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폼페이우스와 동방

<해적을 소탕하는 폼페이우스> 이미 우리는, 687년[67BC] 초에 폼페이우스(Pompeius)가 무제한급의 권력으로 해적들에 대해 전쟁업무에 착수했을 때 동방에서 수륙상으로 로마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속한 광대한 지역을 13개 지구로 나누고 각 지구에 한 명의 부관(lieutenants)을 배치해 인력과 배를 준비하게 하고 해안을 수색해 해적선을 나포하거나 동료의 그물로 몰아넣는 일을 시작했다. 가용한 전선(戰船) 중 양호한 것들 로도스 선박이 그러했는데 이것들을 몸소 타고 년초부터 바다로 가서 주로 이탈리아로 오는 공급선을 재정비할 생각에 시칠리아, 아프리카, 샤르데냐의 바다를 휩쓸고 다녔다. 동시 그의 부관들은 스페인과 갈리아의 해안을 일소하였다. 집정관 가이우스 피소(Gaius Piso)가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의 레가투스(legate)인 마르쿠스 폼포니우스(Marcus Pomponius)가 가비니우스 법(Gabinian law) 덕으로 나브로(Narbo)의 속주에서 모병하는 것을 막고(이것은 경솔한 시작이었다) 동시에 대중의 집정관을 향한 정당한 분노를 합법적 테두리에 제어 감시하려고 시도했던 그 순간에 폼페이우스가 잠정적으로 로마에 다시 나타났다.[각주:1] 사십여일 만에 지중해의 서쪽 주변에서는 곳곳에 항해가 가능해졌고, 폼페이우스는 자기 함선들의 주력 중 60척으로 동쪽 바다로 나아가게 했는데 우선은 해적의 본토이자 고향이라 할 만한 리키아(Lycia)와 실리시아(Cilicia)의 바다로 갔다. 로마함대의 접근소식에 해적들의 선박들은 공해상으로 부터 사라졌고, 그 뿐 아니라 안티크라고스(Anticragus)와 크라고스(Cragus)의 리키아인 요새는 별 다른 저항없이 굴복했다. 폼페이우스의 잘 계산된 포용이 두려움보다는 좀처럼 접근부가능한 해양 요새문을 열어젖히는데 더 도움이 되었다.그의 선험자들은 그 모든 약탈자들을 잡히는 대로 십자가에 매달았다. 지체없이 그는 모두에게 거처를 주고 특히 나포된 해적선에 발견된 보통 사공들을 이례적 관용으로 대접해 주었다. 대담한 실리시아의 바다왕만 홀로 로마에 맞서 무력으로 자기 바다를 적어도 지키기라도 할 시도할 모험을 할 수 있었다. 타우루스(Taurus)의 산악요새에 처자와 보물들을 둔 이후로 그들은 로마함대를 코라케시움(Coracesium) 앞바다의 실리시아의 서쪽 전방계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여기서 폼페이우스의 배들은 모든 전쟁도구들이 잘 준비되어 올려진 채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더 이상의 장애없이 그는 상륙후 해적의 산악성채를 들이쳤고 그 동안 계속해서 항복의 댓가로 그들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었다. W곧, 대다수가 그들의 요새와 산맥에서 희망없는 전쟁의 계속을 단념하고 항복에 동의했다. 폼페이우스가 이 동쪽 바다에 나타난지 49일만에 실리시아는 평정되고 전쟁은 끝이 났다.

해적질에 대한 빠른 억제는 위대한 구원이긴 하나 진정한 위대함은 아니었다. 애당초 엄청난 정도로 끌어모은 로마의 국가자원에 해적들은 대도시 도둑강도무리들이 잘 조직된 경찰에 맞서는 것 만큼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기습을 기념한다는 것은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악의 고착화된 상태에서 날로 확대해 가는 것을 생각할 때엔 이 끔찍한 해적들을 놀랍게도 빨리 진압한 것은 대중에게 최고의 인상을 준 이상이었다. 한 손에 집중된 지배의 첫번째 시험이 되어 여러 당파들은 그 손이 협력단의 통치보다 다스리는 법을 잘 알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기다렸다.  그래도 90척의 전함이라 불릴 수 있는 배를 비롯 거의 400척의 선박이나 배들이 폼페이우스에게 장악되거나 그에게 굴복했다. 부부적인 그의 자비로 다해서 약 1300척의 해적선이 가라앉고, 그 외에도 넉넉하게 채워진 옛 해적들의 병기창이 불탔다. 해적 중 거의 10,000명이 죽어갔다. 20,000 웃돌게 산채로 승자의 손에 잡혔다. 실리시아(Cilicia) 주둔 로마군의 제독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Publius Clodius)와 몇몆은 고향에서 죽게 되었다고도 하는 해적들에게 사로잡힌 개인들은 다시 한번 폼페이우스로 인해 자유를 얻었다. 687년[67BC] 여름 이 원정 3개월 후에 상업과 무역이 옛 궤도로 복귀했고 이탈리아에는 이전의 기근 대신 풍요가 찾아왔다.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간 알력> 크레타 도(嶋)에서의 불유쾌한 간주(interlude)가 어느 정도 로마군의 이 기쁜 성공을 훼방놓았다. 거기엔 퀸투스 메텔루스가 그의 지휘권의 2차년도에 주둔해 섬의 진압-이미 효과가 현저히 드러난 상태—을[각주:2] 마치도록 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 때에 폼페이우스가 동쪽 바다에 나타난 것이다. 한 충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가비니우스 법에 따라 폼페이우스의 지휘권이 메텔루스와 병행하여 동시에 길이는 굉장하지만 폭은 90마일이 되는 것이 없는 이 섬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그의 부관 중에 누구에게 이를 배당치 않을 정도의 사려가 있었다. 아직 저항하는 크레타인의 공동체는 메텔루스가 극악한 잔인성으로 정복된 모국인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서 폼페이우스가 소아시아 남부에서 그에게 굴복한 마을에 부과한 조약들의 온건함을 알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폼페이우스에에게 항복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는 잠시 있던 팜필리아(Pamphylia)에서 그들의 사절단에게 이를 수락하고 그의 부관 루키우스 옥타비우스(Lucius Octavius)를 보내 메텔루스에게 그 협정의 결론을 고지하게 해서 그 마을들을 취하게 했다. 이런 절차는 의심할 바 없이 동료로서의 것이 아니었으나, 공식적인 정당성은 전적으로 폼페이우스 측에 있었다. 메텔루스가 철저히 폼페이우스와 도시들간 협정을 무시하면서 그들을 계속 적대하였다. 헛되이 옥타비우스가 저항했다. 군대 없이 직접찾아간 그는 헛되이 아카이아(Achaia)에서 그곳 주둔 폼페이우스의 부관 루키우스 시센나(Lucius Sisenna)를 소환해 엘레우테르나(Eleutherna)를 포위하고 랍파(Lappa)를 습취하였다. 거기서 옥타비우스의 신병은 수감되어 치욕스럽게 잊혀졌고 그 동안 그와 함께 갔던 크레타인들은 사형집행인에게 보내졌다. 따라서 공식적 충돌이 시센나의 군단들과 메텔루스의 군단들 사이에 발발하였는데, 전자의 경우 그 우두머리에는 그 지도자의 사후 옥타비우스가 자신을 올려두었었다. 그리고 전자가 아카이아로 귀환하라고 명령받았을 때 옥타비우스는 크레타의 아리스티온(Aristion)과 히에라피트나(Hierapytna)와 협력해 전쟁을 계속하였다. 양자 모두 가장 완고한 저항 후 메텔루스에게 겨우 정복되었다.  

실상 옵티마테스의 열심당원 메텔루스는 이렇게 자기 손으로 민주파의 사령관을 향해 공식적 내전을 시작하였다. 이는 로마국가에 형언할 수 없는 해체를 보이는 것이어서, 이 사태가 두 장군간 통렬한 설전 이상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두 해 뒤에 다시 한 번 평화롭게 앉아 원로원에서 "친구처럼" 나란히 앉았다. 

<폼페이우스가 미트라다테스 전쟁 최고명령권을 장악> 이 작전 중에 폼페이우스는 실리시아에 남았다. 다음해의 크레타인에 대한 원정 차라리 메텔루스에 대한 것이라고 볼 전쟁을 준비하려 했는데, 실상은 그가 소아시아 본토의 철저한 혼란상에 개입하도록 그를 지명해 주기만 기다렸다. 그가 입은 손실을 안고 핌브리아군단(Fimbrian legion)의 출발 후 남겨진  루쿨루스군(Lucullan army) 일부가 포투스 영토 경계상의 트록미(Trocmi) 족의 나라의 할리스(Halys) 상류에 빈둥거리며 남아 있었다. 루쿨루스는 이름뿐인 그의 후임 클라브리오(Glabrio)가 소아시아 서부에서 계속 마물고 있음에 따라 여전히 최고명령권을 보유했다.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Quintus Marcius Rex)의 3개 레기온도 실리시아에 비슷한 비활동적 상태였다.  폰투스 영토는 다시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 왕의 자비를 바란 처지에 있었는데, 그는 에우파토리아(Eupatoria) 읍과 같은 로마에 가담한 개인과 공동체들에 그들의 반역에 대해 잔인하게 파멸시켰다. 동방의 왕들은 로마에 대해 별다른 공격적 행동을 계속하지 못했는데, 그들의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고나 실리시아에 폼페이우스가 상륙하는 것이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와 티그라네스(Tigranes)의 더이상의 활동을 막기 때문이었다. 마닐리우스 법(Manilian law)는 폼페이우스가 은밀히 키워온 희망을 그가 예상한 이상으로 빨리 현실화 시켰다. 글라브리오와 렉스가 재소환되고 폰투스-비티니아(Pontus-Bithynia) 정부와 그 주둔 군단이 폰투스-아르메니아 전쟁(Pontic-Armenian war)의 전쟁, 화의, 동맹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폼페이우스에게 이전되었다. 영예와 전리의 전망 중에 폼페이우스는 그의 빈약한 계관(桂冠)을 질투심으로 수호하려는 불편해 하는 옵티마테스당의 꾸짖음을 기꺼이 망각했다. 크레타를 향한 원정과 더 먼 해적들의 추적을 중단했고 그의 함대를 폰투스와 아르메니아의 왕들에 대해 수립한 공격 계획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지상전 중에 그는 절대로 해적에 대한 시야를 완전히 잃지 않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고개들었다. 그가 아시아(Asia)를 떠나기 전(691년[63BC]), 그는 필요한 배들이 해적에 대항하기 좋게 만들었다. 다음 해 그의 제안에서 미슷한 조치가 이탈리아에서 결정되었고 그 목적을 위한 비용이 원로원에 의해 승인되었다. 기병대와 소규모 분선대로 해안을 계속 방어하였는데, 696년[58BC] 키프로스(Cyprus) 699년[55BC] 이집트(Egypt)에 대한 후의 원정이 언급되는 것에서 보듯 해적들은 철저히 정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로마의 우여곡절과 정치적 위기 속의 폼페이우스의 원정 이후에도 다시 고개 들어 과거 썩어빠진 상태의 과두정부 때 처럼 로마인을 바다에서 철저히 구축하는 일은 없었다.

 

 

  1. V. III. Senate, Equites, and Populares [본문으로]
  2. V. II. Metellus Subdues Crete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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