulus) 까지 가려고 한다. 그리하여 나의 역사는 나를 그 시대로 데려간다. 아이스퀼로스(Aeschylus)의 말대로 나는 스스로에게 

‘이 같은 용사 앞에 맞설 자 누구냐?’ 
'누구를 그에 맞서게 할까? 누가 마땅할까?'

 

라고 자문했다. 이에 대해 나는 훌륭하고 명성있는 도시 아테네의 창건자를 영광된 무적의 로마의 아버지와 비교하고 대조시켜야만 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내가 그에 대한 우화들을 걸러내고 이성에 종속시킴으로써 역사와 비슷하게 만드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끝내 신뢰될 수 있는 것을 거부하는 가능성이 없는 곳에 이르면, 나는 고대의 친절한 독자들에게 전설을 받아들이는데 관용을 베푸라는 양해를 구하겠다.

내게는 많은 닮은 점들이 테세우스를 로물루스의 알맞은 비교상대로 보게 한다. 두 사람 모두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가계를 가졌고 신의 후손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양자 모두 전사였다고 전세계인이 알고 (일리아드의 한 구절)

힘과 현명함이 결합된 인물들이었다. 두 세계적으로 뛰어난 도시인 로마와 아테네 중에 로물루스는 전자를 테세우스는 후자를 만들었으며 각기 겁탈로 배우자를 얻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국내의 불화와 친족간 재난을 피치 못하였고, 시적 과장으로 한 말일 수 있으나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면 말년에는 그들 자신의 동료 시민들과 충돌했다는 말조차 있다. 

 

-플루타르코스, <비교열전: 테세우스>,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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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의 시작 부분인 테세우스전의 첫머리다. 이 글에서 보듯 플루타르코스는 본래 지금 편집된 순서나 인물의 년대에 상관없이 두 인물에 대한 한 쌍의 비교열전을 발표해 나갔다. 누마왕의 전기는 로물루스왕의 전기보다 이른 시기에 씌여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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