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폼페이우스와 동방

<해적을 소탕하는 폼페이우스> 이미 우리는, 687년[67BC] 초에 폼페이우스(Pompeius)가 무제한급의 권력으로 해적들에 대해 전쟁업무에 착수했을 때 동방에서 수륙상으로 로마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속한 광대한 지역을 13개 지구로 나누고 각 지구에 한 명의 부관(lieutenants)을 배치해 인력과 배를 준비하게 하고 해안을 수색해 해적선을 나포하거나 동료의 그물로 몰아넣는 일을 시작했다. 가용한 전선(戰船) 중 양호한 것들 로도스 선박이 그러했는데 이것들을 몸소 타고 년초부터 바다로 가서 주로 이탈리아로 오는 공급선을 재정비할 생각에 시칠리아, 아프리카, 샤르데냐의 바다를 휩쓸고 다녔다. 동시 그의 부관들은 스페인과 갈리아의 해안을 일소하였다. 집정관 가이우스 피소(Gaius Piso)가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의 레가투스(legate)인 마르쿠스 폼포니우스(Marcus Pomponius)가 가비니우스 법(Gabinian law) 덕으로 나브로(Narbo)의 속주에서 모병하는 것을 막고(이것은 경솔한 시작이었다) 동시에 대중의 집정관을 향한 정당한 분노를 합법적 테두리에 제어 감시하려고 시도했던 그 순간에 폼페이우스가 잠정적으로 로마에 다시 나타났다.[각주:1] 사십여일 만에 지중해의 서쪽 주변에서는 곳곳에 항해가 가능해졌고, 폼페이우스는 자기 함선들의 주력 중 60척으로 동쪽 바다로 나아가게 했는데 우선은 해적의 본토이자 고향이라 할 만한 리키아(Lycia)와 실리시아(Cilicia)의 바다로 갔다. 로마함대의 접근소식에 해적들의 선박들은 공해상으로 부터 사라졌고, 그 뿐 아니라 안티크라고스(Anticragus)와 크라고스(Cragus)의 리키아인 요새는 별 다른 저항없이 굴복했다. 폼페이우스의 잘 계산된 포용이 두려움보다는 좀처럼 접근부가능한 해양 요새문을 열어젖히는데 더 도움이 되었다.그의 선험자들은 그 모든 약탈자들을 잡히는 대로 십자가에 매달았다. 지체없이 그는 모두에게 거처를 주고 특히 나포된 해적선에 발견된 보통 사공들을 이례적 관용으로 대접해 주었다. 대담한 실리시아의 바다왕만 홀로 로마에 맞서 무력으로 자기 바다를 적어도 지키기라도 할 시도할 모험을 할 수 있었다. 타우루스(Taurus)의 산악요새에 처자와 보물들을 둔 이후로 그들은 로마함대를 코라케시움(Coracesium) 앞바다의 실리시아의 서쪽 전방계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여기서 폼페이우스의 배들은 모든 전쟁도구들이 잘 준비되어 올려진 채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더 이상의 장애없이 그는 상륙후 해적의 산악성채를 들이쳤고 그 동안 계속해서 항복의 댓가로 그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었다. W곧, 대다수가 그들의 요새와 산맥에서 희망없는 전쟁의 계속을 단념하고 항복에 동의했다. 폼페이우스가 이 동쪽 바다에 나타난지 49일만에 실리시아는 평정되고 전쟁은 끝이 났다.

해적질에 대한 빠른 억제는 위대한 구원이긴 하나 진정한 위대함은 아니었다. 애당초 엄청난 정도로 끌어모은 로마의 국가자원에 해적들은 대도시 도둑강도무리들이 잘 조직된 경찰에 맞서는 것 만큼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기습을 기념한다는 것은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악의 고착화된 상태에서 날로 확대해 가는 것을 생각할 때엔 이 끔찍한 해적들을 놀랍게도 빨리 진압한 것은 대중에게 최고의 인상을 준 이상이었다. 한 손에 집중된 지배의 첫번째 시험이 되어 여러 당파들은 그 손이 협력단의 통치보다 다스리는 법을 잘 알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기다렸다.  그래도 90척의 전함이라 불릴 수 있는 배를 비롯 거의 400척의 선박이나 배들이 폼페이우스에게 장악되거나 그에게 굴복했다. 부부적인 그의 자비로 다해서 약 1300척의 해적선이 가라앉고, 그 외에도 넉넉하게 채워진 옛 해적들의 병기창이 불탔다. 해적 중 거의 10,000명이 죽어갔다. 20,000 웃돌게 산채로 승자의 손에 잡혔다. 실리시아(Cilicia) 주둔 로마군의 제독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Publius Clodius)와 몇몆은 고향에서 죽게 되었다고도 하는 해적들에게 사로잡힌 개인들은 다시 한번 폼페이우스로 인해 자유를 얻었다. 687년[67BC] 여름 이 원정 3개월 후에 상업과 무역이 옛 궤도로 복귀했고 이탈리아에는 이전의 기근 대신 풍요가 찾아왔다.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간 알력> 크레타 도(嶋)에서의 불유쾌한 간주(interlude)가 어느 정도 로마군의 이 기쁜 성공을 훼방놓았다. 거기엔 퀸투스 메텔루스가 그의 지휘권의 2차년도에 주둔해 섬의 진압-이미 효과가 현저히 드러난 상태—을[각주:2] 마치도록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 때에 폼페이우스가 동쪽 바다에 나타난 것이다. 한 충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가비니우스 법에 따라 폼페이우스의 지휘권이 메텔루스와 병행하여 동시에 길이는 굉장하지만 폭은 90마일이 되는 것이 없는 이 섬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그의 부관 중에 누구에게 이를 배당치 않을 정도의 사려가 있었다. 아직 저항하는 크레타인의 공동체는 메텔루스가 극악한 잔인성으로 정복된 모국인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서 폼페이우스가 소아시아 남부에서 그에게 굴복한 마을에 부과한 조약들의 온건함을 알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폼페이우스에에게 항복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는 잠시 있던 팜필리아(Pamphylia)에서 그들의 사절단에게 이를 수락하고 그의 부관 루키우스 옥타비우스(Lucius Octavius)를 보내 메텔루스에게 그 협정의 결론을 고지하게 해서 그 마을들을 취하게 했다. 이런 절차는 의심할 바 없이 동료로서의 것이 아니었으나, 공식적인 정당성은 전적으로 폼페이우스 측에 있었다. 메텔루스가 철저히 폼페이우스와 도시들간 협정을 무시하면서 그들을 계속 적대하였다. 헛되이 옥타비우스가 저항했다. 군대 없이 직접찾아간 그는 헛되이 아카이아(Achaia)에서 그곳 주둔 폼페이우스의 부관 루키우스 시센나(Lucius Sisenna)를 소환해 엘레우테르나(Eleutherna)를 포위하고 랍파(Lappa)를 습취하였다. 거기서 옥타비우스의 신병은 수감되어 치욕스럽게 잊혀졌고 그 동안 그와 함께 갔던 크레타인들은 사형집행인에게 보내졌다. 따라서 공식적 충돌이 시센나의 군단들과 메텔루스의 군단들 사이에 발발하였는데, 전자의 경우 그 우두머리에는 그 지도자의 사후 옥타비우스가 자신을 올려두었었다. 그리고 전자가 아카이아로 귀환하라고 명령받았을 때 옥타비우스는 크레타의 아리스티온(Aristion)과 히에라피트나(Hierapytna)와 협력해 전쟁을 계속하였다. 양자 모두 가장 완고한 저항 후 메텔루스에게 겨우 정복되었다.  

실상 옵티마테스의 열심당원 메텔루스는 이렇게 자기 손으로 민주파의 사령관을 향해 공식적 내전을 시작하였다. 이는 로마국가에 형언할 수 없는 해체를 보이는 것이어서, 이 사태가 두 장군간 통렬한 설전 이상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두 해 뒤에 다시 한 번 평화롭게 앉아 원로원에서 "친구처럼" 나란히 앉았다. 

<폼페이우스가 미트라다테스 전쟁 최고명령권을 장악> 이 작전 중에 폼페이우스는 실리시아에 남았다. 다음해의 크레타인에 대한 원정 차라리 메텔루스에 대한 것이라고 볼 전쟁을 준비하려 했는데, 실상은 그가 소아시아 본토의 철저한 혼란상에 개입하도록 그를 지명해 주기만 기다렸다. 그가 입은 손실을 안고 핌브리아군단(Fimbrian legion)의 출발 후 남겨진  루쿨루스군(Lucullan army) 일부가 포투스 영토 경계상의 트록미(Trocmi) 족의 나라의 할리스(Halys) 상류에 빈둥거리며 남아 있었다. 루쿨루스는 이름뿐인 그의 후임 클라브리오(Glabrio)가 소아시아 서부에서 계속 마물고 있음에 따라 여전히 최고명령권을 보유했다.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Quintus Marcius Rex)의 3개 레기온도 실리시아에 비슷한 비활동적 상태였다.  폰투스 영토는 다시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 왕의 자비를 바란 처지에 있었는데, 그는 에우파토리아(Eupatoria) 읍과 같은 로마에 가담한 개인과 공동체들에 그들의 반역에 대해 잔인하게 파멸시켰다. 동방의 왕들은 로마에 대해 별다른 공격적 행동을 계속하지 못했는데, 그들의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고나 실리시아에 폼페이우스가 상륙하는 것이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와 티그라네스(Tigranes)의 더이상의 활동을 막기 때문이었다. 마닐리우스 법(Manilian law)는 폼페이우스가 은밀히 키워온 희망을 그가 예상한 이상으로 빨리 현실화 시켰다. 글라브리오와 렉스가 재소환되고 폰투스-비티니아(Pontus-Bithynia) 정부와 그 주둔 군단이 폰투스-아르메니아 전쟁(Pontic-Armenian war)의 전쟁, 화의, 동맹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폼페이우스에게 이전되었다. 영예와 전리의 전망 중에 폼페이우스는 그의 빈약한 계관(桂冠)을 질투심으로 수호하려는 불편해 하는 옵티마테스당의 꾸짖음을 기꺼이 망각했다. 크레타를 향한 원정과 더 먼 해적들의 추적을 중단했고 그의 함대를 폰투스와 아르메니아의 왕들에 대해 수립한 공격 계획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지상전 중에 그는 절대로 해적에 대한 시야를 완전히 잃지 않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고개들었다. 그가 아시아(Asia)를 떠나기 전(691년[63BC]), 그는 필요한 배들이 해적에 대항하기 좋게 만들었다. 다음 해 그의 제안에서 미슷한 조치가 이탈리아에서 결정되었고 그 목적을 위한 비용이 원로원에 의해 승인되었다. 기병대와 소규모 분선대로 해안을 계속 방어하였는데, 696년[58BC] 키프로스(Cyprus) 699년[55BC] 이집트(Egypt)에 대한 후의 원정이 언급되는 것에서 보듯 해적들은 철저히 정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로마의 우여곡절과 정치적 위기 속의 폼페이우스의 원정 이후에도 다시 고개 들어 과거 썩어빠진 상태의 과두정부 때 처럼 로마인을 바다에서 철저히 구축하는 일은 없었다.

 

 

  1. V. III. Senate, Equites, and Populares [본문으로]
  2. V. II. Metellus Subdues Cret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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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킨나와 술라

<이탈리아의 혼란> 술라가 667년[BC87] 초 그리스를 향해 출발할 때 이탈리아에 남겨놓은 긴박함과 불확실성은 이미 묘사한 바와 같다. 반쯤 억압된 반란과 정치적으로 아주 의심스런 장군들이 반이상 찬탈하다시피한 지휘권 아래 놓인 군대, 수도 내의 혼란과 다층의 얽히고 섥힌 음모들이 그것이다. 무력에 의한 과두제이 승리는 그 완화로 인해 다층의 불만을 잉태했다. 로마 창건이래 최악의 재정위기의 타격을 힘겹게 감수하고 있는 자본가들은 이자에 관해 포고한 정부의 법률에 그리고 정부가 막지 못하는 이탈리아와 아시아의 전쟁에 화가 난 상태였다. 자기 무기를 내려놓게 된 반도들은 지배계급의 시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얻으려는 희망의 좌절 뿐 아니라 오랜 공정한 계약관계의 무효화와 피해방권리가 박탈된 새로운 지위를 한탄하였다. 알프스와 포강 사이의 지역공동체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행해진 부분양보에 불만을 가졌고, 신참 시민과 해방노예들은 술피키우스 법들의 취소에 몸시 화가 났다. 도시의 민중은 일상적 고초에 힘겨워하면서, 이 총칼식 정부가 더 이상 몽둥이로 된 헌정질서 침묵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술피키우스 혁명 이후 추방된 자들의 수도 내 거주하는 지지자들—술라의 눈에 띄는 완화조치의 결고로 아주 수가 많이 있었다—은 열정적으로 그 추방자들의 귀국허가를 받아내려 애썼는데, 특히 부유하고 저명한 여성들 중에서 그 목적을 위해 돈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불편함의 이런 배경들 중에서 당파들간 참로운 무력 충돌을 즉각 예견케 하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목적없는 잠정적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통상 불만을 가지면서 루푸스(Rufus)의 살해, 술라의 암살 시도, 667년[BC87] 집정관 및 호민관 선거의 야당 위한 참여 등에 다소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킨나(Cinna>불평불만자들이 국가의 수장으로 불러들이려는 사람의 바로 그 이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Lucius Cornelius Cinna)는 이제껏 동맹전쟁 때 한 관리로 좋은 모습으 보였다는 외엔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킨나의 원래 인간성과 계획에 관해서는 이 로마혁명 중의 다른 어떤 당파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보다 잘 알지 못한다. 그 이유란 다름 아니라 저속하면서 천박한 이기심에 의해 인도되는 이 사람이 처음부터 숨은 정치적 계획이라곤 전혀 가지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다. 바로 그의 첫 등장에서 신참 시민들과 마리우스의 도당들에게 거액으로 자신을 팔아치웠다고 단언되었지만, 이 조차 거짓이더라도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와 술피키우스(Sulpicius)에게는 없었던 이런 의혹이 킨나에게는 붙었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남는다. 사실, 그 자신이 우두머리인 이 운동은 그 동기나 목적 양면에서 무가치함의 외양을 띄었다. 그들은 한 당에서 부터라기 보다는 적절한 정치적 목적이나 주목할 지원 없는 불평자 다수였다. 그들은 합법적 혹은 비합법적 수단으로 유배에서 풀려나도록 주로 노력하였다. 킨나는 나중에야 모의에 말려들어간 것 같은데, 단순히 호민관 권력을 제한한 결과로 그런 제안들을 할 집정관을 필요로 하는 그 계획이 667년[BC87] 집정관 후보로 최적임자로 그를 요구하였으며 그래서 그가 집정관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제2류의 지도자로 나오는 지도자들 중 몇몇 더 유능한 우두머리들이 있었다. <카르보(Carbo)>이런 사람이 민중호민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Gnaeus Papirius Carbo)로 충동적 대중연설을 잘해 이름을 날린 경우며, <세르토리우스(Sertorius)>무엇보다도 퀸투스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는 로마 관리 중 최고의 재능을 가지면서 많은 면에서 탁월한 자들로서 민중호민관 입후보이래 술라와는 개인적인 적이었고 이 싸움으로 자신의 본성에 전혀 맞지 않는 불만이 많은 자들에게 소속하였다.전집정관 스트라보(Strabo)는 정부와 대립하기는 했으나 이 당파와 뜻을 같이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킨나의 혁명발발>술라가 이탈리아 내에 있을 때는 정당한 동기로 뭉친 이 동맹은 조용히 있었다. 그러나 킨나의 경고에는 끄떡 않은 채 동방의 절박한 문제에 전념하는 이 무시무시한 전집정관이 닻을 내릴 때, 킨나는 호민관단 다수의 지지로 666년[BC88] 술라의 복고에 대한 부분적 반작용인 법들을 즉시 제출했다. 이는 신입의 시민들과 해방노예들의 정치적 평등에 대해 술피키우스가 제안했었던 대로의 포용을 담았으며 술피키우스 혁명의 결과로 추방되었던 자들의 본래 지위로의 회복에도 그러했다. 신입 시민들은 대거로 수도에 모여들어 해방노예들과 나란히 반대자들을 전율케 하고 필요한 경우 강제하였다. 그러나, 집권당은 굴복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집정관 끼리 맞서서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Gnaeus Octavius)가 루키우스 킨나(Lucius Cinna)와 싸웠고 호민관들끼리도 그러했다. 양쪽이 투표당일 투표장소에 대거 무장한 채 나타났던 것이다. 원로원파의 호민관들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로스타 위에서 조차 칼날이 그들에게 겨누어지고 있을 때 옥타비우스(Octavius)는 폭력에 맞서 폭력을 사용했다. <정부의 승리>무장된 사람들로 된 일단의 그의 무리들이 비아 사크라(Via Sacra)와 장터(forum)를 쓸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들의 더 온화한 지도자의 명령도 무시한 채 군집한 대중들에게 끔찍한 잔학행위를 가하였다. 이 '옥타비우스의 날'의 포룸이 피에 씻기는 것은 전후로 절대 없는 일로, 시체의 수는 일만으로 추산되었다. 킨나는 노예들을 불러 이 투쟁에서 한 몫을 해 스스로 자유를 찾을 것을 주문했지만, 그의 호소는 이전의 마리우스의 비슷한 호소만큼이나 소용이 없었고 이 운동의 지도자들에게는 달아나는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 헌정체제는 음모의 두목들이 그 해 임기가 계속되는 한은 그들에 맞설 수단이란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도 경건하기 보다 충직한 예언자 한 사람이 집정관 킨나와 그를 지지하는 민중호민관 여섯에 대한 추방이 나라에 평화와 안정을 회복시켜주리라고 말한 후, 헌정이 아닌 신적 자문에 의해서 집정관 킨나가 원로원의 제청으로 그 직위를 박탈당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Lucius Cornelius Merula)가 그 대신 뽑혔으며, 달아단 두목들에게 추방과 제적이 포고되었다. 누미디아(Numidia)에 있는 추방자들의 수에 약간만을 더한 채로 이 위기의 전과정이 끝날 것 같았다.

 

<이탈리아의 킨나파>만약에 한편에선 원로원이 그들의 태만한 버릇으로 이 난민들을 이탈리아에서 급하게 소개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잊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선 후자들이 해방된 신참 시민의 옹호자로서 이탈리아인들의 반란에 다소 호의적 위치에 서지 않았더라면, 확실히 아무것도 더는 이 운동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움 없이 그들이 티부르(Tibur)에 프라이네스테(Praeneste)에 라티움(Latium)과 캄파니아(Campania)에 있는 신참시민들의 중요한 마을이라면 모든 곳에 모습을 나타내 여기저기서 공동목적을 위해 돈과 인력을 모았다. 이렇게 지원받고 그들은 포위하는 군대와 함께 모습을 놀라(Nola) 에 나타냈다. 이 시기의 군대는 견해에 있어 그 장군이 그의 개인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에서는 어디든 민주적이며 혁명적이었다. 도망한 정무관들의 연설은 병사들에게 마지막 원정과 관련되어 호의적인 기억을 남기고 있었는데 킨나와 세르토리우스가 대표적이어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민중파의 집정관에 대한 초법적 해임과 주권자인 민중의 권리에 대한 원로원의 간섭이 일반병사들에게 전해젔고 콘술 아니 차라리 신참시민의 금은 이 관리들에게 헌정의 파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캄파니아 군대는 킨나를 집정관으로 인정하고 한 사람씩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가 신참시민들 뿐만 아니라 동맹 마을사람들이 모여 이룬 부대들의 핵심이된 것이다. 대부분 모병된 것이나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곧 캄파니아에서 수도로 이동했다. 다른 부대들은 북쪽에서 접근했다. 킨나의 부름에 전년도에 추방당한 이들이 에투리아 해안의 텔라몬(Telamon)에 상륙했다. 이는 겨우 500명의 무장 병력 그것조차 대부분 망명자들의 노예거나 차출된 누미디아 기병일 뿐이었으나, <마리우스 상륙>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전년도 수도의 어중이떠중이들과 기꺼이 어울렸던 만큼 이제는 이 지역의 지주들이 야간에 그들의 고용농민을 가둔 에르가스툴라(ergastula)를 열도록 명하였다. 그가 자유를 달성케 할 목적으로 이들에게 제공한 무기는 경멸되지 않았다. 이들과 신참시민들의 분견대는 물론 빨치산들과 함께 사방에서 몰려든 망명자들로 충원되어 이제 킨나는 독수리군기 아래 6,000명을 거드리고 40척의 배를 댈 수 있었다. 티베르 어귀에 정박해 로마로 향하는 곡물선박을 추적했다. 이에 그는 스스로를 "집정관" 킨나의 처분에 맡겨 내놓았다. 캄파니아군의 지도자들은 흔들렸다. 더 현명한자 특히 세르토리우스가 이름으로 그 자신을 이 운동의 머리로 반드시 올려야 할 사람인 동시에 비정상적 복수심의 망령에 휘둘리며 정치인다운 행동에 무능하기로 악명높은 사람에게 자신들을 너무 긴밀히 밀착하는 위협을 지적했다. 그러나 킨나는 이를 무시하며 마리우스에게 에트루리아와 바다에서 전집정관적(proconsular) 권위를 가진 최고명령권을 인정해 주었다.

 

<의심스런 태도의 스트라보>폭풍은 도시 주변으로  몰려가 정부가 더 이상 그들의 군대로 이를 방어하기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각주:1] 그러나, 메텔루스(Metellus)의 병력은 삼니움(Samnium)에서와 놀라(Nola) 앞에서 묶여있었다. 스트라보(Strabo)만 급히 수도를 도우러 올 위치였다. 그는 콜리나문(Colline)에 나타나 자리잡았다. 그의 대병력의 경험많은 군대로 그는 반도들의 허약한 군대를 틀림없이 신속하고 완전하게 절멸시켰을 수 있었을 것이나, 이는 결코 그의 계획 중에 있지 않았다. <로마 주위의 킨나파>오히려 그는 로마가 실제적으로 반도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허용하려 했다. 킨나가 그의 군단과 카르보의 군단을 함쳐 야니쿨룸(Janiculum) 언덕 맞은편의 티베르 우안에 진영을 갖추었고, 세르토리우스가 좌안에서 세르비우스 성벽을 마주하고 폼페이우스(Pompeius)와 맞섰다. 자기 부대가 세 개 레기온 정도 까지 조금씩 불어나게 된 동시에 수많은 전선(戰船)들을 보유하게 된 마리우스가 차례로 해안지역을 점령해 마침내 오스티아(Ostia) 까지 간계로 그의 손에 넣게 된다. 다가오는 공포통치의 전조로 장군에게 버려진 그곳이 야만적 부대의 학살과 약탈에 노출되었다. 이 수도가 단순한 통행의 금지로도 커다란 위기 속에 동요하였다. 원로원의 명령으로 성벽과 성문이 방어상태에 들어가고 시민징집병들이 야니쿨룸으로 배치되었다. 스트라보의 무위(無爲)는 모든 경우에서 놀람과 분노를 샀다.그가 킨나와 은밀한 협상을 한다는 의혹은 자연스러운 것이나, 아마도 근거는  없다. 그가 세르토리우스 부대와 맞선 중대한 충돌과 집정관 옥타비우스(Octavius)에게 마리우스가 수비대 장교들 중 하나를 통해 야니쿨룸을 뚫었을 때 주어 실상 반도들에게 그것을 통해 큰 손실을 입히고 성공적으로 격퇴시킨 지원은, 그가 반란지도부와 결합하거나 아니면 그 밑에 들어가기라도 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통스러워 하는 정부와 수도시민들에 반도들을 복종시키는데 힘을 보태는 보답으로 다음 해 집정관직을 얻고 정부를 자기 손에 넣는 것이 차라리 그의 계획에 가깝다.

 

<이탈리아인들과 당파들의 협상>그러나, 원로원은 한 참칭자에게 벗어나려 도움을 다른 곳에서 얻고 스스로를 다른 참칭자의 무력 앞에 무릎꿇게 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무기를 내려놓고 결과적으로 옛 동맹 위치를 잃은 동맹전쟁 참가 이탈리아내 공동체들 전부에게게 시민권이 원로원 결의로 수여되었다.[각주:2] 이는 마치 이탈리아에 대해 전쟁하는 모라가 대단한 목표가 아니라 허영에 자신을 저당잡히고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보이려는 그들의 의도처럼 보였다.  그 첫순간의 당황에서, 추가적으로 일이천명의 병사들을 전장으로 보내려는 목적에 동맹전쟁에 그렇게 비싼 끔찍한 값을 치르고 얻었던 모든 것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실제로 이 유연성으로 수혜받은 공동체에서 군단들이 도착했지만, 약속된 수의 레기온 대신에 다 해서 기껏해야 만명이나 될까하는 정도의 원군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철두철미 더 믿을만한 메텔루스(Metellus)의 군단들이 수도 방위를 위해 채용되도록 삼니움족(Samnites)과 놀라인(Nolans)과 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니움인들은 카디움(Caudium)의 멍에—삼니움에게서 취한 전리품과 그들의 포로와 투항자들에 대한 보상, 로마인에게서 삼니움인이 빼낸 전리품은 무효화, 삼니움인 뿐 아니라 그들에게 넘어간 로마인에 대한 시민권 수여—를 기억하게 할 요구를 했다. 원로원은 이 위기중에도 이런 치욕스런 평화조약은 거부했지만 메텔루스에게 작은 분대는 남기고 몸소 남이탈리아에 흩어진 가용 군단을 끌고 최대한 빨리 로마로 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는 복종했다. 하지만,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삼니움인들이 메텔루스가 남겨둔 부관 플라티우스(Plautius)와 그의 약체부대를 공격해 패배시켰다. 놀라의 수비대가 나아가 로마와 동맹한 아벨라(Abella)의 인근 소읍들을 불질렀다. 킨나와 마리우스는 게다가 삼니움인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전부를 부여했—로마의 명예가 그들에게 무슨 문제였을까! —으며 삼니움의 분견대가 이 반도들의 진영을 보강했다. 정부군에 유리치 못했던 한 전투 이후 아리미눔(Ariminum)이 반도들에 점령되고 그리하여 로마에서 인력과 물자를 제공받으려 기대하던 포(Po) 계곡 간 주요 연락망이 교란됨은 심각한 손실이었다. 품귀와 기근이 펼쳐졌다. 군단 수비대를 가진 이 큰 밀집도시는 적절한 공급을 받을 수 없었으며, 마리우스는 특히 보금에 대해 점점 더 차단하는데 신경을 썼다. 그는 이미 선교(船橋)를 통해 티베르강을 차단했다. 이제는 안티움(Antium)과 라누비움(Lanuvium)과 아리키아(Aricia)와 다른 소읍들을 함락하여 개방된 육상교통수단을 지배한 동시에 저항하던 곳의 전 시민들을 배신으로 그에게 돌아선 듯한 자들만을 예외로 처형시킴으로써 자신의 복수심을 달랬다. 역질이 이 고통 뒤를 따랐고 수도 주위에 빽빽하게 몰린 병사들 사이에는 가공할 참상이 있었다. 스트라보의 고참병 군대에서 11,000과 옥타비우스의 군단에서 6,000이 그들에게 희생되었다. 허나 정부는 절망은 하지 않았으며, <스트라보의 죽음>스트라보의 갑작스런 죽음은 다행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는 페스트로 죽었다.[각주:3] 그에게 많은 면에서 맞선 군중들은 상여의 시체를 찢어 거리로 끌고 다녔다. 그의 군단의 여당은 옥타비우스에게 합병되었다.

 

<주저하는 정부>메텔루스의 도착과 스트라보의 죽음 이후, 정부군은 다시 적대자에게 적어도 한 번은 맞서고 알바산에서 반도들과 전투태세에 있었다. 킨나가 그들 앞에 나타나자 그들은 그가 아직 집정관이자 장군인 것처럼 갈채로 맞이했다.  메텔루스는 전투를 지속하기 보다 진영으로 귀환시키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옵티마테스당은 흔들렸으며 서로간 일치되지 않았다. 영예롭지만 완고하고 근시적 집정관 옥타비우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한 파는 고집스레 모든 양보를 반대하였으나, 전쟁에 더 경험많고 더 현명한 메텔루스는 타협을 타진했다. 하지만 킨나와 그의 회담은 양쪽의 극렬분자들의 화를 돋구었다. 킨나는 마리우스에게 약골이란 소리를 들었고 옥타비우스는 메텔루스를 반역자라 했다. 결정은 못한 병사들은 미숙한 옥타비우스의 지도력을 불신할 동기가 없지 않아 메텔루스에게 최고명령권을 취할 것을 제안하고, 거절되자 대거 무기를 버리거나 심지어 적에게로 투항했다. 시민은 날로 더욱 고통과 압박을 받았다.킨나의 전령이 넘쳐나는 노예들에게 자유를 보증한다는 선언하자, 이들이 무리지어 수도로 부터 적진의 군단으로 몰렸다. 그러나 원로원이 군대에 들어가고자 하는 노예들에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제안이 옥타비우스에 의해 단호히 반대되었다. <굴복하는 로마>정부는 패배했다는 것과 여객이 산적 두목을 만나듯 그 부대 지도자들과 협상해야 할 밖에 도리 없음을 시인했다. 사절단이 킨나에게 갔으나, 그들은 어리석게 그를 집정관으로 인정하는 우를 범하였고 킨나는 이를 기화로 성문 더 가까이 진을 옮겼다. 이젠 어떤 협상도 더이상 불가능했다. 원로원은 무조건 추방된 집정관에게 굴복하면서 오직 유혈을 자제하라는 요구만을 더했다. 킨나는 이를 약속했으나 맹세하기는 거부했다. 마리우스는 협상 중에 그의 곁을 지키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묵하였다.

 

 

 

 

  1. 다음에 말하는 것의 전부는 최근 발견된 리키니아누스(Licinianus)의 보고에 의거한 것으로, 이는 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실들을 전해주며 우리들에게 전에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던 이런 사건들의 관련과 연쇄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준다. [본문으로]
  2. IV. VII. The Bestowal of the Franchise and Its Limitations. 코미타 의회에 의해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에 명백하다. 원로원은 대신 플라우티우스-파피리우스 법( Plautio- Papirian law) (IV. VII. Bestowal of Latin Rights on the Italian Celts)을 연장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는 관습적으로 그 점을 열어두었으며(i. 409) 실질적으로 전 이탈리아에 대한 시민권 부여까지 이르게 했다. [본문으로]
  3. 리비우스 말( Obsequens 56에 따라)로 "-Ad flatus sidere-," 는 "페스트에 걸렸다" (Petron. Sat. 2; Plin. H. N. ii. 41, 108; Liv. viii. 9, 12)는 의미지, 후대 작가들의 오해처럼 "번개에 맞았다"는 것이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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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체제복귀

<공석이 된 정부> 가이우스 크라쿠스(Gaius Gracchus)가 보여준 새로운 구조는 그의 사망에 임해 폐허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실제 그의 형의 죽음처럼 기본적으로 단순 복수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달리는 겨우 동시에 구정체(舊政體)로의 복귀를 향한 실질적으로 한 걸음이었는데 군주적 인물이 막 확립되려는 군주제를 빼앗겼을 때의 일이다. 가이우스(Gaius)의 몰락과 오피미우스(Opimius)의 전면적이고 유혈적인 재판 이후, 그 공석을 감히 차지하려는 시도에서 쓰러진 국가의 수장과 혈연관계로나 개인적 탁월성에 의해 합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는 절대적으로 없었다. 가이우스는 자식없이 이 세상을 떠났고 티베리우스가 남긴 아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소위 전 민중적 당파에서 문자그대로라도 지도자란 칭호를 받을 자는 없었다. 그라쿠스식 정체는 사령관 없는 요새를 닮았다. 성벽과 수비대는 다치지 않아도 장군은 부족하며 타도된 정부의 빈 자리를 취할 무언가는 전혀 없었다.

<복귀된 귀족정> 그래서 일은 그렇게 된 것이다. 상속자 없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사후 원로원정부가 자동적으로 그에 자리잡았는데, 이는 호민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거되지 않고 그에 의해 단순히 예외적 절차로 실질적 무화 상태로 되어있어 있었다는 면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복귀과정에서 국가란 장치가 수세기를 굴러온 옛 궤적으로 들어가는 것 이상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단한 잘못이다. 복귀란 언제나 혁명인 법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그것이 옛 통치라기 보다는 복귀된 옛 섭정(군주)이다. 과두제는 이미 타도된 참주정이란 갑옷을 새로 입은 채 나타났다. 원로원이 자신들의 무기로 그라쿠스를 두드려 팬 만큼이나 그들은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그라쿠스식 정체의 지배방식을 이어갔다. 물론 숨은 동기상으로 완전히 일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배귀족에 실질적으로 적대적인 요소들을 철저히 씻어내는 것이 함께였다.

<민주당파의 고발들>우선 반동은 주로 인물을 향했다.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Publius Popillius)가 그에 관한 조치가 취소된(633년[BC121]) 이후 유배지에서 돌아왔고 고발전쟁이 그라쿠스 지지자들에 대해 수행되었다. 반면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를 사임 후 반역죄로 단죄하려는 민중당파의 시도는 여당에 의해 좌절된다(634년[BC120]). 이 복귀정부는 귀족정치에 대한 지조에서 특징이 발견된다. 한 때 그라쿠스 형제의 동맹이던 가이우스 카르보(Gaius Carbo)는 오랫동안 개종자로 있었으나[각주:1], 이젠 오피미우스의 수호자로서 그의 열정과 쓸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변절자로 남게 되었다. 오피미우스를 향한 것과 같은 고발이 민주당파에 의해 그에게 제기되었을 때 그의 몰락을 기꺼이 막지 않으려 하는 정부에 대해 카르보는 자신이 양파에서 버려진 것을 알고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반동적 인물들은 개인신상에서 순수 귀족당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반동은 즉시 식량배분, 아시아 속주의 과세, 배심원과 법정에 대한 그라쿠스안을 즉각 공격치 않았다. 오히려 상인계급과 도시무산자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이들 세력들 특히 무산자들에게 그라쿠스 형제가 한 이상 단호하게 리비우스 법들의 소개에서 했었던 것처럼의 존경을 계속 보였다. 이 과정은 단순히 그라쿠스 혁명이 동시대인을 여전히 떨게 하고 그 창출물을 보호하였기 때문에 채택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민중의 이익을 양성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귀족층의 개인적 이익과도 부합하여서 공공복리 외엔 희생될 것은 없었다.

<복귀기의 영지문제>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서 공공복리증진을 위해 고안된 이 모든 조치들—최상이나 명백히 그의 입법상 가장 인기없는 부분들—이 귀족파에 의해 버려졌다. 그의 계획의 가장 고귀한 것인 로마시민들 간을 우선으로 하고 다시 이탈리아와 속주간에 평등성을 도입하려는 그리고 국가의 지배장악하는 자들과 단순 봉사근로하는 자들의 구분을 없앤 만큼 동시에 역사상 알려진 가장 체계적 이주를 통해 그런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계획만큼이나 빠르고 성공적으로 공격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런 황소고집과 망령으로 회복된 과주정은 죽은 세대의 원칙—이탈리아가 지배자로 남아야 하고 로마가 이탈리아의 지배도시여야 한다는 것—을 현재 새롭게 강요했다. 그라쿠스 생시조차 이탈리아 동맹들의 주장은 결정적으로 거부되었으며 해외식민의 위대한 이상은 아주 심각한 공격에 노출되어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사후, 카르타고 재건계획은 비록 개별할당분은 그 수혜자에게 남겨졌지만 간단히 여당에 의해 유보되었다. 민주당파에 의한 비슷한 사업을 다른 지점에서 추진할 때엔 그들은 싸울 수 없었다. 마르쿠스 플라쿠스(Marcus Flaccus)가 시작한 알프스 이북의 정복과정에서, 나르보(Narbo)의 식민지가 636년[BC118]에 로마제국 사상 가장 오랜 해외의 시민도시로 설립되었다. 여당에 의한 여러방면의 공격과 원로원의 제거를 위한 직접적 결의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가 가진 상업적 수익성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 예외—고립에 있어 그리 중하지 않다—를 제하면 이 정부는 이탈리아 밖 영토 할당을 꾸준히 금지해 낼 수 있었다. 

이탈리아 영지문제는 비슷한 관점에서 토대지어 졌다. 가이우스의 이탈리아 식민지들 특히 카푸아(Capua)는 취소되었고 이미 이주된 곳도 해산되었다. 타렌툼(Tarentum)의 중요치 않은 곳 하나만 넵투니아(Neptunia)라는 신도시 형태로 이전 그리스 공동체와 나란히 위치되었다. 이미 비식민적 할당으로 배분된 영지는 수익자 손에 많이 남은 만큼이나 국익을 위해 그라쿠스에 의해 그들에게 부과된 제한—토지임차와 양도금지—은 마르쿠스 드루수스(Marcus Drusus)에 의해 제거되었다. 점유권에 의해 여전히 소유된 영지—라틴인들에 향유되는 영지를 넘어 서서 그라쿠스 최고치기준[각주:2]에 따라 그 보유자에게 남겨진 부동산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에 관해서는 반대로, 이제껏 점유자였던 자들에 대해 그것들을 보존해 주고 미래분배의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단호히 결의되었다. 드루수스가 약속한 36,000의 새로운 농장할당의 대상은 의심할 바 없이 이런 땅들이 주된 것이었다. 하지만, 수십만 에이커의 이런 이탈리아 영지를 어디서 찾을 지에 관해 조사하는 수고를 그들은 스스로 면하면서 그 목적에 봉사하는 리비우스 식민법을 암묵적으로 보류했다—아마도 오직 스코라키움(Scolacium: Squillace)의 작은 식민지만 드루수스의 식민법에 언급된다. 민중호민관 스푸리우스 토리우스(Spurius Thorius)가 원로원의 지시로 통과시킨 법은 반면, 배분위원회가 635년[BC119] 없어지도록 했고 공유지 점유자에게 고정임차료를 부과했다. 이 절차는 수도의 민중에게는 이익이 되었는데 곡물배분 자금일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곡물기금의 증가를 포함한 제안들은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같은 현명한 호민관에 의해 회피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8년 후(643년[BC111])에 있었는데, 이 때 민중의 새로운 결의로[각주:3] 점유된 공유지가 직접 전점유자의 사유재산으로 전환되었다. 거기서 미래에는 공유지가 점유되지 않고 임대되거나 공공방목지로 개방되도록 한다는 것도 추가했다. 후자의 경우 큰 가축 10두와 작은 가축 50두의 아주 낮은 상한을 고정하여서 큰 가축소유자는 실질적으로 작은 가축을 포기해야 했다. 이런 현명한 규제로 오랫동안 방치된 점유방식의 유해성[각주:4]은 드디어 인정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언제나 국가에서 그 소유를 빼앗을 때만 적용되었다. 로마귀족파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지켰고 어떤 공유지든 그들 손에 있는 것은 자기 재산으로 전환시켰다. 이탈리아 동맹들을 다룰 때는 특히 자치를 담당한 그들의 귀족층이 누리던  라틴의 영지의 소유권을 주지 않고 그들의 규약에 의해 그들에게 보증된 권리들을 손상없이 보존하는 것으로 달랬다. 반대당은 불리한 위치에서 있기에, 가장 중한 실질문제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이익은 도시의 반대파들과 정면 충돌했다. 실상 이탈리아인들은 로마정부와 동맹을 이루어 로마의 다양한 선동가들의 이상한 계획에 맞서 원로원의 보호를 찾았다.

<복귀기의 무산층과 기사계급> 복귀정부가 이렇게 그라쿠스식 정체에 존재했던 개선의 씨앗을 박멸하는데 철저히 주의한 반면, 그라쿠스가 보편행복을 위한 것이 아닌 일로 일깨운 적대세력들의 존재 앞에서는 완전히 무능한 채로 남았다. 수도의 무산자들은 공인된 칭호로 남았다. 원로원은 마찬가지로 상업계급에서 배심원을 뽑는 것에 침묵했는데 이 멍예는 귀족층의 우수하고 자랑스런 부분에 대해 더 불쾌한 멍에였다. 귀족층이 쓴 족쇄는 그 위엄에 맞지 않았으나 이를 그들이 심각히 제거한 것을 발견치 못한다. 632년[BC122]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법은 해방노예의 투표권에 대한 적어도 헌정적 제한을 강제하였는데 오랫동안 원로원측이 그들의 하층폭군들을 억제하는 유일한 시도이자 아주 약한 시도로 남았다. 집정관 퀸투스 카이피오(Quintus Caepio)가 기사관직의 도입(684년[BC106]) 후 다시 재판을 원로원계급의 배심원에게 위임하도록 한 제안은 이 정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지만 문제를 영향력 있는 수준으로 밀고 가는 것 까지일 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멈춰섰다.[각주:5] 이 정부는 그 권력을 공유한 불편한 협력자들에게서 해방되지 못했지만, 이런 조치들은 상인계급과 무산계급과의 지배귀족과의 그리 신중치 못한 협정을 계속 교란은 했을 것이다. 양자 모두 원로원이 꺼리지만 두려움에서만 양보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은혜로나 이익으로나 원로원의 지배에 항구적으로 밀착한 것이 아닌 양자는 그들에게 더 많이 주는 다른 주인에게는 언제든지 비슷한 봉사를 하려했고 기회가 있으면 원로원을 속이고 방해하는 것을 서슴없이 했다. 이처럼 복귀체제는 합법적 귀족층의 욕망과 감정은 물론 참주정부의 국제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그 지배는 그라쿠스의 것돠 같은 기초에 근거할 뿐 아니라 못지않게 병들었고 실상은 더 나쁘게 쌓아졌다. 대중과 합심되어 그 힘을 받으면 강하였으나, 거리의 패거리와 상인의 이익과 상충되면 철저히 무력해졌다. 이는 공석의 왕좌 위에 비양심과 사분된 희망과 함께 앉은 셈이다. 지배하는 국가조직에 화가 나 있지만 체계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하며 자기의 실제 이익이 결정을 재촉하지 않으면 우유부단했다. 자당과 반대당에 한결같이 불성실, 내적 불일치, 최고의 무능, 비천한 이기심의 잘못된 지배의 비길 데 없는 관념들의 초상이었다.

<복귀기의 인물들>달리 될 수는 없었다. 전국이 지적 도덕적 쇠퇴기에 있었고 특히 상류계급에서 심했다. 그라쿠스기 이전 귀족층은 사실 재능면에서 과할 정도로 충만하지는 않았으며 원로원좌석은 겁약한 귀족들로 붐볐다. 그럼에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 가이우스 라일리우스(Gaius Laelius), 퀸투스 메텔루스(Quintus Metellus), 푸블리우스 스카이볼라(Publius Crassus)와 많은 다른 존경받는 능력자들이 있었고, 호의적인 관찰자들은 불의 중에도 절제와 잘못된 정치의 속에서도 일정한 예의를 원로원이 가졌다는 의견을 가졌을 것이다. 이 귀족층이 타도된 후 부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귀족층은 복귀의 저주에 의존했다. 귀족층이 전에 잘했든 잘못했든 한세기간을 별 현저한 반대없이 다스리는 동안 이제 헤쳐온 위기는 어둔 밤의 불빛 처럼 그 앞에 아가리를 벌린 깊은 수렁을 보이고 있었다. 원한과 공포가 구귀족 대가들의 정부를 특징짓는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자가 단일정예로 뭉친 당으로 지금까지 지배에 참여못하는 대중보다 더 단호한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가족정부가 파트리키우스정체(patriciate)의 최악의 시기에 그런 것이 다시 한번 이제 성행하여 퀸투스 메텔루스의 네 아들과 아마 두 조카되는 이들—예외는 있지만 철저히 범용한 자들로 그 단순성 때문에 공직에 나간 이들이다—이 그 사위야 말할 것 없이 15년 내(631-645년간[BC123-109]) 집정관직에 모두 도달했고 한 명 빼고 개선식을 올렸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반대당을 향한 마음에 폭력과 잔인성을 가질 수록 영예를 받고 격정과 치욕이 진짜 귀족이라며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지배자나 피치자 모두 전쟁하는 두 당파를 모든 면에서 닮고 그 전쟁에선 어떤 국제법도 소용없다는 것만 다른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구귀족이 민중을 방망이로 두들겼다면 이 복귀귀족은 타이른 셈이다. 권력으로 돌아갔으나 현명함과 개선과는 거리가 있다. 그라쿠스 혁명에서 킨나 혁명 까지인 이 복귀기 만큼이나 로마 귀족이 정치군사적 능력에서 이렇게도 결핍한 것은 이제껏 없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이런 것의 중한 예시가 이 당시 원로원파의 수장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에게서 주어진다. 고위귀족이나 부하지 않은 부모를 두어 그의 비범한 재능을 사용해야 했던 그는 집정관(639년[115])과 감찰관(645년[BC109])에 까지 뛰어올랐고 오랫동안 원로원의 수장이자 정치적 신탁을 가졌고 연설가나 작가로 뿐 아니라 이 세기 지어진 주요 공공 건물의 창조자로 그 이름이 불멸화되었다. 그러나, 그를 더 가까이보면 그의 크게 칭송되는 업적은 단순히 장군으로서는 알프스의 싸구려 마을을 얻은 것이요 정치가로는 투표나 사치에 대한 자신의 법으로 이 시기의 혁명적 정신에 대해 승리를 얻은 것 뿐이다. 그의 진짜 재능은 이에 있었다. 다른 올곧은 원로원의원 처럼 매수가능한 자이면서 교활하게도 위험해지려할 때를 분간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괜찮은 정직한 외모로 파브리키우스(Fabricius)의 역을 공중의 앞에서 해냈다. 군사적 면에서 볼 때, 의심할 바 없이 최고귀족 동아리내에 속하는 유능한 관리의 존경할 만한 예외를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규칙이란 군대지휘를 하게 될 때 급히 그리스 군사교본과 로마연대기를 군사적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만큼 뒤척이다가 전장에 나가 실제 지히권을 천한 출생이나 능력과 절제 있는 관리에게 양도하는 현명함을 보이는 것이 다였다. 사실 두세기 이전에 원로원이 왕의 의회를 닮았어도 그 후계들은 군주 역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복귀 귀족들의 무능은 그들의 정치도덕적 무용성과 완전히 등치되었다. 그가 돌아간 국교가 이 시기 야수적 방탕의 진실된 반영은 아니라해도 또 이 시기 외부의 역사가 그 가장 본질적 요소의 하나로 로마 귀족의 철저한 타락을 보여주진 않는다해도 로마 최고동아리 중의 급격한 계승 속에 밝혀진 이 끔찍한 범죄들 하나만도 그 성격을 보이기 충분하다.

 

 

 

  1. IV. III. Democratic Agitation under Carbo and Flaccus [본문으로]
  2. IV. II. Tribunate of Gracchus [본문으로]
  3. 많은 부분이 현전하며 잘못된 이름으로 알려진다. 그 이름은 300년간을 토리우스 법에서 내려왔다. [본문으로]
  4. II. VII. Attempts at Peace [본문으로]
  5. II. VII. Attempts at Peace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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