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민중에게 엄천나게 많고 다양한 대형 볼거리들, 즉 유베날리스제전, 키르쿠스제, 연극, 검투시합들을 제공했다. 유베날리스제[각주:1]에서, 그는 집정관급 의원과 나이 든 부인들이 참가경연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키르쿠스제에서, 그는 기사계급의 좌석을 일반민중석과 떨어뜨려 놓게 배치했고[각주:2] 네마리 낙타가 끄는 전차 시합을 하게 했다. 그가 제국의 영속을 위하여 제정해 그리하여 막시무스(Maximus)라 부르게 된 이 축제에서 많은 원로원 계급 및 기사 계급의 인사들이 몸소 경연에 참가했다. 한 뛰어난 로마 기사계급의 인사가 밧줄로 무대로 내려와 코끼리 등에 올라탔다. 아프리카누스가 지은 한 로마극이 비슷하게 무대에 올려졌다. 그 제목은 "화재"로 붙여졌는데, 극 중 공연자들은 극장에서 타도록 되어있는 가구들을 가져가도록 허락되었다. 매일 엄숙하게 많은 물품들이 민중에게 뿌려졌다. 곡물쿠폰, 의류, 금은보석, 진주, 그림, 노예, 가축, 맹수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배와 집 땅들이 복권 경품으로 제공되었다.

 

  1. 그의 처음 면도를 기념한 것이었다. (12장) [본문으로]
  2. 전에는 테아트레(Theater)에서만 그렇게 했다. (Jul. xxxix. 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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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개성을 보다 더 확립하기 위해 그는 "아우구스투스를 모범으로 통치할 계획이다"고 선언하며 그의 관후함, 자비, 상냥함을 보일 수 있는 기회는 노치지 않았다. 더 힘겨운 세금들을 그는 완전히 걷어내버리거나 줄였다. 파피우스법(Papian law)[각주:1]에 의해 고발자들에게 약속된 댓가를 그는 4분의 1로 줄였고 민중에게는 사람 당 400 세스테리우스를 나눠주었다. 환경상 많이 곤궁해 준 원로원의 의원들 중에 가장 고귀한 사람에게 그는 년례지원금을 기부하였는데 50만 세르테우티우스나 되었다. 근위연대에 곡물 지원을 무료로 기부했다. 죽을 판결을 해야할 법정에 불려갔을 때는 "나는 일거나 쓰는 것을 배운 것이 후회될 지경이오"라고 말했다. [각주:2] 그는 이름 읽어주는 자들[각주:3] 없이도 각층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였다. 원로원이 그에게 그의 훌륭한 통치에 대한 감사를 표할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 가치가 있을 때에라도 그것을 받을 시간은 있을 것입니다."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에서 운동 연습을 하는 것을 평민들이 보도록 허용했다. 빈번히 대중연설을 하고 자신의 작문을 보여주었는데 집이나 극장이나 가리지 않았다. 모두의 기쁨을 위한 이 일로 감사제[각주:4]가 바쳐졌으며 그의 시 일부가 금종이에 써져 카피톨리아의 유피테르에게 헌정되었다.

 

 

  1. 결혼법. (Aug. xxxiv.) [본문으로]
  2. 황제를 비롯 로마 정무관들은 판관 역을 해야 했다. [본문으로]
  3. (Aug. liii. 3,) [본문으로]
  4. 승리한 장군에게 주로 바쳐졌다. (Jul. xxiv.)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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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클라우디우스의 기억에 관한 의무적 존경심의 겉치레로 통치를 시작했는데 최고의 고귀한 의전과 장식으로 매장하면서 몸소 장례연설을 했으며 신들의 반열에 그를 등록시켰다.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 도미티우스에 대한 기억에도 최고의 존경을 바쳤다. 공사 양면의 일 처리는 어머니에게 맡겼다. 재위 첫 날 근위대 천부장에게 준 단어가 "최고의 어머니"이며 훗날 로마 거리에서 그녀의 가마에서 함께 나타났다. 안티움에 식민지를 세웠고[각주:1] 근위대에 속한 퇴역병들을 이주시키며 제일급의 부유한 백부장들 여럿을 그 장소로 옮겼다. 거기에 엄청난 규모로 고귀한 항구를 하나 지었다.

 

  1. A.D. 6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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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주의 임종 시 그는 17세였으며[각주:1] 공포되자 마자  제6시에서 제7시 사이에 근위대 연대로 갔다. 징조들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더 이른 시간은 좋지 않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궁전문 앞에 발을 딛었ㅇ르 때 병사들의 만장일치로 황제로 환영받았으며 병영에 가마를 타고 갔다. 그후 군단에 짧은 연설을 한 후 원로원 의사당에 가서 저녁까지 있었다. 그를 향해 쌓아올려진 엄청난 영예들 중에 거부된 것은 그의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 뿐이었다.

 

 

  1. A.D. 5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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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이전 소년일 때, 키르쿠스 축제(Circensian Games)[각주:1]에서 그에게 커다란 갈채를 가져다 준 트로이 모의전을 단호하게 자기 역할을 해냈다. 열한살[각주:2]에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어 원로원의원이 되어있던 안네우스 세네카(Anneus Seneca)[각주:3]의 지도하에 놓였다. 이에 대해 세네카가 그가 칼리굴라에게 수업한 날 밤에 꿈을 꾸었다고 한다. 네로가 곧 그 꿈을 실현했는데 할 수 있는 모든 본성의 잔인성을 발휘한 배신에 대한 것이다. 그의 동생 브리타니쿠스가 양자로 된 이름 대신 통상 이름인 아에노바르부스로 인사한 것에 대해 그는 아버지에게 그가 도전적이라고 일렀다. 그의 숙모 레피다가 재판을 받자 그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법정에 반대 증언을 위해 출석하였다. 그녀는 피고인을 박해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성년이 되어 포룸에 갈 때 민중에게 선물을 병사들에게 은사금을 주었다. 근위대에서 엄숙한 무장행렬을 하며 그의 손에 방패를 쥐고 선두에 행진하였다. 그 후, 원로원에서 그의 아버지에게 감사를 바쳤다. 클라우디우스 앞에서, 그가 집정관 일 때 라틴어로는 볼로냐(Bononia)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어로는 로도스인(Rhodian)과 트로이 사람들을 위한 연설을 행했다. 그는 도시장관직을 수행할 때 라틴축제 중 판관역을 처음 맡았다. 가장 유명한 탄원자들이 그 앞에 경쟁을 위해 줄을 이었는데 통상 사소한 것이 아닌 중요 재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가 몸소 그들에 반대되는 그리고 곧 그는 옥타비아(Octavia)[각주:4]와 결혼했고 클라우디우스의 장수를 위해키르쿠스 축제 경기들과 맹수사냥 등을 보여주었다.

 

  1. A.D. 47. [본문으로]
  2. A.D. 50. [본문으로]
  3. 황제 네로의 충고자이자 유명 철학자 세네카는 이 때 코르시카 유배에서 풀려나있었다. [본문으로]
  4. 클라우디우스의 딸이자 경쟁자 브리타니쿠스의 누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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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Nero)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은 후 아홉 달 만에 안티움(Antium)[각주:1]에서 1월 초하루 이전 18일[각주:2] 태어났다. [각주:3]  그 때 태양이 솟아 그 빛이 땅에 닿기 전에 그에게 먼저 닿았다. 많은 두려워하는 추측들이 그의 출생배경으로부터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의 장래에 관해 만들어졌는데, 그의 아버지인 도미티우스에 대한 말은 나쁜 징조로 간주되었다. 그는 때로 그를 축하해주려 온 친구들에게 공중에게 혐오되고 치명적인 것들만 그와 아그리피나 사이에 만들어질 수 있노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의 미래의 불행의 분명한 또다른 전조가 그의 정화일에 일어났다. [각주:4]  가이우스 카이사르(Caius Caesar)[각주:5]가 누이에게 어떤 이름이 이 아이에게 적당한지 이름 지어줄 것을 요구받았고 훗날 황제가 되어 네로를 입양한 그의 삼촌 클라우디우스(Claudius)를 보며 그의 이름을 주었다는데 진지한 말이 아닌 농담이다. 아그리피나는 이 말을 경멸하였는데 클라우디우스가 당시 궁전의 웃음 거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어 그의 재산의 삼분의 일을 받은 상속자가 되었다. 대부분 그가 획득치 못하고 공동 상속인 가이우스가 가져갔다. 어머니가 유배되자 숙모 레피다와 아주 궁핍한 조건에서 두명의 가정교사, 춤교사, 이발사의 돌봄아래 살아갔다. 클라우디우스가 제위를 차지하자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양부인 크리푸스 파시에누스(Crispus Passienus)의 추가 상속으로 부유해졌다. 어머니가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는 브리타니쿠스(Britannicus)[각주:6]의 경쟁자로서 커다란 명성을 황제의 관심하에 얻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클라우디우스의 아내 메살리나(Messalina)가 그를 정오수면 중 교살하려 암살자를 고용하였음을 보고되었을 정도였다. 이 이야기에 더해, 암살자들이 방석아래서 기어온 뱀에 놀라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런 야설은 침상 베개 근처에서 뱀가죽을 찾은 데 따른 것인데 그의 어머니의 명으로 그는 그 가죽을 금팔찌로 두르고 바른쪽 팔에 착용했다. 마침내는 이 부적을 그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혐오하여 버려두었지만 극도의 곤경에서는 헛되이 다시 찾았다.

 

 

  1. 로마 교외의 해안도시. [본문으로]
  2. 12월 15일. [본문으로]
  3. A.U.C. 791(A.D. 39). [본문으로]
  4. 로마에서, 정화식과 이름짓기가 남아의 경우 9일 여아의 경우 10일째에 행해졌다. [본문으로]
  5. 칼리굴라 황제. [본문으로]
  6. 메살리나와 클라우디우스 황제 사이의 아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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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老) 안토니아(Antonia)[각주:1]에게서 그는 네로의 아버지를 낳았다. 인생의 모든 면에서 형편없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동방에서 가이우스 카이사르[각주:2]를 수행할 때 그는 자기 해방노예가 그가 명령한대로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였다. 카이사르의 사교에서 이로 인해 축출된 후로도 이 버릇을 못 고쳤다. 아피우스 가도상의 한 마을에서 갑자기 그는 자기 말들을 째찍질하며 전차를 고의로 불쌍한 아이에게 덮쳐 산산히 조각내기에 이른다. 로마에서는 포룸(Forum)에서 로마기사의 눈을 뽑았는데[각주:3] 겨우 말싸움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사기꾼 기질에도 충만하여 은대장장이[각주:4]에게 상품가격을 속였을 뿐 아니라 법무관 재임시에는 상금무게를 속여 전차소유자들을 사취하였다. 여러 파벌들의 지도자가 만들어낸 불평과 누이의 야유에 대해 그는 한 가지 법[각주:5]을 인정하는데 동의하였다. "장래에 이 상들이 즉각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티베리우스(Tiberius)[각주:6]의 죽음 직전, 그는 반역죄, 간통죄 및 그의 누이 레피다(Lepida)와의 근친상간죄로 기소되었지만 사태의 추이에 맞춰 이를 모면했고 피르키(Pyrgi)[각주:7]에서 부종으로 죽었다. 그의 아들 네로(Nero)를 남겨둔 채로였는데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의 딸인 아그리피나(Agrippina)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1.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소(少) 옥타비아 소생의 딸. [본문으로]
  2. 카이사르 2세. 아우구스투스를 말함. [본문으로]
  3. 로마 희극 등에 많이 보이는 이탈리아인의 관습. (Aug. xxvii. 4; Nero xxvi. 2) [본문으로]
  4. 이들은 은행가를 겸한 직업이었다. [본문으로]
  5. 법무관의 직무 [본문으로]
  6. 서기 14년 37년까지 재위한 2대 로마 황제. [본문으로]
  7. 에트루리아의 해안 마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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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나이우스도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도미티우스(Domitius)였다. 후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으로 가족부동산의 명목상의 구입자로 남겨진 이로 알려진다.[각주:1] 그리고 못지 않게 젊은 시절에 전차몰이의 명수로 이름높았고 훗날에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얻은 약식개선식(triumphal ornaments)으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는 대단히 거만하며 방탕하며 잔인한 사람이었다. 조영관(aedile)일 때[각주:2] 감찰관 루키우스 플란쿠스(Lucius Plancus)에게 길을 비키라고 했다. 법무관일 때와 집정관일 때는 로마 기사 부부들이 무대에 서게 했다. 대경기장 키르쿠스(Circus)나 시의 병원구역에 이르는 구석구석까지에서 맹수사냥은 물론 검투시합을 시연했다. 그러나, 이런 야만성은 아우구스투스가 사적으로 꾸짖은 후 공적인 고시로 그를 제어케 했다.

 

 

 

  1. 유언집행자가 명목상 구입자로 되어 상속인에게 전달함. [본문으로]
  2. B.C. 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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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이 사람이 가문 최고의 인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페디우스(Pedius) 법[각주:1]에 의해서 무고함에도 카이사르의 죽음에 연루된 자들로 판정되었다.[각주:2] 이에, 그는 친척들인 브루투스(Brutus)와 카시우스(Cassius)에게로 갔다. 지휘권이 그에게 이미 주었졌던 함대를 보유했을 뿐 아니라 증강까지 하였다.  

마침내, 그의 편들이 여기저기서 패했고 이에 그는 자발적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k Antony)에게로 항복한다. 언급한 법으로 단죄된 이들 중 그는 조국으로 돌아가 최고 관직을 얻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내전이 다시 발발하자 동일한 안토니우스의 부관으로 지명되었고 클레오파트라(Cleopatra)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에게 최고 명령권을 제의받았다. 하지만, 갑작스레 얻은 작은 질병으로 감히 받아들이지도 수락하지도 못한 채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게로 넘어가 버리고 며칠 후 그의 기억에 대한 퍼붓는 비난이 불가불 따르게 한 채로 죽는다.[각주:3] 안토니우스의 성명으로 그는 그의 정부 세르빌라 나이스(Servilia Nais)[각주:4]와 있고 싶어 안달라 편을 바꾼 것이다.

 

 

 

  1. 페디우스가 집정관일 때 카이사르파들이 제안한 법. [본문으로]
  2. A. U. C. 711(B.C. 43). [본문으로]
  3. A. U. C. 723. (B.C. 31) [본문으로]
  4. 해방노예로 주인의 성(姓)을 따라쓴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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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선은, 먼 옛날 시기 그의 증조부의 조부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Cneius Domitius)를 살펴보자. 그가 호민관이었을 때 아버지 자리에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선거한 이유로 대사제(pontiff)와 다투었고 선거권을 사제단에서 민회로 이전하였다. 그의 집정관 재직시[각주:1] 알로브로게스족(Allobroges)과 아그베르니족(Arverni)을 정복하고[각주:2], 이 속주를 행진하며 코끼리에 올라 개선식처럼 병사들이 그를 수행하게 했다. 이 인물에 대해 연설가 리키니우스 크라수스(Licinius Crassus)는 말했다. "황동수염이 이상할게 없다. 그의 낯가죽은 무쇠고 심장은 납이다." 그의 아들은 자기의 법무관 시절[각주:3]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를 불러 원로원 앞에 그 직무와 행정 수행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것이 복점과 법률 모두에 어긋나났기 때문이었다.[각주:4] 후에 스스로 집정관이 되었을 때,[각주:5] 그가 카이사르에게서 군대 명령권을 빼앗으려 했고 음모와 협잡으로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내전 초 코르피니움(Corfinium)[각주:6]에서 포로가 되었다. 풀려나서 그는 마르세유로 갔고 거기서 곧 포위당하였다. 민중들에게 항전을 호소하였으나 곧 그곳을 버리고 파르살리아(Pharsalia)의 전장으로 가서 죽음을 당했다. 그는 일관성이 부족한 사람이고 침울한 성격이었다. 절망적 최후 상황에서 그는 음독을 하려햇으나 죽음을 생각하고는 전율하여 곧 후회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토해내고, 현명함과 신중성 있게 적당한 양만을 투약 자신의 의사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각주:7]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중립에 기울고 다툼에 참가하지 않는 자들에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상담해 왔을 때,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은 그 밖에 없었다.

 

 

 

 

 

  1. A.U.C. 632 (B.C. 122) [본문으로]
  2. 전자는 다우피니(Dauphiny)와 사보이(Savoy)에 사는 갈리아족이고, 후자는 오베르뉴(Auvergne)에 그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알로브로게스족을 물리쳤다함은 수에토니우스의 오류로 이 종족을 물리친 것은 호민관 도미티우스이다. [본문으로]
  3. A.U.C. 695 (B.C. 58) [본문으로]
  4. 이런 제안들은 카이사르와 연대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게 좌절됨. [본문으로]
  5. A.U.C. 700 (B.C. 53) [본문으로]
  6. 코르피니오(Corfinio)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이태리의 도시이다. [본문으로]
  7. 코르피니움 당시의 일로 그는 카이사르의 용서를 받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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