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체제복귀

<공석이 된 정부> 가이우스 크라쿠스(Gaius Gracchus)가 보여준 새로운 구조는 그의 사망에 임해 폐허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실제 그의 형의 죽음처럼 기본적으로 단순 복수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달리는 겨우 동시에 구정체(舊政體)로의 복귀를 향한 실질적으로 한 걸음이었는데 군주적 인물이 막 확립되려는 군주제를 빼앗겼을 때의 일이다. 가이우스(Gaius)의 몰락과 오피미우스(Opimius)의 전면적이고 유혈적인 재판 이후, 그 공석을 감히 차지하려는 시도에서 쓰러진 국가의 수장과 혈연관계로나 개인적 탁월성에 의해 합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는 절대적으로 없었다. 가이우스는 자식없이 이 세상을 떠났고 티베리우스가 남긴 아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소위 전 민중적 당파에서 문자그대로라도 지도자란 칭호를 받을 자는 없었다. 그라쿠스식 정체는 사령관 없는 요새를 닮았다. 성벽과 수비대는 다치지 않아도 장군은 부족하며 타도된 정부의 빈 자리를 취할 무언가는 전혀 없었다.

<복귀된 귀족정> 그래서 일은 그렇게 된 것이다. 상속자 없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사후 원로원정부가 자동적으로 그에 자리잡았는데, 이는 호민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거되지 않고 그에 의해 단순히 예외적 절차로 실질적 무화 상태로 되어있어 있었다는 면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복귀과정에서 국가란 장치가 수세기를 굴러온 옛 궤적으로 들어가는 것 이상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단한 잘못이다. 복귀란 언제나 혁명인 법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그것이 옛 통치라기 보다는 복귀된 옛 섭정(군주)이다. 과두제는 이미 타도된 참주정이란 갑옷을 새로 입은 채 나타났다. 원로원이 자신들의 무기로 그라쿠스를 두드려 팬 만큼이나 그들은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그라쿠스식 정체의 지배방식을 이어갔다. 물론 숨은 동기상으로 완전히 일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배귀족에 실질적으로 적대적인 요소들을 철저히 씻어내는 것이 함께였다.

<민주당파의 고발들>우선 반동은 주로 인물을 향했다.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Publius Popillius)가 그에 관한 조치가 취소된(633년[BC121]) 이후 유배지에서 돌아왔고 고발전쟁이 그라쿠스 지지자들에 대해 수행되었다. 반면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를 사임 후 반역죄로 단죄하려는 민중당파의 시도는 여당에 의해 좌절된다(634년[BC120]). 이 복귀정부는 귀족정치에 대한 지조에서 특징이 발견된다. 한 때 그라쿠스 형제의 동맹이던 가이우스 카르보(Gaius Carbo)는 오랫동안 개종자로 있었으나[각주:1], 이젠 오피미우스의 수호자로서 그의 열정과 쓸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변절자로 남게 되었다. 오피미우스를 향한 것과 같은 고발이 민주당파에 의해 그에게 제기되었을 때 그의 몰락을 기꺼이 막지 않으려 하는 정부에 대해 카르보는 자신이 양파에서 버려진 것을 알고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반동적 인물들은 개인신상에서 순수 귀족당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반동은 즉시 식량배분, 아시아 속주의 과세, 배심원과 법정에 대한 그라쿠스안을 즉각 공격치 않았다. 오히려 상인계급과 도시무산자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이들 세력들 특히 무산자들에게 그라쿠스 형제가 한 이상 단호하게 리비우스 법들의 소개에서 했었던 것처럼의 존경을 계속 보였다. 이 과정은 단순히 그라쿠스 혁명이 동시대인을 여전히 떨게 하고 그 창출물을 보호하였기 때문에 채택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민중의 이익을 양성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귀족층의 개인적 이익과도 부합하여서 공공복리 외엔 희생될 것은 없었다.

<복귀기의 영지문제>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서 공공복리증진을 위해 고안된 이 모든 조치들—최상이나 명백히 그의 입법상 가장 인기없는 부분들—이 귀족파에 의해 버려졌다. 그의 계획의 가장 고귀한 것인 로마시민들 간을 우선으로 하고 다시 이탈리아와 속주간에 평등성을 도입하려는 그리고 국가의 지배장악하는 자들과 단순 봉사근로하는 자들의 구분을 없앤 만큼 동시에 역사상 알려진 가장 체계적 이주를 통해 그런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계획만큼이나 빠르고 성공적으로 공격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런 황소고집과 망령으로 회복된 과주정은 죽은 세대의 원칙—이탈리아가 지배자로 남아야 하고 로마가 이탈리아의 지배도시여야 한다는 것—을 현재 새롭게 강요했다. 그라쿠스 생시조차 이탈리아 동맹들의 주장은 결정적으로 거부되었으며 해외식민의 위대한 이상은 아주 심각한 공격에 노출되어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사후, 카르타고 재건계획은 비록 개별할당분은 그 수혜자에게 남겨졌지만 간단히 여당에 의해 유보되었다. 민주당파에 의한 비슷한 사업을 다른 지점에서 추진할 때엔 그들은 싸울 수 없었다. 마르쿠스 플라쿠스(Marcus Flaccus)가 시작한 알프스 이북의 정복과정에서, 나르보(Narbo)의 식민지가 636년[BC118]에 로마제국 사상 가장 오랜 해외의 시민도시로 설립되었다. 여당에 의한 여러방면의 공격과 원로원의 제거를 위한 직접적 결의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가 가진 상업적 수익성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 예외—고립에 있어 그리 중하지 않다—를 제하면 이 정부는 이탈리아 밖 영토 할당을 꾸준히 금지해 낼 수 있었다. 

이탈리아 영지문제는 비슷한 관점에서 토대지어 졌다. 가이우스의 이탈리아 식민지들 특히 카푸아(Capua)는 취소되었고 이미 이주된 곳도 해산되었다. 타렌툼(Tarentum)의 중요치 않은 곳 하나만 넵투니아(Neptunia)라는 신도시 형태로 이전 그리스 공동체와 나란히 위치되었다. 이미 비식민적 할당으로 배분된 영지는 수익자 손에 많이 남은 만큼이나 국익을 위해 그라쿠스에 의해 그들에게 부과된 제한—토지임차와 양도금지—은 마르쿠스 드루수스(Marcus Drusus)에 의해 제거되었다. 점유권에 의해 여전히 소유된 영지—라틴인들에 향유되는 영지를 넘어 서서 그라쿠스 최고치기준[각주:2]에 따라 그 보유자에게 남겨진 부동산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에 관해서는 반대로, 이제껏 점유자였던 자들에 대해 그것들을 보존해 주고 미래분배의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단호히 결의되었다. 드루수스가 약속한 36,000의 새로운 농장할당의 대상은 의심할 바 없이 이런 땅들이 주된 것이었다. 하지만, 수십만 에이커의 이런 이탈리아 영지를 어디서 찾을 지에 관해 조사하는 수고를 그들은 스스로 면하면서 그 목적에 봉사하는 리비우스 식민법을 암묵적으로 보류했다—아마도 오직 스코라키움(Scolacium: Squillace)의 작은 식민지만 드루수스의 식민법에 언급된다. 민중호민관 스푸리우스 토리우스(Spurius Thorius)가 원로원의 지시로 통과시킨 법은 반면, 배분위원회가 635년[BC119] 없어지도록 했고 공유지 점유자에게 고정임차료를 부과했다. 이 절차는 수도의 민중에게는 이익이 되었는데 곡물배분 자금일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곡물기금의 증가를 포함한 제안들은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같은 현명한 호민관에 의해 회피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8년 후(643년[BC111])에 있었는데, 이 때 민중의 새로운 결의로[각주:3] 점유된 공유지가 직접 전점유자의 사유재산으로 전환되었다. 거기서 미래에는 공유지가 점유되지 않고 임대되거나 공공방목지로 개방되도록 한다는 것도 추가했다. 후자의 경우 큰 가축 10두와 작은 가축 50두의 아주 낮은 상한을 고정하여서 큰 가축소유자는 실질적으로 작은 가축을 포기해야 했다. 이런 현명한 규제로 오랫동안 방치된 점유방식의 유해성[각주:4]은 드디어 인정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언제나 국가에서 그 소유를 빼앗을 때만 적용되었다. 로마귀족파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지켰고 어떤 공유지든 그들 손에 있는 것은 자기 재산으로 전환시켰다. 이탈리아 동맹들을 다룰 때는 특히 자치를 담당한 그들의 귀족층이 누리던  라틴의 영지의 소유권을 주지 않고 그들의 규약에 의해 그들에게 보증된 권리들을 손상없이 보존하는 것으로 달랬다. 반대당은 불리한 위치에서 있기에, 가장 중한 실질문제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이익은 도시의 반대파들과 정면 충돌했다. 실상 이탈리아인들은 로마정부와 동맹을 이루어 로마의 다양한 선동가들의 이상한 계획에 맞서 원로원의 보호를 찾았다.

<복귀기의 무산층과 기사계급> 복귀정부가 이렇게 그라쿠스식 정체에 존재했던 개선의 씨앗을 박멸하는데 철저히 주의한 반면, 그라쿠스가 보편행복을 위한 것이 아닌 일로 일깨운 적대세력들의 존재 앞에서는 완전히 무능한 채로 남았다. 수도의 무산자들은 공인된 칭호로 남았다. 원로원은 마찬가지로 상업계급에서 배심원을 뽑는 것에 침묵했는데 이 멍예는 귀족층의 우수하고 자랑스런 부분에 대해 더 불쾌한 멍에였다. 귀족층이 쓴 족쇄는 그 위엄에 맞지 않았으나 이를 그들이 심각히 제거한 것을 발견치 못한다. 632년[BC122]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법은 해방노예의 투표권에 대한 적어도 헌정적 제한을 강제하였는데 오랫동안 원로원측이 그들의 하층폭군들을 억제하는 유일한 시도이자 아주 약한 시도로 남았다. 집정관 퀸투스 카이피오(Quintus Caepio)가 기사관직의 도입(684년[BC106]) 후 다시 재판을 원로원계급의 배심원에게 위임하도록 한 제안은 이 정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지만 문제를 영향력 있는 수준으로 밀고 가는 것 까지일 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멈춰섰다.[각주:5] 이 정부는 그 권력을 공유한 불편한 협력자들에게서 해방되지 못했지만, 이런 조치들은 상인계급과 무산계급과의 지배귀족과의 그리 신중치 못한 협정을 계속 교란은 했을 것이다. 양자 모두 원로원이 꺼리지만 두려움에서만 양보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은혜로나 이익으로나 원로원의 지배에 항구적으로 밀착한 것이 아닌 양자는 그들에게 더 많이 주는 다른 주인에게는 언제든지 비슷한 봉사를 하려했고 기회가 있으면 원로원을 속이고 방해하는 것을 서슴없이 했다. 이처럼 복귀체제는 합법적 귀족층의 욕망과 감정은 물론 참주정부의 국제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그 지배는 그라쿠스의 것돠 같은 기초에 근거할 뿐 아니라 못지않게 병들었고 실상은 더 나쁘게 쌓아졌다. 대중과 합심되어 그 힘을 받으면 강하였으나, 거리의 패거리와 상인의 이익과 상충되면 철저히 무력해졌다. 이는 공석의 왕좌 위에 비양심과 사분된 희망과 함께 앉은 셈이다. 지배하는 국가조직에 화가 나 있지만 체계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하며 자기의 실제 이익이 결정을 재촉하지 않으면 우유부단했다. 자당과 반대당에 한결같이 불성실, 내적 불일치, 최고의 무능, 비천한 이기심의 잘못된 지배의 비길 데 없는 관념들의 초상이었다.

<복귀기의 인물들>달리 될 수는 없었다. 전국이 지적 도덕적 쇠퇴기에 있었고 특히 상류계급에서 심했다. 그라쿠스기 이전 귀족층은 사실 재능면에서 과할 정도로 충만하지는 않았으며 원로원좌석은 겁약한 귀족들로 붐볐다. 그럼에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 가이우스 라일리우스(Gaius Laelius), 퀸투스 메텔루스(Quintus Metellus), 푸블리우스 스카이볼라(Publius Crassus)와 많은 다른 존경받는 능력자들이 있었고, 호의적인 관찰자들은 불의 중에도 절제와 잘못된 정치의 속에서도 일정한 예의를 원로원이 가졌다는 의견을 가졌을 것이다. 이 귀족층이 타도된 후 부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귀족층은 복귀의 저주에 의존했다. 귀족층이 전에 잘했든 잘못했든 한세기간을 별 현저한 반대없이 다스리는 동안 이제 헤쳐온 위기는 어둔 밤의 불빛 처럼 그 앞에 아가리를 벌린 깊은 수렁을 보이고 있었다. 원한과 공포가 구귀족 대가들의 정부를 특징짓는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자가 단일정예로 뭉친 당으로 지금까지 지배에 참여못하는 대중보다 더 단호한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가족정부가 파트리키우스정체(patriciate)의 최악의 시기에 그런 것이 다시 한번 이제 성행하여 퀸투스 메텔루스의 네 아들과 아마 두 조카되는 이들—예외는 있지만 철저히 범용한 자들로 그 단순성 때문에 공직에 나간 이들이다—이 그 사위야 말할 것 없이 15년 내(631-645년간[BC123-109]) 집정관직에 모두 도달했고 한 명 빼고 개선식을 올렸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반대당을 향한 마음에 폭력과 잔인성을 가질 수록 영예를 받고 격정과 치욕이 진짜 귀족이라며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지배자나 피치자 모두 전쟁하는 두 당파를 모든 면에서 닮고 그 전쟁에선 어떤 국제법도 소용없다는 것만 다른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구귀족이 민중을 방망이로 두들겼다면 이 복귀귀족은 타이른 셈이다. 권력으로 돌아갔으나 현명함과 개선과는 거리가 있다. 그라쿠스 혁명에서 킨나 혁명 까지인 이 복귀기 만큼이나 로마 귀족이 정치군사적 능력에서 이렇게도 결핍한 것은 이제껏 없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이런 것의 중한 예시가 이 당시 원로원파의 수장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에게서 주어진다. 고위귀족이나 부하지 않은 부모를 두어 그의 비범한 재능을 사용해야 했던 그는 집정관(639년[115])과 감찰관(645년[BC109])에 까지 뛰어올랐고 오랫동안 원로원의 수장이자 정치적 신탁을 가졌고 연설가나 작가로 뿐 아니라 이 세기 지어진 주요 공공 건물의 창조자로 그 이름이 불멸화되었다. 그러나, 그를 더 가까이보면 그의 크게 칭송되는 업적은 단순히 장군으로서는 알프스의 싸구려 마을을 얻은 것이요 정치가로는 투표나 사치에 대한 자신의 법으로 이 시기의 혁명적 정신에 대해 승리를 얻은 것 뿐이다. 그의 진짜 재능은 이에 있었다. 다른 올곧은 원로원의원 처럼 매수가능한 자이면서 교활하게도 위험해지려할 때를 분간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괜찮은 정직한 외모로 파브리키우스(Fabricius)의 역을 공중의 앞에서 해냈다. 군사적 면에서 볼 때, 의심할 바 없이 최고귀족 동아리내에 속하는 유능한 관리의 존경할 만한 예외를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규칙이란 군대지휘를 하게 될 때 급히 그리스 군사교본과 로마연대기를 군사적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만큼 뒤척이다가 전장에 나가 실제 지히권을 천한 출생이나 능력과 절제 있는 관리에게 양도하는 현명함을 보이는 것이 다였다. 사실 두세기 이전에 원로원이 왕의 의회를 닮았어도 그 후계들은 군주 역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복귀 귀족들의 무능은 그들의 정치도덕적 무용성과 완전히 등치되었다. 그가 돌아간 국교가 이 시기 야수적 방탕의 진실된 반영은 아니라해도 또 이 시기 외부의 역사가 그 가장 본질적 요소의 하나로 로마 귀족의 철저한 타락을 보여주진 않는다해도 로마 최고동아리 중의 급격한 계승 속에 밝혀진 이 끔찍한 범죄들 하나만도 그 성격을 보이기 충분하다.

 

 

 

  1. IV. III. Democratic Agitation under Carbo and Flaccus [본문으로]
  2. IV. II. Tribunate of Gracchus [본문으로]
  3. 많은 부분이 현전하며 잘못된 이름으로 알려진다. 그 이름은 300년간을 토리우스 법에서 내려왔다. [본문으로]
  4. II. VII. Attempts at Peace [본문으로]
  5. II. VII. Attempts at Peace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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